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하는 말(2)
존경하는 인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이름 지은 코로나 바이러스 19(COVID-19)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하는 말(1)을 쓴 이후로 다시 (2)를 전합니다. 내가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접촉을 통해서 전파된다는 것을 알고 인간들은 나를 감시한다고 인간들 끼리 누가 누구와 접촉하는지를 찾아내는 위치 추적 앱을 만들어 내었다고 합니다. 대단한 순발력입니다만 나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살아남아야한다는 일에 모두들 정신이 팔려 있으니 이게 장래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류와 교감의 자유성을 얼마나 구속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두려움도 지니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3:16,17>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16 그가 모든 자, 즉 작은 자나 큰 자, 부자나 가난한 자, 자유자나 종이나 그들의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7 그 표나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의 이름의 숫자를 지닌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사거나 팔 수 없게 하더라.
18 지혜가 여기에 있으니 지각이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숫자를 헤아려 보라. 그것은 한 사람의 숫자이니, 그의 숫자는 육백육십육이니라.』
계시록에 나오는 “표”를 두고 바코드라고 해설하는 종교인들의 설교가 있는데 그럴듯한 해설입니다만 사실 계시록은 모두가 상징입니다. 상징은 해석하는 사람 자기 마음대로가 정답이니 오늘의 시대가 계시록의 예언이 맞아 떨어지는 시대라고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계시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자기가 예언하는(꿈꾸는) 그대로의 인간으로 형성된다는 게 인간의 타고난 속성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미래에 대한 꿈을 꾸고 주어진 시간 안에서 그 꿈을 창조해 나갑니다. 창조본능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확인해 주는 원초적인 삶의 에너지 입니다. 창조를 통해서 기쁨을 얻고 보람을 누림으로 모든 인간들이 창조에 몰두합니다. 창조에 몰두하는 인간은 창조의 아이디어를 자연에 대한 관찰과 체험과 독서, 다른 인간과의 정보의 교류를 통해서 얻어 냅니다. 서구 사회는 성서가 기초로 된 사회이며 주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며 기도 하는 사회입니다. 당연히 서구인들은 성서에서 살아갈 꾀를 유추해내는데 익숙하게 됩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이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에 의지하여 오래 전부터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는 꿈을 꾸어왔고 일일 생활권을 만들기 위한 교통수단을 개발하고 통신수단을 개발하고 결국에는 인공위성과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는데 성공했습니다. 지금 인간이 만든 전자정보기술은 가공할 수준에 와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초월한 시대에 와 있습니다. 인간 이세돌이 인공지능과 바둑을 두어서 연전연패한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합니다. 결국 인간은 계시록에 기술 된 그대로 자신들이 만든 “표”를 자신들의 손이나 머리에 심고 그것으로 물건을 사고 팔게 만들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인간 여러분!
인공지능은 욕망을 추구하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역으로 통제에 들지 않는 인간들을 아예 배제하기 위해서) 만든 것일 뿐이고, 신이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도입하라고 명령해서 만든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666“ ”짐승의 숫자"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부호화된 체계에 갇히는 순간 자기감정 발현의 주체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누군가로 부터 통제를 받아 감정 표현을 못하게 되는 짐승의 위치로 추락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 누군가"는 이미 “빅브라더”라는 말로 인간들 사회에 회자된 바가 있습니다. 빅브라더에 의해 인체에다 숫자나 기호를 바코드처럼 심으려는 시도는 여러 군데서 일어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게 동물의 몸에 부착하는 생태연구를 위한 위치 추적장치 입니다. 이게 진화된 게 성폭행범의 재발 방지나 코로나 격리자 무단이탈 방지목적으로 채우는 전자팔찌나 전자발찌 입니다. 이 기술이 계속 진보되어 인체에 무해하고 생체 에너지에 의해 작동되는 전자 칩을 인간의 피부 내에 심게 되면 인간은 지구상 어디에도 자신을 숨길 곳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기술은 어디까지 진화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이 지닌 감정 표현의 자유성까지 뿌리째 말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여러분!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게는 어둠이 필요합니다. 몸도 영혼도 쉬어야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에너지가 충전되는 때문이지요. 어둠 속에서 쉬는 동안 은밀한 자기만의 쾌락과 안식을 누릴 권리도 인간의 자유권에 속합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을 예방 한다고 인간들은 더 큰 폭력을 감추고 있는 감시통제시스템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인간이 생산해 내는 정보를 사용하려고 처처에서 "정보이용 동의서"를 작성하게 합니다. 신용카드는 개인의 생활정보를 고스란히 노출 시킵니다. 무슨 식당을 자주가고 무슨 음식을 좋아하며 주로 어느 동네 어느 가계를 다니며 무슨 물품을 얼마나 사는지, 아침에 쓰는지 저녁에 쓰는지 다 노출 됩니다. 위치추적 앱은 누구와 밥을 먹는지 누구와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하는지 다 들여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걸 들여다보는 눈동자가 있다면 "인간들의 홀딱 벗은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고 웃겠지요.
