김** 예비역 공군 중사 / 소방공무원
에~엥! 에~엥! “비켜 주세요.” 그러나 갈 길이 바빠서인지 주변의 차들이 소방차에게 길을 내주지 않는다. 나를 비롯한 구조대원들은 아파트 7층 화재현장에서 한 사람이 아직 구조되지 못했다는 무전을 듣고 마음을 졸인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대원들은 등에 20kg 넘는 장비를 짊어지고, 점점 짙어지는 연기를 헤치며 7층으로 전력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길고도 짧은 화마와의 한판 승부. 이윽고 한 사람이 구조대원들에게 들려나온다. 이어 구급차는 이 환자를 태우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간다.
온 몸이 땀과 물로 젖었고 얼굴과 손은 어느새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위장크림을 바른것마냥 새까맣게 되어 이글거리는 눈빛만 보인다. 소방서로 돌아와 장비를 정리하고 잠시 벤치에 앉는다. 오늘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이런 소중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에도 감사를 하게 된다.
돌이켜 보면 내가 소방관이 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약관 스무살의 나이에 군인이 됐다. 군 생활 중에 공부에 대한 욕심을 갖게 됐고, 대학교와 대학원 공부를 마쳤다. 솔직히 나에게 대학 공부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초등학교 6학년 때 돌아가시고 나는 자연스럽게 가장의 노릇을 하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군 입대 후 하사시절에는 월급이 50~60만원 정도였는데 그 돈으로 어머니와 생활하면서 대학을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다행히 매번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던 중 나보다 더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교사가 되기로 맘을 먹고 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하며 동시에 제대를 했다. 나는 군 생활과 학교생활을 동시에 해냈다는 자신감으로 인해 제대 후에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대 후 6개월 동안의 구직과정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교사임용시험을 준비하면서 학원 강사생활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채용을 하겠다는 학원에서는 80만원이라는 턱없이 적은 월급을 제시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학원 강사 생활을 시작한 나는 3개월간 일하고 나서 이 길은 나의 길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고 다시 취업의 길로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취업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정보 부족으로 인해 다단계 회사에서 잠시 일하다가 많은 돈도 잃게 됐다. 결국 많은 손해를 보고 회사를 그만 두고 집에 돌아오던 날 밤에 나는 집 모퉁이에서 나무사이의 달빛을 쳐다보며 조용히 울어야 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을 얻고 힘차게 사회로 나온 나에게 이런 상황들은 너무 가혹했다. 군에서의 모든 자신감은 사라지는 듯 했다. 축 쳐진 어깨로 집에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는 따뜻한 밥을 지어주시고 나를 조용히 쳐다보셨다. 나는 어머니께서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으며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시는 어머니로부터 무한한 믿음을 느꼈다.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열심히 새로운 일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 대학원 은사님의 추천으로 초등학교 계약직 교사로 일하게 됐다. 그러나 계약기간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더구나 계약직 교사 일을 하며 준비하던 교원임용시험은 계속 고배를 마셨다. 그러던 중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났으며, 사정이 좋지 않은 누나의 조카들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군 생활을 하며 모아 두었던 돈은 어느새 없어지고, 내게 남은 것은 월35만원의 월세와 300만원의 카드 빚이 전부였다. 결단이 필요했다.
2005년 2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남을 위해 봉사하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그것은 소방관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다시 소방관이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짧은 시간에 정보를 얻기는 정말로 어려웠다. 정보 수집과 발품을 통해 충청남도에서 소방관 시험이 5월 중순에 있음을 알았고, 거주지 제한으로 1년간 내게 기회는 이것뿐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3개월 동안의 나와의 싸움이 시작됐다.
드디어 시험일. 시험을 치렀지만 생각보다 시험이 어려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뒤 합격을 알리는 문자메시지를 받았고, 나와 아내는 너무 기쁜 나머지 장모님이 계시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포옹을 했다. 이후 체력시험과 면접을 통과해 2006년 4월 12일에 소방관으로 임용되어 현재까지 소방관으로 일하고 있다.
비록 교사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소방관은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기에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하루하루를 감사하게 살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렵고 결단하기 어려운 시점에 제대군인지원센터와 같은 지원시설에서 도움을 주고, 정보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방황과 어려움의 시간이 줄어들고 보다 폭넓은 선택의 기회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끝으로 제대를 생각하는 후배들은 제대 후의 일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꼭 제대군인지원센터 등과 같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의 도움을 받고 사회에 나왔으면 한다. 우리 제대하는 후배들의 앞날에 성공을 빌며, 오늘도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정신을 가진 제대군인으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소방관으로서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