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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독립운동가의 아들
아버지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다. 아버지는 공창준이고, 아들은 공진원1)이다. 공창준은 함경도에서 홍범도와 함께 의병으로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인물로 북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남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고, 북만주에서 아버지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아들은 한국독립당에서 조직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중국관내로 이동하여 낙양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고 남경에 왔을 때 아버지는 숨을 거두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겼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장으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한 것이다. 아들은 7년 후 생을 마감하였다. 그 아들의 이름은 공진원이다.
공진원(호 학은(鶴隱))은 ‘고운기(高雲起)’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정정화의 회고록인 『장강일기』에는 그의 본명을 ‘고운기’라 하고 있고, 여러 저술들에서도 고운기를 본명이라고 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공진원에 대한 여러 기록에 그의 아버지의 이름은 공창준(公昌俊(호 심연(心淵)), 1880~1936. 4. 15)으로 되어 있다. 아버지의 성이 공씨였으니, 그의 본명은 공진원이 맞다고 할 것이다.
출생과 성장
공진원은 1907년 함경남도 문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공창준은 을사늑약 직후 이에 분개하여 홍범도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홍범도부대와 함께 만주로 이동하여 무송현에서 김혁 · 윤세복 등과 흥업단을 조직하기도 하였고, 1930년대에는 북만주에서 홍진 · 이청천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공진원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나, 1930년대 아버지는 한국독립당에서, 그는 한국독립당의 당군인 한국독립군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아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 9월 홍범도 의병부대가 만주로 이동할 때, 아버지를 따라 망명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아버지가 활동하던 만주에서 자랐고, 하얼빈에서 중국 중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운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한국독립군으로 북만주에서 활동
공진원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930년대 초반 한국독립군이다. 한국독립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당에서 조직한 당군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7월 홍진 · 이청천 · 이장녕 · 황학수 · 신숙 등의 인사들이 북만주 위하현에서 창립한 정당이고, 한국독립군은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일본군과의 항전을 위해 한국독립당에서 편성한 독립군이다.
한국독립군은 총사령관 이청천 · 부사령관 남대관을 중심으로 한 지휘부를 먼저 구성하여 편성되었다. 그리고 중동선 철도연변의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발동하고, 북만주 일대에 징모위원들을 파견하여 한인청년들을 징집하였다. 1931년 말 약 5, 6백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하였고, 부대의 편제도 갖추었다. 부대편제는 총사령관 · 부사령관 · 참모장 · 참모 · 부관, 그리고 대대와 중대로 편제되었는데, 공진원은 제6중대장이었다.
선생의 아버지 공창준은 한국독립당의 간부였다. 한국독립당의 조직체제는 집행위원제였고, 집행위원장(홍진)과 부위원장 4명(이진산 · 황학수 · 이장녕 · 김규식), 그리고 28명의 집행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창립 당시 공창준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조직부 위원이었다. 아버지는 당의 간부로, 아들은 독립군의 간부로 활동한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결성 직후부터 중국의 반만항일군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반만항일군이란 만주를 침략한 일본군이 세운 만주국에 대항하여 싸우는 중국의 군대를 일컫는 것이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이후 만주지역 각지에는 중국인들이 ‘자위군’ · ‘의용군’ · ‘구국군’ · ‘호로군’ 등의 이름을 가진 군대들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독립군은 결성 직후부터 이들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군’과의 첫 연합작전은 서란현전투였다. 1932년 1월 길림자위군의 사복성 부대와 연합하여 서란현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였고,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분대를 전멸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어 1932년 2월에는 일본군이 중국의 이두 · 정초 등이 이끄는 중동철도호로군을 공격하자, 이들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적극적인 공격으로 한국독립군은 커다란 타격을 입고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다.
