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내기 준비가 끝난 황매산 기슭의 다랑논. 곡선미가 돋보이는 계단식 논은 도시인들에겐 정겹게 느껴지는 풍경이지만, 깊은 산골에서 사는 사람들은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기 위한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하늘이 울어도 결코 울지 않는다’는 지리산(1,915m)-. 봄볕 제법 짙어져 온갖 봄꽃들 다투어 피어나는 이 계절에 발걸음이 ‘산빛이 맑은 고을’ 산청(山淸)으로 향한 건 순전히 지리산이 가진 흡인력 때문이다. 물론 백두산에서 흘러온 정기로 빚어진 천왕봉이니, 그 천왕봉이 안고 있는 산청이란 고을의 봄 풍경도 매우 궁금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전서 산청을 가려면 한나절 이상 걸렸지만, 대전~진주 고속도로가 개통된 21세기에 산청으로 접근하는 건, 조금 과장하면 눈 깜빡할 사이다. 예전엔 서울서 아침에 출발해 산청서 점심을 먹는다는 건 비행기를 타고 진주를 거쳐오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을 출발한 지 4시간이 조금 안돼 찾아간 경호강변에서 점심으로 음미하는 어탕국수는 어느 때보다도 특별했다. 경호강에서 잡아올린 민물고기를 삶아낸 걸쭉한 국물에 만 국수로 산청의 첫맛을 느끼고 나면 강 건너에서 왕산(923m)이 부른다.
화계리에서 덕양전을 끼고 왕산 서북쪽 마을길로 들어가면 끝에 전(傳) 구형왕릉이 있다. 구형왕(仇衡王, ?-?)은 김해지역을 기반으로 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다. 금관가야의 제10대 왕(재위기간 521-532)인 구형왕이 532년 신라에 항복하면서 492년간 지속됐던 금관가야는 역사의 무대서 사라진다. 그러나 항복한 대가로 진골로 편입한 그 후손들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金庾信·595-673)이 구형왕의 증손자다.
▲ 1.천왕봉 부근서 바라본 지리산 전경. 5월 말 풍경이다. 2.지리산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진 성모상. 3.구형왕과 광비를 모신 덕양전. 구형왕은 나라를 신라에 양보했다 해서 양왕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아마 구형왕릉을 처음 보는 이라면 눈이 커지게 마련이다. 흙을 쌓아 만든 봉분이 아니라, 마치 피라미드처럼 돌로 층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좁은 계곡 안쪽 경사면에. 이런 독특한 형태와 위치 때문에 구형왕릉은 왕릉이 아니라 석탑이나 제단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또 산청에 전하는 전설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진 구형왕이 죽어가면서 병사들에게 돌로 덮어달라고 유언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구형왕은 나라가 망한 뒤에도 30여 년을 더 살았다고 하니 이래저래 구형왕릉은 역사의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다.
궁금증에 입안이 타는데, ‘류의태 약수터 1.84km’ 라는 입간판이 눈에 띈다. 류의태는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의 스승이다. 산길로 1.84km는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발길은 그곳으로 끌린다.
1천여 종의 약초가 자생하는 지리산 자락은 전통적으로 한방 약초의 보고였다. 그래서인지 산청에는 여느 지방에 비해 뛰어난 의술을 가진 명의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전한다. 류의태도 그 중 한 명이다. 류의태는 이 왕산 아래 화계 마을에서 의료활동을 했다.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의서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도 당시 산음이었던 산청에서 한의학의 거성을 스승으로 만나 의술이 일취월장하게 됐던 것이다.
물론 허준이 스승 류의태의 시신을 해부했다는 이야기는 픽션이고, 류의태라는 인물도 허준이 죽은 후 민간에 떠돌던 야담에서 끄집어낸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산청 사람들은 ‘허준 스승 류의태’의 실존을 굴뚝 같이 믿고 있다.
승용차로 임도를 10분쯤 오른 뒤 다시 오솔길을 10분쯤 걸으면 약수터가 보인다. 도중 수로왕이 김해에서 가끔 이곳에 들러 쉬었다는 수정궁터도 지난다. 너덜지대에서 솟는 샘물은 수량도 많고, 물맛도 특이하다. 여느 샘물처럼 맛이 끊기는 게 아니고, 약간 떫은 맛이 돌면서 계속 침샘을 자극한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약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도 이곳서 쉬면서 이 물을 마셨고, 구형왕도 회한의 말년을 보내면서 이 물을 음용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류의태도 약재를 달일 때는 반드시 이 물을 썼다고 한다.
