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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를 살리심 요한복음11:39-46 ▧
죽은지 나흘째가 되는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린 이적은 요한 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최대의 이적중 하나입니다. 본서 6장에서 주님은 생명의 떡으로 나타났고 7장에서는 생명수로 8장과 9장에서는 생명과 빛으로 10장은 선한 목자로 그리고 본장에서는 부활의 주로 나타나시었습니다. 부활은 생에 대한 승리요 부활은 생명의 기쁨입니다.
오늘 주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괴로운 생애를 지적해 주시는 기사입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문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사도 바울은 세상에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해로 생각하고 배설물로 여기고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때로는 괴로움으로 곤고하고 사망길에 처해 있다고 개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괴로움 끝에 나사로가 죽음
21절에 마르다는 자기 오라비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한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 죽음은 원수요 괴로운 것입니다. 죽음은 분리이고(고전15:53) 쏘는 것이며(고전15:55) 우리의 소유와 아름다움과 동경하는 것, 즐거움 조차도 빼앗아버리고 맙니다.
* 성도의 영육의 죽음 (1) 죽으면 호흡이 끊어집니다.
영적 사망은 기도의 호흡이 중단됨을 의미합니다.
(2) 죽으면 모든 활동이 중지됩니다.
사지 백체와 오장육부의 활동과 기능이 중지됩니다. 영적 죽음이란 신령한 움직임이 중단됨을 의미하니 주일 성수, 십일조 생활, 찬송의 생활, 감사, 전도, 구제, 기도의 생활이 중단된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죽으면 육체가 차가워 집니다.
육체가 차게 되는것은 피의 사랑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뜨거운 것입니다. (마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 불법은 마치 차디찬 겨울과 같습니다. 긍휼도, 용서도, 동정도, 우애도, 애정도, 의리도, 신의도 찾아 볼 수 없는 세계는 차가운 세계입니다.
(4) 죽으면 감각이 없어집니다.
무반응입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영적 죽음은 생명 운동에 대한 무반응입니다. 피리를 불어도 슬퍼할 줄 모르고 춤을 추어도 기뻐할 줄 모르는 신자를 의미합니다.
(5) 죽으면 의사불통이 됩니다.
언어의 단절입니다. 말이 가지도 못하고 오지도 못하여 답답하기만 합니다.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6) 죽으면 생산이 없습니다.
생산이 없는곳엔 항상 절망뿐입니다. 거기엔 창조와 건설과 발전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교인은 평생 살아도 전도 한 번 못하고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 사람에게 아무런 진보나 발전이나 창조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7) 죽으면 내어 버립니다.
사람이 죽으면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악취로 인해 내버리게 됩니다. 영적으로 죽은 신자는 교회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내버려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치있고 덕되고 없으면 안될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비극이요 눈물이요 절망입니다.
이 눈물과 절망은 병과 죽음이 지난 다음에 오는 마지막 흔적이기도 합니다. 33절에 이일 때문에 나사로의 누이들이 울었고 둘러선 주민들도 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병과 죽음 때문에 나인성 과부의 마을 사람들이 울었고 딸의 죽음으로 회당장 야이로의 가족과 친족들도 울었습니다. 병이 있는 세계, 죽음이 있는 세계, 거기는 절망이요 눈물입니다. 이것이 베다니의 실황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 세상은 베다니 같은 현상을 계속되고 있습니다.
2. 우리 인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배우고 알아야 할 일이 많이 있지만 다음과 같은 것은 꼭 알고 지내야 합니다.
첫째, 죽음은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전3:2)에 "날때가 있으며 죽을 때가 있고"하였으며, (창3:19)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 것은 아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만인에게 있는 것처럼 죽음도 만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거절하거나, 피하거나, 연기 하거나, 도전하거나, 취소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면 누구나 죽음의 사실을 알고 지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영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것입니다.
주님은 멸망의 문이 있고 생명의 문이 있다고(마7:13-14)하셨습니다. 멸망의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의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악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눅16:19-31)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로 불신자와 신자의 금세와 내세의 삶을 보여 주셨음니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불신하던 부자는 지옥불에 떨어졌습니다.
악인들이 당할 영벌의 장소는 "불꽃 아궁이라"고(마13:42)하셨습니다. "깊은 구덩이"라고(벧전3:9)하셨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서 단절되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마8:12)에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마9:43) "죽지 않는곳"(막9:48) 천국과 영원히 단절 될 세계입니다.