한국독립군은 각지로 분산되어 있던 부대들을 다시 집결하였다. 그리고 1932년 9월 길림자위군의 고봉림 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만주군이 지키고 있던 쌍성보를 기습 공격하였다. 한중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쌍성보를 점령하고, 무기와 탄약 등 수개월 동안 쓸 수 있는 물자를 획득하는 전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두 달 후 제2차 쌍성보전투에서는 크게 패하였다. 일본군과 만주군이 대포와 비행기를 동원하여 반격해 왔고, 한중연합군은 4일 동안 추격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고봉림 부대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고,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독립군은 투항하지 않았다. 1932년 11월 29일 오상현 사하자에서 회의를 열고, 재기에 대한 방안과 향후 활동방향을 논의하였다. 재기에 대한 방안은 연길 · 화룡 · 왕청 · 혼춘 · 영안현 등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동만주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각 군구별로 장정들을 재징집한다는 것, 활동방향은 동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길림구국군과 연합을 추진하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길림구국군과의 합작을 타진하기 위해 세 사람을 선발하여 파견하기로 하였다. 선발된 세 사람은 강진해 · 심만호 · 공진원이었다. 강진해는 군의감이었고, 심만호는 한국독립당의 집행위원으로 독립군에서는 별동대장을 맡고 있었다. 공진원은 이들과 함께 동만주로 떠났다.
공진원은 강진해 · 심만호와 함께 액목현에 이르러 길림구국군의 제13사단장 요진산을 만났다. 요진산으로부터 길림구국군도 1932년 10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였고, 사령관 왕덕림은 장개석의 협조를 얻기 위해 남경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지만 오의성 · 시세영 등의 부대는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들을 찾아가 만났다. 이들에게 한국독립군과의 합작을 제의하였다. 시세영은 이들의 제의를 받아들여 한중합작을 이루기로 하고, 연합부대의 명칭은 ‘중한연합토군’이라고 하였다.
공진원은 한국독립군 본부로 돌아와 길림구국군과의 합작이 성사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에 의해 한국독립군은 1932년 12월 30일 오상현을 출발하여 동만주를 향해 떠났다. 출발한 지 한 달 보름쯤 되었을 때인 1933년 2월 경박호를 지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이 경박호로 진격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한국독립군은 시세영 부대와 함께 포위작전을 세우고,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도하였다. 그리고 호수주변에 매복해 있다가 포위망 속에 들어온 일본군을 공격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유명한 경박호전투였다.
경박호전투를 치른 후, 한국독립군은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사도하자에서 일본군과 대접전을 벌인 것을 비롯하여, 1933년 6월에는 시세영 부대와 함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동경성을 공격하였다. 또 일본군이 왕청현으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길목인 대전자령 계곡에 매복하였다가 이들을 급습하기도 하였다. 동경성전투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대전자령 전투에서는 반총이 이끄는 일본군 1개 연대를 거의 섬멸시키는 전과를 거두었다.
동만주로 이동한 후,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과 여러 차례 연합작전을 전개하였고, 전투의 대부분을 승리로 이끌면서 활동기반을 구축하여 갔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1933년 10월 동녕현성에서 연합작전을 준비하던 중 오의성 부대가 한국독립군을 기습 포위하고 총사령관 이청천을 비롯하여 3백여명의 독립군을 체포 구금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의 음모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생긴 불만 때문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길림구국군 장교회의에서 이 문제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오해가 풀리고 사건은 수습되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한국독립군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오해가 풀리면서 체포 구금되었던 독립군은 석방되었지만 독립군 장정들 대부분이 구국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각지로 흩어져버린 것이다. 이로써 한국독립군은 군대로써의 조직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활동도 어렵게 되었다.
무장조직이 와해되면서 당과 군을 이끌던 인사들의 안전 문제도 시급해졌다. 더욱이 일본군과 만주국 군대의 추계대공세가 벌어지고 있었고, 밀정들의 발호와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도 끊이지 않았다. 이 뿐만 아니었다. 마적단들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은 중국관내로 이동하였고, 공진원도 총사령관 이청천과 함께 중국관내로 향했다.
중국관내에서 낙양군관학교 졸업
1933년 말 공진원은 한국독립군과 함께 중국관내로 이동하였다. 중국관내로 이동하게 된 데에는 북만주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이 주된 요인이었지만, 김구로부터 중국관내로 이동하라는 제의도 크게 작용하였다. 한국독립당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이규채 · 신숙 · 금상덕을 남경으로 파견하였고, 이들 중 이규채가 중국관내로 옮겨오라는 김구의 제의를 전달해왔다.
당시 김구는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의거가 있은 후, 장개석을 만나 군사간부 양성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여 승낙을 얻었다. 이에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고, 군사간부를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인 이청천을 교관 책임자로 하고, 한국독립군을 비롯한 만주지역의 한인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간부로 양성기위하여 한국독립군의 이동을 제의한 것이다.