이 약수에 딱히 어떤 이름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런데, 수로왕이나 구형왕과 연관해서 짓지 않고 ‘류의태 약수터’로 작명하게 된 것은 1999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텔레비전 드라마 ‘허준’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뛰어난 약효가 있다는 뜻이다. 1999년 이전의 낡은 표지판에는 그냥 ‘약수터’라고만 되어 있었다. 가져간 물병에 약수를 가득 담아 내려오니 저녁 노을이 덕양전(德讓殿)을 덮는 중이다.
▲ 1.대원사계곡의 맑은 계류. 골도 깊고 수량도 많은 편이라 여르멀이면 피서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2.거림계곡 학생수련원 부근의 벚꽃. 뒤로 흐르는 산줄기는 영신봉에서 뻗어내린 낙남정맥이다. 3.지리산 참숯굴에서 땀을 빼고 있는 사람들.
보금자리 찾아가는 새처럼 잠자리를 찾는데, 발길은 강한 자석에라도 끌리듯 지리산 천왕봉이 가까운 곳으로 향한다. 밤머리재 훌떡 넘어 대원사·내원사·거림계곡 모두 뒤로하고 중산리로 들어간다. 매표소 가장 가까이서 잠을 잔 뒤 어둑새벽에 길을 나서면 점심 전에 천왕봉까지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때는 ‘봄철 산불 입산금지 기간’. 봄가을로 늘 겪는 일인데도 까마귀 고기 먹은 것처럼 잠시 잊고 있었다.
젊었을 적에 열심히 지리산 드나들더니 결국 불혹을 넘긴 지난해에 중산리로 시집와 아담한 찻집을 차린 지인과 함께 하는 저녁식사. 그녀가 뒤꼍에서 뜯은 냉이, 취나물, 돌나물, 제비꽃 같은 봄나물이 반찬으로 올라온다. 앙증맞은 보랏빛 제비꽃을 통째로 입에 넣으니 향긋한 봄내음이 몸안으로 퍼져든다. 그런데, 다른 나물에겐 괜찮은데 왜 제비꽃에겐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걸까?
아침 햇살에 놀라 눈을 뜬다. 입안엔 간밤의 제비꽃 향이 아직도 맴도는 듯하다. 서둘러 문밖으로 나선다. 아래는 초록의 봄옷으로 치장했는데, 윗도리는 아직도 칙칙한 겨울옷을 입은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지척이다. 저 천왕봉 꼭대기엔 언제인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성모(聖母)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지금은 천왕봉에서 하산해 중산리 천왕사(天王寺)라는 자그마한 암자에 머물고 있는데, 그 사연이 구구절절 기구하다.
왜구들이 한반도 해안에서 난장판을 벌이던 고려 말기. 지리산 서쪽의 운봉 황산싸움(1380년)에서 이성계 군대에게 대패한 왜구들이 지리산으로 도망치면서 성모석상을 두 동강 냈다. 또 일제 때는 이 역사를 기억하는 일본인들이 천왕봉 근처에 있던 너와집 사당을 철거하고 산 밑으로 굴려버린 것을 산청의 한 처녀가 다시 올려 놓았다. 해방되던 해에는 누군가에게 보쌈 당했다가 올라온 적도 있었다.
그 후 다시 사당 안에 모셔져 기도객들의 소원을 잘 듣고 있었지만, 1972년 봄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마친 모 종교인들이 석상을 훼손한 이후로 실종됐다. 그러다 1986년 1월 혜범 스님이 몸통과 머리 부분을 따로 발견해 천왕사에 모시고 있다. 그렇지만 성모석상을 원래 있던 천왕봉으로 올리려 해도 또다시 해코지 당할 걱정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 관리사무소측도 성모석상의 상징성을 고려해 새 석상을 제작했지만, 여러 사정 때문에 천왕봉에 올리지 못하고, 결국 2000년 8월 중산리 주차장 계곡 건너편에 모셨다.