셋째,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곳은 "새 세상이라고"(마19:28)하셨습니다. 바로 그곳은 "내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습니다(요14:2). 거기에서 신자들은 새 몸 곧 영생의 몸으로 살게 됩니다. "썩지 아니하는 몸"(고전15:45), "영광스러운 몸"(고전15:43), "강한 몸"(고전15:43), "신령한 몸"(고전15:44), "영광의 몸"(빌3:21), 이상과 같은 몸의 형태로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엔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아픈것이 없다"고(계21:4)하셨습니다. "해와 달이 비췸이 쓸데 없는곳"(계21:23), "거기엔 밤이 없는 세계"(계21:26)입니다. "등불이 쓸데 없는 곳"(계22:5)입니다. 오직 무궁한 삶, 완성된 영화로운 삶, 거룩한 삶, 평화로운 삶, 만족과 충만의 삶, 빛나고 아름다운 삶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내세 영광의 세계를 이 세상의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표현 한다고 해도 그 세계를 다 알거나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3. 죽은자를 살리신 뜻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은 단지 그와만 관계를 유지하기 보다는 예수의 사랑을 받은자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기 위한 교훈인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첫째, 육체의 부활이 있음을 배울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에서 죽음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영과 육의 분리되는 자연적인 죽음에서 예수님은 그 육신을 살리실 수가 있습니다. (눅8:54-55)에 보면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가라사대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예수께서 먹을 것을 주라고"하신대로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육신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둘째, 영의 부활이 있다는 뜻입니다.
육은 살고 영은 죽는 영적 죽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을 살리신 분입니다. 영의 부활의 주체도 예수님이십니다. (엡2:1)"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예수님은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영이 죽은 육체는 산 송장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음성도 못듣고 구주의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도 못느끼고 영원한 미래에 대해 관심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들이 살아나리라"(요5:25) 이 말은 현세에서 복음을 듣는 자들이 영적으로 중생하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셋째,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영생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과 육이 아울러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 영원한 사망 곧 둘째 사망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또 다른 사망이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이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사망이 죽는 날이기도 합니다.
와신턴은 죽으면서 "의사여 나는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소"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천로역정의 저자 존번연은 죽으면서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울라 나는 주 우리 그리스도에게로 가노라 하나님께서 그의 복스러운 아들의 중보로 말미암아 나를 영접하시되 우리가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하여 모인 곳으로 영접하시리라 그리고 거기서 영원토록 머물리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설교자 무디는 마지막 임종시에 병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면서 "영광이로다.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도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다"하고서 주앞으로 갔습니다.
넷째, 재림의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행1:11)에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너희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요14:3) "가서 너희를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또 (마24:30)"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간은 알 수 없으나 다시 오시는 것만은 사실이며 또 형태적 재림도 사실입니다. 영광의 주로 오시며 일면 심판의 주로 오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영광을 얻게 되고 하나님을 모르고 복음을 복종치 않은자, 불신자에게는 벌로서 영원한 멸망이 있게 되며 충성된 자에게는 보상이 있습니다. (마25:14) 재림의 날은 신자에게는 소망의 날이요 불신자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다섯째, 천국의 영생을 보증하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을 영원히 죽지 않는 곳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이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다시 사망이 없는 세계로(계21:4)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기독교는 부활이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의 다시 사심은 사망이 죽는 날 이기도 합니다.
4. 신앙이 없는 기적은 없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40절에 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많은 사랑을 받아 오면서도 그의 능력이 강함을 믿지 아니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마르다의 신앙
첫째, 미래 부활은 믿으나 현재 지금 부활은 못믿음
24절에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날 부활에는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미래 지향적인 믿음은 좋으나 현재의 그리스도의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은 더욱 귀한 것입니다. 현재의 체험은 미래 체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26:19)에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로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라"라고 하셨습니다.
(요5:28-29)에 "무덤속에 있는자가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1) 마지막 날의 부활은 믿으면서 현재의 부활은 믿지 못하는 신앙의 착오자였습니다.
(2)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으면서도 그의 행하시는 권능의 표적을 믿지 못했습니다.
(3) 죽은지 나흘이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알면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둘째,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망했습니다.
27절에 바른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나 39절에는 벌써 냄새가 난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믿으려는 소원과 믿음의 실력이 서로 일치하지 못한 현상입니다.
(1) 마르다의 신앙이 진리를 깊이 배우지 못한 연고라고 생각됩니다. 성경 말씀은 신령한 감동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고 또한 배워서 알수가 있는데 그는 성경배우는 일에는 열의가 없었습니다(눅10:38-43).
(2) 마르다의 신앙이 체계적으로 정연하지 못한 원인은 신앙 연단이 부족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는 연단이 필요하기도 합니다(벧전1: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보배로 여기시는 고로 여러 가지로 연단 시키기를 좋아 하신다고(신32:10-12)하셨습니다. 이제 나사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연단이 되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마르다는 지금까지 신앙은 인본 주의적 신앙에 불과했습니다.
* 예수를 사랑함으로 대접을 하되 물질적인 음식 대접에만 치중하였습니다(40절)
* 예수를 귀빈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면서도 그 동생 마리아로 인하여 예수를 원망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40절).
