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 시의 추억 / 남진우
갈매기 한 마리
원을 그리며 내 머리 위에서 종일 돌고 있다
삭아가는 폐선 옆에 서서
멀리 난바다에 부서지는 햇살 바라보며 찍은
흑백사진
거기
홀로 선 내 머리 위에 맴돌고 있는 갈매기 한 마리
내 젊음은 저렇듯 끝없이 돌고 돌다가
점이 되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돌지 않고
무슨 얼룩처럼 사진에 붙박인 갈매기 한 마리
눈길을 주는 순간 물결을 일으키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 눈동자 속으로 뛰어들어와
다시 돌기 시작한다
몽생미셸 / 남진우
육지의 끝
썰물 진 바닷가에
조가비처럼 누워 있는 수도원
안개가 걷히면
순례자 대신 장사치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
영혼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자들이
비좁은 계단 사이 어깨를 부딪치며
값싼 지폐와 신성을 교환하기 위해 오간다
수도사의 휴게실을 지나 석회암 기둥의 회랑을 지나
바다를 등지고 멀리 바라보이는 목초지엔
무심히 풀을 뜯는 검은 얼굴을 한 양떼들
하루의 소란이 다 저물고 난 뒤
깊은 밤이 찾아오면 조가비는 비로소 입을 열어
밤하늘 가득 맺힌 물방울 같은 별들을
제 속으로 빨아들인다
석모도 해변을 거니는 검은 개 한 마리/남진우
눈보라가 걷힌 해변
저 멀리 검은 개 한 마리가 어정거리고 있다
낭떠러지 아래 푸석한 갯벌을 가로질러 펼쳐진 바다
사는 것이 끝없는 모욕의 연속일 때 문득 눈보라 속으로
가웃없이 사라지고 싶을 때
늘 귓가에 철썩이는 파도
바닷물에 앞발 담그기도 두려운 듯 야윈 개는 멀찍이 떨어져
수평선으로 향하는 몇 갈래 물 위의 길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미워했던 것들 이젠 다 부질없다
까슬한 턱을 쓰다듬으며 마른 기침을 해보았지만
가시를 곤두세운 바람이 쓸고 가는 지상엔
아침 햇살에 흩날리는 자디잔 먼지 조각들 뿐
눈 가늘게 뜨고
개 한 마리 모래 둔덕을 넘어
낭떠러지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아무런 영광도 없이
물거품처럼 부서지고 싶은 회한도 없이
늠름하게, 천천히, 꼬리를 늘어뜨리고
석모도 아침 해변을 산책하는
검은 개 한 마리
들소떼와 춤을/남진우
1.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신다
소란스럽게 흔들리는 벽과 창문 흩날리는 빛살들
귀먹은 어머니의 재봉틀에서 들소 떼가 쏱아져 나와
마루를 가로지른다
일제히 삐걱이는 마루 바닥 딛고 사방에서 쿵쿵 몸을 부딪치는 들소떼
선반 위에 얹혀진 가난한 살림이
금방이라도 쏱아져내릴 듯 흔들린다
2.
들소 떼가 우리 집 낡은 지붕을 밟고 지나간다
성난 물소떼가 비스듬히 기운 우리 집 담벼락을 마져 무너뜨리며
골목을 지나 신작로로 달려나간다
뿔을 치켜들고 일시에 비좁은 우리 집을 빠져나가
우우우 지평선으로 가라앉는 둥근 해를 향해 몰려간다
모래들판 너머
구름처럼 일어나는 먼지 속에 문득 떠오르는 푸른 목초지
3.
어머니가 재봉틀을 돌리신다
일당 몇 푼 쌓여가는 옷감에 하루 해를 넘긴다
재봉틀 소리 가득한 집안은 들소들이 내뿜는 거친 숨결로
달아오르고 식당 세탁소 문구점 목욕탕 편의점
모두 문을 닫은 텅 빈 거리
전단지 달라붙은 전못대 밑을 지나
식식대며 어디론가 무작정 내달리는 들소떼
재봉틀이 흔들거리며 평원을 달려나간다
4.
사냥꾼도 원주민 전사도 다 사라진
도시의 황혼을 들소떼가 내달린다
가로수를 들이받으며 상점진열장을 부수며
무릎을 꺾고 지쳐 쓰러진 들소들 위로 다시 들소들이 뿔을 세우고 내달린다
걷어찬 돌멩이도 건너갈 강도 없는 막막한 길 저편에서
어머니 홀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다
5.
달리는 길의 끝
낭떠러지 밑으로 들소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시름겨운 어머니 한숨 속으로
들소떼가 꺼져들어간다
점치는 여인/남진우
마침내 사막을 다 지나왔을 때
모래내시장 구석 점치는 여인은 내게
당신은 사막 한복판에 누워 있다고 말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냐며 일어서자
당신 목에 가득 찬 모래가 곧 허물어져내릴 거라고 했다
돌아서서 몇걸음 걷다 말고 나는 쓰러졌다
아득히 멀리 선인장이 늘어선 광막한 모래밭
뜨거운 햇살이 살가죽을 태우고
방울뱀이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신기루처럼 어른거리는 영상이 거듭 나타났다 스러지는 동안
유목민들이 지나가다 내 옷과 신발을 거두어갔다
긴 세월 내 몸에서 빠져나간 모래가
허공의 모래바람에 섞이고
밤이면 멀리 산정에서 뇌성이 울리곤 했다
모래 속에 파묻혀가며 나는 외쳤다
나 아직 죽지 않았다고 이건 내게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고
한산한 모래내시장 구석
주변의 웅성임이 뚝 그쳤다 점치는 여인이
마지막 패를 뒤집자 사막 저편
죽은 내가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 남진우 시인의 약력 ]
<<남진우 시인 약력>>
*1960년 전북 전주 출생.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제8회 동서문학상 (평론 부문) 수상., 제6회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수상, 제9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제11회 소천비평문학상 수상, 제13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죽은 자를 위한 기도』『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사랑의 어두운 저편』
*〈시운동〉 동인.
*현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