인간 여러분!
666의 칩을 인체에 심으면 주민등록증이 필요 없고 운전면허증도 인감증명서도 B/C카드도 심지어는 건강검진도 필요 없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666의 칩을 조종하는 조직이 만들어 질 것입니다. 그리되면 인간은 은밀하게 사랑도 나누지 못하는 돼지우리에 갇힌 짐승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생방송인 줄도 모르고 불평불만을 말했다가 생중개가 된 방송사고 같이 인간 내면의 솔직한 감정 표현이 불가능해지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 여러분!
조직이 만들어지면 조직은 늘 인간을 구속하고 통제하려 듭니다. 구속과 통제는 인간이 태초부터 누렸던 자유를 제한합니다. 자유를 제한하려는 인간조직의 모든 그릇된 행위에 대해서 "그건 잘못이야!"라고 외쳐야 합니다. “자유에의 의지!” “방하착!” 다 같은 말입니다. 인간은 굶을 자유도 있고, 혼자서 스스로를 자위할 자유도 있고, 내가 싫은 사랑을 거부할 자유도 있는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인간사회에서 "자유"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공공의 이익과 공공의 질서, 또는 민주화라는 말로 포장되어 다수결로 결정된 "정의 같지도 않은 정의"라는 이름으로 기본적으로 보장 되어야 마땅한 개인의 자유 조차도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또 다시 세상을 선과 악으로 분별하는 무지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선악은 관념의 산물이지 진리(참)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상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로 이해하는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인간은 영원히 죽음(=무지몽매)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게 인류가 지고 가는 근본적인 원죄(=무지한 죄)입니다.
왜? 인간들은 동료인 다른 인간을 선(善)이라는 이름으로 속박하고 통제하려고 듭니까? 선과 악은 누가 개념 짓고 판단합니까? 신과 법이 판단한다고 외치지만 신과 법을 대리한 인간 누군가가 판단하겠지요. 그 인간의 판단은 늘 완전무오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게 맞습니까? 신을 믿는 방법이 틀렸다고 처벌하는 법을 만들면 인간의 일상은 종교재판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누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며 법이 늘 정의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불변의 진리는 선악이 아니고 " 인간은 생명이고 본디 자유롭게 창조되었다"는 유일한 사실 그 하나뿐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의 김정은이 잠적하였을 때 세계인들의 궁금증이 코로나에 걸린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증폭시켜갈 때 미국의 트럼프가 이런 소리를 하더군요. “김정은, 어떤 상황인지 알지만 말할 수 없다” . 빅브라더인 나는 다 알고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더군요.
인간 여러분!
아무리 코로나가 무섭더라도 사생활의 자유, 은밀함의 자유에 대한 가치를 포기하면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생활을 터트려서 재미 보려는 언론이나 정치가들도 이제 그만 이 땅에서 나와 함께 떠나 주시길 바랍니다. 자유권적인 기본권은 생명이 생명으로 존재하기 위한 삶의 기초이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