그런데, 이변이 생겼다. 아무래도 새 성모상이 진품의 권위를 따르지 못할 터인데, 기돗발이 제법 받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소원을 비는 사람들과 무속인들의 발길이 잦아진 것이다. 기도를 드리던 한 여인이 ‘천왕봉의 정기’ 때문이라고 귀띔한다.
이렇듯 신령스런 지리산은 산청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 겨레의 소중한 보물이지만, 20세기 중반엔 이데올로기 갈등이 빚은 비극의 무대로 바뀌기도 했다.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던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순천을 장악했다가 토벌대에 쫓겨 지리산에 숨어들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그 후 이곳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빨치산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경남지역까지 확대하면서 투쟁했다. 그러나 결국 1955년 5월 빨치산이 섬멸됐다는 공식발표가 있기까지 7년 동안 지리산 지역은 일체 접근이 금지된 반역의 땅이었다.
▲ 1.작년에 심은 편백나무 묘목을 손질하는 생초면 하촌리 주민달. 2.편백나무 묘목을 들고 한껏 웃고 있는 아주머니. 3.봄나들이 나온 가족이 경호강을 구경하고 있다. 4.몇 년 전 새로 조성한 성모상. 기돗발이 받는다는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2001년 중산리에 세워진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지리산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빨치산을 테마로 세운 전시관이다. 전시관에는 당시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았고, 야외 전시장엔 당시 투입된 전투장비서부터 비트와 관련 조형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중산리계곡과 내원계곡 등에는 빨치산루트 체험코스도 개발해 놓았다. 경상남도가 산청·함양·하동군과 함께 조성한 이른바 ‘지리산 공비토벌 관광사업’이다.
그런데 이 사업은 전시관의 전시 내용의 객관성이 떨어지고, 등산로 주변의 빨치산 아지트나 안내판 등이 산을 훼손한다 해서 비난을 받고 있다. 중산리의 한 주민은 전시관 이름도 평화나 통일이 들어가게 바꾸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도 보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집채만한 바위가 맑은 계류와 조화를 이루는 거림계곡의 봄꽃을 감상하고, 최치원도 반했다는 고운동계곡에서 낙남정맥 산줄기를 바라본 뒤 춘흥에 겨워 내려서면 시천면 소재지인 사리다. 이곳의 옛 이름은 덕산(德山). 천왕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그 산줄기 사이로 흘러내린 맑은 계류가 모여드는 이곳에서 옷소매를 붙드는 이가 있으니 바로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이다.
옛 기억을 되살려 남명의 ‘강호한정가’를 한 번 읊어본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예 듣고 이제 보니 /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 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여긴가 하노라’
지리산의 다른 이름인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흘러온 정기가 뭉친 산이라는 뜻이고, 양단수는 대원사·내원사계곡 등 삼장면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와 중산리·거림계곡 등 시천면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가 만나는 두물머리, 바로 덕산을 말한다. 남명은 바로 이곳을 학문 탐구의 이상향으로 여기고 말년을 보냈는데, 그 주변으로 덕천서원(德川書院), 산천재(山天齋), 남명 묘소 등 남명과 관련된 유적지가 남아있다.
남명이 심었다는 400살 된 커다란 은행나무 그림자를 밟고 들어선 덕천서원. 마루에 앉아 남명을 생각한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도학자인 남명은 동시대를 살았던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문을 이루었음에도 후대의 정치상황으로 인해 크게 부각되지 못했다. 이런저런 벼슬을 수도 없이 물리친 남명은 61세에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와 세상을 뜨기까지 10년간 자신의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남명은 ‘경(敬)’으로서 마음의 중심을 잡고, ‘의(義)’로서 행동을 곧게 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했던 순수 학자요, 고고한 선비였다. 덕천서원 앞 세심정에서 지리산 대나무처럼 올곧은 남명의 정신을 기리고, 덕천강 물줄기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남명이 덕산으로 오면서 지었다는 산천재가 있다.
