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6
2. 종교
1) 다양한 교리 해석이 나타났다.
(1) 삼위일체 – 신은 하나이지만 세 가지 다른 행위를 하는 것
*한 사람이 세 가지 알을 할 수 있다. 는 식으로 설명
(2) 죄악 --- 신에 의하여 불법으로 정해진 것을 의식적으로 할 E
아우구스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새속적인 이득을 위해서 신의
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세속적 도덕을 가져오다.
아라스토텔레스 윤리학 영향
집단의 선이 개인이 선에 우선한다.(교회 우선주의)
(3) 군주의 권력 — 폭군을 제거할 수 있다.(성경)
성경 말씀에 ‘칼을 함부로 쓰는 사람은 그 칼에 죽임을 당한다.)
(4) 사르트르 성당(1120년에 건립 시작)의 학문
플라톤(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논리학)을 수용한다.
***중세와 기독교
서양사의 중세사는 단순하지 않다.
로마에서 시작하여, 게르만 족의 대 이동, 많은 국가가 탄생하면서 국가 간에는 경쟁을 했다. 이러한 중세를 관통하면서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기독교가 했다. 중세의 기독교는 고대와 중세를 이어주는 고리의 역할을 한다.
기독교가 종교로 성장한 시기는 로마이다. 로마 시기에는 로마 역사에 묻혀 있다. 그 후로 세속 권력과 맞물려 서양사의 큰 축을 이룬다. 기독교가 세속 권력과 협력하고, 또 경쟁하면서 살아남는 과정이 바로 중세사가 된다.
유럽의 새 주인이 되어서 중세사를 꾸려가야 하는 게르만의 입장에서도 기독교는 반드시 필요했다. 서양사가들은 기독교가 게르만에 다가가지 않았더라도(적극적으로 포교했다.) 게르만이 기독교에 다가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게르만이 유럽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협력이 절대 필요했다.)
게르만의 영웅들(샤를마뉴나 오토 등)이 기독교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유이다.
1) AD 50년 경에, 예수가 죽고(30년) 난 후에 야고보를 수장으로, 베드로 등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교단을
형성했다.
이때, 바울의 전도사업에서 이교도(또는 사교도-신약과 그리스도 전통에서 그리스도 교와 유대교를 믿지 않는 사람)를 포함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리스 철학자는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았다.(전도에 어려움이 있었다.)
2) 로마는 신흥 종교에 관대했으나, 기독교의 오해와 교리 문제 등으로
박해를 받았다.
(네로의 박해 등)
3) 그러나 하층민을 중심으로(평등사상, 구원사상 등등) 교세가 확산했다.
4)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자-교세가 빠르게 학산되면서 중심세력으로 부상.
5) 게르만 족의 침입 – 게르만족의 기독교 화가 일어나다.
6) 교회 중심으로 교육기관이 설립 – 수도원이 중심이 되었다.
철학이 기독교에 들어오다.
7) 성직자가 종교교육과 세속교육을 모두 맡았다.
8) 8-10세기에 학교가 부흥하다.
궁전에서도 학교교육에 투자했다.
9) 이탈리아는 로마 멸망 후 비잔틴의 속국화 되었다.(라벤나)
10)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가 유럽의 최강자가 되어서
로마 카톨릭을 후원하여, 교황권이 살아난다.
11)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중심이 되어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황실의 권력 다툼과 관계있다.)
12) 이스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711년부터)
프랑스의 카롤링거 왕조(샤를마뉴)와 충돌
성경(종교) 문학
367년에 신약의 경전을 정했다.(알렉산드리아 아타니시우스가 주도)
샤를마뉴 때 여러 번역본이 나오면서 성경의 개정이 있었다.
*위경(이 말은 그리스어가 어원으로 감추고, 멀리 두다, 라는 뜻이다.) -
위험한 내용이 아니고,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성경 해석에 참고가 될만 하다.
즉 ’사도들의 기적‘을 다룬 것들은 응용했다.
그러나 이단이나, 분리주의자들로부터 나왔으므로 ’외경‘이라고 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 사이에 설명이 어려운 공백을 메워준다.
특히 ’묵시록‘의 경우는 진부 여부가 불확실하지만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한다.
===> 중세 초기에 성경의 논평 및 주석(설명)이 나타나면서 신학을 체계회했다.
1. 중세의 성지 순례
예나, 지금이나 종교적 유적이 있는 곳을 순례 방문하는 것은 일상의
일이다.
중세인이 순례를 많이 가는 곳은 성 야고보 무덤 교회(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예루살렘의 성모 교회, 로마의 성 베드로 교회이다.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성 야고보 무덤 교회를 많이 찾았다. 이곳에서 9세기에 야고보의 시신을 발경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 844년에 이슬람과 싸울 때 기사차림으로 나타난 야고보가 적을 물리쳤다는 전설도 있다.
(야고보는 헤롯에게 참수형으로 죽었으나, 그의 시신이 포르투갈의 산티아고에서 발견되어, 이곳에 야고보 교회를 세웠다.)
중세인에게는 태어나는 날보다 죽는 날이 더 중요했다. 죽음은 저승의 생으로 들어가는 길이므로 영혼의 구원과 관계있다. 711년에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함으로 어려움이 더 많아졌다. 성지순례는 신성한 여행이지만 사실은 도둑이나, 들짐승 같은 세속의 어려움도 쌓여 있었다.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대 유행했다. 그러나 중세인은 종교적 열정, 속죄, 질병의 치료 등으로 더 집착했다. 성지 순례가 대 유행을 하자 순례를 떠나지 못한 사람은 마음에 빚을 진 기분으로 살았다.
지역민들이 단체로 순례를 떠나므로 동류 의식을 느꼈다. 순례길 주변에 숙박업과, 상업이 번성하면서 도시가 생겨났다. 특히 성당이나 수도원은 순례객이 들리는 곳이었고, 이곳 성당과 수도원도 기념품을 판다든지 하여 순례객을 상대로 이속을 챙겼다.
11세기에 기독교인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므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더욱 더 인기있는 순례지가 되었다. 순례의 출발지는 프랑스였다. 이 시기 이미 순례 안내 책자도 나왔다. 12세기에 절정을 이룬 후에 순례 열풍도 사그러져 갔다.
페스트, 종교개혁, 종교전쟁이 찬물을 끼얹었고, 또 백년전쟁도 순례여행을 어렵게 했다.
3. 기사 이야기의 대 유행
문맹이 많아서 이야기 들려주는 일이 유행했다. 순례하는 이야기군이 나타나서 돈을 받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이들은 성을 찾아다니면서 왕, 성주, 귀족을 고객으로 했다. 나중에는 글도 남겼다. 이것이 중세의 기사 문학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고객에 맞추어 왕, 성주, 귀족이 되었다. 곧 궁정 기사 소설이다.
중세의 영주와 귀족이 살던 성은 좁고, 살기에 무미건조한 곳이었다. 이런 궁전-성을 찾아다니는 전문 이야기꾼이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기사와 궁전의 여인이 주인공 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영국 작가는 아서왕 이야기를 쓴 크레티앙 트루아 이다. 아서왕 이야기를 위시하여 성배 이야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