공진원은 이청천과 함께 중국관내로 향했다. 일행은 김창환 · 이복원 · 오광선 등의 한국독립군 간부, 그리고 낙양군관학교에 입학하고자 하는 청년 등 모두 39명이었다. 이들은 중국인 노동자로 변장하고, 2~3명씩 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경계망을 뚫고 북경을 거쳐, 하남성 낙양에 도착하여 낙양군관학교에 들어갔다.
낙양군관학교에 한인청년들의 군사훈련을 위한 특별반을 설치하였다. 공진원은 낙양에 도착하여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다.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운영은 김구가 주도하였지만, 훈련과 교육을 담당한 것은 한국독립군 출신들이었다. 총사령관 이청천이 총교도관으로 훈련과 교육을 담당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오광선 · 조경한 등은 교관을 맡았다. 그리고 학생들의 경우도 한국독립군 계열이 다수였다. 모두 92명이 입교하였는데, 이중 김구 계열의 38명과 김원봉 계열의 15명 이외에 나머지 학생들은 만주에서 데리고 온 청년들이었다.
공진원은 1934년 2월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여 1년 2개월 동안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군사교육과 훈련은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비밀리에 이루어졌고, 입교한 학생들은 대부분 중국 이름을 사용하였다. 안춘생은 ‘왕형’, 나태섭은 ‘왕중량’이란 이름을 사용한 것이 그러한 예이다. 공진원도 이때 ‘고운기’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육과 훈련은 전술학 · 병기학 · 통신학 · 정치학 등의 학과와 무술 · 검술 · 사격 등 술과 등으로 이루어졌고, 1935년 4월 졸업하였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대장
공진원은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이청천과 함께 활동하였다. 낙양군관학교 졸업생들은 김구 · 김원봉 · 이청천 계열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들은 졸업 후 각 계열에 따라 세 갈래로 갈라졌다. 공진원은 이청천 계열이었다. 이청천은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자신의 계열 학생들을 데리고 1935년 4월 남경에 도착하였고, 이들은 신한독립당 산하의 청년군사간부훈련반에 들어갔다.
공진원이 남경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 공창준이 별세하였다. 공창준은 북만주에서 홍진 · 이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33년 말 한국독립당이 중국관내로 이동할 때, 북경을 거쳐 남경에 와 있었다. 그러나 남경에 도착한 후 병을 얻었고, 결국 1936년 4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면서 공창준은 공진원에게 ‘너는 국가민족을 위하여 盡忠하여라’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공진원이 신한독립당에 참여하였을 때, 남경에서는 각 정당 및 단체들 사이에 통일운동이 추진되고 있었다. 통일운동은 한국독립당 · 의열단 · 조선혁명당 · 신한독립당 · 대한독립당 사이에 추진되었고, 이들은 1935년 7월 통일을 이루어 민족혁명당을 창립하였다. 그렇지만 민족혁명당으로의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진 · 조소앙 등이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고, 이청천도 탈당하여 1937년 4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조선혁명당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인사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이 과정에서 공진원은 이청천과 함께 민족혁명당 · 조선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공진원이 조선혁명당에서 활동하고 있을 때,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1937년 7월 7일 북경 교외의 노구교(盧構橋)에서 충돌을 계기로 중국은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에 돌입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 역량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대일항전을 전개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때 조선혁명당은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국민당, 홍진 · 조소앙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재건)과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자는 전제로 연합을 이루었다. 그리고 1937년 8월 17일 연합체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가 결성되면서, 공진원은 임시정부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남경을 공격해오면서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올랐다.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소속된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재건) · 조선혁명당은 임시정부와 함께 피난을 다녔고, 공진원은 이들과 함께 행동하였다. 남경에서 후난성 장사(湖南省 長沙)로, 장사에서 광동성 광주로 이동하였다가 1938년 11월 광서성 류저우(廣西省 柳州)에 도착하였다.
유주에 도착한 후, 공진원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이하 ‘청년공작대’로 약칭) 대장을 맡았다. 청년공작대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재건) · 조선혁명당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1939년 2월에 결성한 군사조직이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군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피난으로 인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유주에서 결성한 것이 청년공작대였다.
청년공작대는 3당에 소속되어 있던 남녀 청년들로 조직되었고, 대원들은 모두 34명이었다. 김동수 · 이재현 · 노복선 · 진춘호 · 지달수 · 전태산 등 낙양군관학교와 중국의 중앙군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고, 오광심 · 김효숙 · 신순호 · 오희영 · 지복영 · 조계림 등 여성들도 참여하였다. 공진원이 대장을 맡게 된 것은 이들 중 나이가 많기도 하였지만,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한 경험 때문이었다.