앞뜰의 늙은 매화 꽃잎 떨군 산천재 주련에 걸린 남명의 시구(詩句)대로 이 땅 봄산 어딘들 꽃이 피지 않으랴만, 산 높고 골 깊은 지리산은 한 굽이 돌 때마다 계절이 다르다. 덕천강 근처의 진달래꽃과 벚꽃은 벌써 지고 철쭉이 피어났는데, 계곡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서면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산벚꽃과 진달래꽃이 멋진 수채화를 그린다. 또 계곡 입구는 늦봄이지만 끝은 잔설이 남아있는 초봄이다. 천왕봉 근처의 때깔 고운 털진달래는 5월 말에야 피기 시작한다.
▲ 1.산청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경호강은 산청의 가장 큰 젖줄이다. 이 강을 경계로 산청은 동부와 서부로 나뉜다. 2.봄나들이 나온 염소가족. 3.비 그친 뒤 오후의 산청장. 인근 산기슭에서 채취한 산나물이나 싱싱한 야채를 싸게 구할 수 있다. 4.웅석봉 남쪽 청계계곡에서 쑥을 캐고 있는 아주머니. 매년 봄만 되면 진주서 공기 맑고 물 깨끗한 이곳으로 쑥을 캐러 온다고 한다.
이렇듯 아랫마을과 윗마을의 계절이 다르다 해도 산청 주민들은 4월 중순에 들어서면 양지쪽에서 냉이, 취나물, 씀바귀 같은 나물을 캐고, 두릅을 따고, 가파른 경사의 밤나무밭에서는 고사리도 뜯으며 봄맞이를 한다. 덕천서원 근처 국동 마을 뒷산의 밤나무밭으로 끌리는 발길. 서투른 솜씨로 고사리 몇 개 뜯어 아주머니에게 내밀자 웃으며 받아준다. 봄볕 쏟아지는 언덕에서 함께 고사리 꺾으며 물 좋고 공기 맑은 곳에서 별 걱정 없이 산다는 아주머니의 자랑을 엿듣는다. 저 멀리 발밑으론 남명이 사랑해마지 않았던 덕천강 양단수가 내려보인다.
떠날 무렵 아주머니는 데쳐 먹으라며 두릅을 한 움큼 쥐어준다. 몇 번을 사양했으나 서울 아들 생각난다며 막무가내다. 사양도 지나치면 결례라 했다. 꾸벅 인사하고 내려서는데 벌써 입가엔 군침이 돈다. 어제는 냉이와 제비꽃, 오늘은 두릅. 봄날 산청을 찾아온 보람이 있다.
이제 지리산 자락의 절집과 계곡을 둘러볼 차례다. 기록에 의하면 한때 400여 암자가 있었다는 지리산 자락엔 지금도 큰 절집만 해도 천은사 화엄사 등 10여 개가 넘는다. 그중 천왕봉 가는 길에 자리한 법계사, 비구니절집 대원사, 소박한 내원사, 그리고 경호강 동쪽 신등면의 율곡사 등이 산청을 대표하는 절집이다.
삼장면 소재지인 대포리에서 냇물을 건너 대포 마을 솔숲을 끼고 오르면 내원사다. 국수봉에서 발원한 내원계곡과 써리봉에서 발원한 장당계곡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자리한 내원사는 아름다운 물줄기를 건너는 즐거움이 있다. 일주문도 불이문도 없지만, 장당계곡쪽으로 에돌아 내놓은 반야교는 넉넉함이 돋보인다.
내원사는 신라 말 무염(無染·801-888)이 덕산사(德山寺)라고 창건했다. 이후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고 1959년 중건한 뒤 오늘에 이른다. 당우들은 한국전쟁 후에 지은 건물임에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건 아마 내원사삼층석탑(보물 제1113호) 덕분인 듯싶다. 화려하진 않아도 소박한 당우와 잘 어울린다. 비로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021호)도 이 절집의 위상을 높여주는 데 한몫을 한다.
삼층석탑 곁의 목련이 말없이 하얀 꽃잎만 뚝뚝 떨구고 있는 내원사는 언제 들러도 한적하다. 깨달음을 얻게 하는 해조음(海潮音) 닮은 계류 소리를 들으며 하룻밤 머물고 싶은 그런 절집이다.
내
▲ 일운치가 넘치는 남사 고가마을 흙돌담장 골목길(위). 소를 끌고 장으로 가고 있는 노인(아래).
