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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묵상글 (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 4등 안드레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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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4등 안드레아?
공관복음에서 안드레아 사도는 저평가된 분입니다.
형 베드로는 주님 교회의 반석이 되었지만
그는 같이 첫 제자였으면서도 그리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주님의 중요한 순간들,
곧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 때와
죽은 소녀를 살리실 때와
겟세마니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주님께서는 첫 제자들 가운데
형 베드로와 제베데오의 두 아들은 동반하시고 안드레만 빼놓으셨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안드레아가 4등 안드레아였다는 표시이거나
안드레아가 아예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표시가 아닐까요?
물론 주님께서 그러셨을 리 없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안드레아가
인간적으로는 자신만 주님 사랑 밖에 있다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제베데오의 두 아들이 베드로를 제치고
주님 좌우에 앉으려고 하자 다른 제자들이 불쾌해했다고 하는데
이때 안드레아만 예외였을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주님 사랑에서 자기는 밀렸다고 인간적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어쨌거나 공관복음의 안드레아는 존재감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요한복음의 안드레아는 제법 중요한 존재입니다.
스승 세례자 요한과 함께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고,
지나가는 주님을 세례자 요한이 가리키며 메시아임을 알려주자
주님을 따라가 주님이 계신 곳을 보고는 형을 주님께 데려갑니다.
그러니까 안드레아는 제일 먼저 주님을 따른 존재요,
형을 주님께 인도하고 천거한 존재인데,
이런 면모는 요한복음에서 두 번 더 발견됩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주님을 찾아왔을 때 그들을 주님께 데려가고,
빵의 기적 때 오병이어를 가진 아이를 주님께 데려가 만나게 합니다.
그리고 이밖에는 요한복음에서도 안드레아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4등의 존재로 있고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
실은 안드레아가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저는 오늘
이런 존재와 이런 사랑을 돋을새김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제가 이렇게 없는 듯 있는 사람이지 못하고,
존재감 없이 존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안드레아처럼 소리 없이 대단한 사랑을 하지 않고,
빈 깡통처럼 요란한 사랑을 제가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에 비해 존재와 존재가 만나게 하고,
사랑이 사랑을 만나게 하는 안드레아의 사랑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아무튼, 4등으로라도 늘 주님과 함께 있는 것,
두드러진 활약은 못하더라도 사람들을 주님과 만나게 하는 것,
이것이 실은 겸손이 밑받침된 대단한 내공의 사랑이라는 것을
안드레아 사도를 통해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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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안드레아는 공관복음에 따르면, “사람 낚는 어부”(마르 1,17;마태 4,19)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형인 베드로와 함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특히 <마르코복음>에서는 열병으로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는 장면에서 등장하며(마르 1,29-30), 예수님께서 성전파괴를 예언하셨을 때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겠느냐며 궁금해 하기도 합니다(마르 13,3-4).
<요한복음>에서는 그가 상당히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께서 부르신 첫 번째의 제자가 되었으며(요한 1,35-40), 형인 시몬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소개하면서 그를 예수님께로 인도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요한 1,40-42). 또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에는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드렸고(요한 6,8-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는 예수님을 만나 뵈러 온 그리스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합니다(요한 12,20-22).
한편, 초기의 동방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맨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프로포클레토스)으로 불립니다. 그는 흑해 주변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인 ‘파트라이’에서 순교하였는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의 성화나 성상에는 X자 형의 십자가와 함께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그 나라의 수호성인인 안드레아를 상징합니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모셔져 오다가,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서 그리스 정교와의 화해의 표시로 그의 순교지인 ‘파트라이’에 모셔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라고 말씀하시고 안드레아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마태 4,20).