청년공작대는 유주에서 주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유주지역은 일본군의 침략을 직접 받지 않았고, 이 지역의 중국인들은 별다른 항일의식이 없었다. 이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항일투쟁의 대열로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방법으로 벽보 · 연극 등을 통해 중국인들의 반일감정과 항일의지를 고취시키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변화를 주었고, 중국 청년들이 청년공작대 대원으로 참여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유주에서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는 유주에서 다시 사천성 기강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기 때문이었다. 유주에 머물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을 1939년 4월 유주를 출발하여 한달여만인 5월 기강에 도착하였다. 공진원은 청년공작대 대원들과 함께 움직였다. 기강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 인사들과 각 정당 별로 숙소가 배정되었고, 청년공작대의 숙소는 기강시내의 산꼭대기에 있는 관음암(觀音庵)으로 정해졌다. 공진원은 청년공작대 대원들과 함께 관음암에 머물렀다.
공진원은 기강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기강에 도착한 후 임시정부는 정부의 조직을 확대 강화하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그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임시의정원의 의원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임시의정원은 그동안 김구의 한국국민당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에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 인사들도 임시의정원에 참여토록 하였고, 1939년 10월 의원에 대한 보결선거가 실시되었다. 이때 이복원(李復源) · 방순희(方順熙) · 이흥관(李興官)과 함께 함경도 의원으로 선출된 것이다.
임시의정원 의원에 이어 한국독립당의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한국독립당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로 연합을 이루고 있던 한국국민당 · 한국독립당(재건) · 조선혁명당이 통합하여 결성한 정당이었다. 이들 3당은 임시정부로 세력을 결집하기로 하고 통합을 추진하였고, 그 결과 1940년 5월 8일 기존의 3당을 완전히 해소하고, 3당의 통합체로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던 것이다. 이때 공진원은 이시영(李始榮) · 김의한(金毅漢)과 함께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광복군 지대장으로 활동
공진원은 기강에 도착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의 여당인 한국독립당의 간부를 맡아 활동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에서도 간부로 활동하였다.
임시정부는 기강에 도착하여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 강화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창설을 추진하였다. 광복군 창설은 우선 지휘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이후 병력을 모집하여 예하 단위부대를 설치하는 것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중경에는 만주에서 활동하였던 독립군 출신들과 중국의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인청년들이 있었다. 먼저 이들을 중심으로 총사령부를 구성하여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것이었고, 1940년 8월 4일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공진원은 광복군 창설 멤버였다. 8월 4일 총사령부를 구성할 때 참모로 선임된 것이다. 총사령부는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이범석, 부관장 황학수, 주계장 조경한, 그리고 참모 이복원 · 김학규 · 공진원 · 이준식 · 유해준, 부관 조시원 · 노복선 · 고일명, 주계 지달수 · 민영구였다. 이들 중 이청천 · 이범석 · 황학수 · 이복원 · 김학규 · 공진원 · 이준식 · 지달수 등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이었고, 유해준 · 노복선 · 고일명 · 민영구는 중국의 육군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공진원은 한국독립군 출신으로 광복군 창설 멤버였고, 참모에 선임되었다.
임시정부는 총사령부를 구성한 후, 1940년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성립전례식은 임시정부 주석이며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인 김구의 주관하에 거행되었고, 김구의 대회사, 외무부장 조소앙의 성립경과보고, 임시정부 대표 홍진의 훈사, 한국독립당 대표 조완구의 축사와 중국측 인사들의 축사, 장개석에게 보내는 치경문 낭독, 이청천에게 헌기와 총사령의 답사로 진행되었다. 성립전례식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공진원이었다. 공진원이 참모의 자격으로 전방에서 활동하는 장사들에게 보내는 ‘고중국전방장사서(告中國前方將士書)’를 낭독한 것이다.
광복군이 창설된 후, 공진원은 제2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총사령부만으로 창설되었고, 창설 직후 그 단위부대로 지대를 편성하였다. 지대는 사단에 해당되는 편제로, 처음에 3개 지대가 편성되었다. 제1지대장은 이준식, 제2지대장은 공진원, 제3지대장은 김학규였다. 이로써 광복군은 창설 직후 총사령부와 그 예하에 3개 지대를 갖추게 되었고, 공진원은 제2지대장을 맡게 되었다.