원사까지 들어왔다면 안내원 마을까지 들어가 보자. 자그마한 암자들이 10여 개나 들어서 있는 계곡 끝에 안내원 마을이 있다. 이곳의 곶감과 복조리는 유명하다. 마을 사람들은 여느 계절엔 산나물과 약초를 캐지만, 늦가을엔 곶감을 깎아 널고, 겨울엔 대나무를 쪼개 복조리를 만드는 부업을 하는데, 이게 제법 인기가 있어 일만 하면 얼마든지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겨우내 눈에 갇힌 채 만든 복조리 한 쌍을 구해보려 했지만, 사람 그림자는 뵈지 않는다. 모두 봄나물을 뜯으러 간 것일까.
바람이 댓잎을 스친다. 봄날의 고요함이 평화롭게 느껴지는 마을이다. 그러나 이 마을은 빨치산 투쟁의 종지부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1963년 11월 이곳 구들장아지트에서 숨어 지내던 빨치산 1명이 사살되고 정순덕이라는 여자 대원 1명이 총상을 입고 생포되면서 지리산에서 숨어 지내던 빨치산은 결국 최후를 맞았다. 안내원 마을에 ‘구들장 아지트’를 알리는 표지판을 세워놓았지만, 옛 가옥이 모두 철거된 지금은 어디서도 그 흔적을 살필 수 없다.
내원계곡을 빠져나와 대원사계곡의 맑은 계류를 거슬러 오른다. 몸을 푼 맑은 계류가엔 연분홍 진달래가 활짝 피었고, 키 큰 소나무도 겨울옷을 벗어 던지고 해맑은 초록의 솔잎을 키운다. 비구니절집인 대원사 대웅전에서 부처님께 삼 배 올리고, 계속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폐교된 유평분교와 삼거리 지나고 새재 마을까지 이어지는 길 양쪽엔 사과나무들이 많이 심어져 있다. 당도가 매우 높아 산청 꿀사과로 불리는 지리산 ‘유평사과’다. 곧 사과꽃이 피려는지 꽃눈이 제법 부풀어있다.
오늘밤은 어디서 눈 붙일까 고민하다 웅석봉 남쪽 단속사터가 있는 청계계곡으로 들어선다. 이튿날 새벽, 빗소리에 눈을 뜬다. 창밖을 내다보며 빗소리를 듣다보니 어느덧 사위가 뿌옇게 밝아온다. 봄비는 깨어나라는 속삭임이다. 여행 중 비를 만나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지만, 작은 몸 하나 가릴 수 있는 몇 천 원짜리 우산 하나만 있으면 문제될 것이 없다.
단속사터-. 언제나 정갈하게 서있는 동·서 삼층석탑이 빗속에서도 의연하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쯤에 창건된 단속사(斷俗寺)는 경내를 한 바퀴 돌고나면 미투리가 다 떨어질 정도의 거찰이었다고 한다. 절집 입구라는 광제암문(廣濟岩門)이 동서 삼층석탑과 3km쯤 떨어져 있으니 아마 지리산 부근의 절집 중 빠지지 않는 규모였을 것이다. 하긴 금당 뒷벽에 경덕왕 진상(眞想)도 그렸다 하니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단속사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또 진흥왕 때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도 있었다고 전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황매산 계단식 논(위). 고려 말 강회백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면서 심었다는 정당매(아래).
단속사 삼층석탑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면 마을 입구에 고려 말 강회백(姜淮佰)이 단속사에서 공부하면서 심었다는 수령 600년 이상 된 매화나무가 있다. 뒤에 그가 정당문학 벼슬에 오르자 ‘정당매(政堂梅)’로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목을 기념하는 비각도 있다. 그로부터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후손들이 가꾸어 그의 정신을 기리며 보호하고 있다. 늙은 매화 가지엔 매화꽃 대신 봄비가 아롱아롱 맺혀있다.