그런데 ‘고기를 낚는 어부’와 ‘사람을 낚는 어부’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는 살아있는 고기를 죽이기 위해 잡아들인다면,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죄로 죽은 영혼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잡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또 ‘고기를 낚는 어부’는 고기를 골라서 낚아 올리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고기가 좋든 나쁘던, 곧 전교대상이 선하든 악하든 간에 낚아 올린다는 점입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낚는 어부’는 자신의 그물을 치지만, ‘사람을 낚는 신령한 어부’는 성령의 그물을 칩니다. 곧 자신의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가라는 데로 가며 그물을 던지라는 쪽으로 던지고, 그분이 명령하는 방식으로 그물을 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해타산의 머뭇거림이 전혀 없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온전한 응답이 요구됩니다. 그러니 우리도 안드레아 사도가 예수님께서 머무르는 곳에서 밤을 묵어가며 양성을 받았듯이, 먼저 그분과 함께 머물며 ‘그분 안에서 양성을 받는 제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8)
주님!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그물이 아니라 성령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위험하더라도 깊은 곳, 당신이 원하신 곳에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자신의 먹이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기 위한 사랑의 그물을 치게 하소서.
내 입맛에 맞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모두를 거두어들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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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따름으로써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축일을 맞이한 분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리며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기꺼이 따름으로써 큰 믿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온전히 따르려니까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했고 마침내 버림으로써 주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안주하지 않고 도전할 때 새로운 것을 얻게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단지 마음과 행동의 변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주님을 따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과거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할 새 일을 만날 수 있고 또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주님은 거기 계십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와 형제지간입니다. 특별히 요한과 길을 걷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있는데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41)하며 형에게 말하고, 형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도 소개하였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요한6,8-9)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간 사람도 안드레아입니다. 그는 혼자만 메시아를 따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소개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그는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삶의 쇄신과 회개를 가져오게 됩니다. 안드레아는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삶의 자리에서 우리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나를 따라오너라” 하십니다. 따르고 안 따르고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에게는 새 삶이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이 그물이나 배, 아니면 가족? 일지라도 단호하게 버리고 주님 안에 머물면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나라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따름으로서 완전한 주님의 사람이 됩니다.
일상 안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끊임없이 대립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에 따라서 주님의 제자가 되기도 하고 세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버릴 것은 확실히 버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안드레아가 형에게 자기가 만난 주님을 알렸듯이 주님의 체험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셨으니, 무엇보다도 모범과 행실로써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름으로써 믿음을 견고케 하듯이 믿음이 약한 이들이 우리를 보고 믿음을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큰 나무는 잘 부러지지 않고 큰 강물은 소리를 내지 않으며 깊은 샘물은 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답니다. 예수님이 크신 분이셨듯이, 모두가 큰사람 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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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말의 어원을 배우는 것은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문지방에 앉지 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어려서 어른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몰랐지만 어른들이 그렇게 말하니 따랐습니다. 며칠 전에 그 의미를 들었습니다. 문지방은 ‘경계선’이라고 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선과 악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 적과 친구의 경계, 안과 밖의 경계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경계는 ‘금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낙원’을 주셨습니다. 그 낙원에는 하나의 금기가 있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것들은 다 가져도 되지만 선악과는 만지거나,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는 롯에게도 ‘뒤’를 돌아보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면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방학이 되기 전에 9일 동안 ‘오 예수’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라틴어로 된 노래입니다. 가사의 일부 중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혼돈의 경계에 있어서는 안 되고 질서의 경계 안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신학생들은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오 예수’의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오 예수님, 내 사랑이신 예수님/ 나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오니/ 당신에서나 이 신학교에서나 떠나있지 않으렵니다./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신학교 밖에서 세속, 마귀, 육신이 흉악한 괴물처럼/ 우리를 공격하며 거룩한 이곳에서 끌어내리려 합니다./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의 것들을 더욱 사랑한다면/ 그대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고 내 제자가 아니리라./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무도 하늘나라의 사람이 아니니라./ 가장 사랑하올 예수님 우리를 지키고 보살펴 주십시오./ 또한 그대들은 불리움과 뽑히움을 확실하게 하도록 힘쓸 것이며/ 죄에서 떠나 있으라.” 사실 신학생 때는 이 노래의 가사를 깊이 묵상하지 않았습니다. 이 노래가 끝나면 신나는 방학이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과 기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주님의 품에 확실하게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선’을 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은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전임 서울대교구 교구장이셨던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님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추기경님과 8년 동안 교구청에서 지낼 수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은 소탈하시고, 검소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사제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높은 산과 같았다면, 정진석 추기경님이 자상한 어머니 같았다면 염수정 추기경님은 언제나 푹 쉴 수 있는 동네의 느티나무 같았습니다. 