공진원은 제2지대장에 임명된 직후, 1940년 11월 대원들과 함께 섬서성 서안으로 갔다. 당시 서안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전방이었고, 임시정부는 총사령부를 서안으로 옮겼다. 총사령 이청천과 참모장 이범석은 중국군사당국과의 협상을 위해 중경에 남고, 황학수를 총사령 대리로 한 총사령부잠정부서를 편성하여 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한 것이다. 공진원은 제2지대장으로, 그리고 서안총사령부에서는 참모로 역할하였다.
서안에 도착한 후, 공진원은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창설 직후 편제된 지대는 병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우선 총사령부 인원으로 3개 지대를 편성한 것이고, 각 지대는 병력을 모집하여 부대의 규모를 확대하도록 하였다. 제2지대의 경우도 지대장 공진원과 대원 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무부에서는 관할지역을 정하여 각 지대별로 병력을 모집토록 하였고, 각 지대를 징모분처로 편제하였다. 제2지대는 징모제2분처로 편제되었고, 공진원은 징모제2분처의 책임자인 주임의 임무도 맡았다.
공진원은 징모제2분처의 주임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담당지역은 수원성 일대였다. 수원성은 현재 내몽고지역이다. 공진원은 1941년 2월 나태섭 · 고시복 · 유해준 · 지달수 · 이욕해 등 제2지대 대원 전원을 이끌고 수원성 포두로 갔다. 당시 수원성 일대는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는 일본군을 상대로 상업을 하던 한인을 비롯하여, 일본이 개척단이란 이름으로 이주시킨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공진원은 포두에 근거를 마련하고,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초모활동은 일종의 지하활동으로 극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우선 포두를 거점으로 삼고, 각 지역에 비밀조직망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한인청년들을 만나 포섭하고, 포섭한 청년들은 서안으로 보냈다. 이러한 활동을 초모활동이라고 한다. 초모활동은 포두를 거점으로 수원성 일대를 비롯하여 북경 · 천진 · 당산과 찰합아성의 장가구 등지에서 이루어졌고, 많은 한인청년들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초모활동을 전개하던 중 대원이 일제에 체포되는 일이 일어났다. 장가구에서 포섭한 한인청년 최준(崔俊)이 일본헌병대에 자수하였고, 이로 인해 대원 유해준이 체포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밀조직망과 거점도 파괴되고 말았다.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보고를 받은 서안의 총사령부에서는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공진원은 대원들과 함께 1941년 겨울 서안으로 복귀하였다.
서안으로 돌아왔을 때, 광복군의 사정은 많이 변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를 받게 된 것이다. 중국군사위원회에서는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행동9항준승’을 통해 광복군을 예속하고 활동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참모장을 비롯하여 총사령부 간부에 중국군을 임명하였고, 서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총사령부도 중경으로 불러들였다.
서안총사령부가 중경으로 철수하면서, 공진원도 중경으로 돌아왔다. 중국군사위원회가 총사령부를 중경으로 불러들인 것은 ‘9항준승’에 ‘총사령부의 소재지는 군사위원회에서 지정한다’는 조항에 의한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총사령부를 통제 가능한 지역에 두려고 한 때문이었다. 당시 서안총사령부는 황학수가 총사령 대리를 맡고 있었다. 1942년 10월 공진원은 황학수와 함께 제2지대 대원들을 데리고 서안을 떠나 중경으로 귀환하였다.
중경으로 돌아온 후 공진원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10월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주요하게 대두되었던 문제는 ‘9개준승’을 취소시켜야 한다는 문제였다. 당시 의회는 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도 참가한 통일의회로 구성되었고, 여야를 막론하고 모든 의원들이 ‘9개준승’의 취소를 요구하고 있었다. 의회에서는 ‘9개준승’의 취소를 제안하기 위한 특종위원회라는 기구를 발족하였다. 공진원은 김상덕 · 손두환 · 조경한 · 유자명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어 ‘9개준승’을 취소시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공진원은 ‘9개준승’이 취소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 공진원의 행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정정화의 회고록인 『장강일기』에는 그가 병사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아마도 공진원은 중경에 돌아온 후 병을 얻었던 것 같고, 1943년에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대한민국정부에서는 1963년 공진원에게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