* 많은 일로 염려하였으나 가장 좋은 말씀 듣는 신령한 일을 택하지 못했습니다(41-42절).
셋째, 그의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강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25-26절의 의미 하신 말씀을 그에게 기억시키면서 그의 믿음을 보강해 주시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보강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계시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계시된 말씀은 곧 성경으로 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은 성경 내용의 부족 때문에 오는 것은 아닙니다. 현대 사람들은 자기들의 믿음을 보강하기 위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새것만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의 말씀에 비추어 신앙을 수정 보강하면서 살아 갑시다. 5. 기적을 일으키신 방법
예수님은 나사로를 어떻게 살리시었나를 생각해 보면
첫째,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39-44).
이 명령은 인간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도 아니하고 믿지도 아니하고서 기적을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대로 만반의 준비가 다 된 곳에 주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1) 가나안의 혼인 잔치집의 기적은 하인들로 하여금 돌항아리에 아구까지 물을 채우도록 하시고 그후 다시 그 물을 연회석에 갖다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맛을 보고서 처음에 나온 포도주보다 좋았음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돌항아리에 물을 채우기 까지의 과정은 인간들이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 이상 물을 변하게 하시는 것은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2) 오병이어의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들이 먹을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이 가져 온 것은 한 사람이 한끼 먹을 양식밖에 못구했지만 5천명이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기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을 원하는자들은 먼저 순종하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둘째, 예수께서 기도하시므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41-42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하고 예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마 기도는 이미 나사로의 병보를 들었을때 하신 것이고 여기와서는 이미 응답이 된것을 감사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자가 배워야 할 것은 예수님처럼 사랑과 긍휼히 여기는 맘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시었습니다.
나사로는 죽어 이미 매장됐고 냄새까지 났지만 예수의 외치시는 음성에 일어났습니다. 이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자가 복된자인 것입니다. 이같은 음성을 들은 자들이 있나니 (눅7:14)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행여 속에서 듣고 살아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터니슨"은 시로써 이 기사를 "형제여 이 나흘 동안 어디에 있었나 죽은 것이 어떤 것인가를 말해 보면서 분명 찬양에 또 찬양을 덧붙였을 대답의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네. 어느 집에서나 이웃 사람들을 만났네. 거리는 기쁨조차 소리로 가들차 있었네. 근엄한 기분조차 지나고 있는 기쁨의 소리도 감람산의 자주 빛 이마,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살아난 사람을 보라 나머지는 알려지지 않고 남아 있다네 그는 그것을 말하지도 않았네 혹은 무엇인가가 말하지 못하게 했다네."라고 표현했습니다.
6. 예수님의 사랑하심으로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36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말은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앞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한 말입니다. 성경에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어도 울으셨다는 기록은 있습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와 예루살렘 앞에서 그 패망을 생각하시고 울으셨습니다. (눅19:41-42)"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무덤 앞에서 우신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비참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 가정의 슬픔을 내는 슬픔에 동참하시는 참으로 인간적인 심성의 발로로 이해되며 또한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대속주로서의 한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눈물 속에는 이러한 신적 사랑과 인간적 연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본것입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죽은자가 살아났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7. 예수안에 있는 생명은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니"했습니다. 나를 믿는 자라는 말과 살아서 나를 믿는 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신앙인을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요 죽어도 사는 생명입니다. 나사로란 한 청년의 생명은 예수를 믿는 자의 생명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었던 나사로의 생명이 부활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났을때 다시 살아날 수 있었고 주님의 음성과 접했을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겔37:1-10)의 말씀대로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아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여호와의 말씀이 접했을 때야 살아날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를 믿는 자는 주님의 피로 사신 생명이기에 가치있고 값비싼 생명이며 버릴수 없는 생명이 되므로 그의 생명은 죽으나 사나 살아있는 생명인 것입니다.
결 론 첫째, 예수님은 부활이시요
(1)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골1:18).
(2) 그는 성도들의 부활의 창시자입니다(요6:54).
(3) 이로써 나사로는 그의 능력으로 부활의 체험을 하였다고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1)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2) 그는 그의 백성의 주인이십니다. (3) 영광중에 있는 그의 생명은 신자의 보증이시며
(4) 그는 부활에 있어서 육체와 영혼의 생명이십니다(롬8:11)
셋째,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1) 예수를 믿을 때 성령에 의해 살아났으며(2) 주를 믿는자에게는 영생을 보장해 줍니다.(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안에서 죽은자들이 먼저 일어나고"했습니다.성도들은 나사로의 살아난 것을 부러워 하기 보다는 이제 우리는 다시 죽음이 없는 부활로 살아난다는 것을ale고 소망중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