추기경님과 많은 일화가 있지만 기억나는 것 하나만 나누고 싶습니다. 7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관리국장 신부님은 그 건물을 은퇴사제 숙소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청소년 국장 신부님은 청년사목 사제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성소국장이었던 저는 예비 신학생들 위한 기숙사로 사용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추기경님과 산보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추기경님! 그 건물을 과거의 사목을 위해 투자하실 건지요? 추기경님! 그 건물을 현재를 위한 사목에 투자하실 건지요? 추기경님! 그 건물을 미래를 위한 사목에 투자하시겠습니까?” 추기경님께서는 저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셨고, 그 건물은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기숙사가 되었습니다. 그 건물은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못자리가 되었고, 그 학생들이 교구의 사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혼돈의 선에서 질서의 선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물도 버리고, 배도 버리고, 가족들도 뒤로한 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혼돈의 선을 넘어 주님의 품으로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 갰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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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말이 있습니다. 바로 ‘보이스 피싱’입니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목소리 낚시’입니다. 이것을 다시 의역해 보면 ‘말로 사기 치기’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피싱’이란 말은 그리 썩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꼭 ‘피싱’이라는 말 겉에 사람을 속이려는 더러움이 박힌 것 같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자제들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람 낚는 어부’는 우리 시대의 ‘보이스 피싱’과 다르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피싱은 사람을 죽이는 행위이지만 ‘사람 낚는 어부’인 사도들은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들, 즉 사도들은 모두 주님께 사람 낚는 법을 직접 배웠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전수한 사람 낚는 법은 바로 ‘사랑, 감사, 용서’였습니다. 사도들은 사랑으로 사람을 대했고, 감사로서 하느님을 섬겼으며 용서로서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사도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주님께, 그리고 하느님 나라도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도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 죽이는 ‘보이스 피싱’말고 사람 살리는 낚시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낚는 방법은 사랑입니다. 내어주고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사람을 낚는 방법은 감사입니다. 하느님을 가슴에 품는 감사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을 낚는 방법은 용서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돌아보기
돌아보는 습관은 영적인 삶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돌아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보기 싫었던 내 치부를 직면할 수 있습니다.
볼 수 없었던 내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내 옆에 주님 발자국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성무일도 끝기도는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이는 오랜 교회의 전통이자 동시에
영적 길을 걷는 방법입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봅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걸었는지….
11월을 돌아봅니다.
주님께서 어떤 손길로 저를 인도하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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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하느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기가 늘 하던 것의 범주 내에서만 우리는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니 그 범주에서 벗어나는 부르심을 받아들이기가 힘듭니다. 복음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오지요.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돈 많은 풍요라는 자기 범주 안에서 주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은 그렇지 않았지요. 주님께서는 자기 범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즉, 자기가 늘 하던 범주라는 틀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자기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제대로 따를 수 있었습니다. 나보다 주님이 더 중요한 사람만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주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무조건 지키고 남는 여력으로만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부르심을 온전하게 따르는 것은 너무나 어렵고 힘든 것입니다.
자기에게 급한 어떤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도와주면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한 친구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했습니다. 자기의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의 어려움에 함께하는 친구가 좋습니까? 아니면 자기 일 먼저 하고 나서 여력이 되면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친구가 좋습니까?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나의 응답을 통해 주님과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오늘 우리는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지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베드로 사도의 동생으로, 복음에도 나오듯이 형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하는 어부였습니다. 그날도 이 두 형제는 호수에서 어망을 던지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이번 달 초에 사목회장님을 새롭게 뽑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조언을 들어서 사목회장님 하시면 괜찮겠다고 생각되는 분에게 사목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솔직히 거절하시면 어떻게 설득할까도 고심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우였습니다. 이분께서는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조금도 망설임 없이 그물을 버리고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에 주님께서도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지금도 우리에게는 그분의 부르심이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내 일이 먼저라고 하면서 그 부르심을 뒤로 미루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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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진심을 담아 들여다보면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을 사랑을 읽을 수 있다(하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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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버림과 따름, 믿음의 여정
-제자이자 사도의 삶-
주님을 믿고 따르는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른 밤 눈뜨자 저절로 나온 말마디는 “주님, 감사합니다!”였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도 “주님, 감사합니다!”고백합니다. 감사로 시작해서 감사로 끝나는 인생이기를 소망합니다. 사실 단 하나의 소원은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주님을 믿는 제자로 주님을 따르는 삶, 하나뿐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바치는 기상시, 취침시 바치는 만세육창의 평화의 기도와 제 신원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평화(平和)의 전사(戰士)’다!”
주님을 따르는 모범이 바로 그 믿음의 제자인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 사도입니다. 베드로의 형제로 요한 복음에 보면 형을 주님께 인도했으며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름 뜻은 ‘사내다움’ 또는 ‘용기’를 뜻합니다. 형과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로 최초로 러시아에 복음을 전했으며 초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지냈습니다.
상징물로 X자형 십자가이며, 어부, 생성장수, 스코틀랜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수호성인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국기는 푸른색 바탕에 X자형 흰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사실은 같은 수호성인을 모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국가간의 전쟁인데 말그대로 형제국끼리의 전쟁입니다.
위경 “사도 안드레아의 행전”은 비신화화하기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며 안드레아는 로마제국의 속주인 마케도니아 이남 지역인 아카이아(오늘날 그리스 전역) 남부지방에서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목박혀 순교했다 합니다. 까닭인즉 X자는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글자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형장에 끌려갔을 당시 안드레아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기쁨에 넘쳐 다음 기도를 바쳤다 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올려 주님곁으로 가게 해다오.”
전설같은 일화지만 시종여일 한결같이 순교하기까지 주님을 충실히 따른 사도 안드레아의 생애가 감동적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그림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시자 그들을 부르십니다. 말그대로 운명적인, 은총의 만남이요 첫눈에 반했음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라. 내가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그러자 그들은 전광석화,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어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시자 이들 역시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 깨닫습니다. 갈망하던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만났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첫눈에 이들의 갈망을 알아챘음이 분명합니다. 서로 첫눈에 반한 운명적인 만남입니다. ‘구원의 출구’를 발견한 것이지요! 이들 어부들은 갈릴레어 호수에서 고기잡이 생업에 종사했던 젊은이들이지만 끊임없이 주님을 찾는 갈망의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이들의 참 진리를 찾는 갈망을 첫눈에 알아챘고 부르시자 즉각 응답한 두쌍의 어부 형제들입니다.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이들 어부형제들이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냈을까요? 우리에게 주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요? 평생 단조로운 반복의 일상을 살다가 무지와 허무속에 인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우연이 아닌 필연같은 주님 은총의 부르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어부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제자들처럼 우리의 부르심과 버림, 따름은 한 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끊임없이 버리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 삶의 여정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여정, 버림의 여정,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끝까지 죽을 때까지 한결같이 부르심-버림-따름의 여정에 항구할 때 비로소 성소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그날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나 홀로의 여정이 아니라 더불어의 여정이요, 이웃에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복음 선포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네 어부를 부른 목적도 사람 낚는 어부로, 즉 복음선포의 일꾼으로 뽑은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선포는 제자는 물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자 존재이유입니다. 그러니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로서의 우리의 신원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복음 선포 사명에 분발의 노력을 다할 것을 호소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절로 나오는 고백입니다.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참 아름다운 모습이, 참 멋지고 매력적인 모습이 기쁜소식을, 복음을 살며 전하는 이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살며 선포하는 일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늘나라의 복음이야말로 인생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 자체가 주님과 하나되어 복음이, 하늘나라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러면 복음선포는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단히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버림과 따름의 여정에, 복음선포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날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마다 바치는 주님 사랑의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하루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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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30.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부르심과 따름>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오 4,19)
있었던 나를
알고 계시거늘
있는 나를
바라보시며
있어야 할 나로
늘 부르시니
있었던 나에
부끄러워하거나
있는 나에
머물지 않고
있어야 할 나로
늘 따라 나서네
했던 나를
알고 계시거늘
하는 나를
바라보시며
해야 할 나로
늘 부르시니
했던 나에
부끄러워하거나
하는 나에
머물지 않고
해야 할 나로
늘 따라 나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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