단속사터를 빠져나와 봄비에 젖은 남사 고가마을 흙돌담장 골목길을 걸으며 조선을 느낀 다음, 단성 나들목 근처에 자리한 성철(性澈·1912-1993) 스님 생가인 겁외사로 들어선다. 겁외사(劫外寺)는 ‘시간과 공간 밖에 있는 절’이란 뜻으로 성철 스님이 생전에 부산의 한 거처에 붙였던 이름이다. 벽해루를 지나면 정면에 스님의 동상(사리탑)이 서 있고, 동상 뒤쪽의 혜근문을 통해 스님의 생가와 기념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 바로 아래 자리한 탓에 들려오는 소음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금칠한 스님의 동상 등을 본 사람들은 당혹해한다.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인 성철 스님은 고된 수행자의 모습과 철저한 무소유의 자세 때문에 불교계는 물론이요, 다른 종교인들도 존경해마지 않았다. 포영당에 전시된 스님의 누더기 두루마기가 무색하다는 생각을 하며 근처의 면화시배지로 간다.
목화 하면 떠오르는 어릴 적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때 고향에 가면 그곳 친구들이 따서 주던 열매의 달짝지근한 맛이 떠오른다. 당시엔 열매가 익어 터졌을 때 생기는 보송보송한 솜덩어리가 목화인 줄 알았고, 모두들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정확하게는 8월 말에 하얀 꽃을 피운 다음 점차 붉어지는 꽃을 목화라 하고, 이 꽃이 지고 난 뒤 열리는 진녹색의 열매는 다래, 그리고 다래가 익어 터졌을 때 생기는 솜덩어리는 면화(棉花)라고 따로 지칭한다.
고려의 멸망이 가까워진 1369년(공민왕 18년), 원나라로 귀양 갔던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1331-1400)은 돌아올 때 목화씨앗 10여 개를 붓대롱에 넣어와 이곳에서 처음으로 심었다. 재배에는 성공했으나 금방 면을 생산한 건 아니다. 어느 날 찾아온 원나라 승려 홍원이 자기 나라에 있는 목화를 보고 매우 좋아했다. 마침 그는 직조술을 알고 있었고,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이 그에게 기술을 배워서 물레를 만드는 데 성공, 결국 무명 한 필을 만들어냈다.
▲ 목화의 열매가 익어 벌어지면 이렇게 포근한 솜이 생겨난다.
또, 이와는 다르게 실 잣는 기계를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가 발명하고, 문영(文英)이 베를 짜는 법을 발명하여 명칭이 ‘물레’, ‘무명베’가 됐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그 후 해마다 씨가 불어 목화는 10년도 채 못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조선 태종 때는 일반 백성들도 두루 무명옷을 입을 만큼 면업은 발전했다.
봄비 내리는 목화밭. 아직 씨를 뿌리기 전인지 지난 해 수확이 끝난 앙상한 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땅바닥엔 쥐똥 같은 씨앗이 몇 개 들어있는 면화들이 가끔 보인다. 비에 푹 젖은 솜을 헤쳐내고 조심스레 씨앗을 갈무리한다. 이 작은 씨앗 몇 개가 불과 30여 년만에 온 백성들의 겨울을 따뜻하게 해주었다니…. 선생의 묘를 가보지 않을 수 없다. 경호강 건너 신안면 도천서원(道川書院) 옆산에 있는 선생의 묘는 잘 가꾸어져 있었다. 오르는 길의 솔숲도 좋고, 멀리 바라보이는 경호강과 산줄기 풍광도 괜찮았다.
선생의 묘를 벗어날 무렵 비가 잠시 그친다. 서둘러 산청장으로 간다. 어제 단성장을 들렀을 땐 파장 무렵이라 별로 구경을 못했다. 산청장을 두어 바퀴 돌면서 맘씨 좋은 할머니에게 취나물도 사고, 정육점에서 흑돼지 삼겹살도 산 다음, 심거나루를 통해 다시 청계계곡으로 잠자리를 찾아간다.
봄비 그친 산하는 더 없이 맑다. 웅석봉 산기슭엔 얼레지가 가득하다. 이 봄에 아름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만, 얼레지는 볼 때마다 눈길을 붙든다. 치마 같은 진분홍빛 꽃잎을 뒤로 활짝 젖히고 매끈한 다리를 닮은 수술과 암술을 길게 뻗어내 마치 봄바람 난 처녀처럼 당돌한 꽃. ‘질투’라는 꽃말대로 봄조차 시샘할 만큼 아름답다.
공기 좋고 물 깨끗한 곳에서 쑥을 캐 쑥떡을 해먹기 위해 매년 봄마다 이곳을 찾는다는 진주에 사는 아주머니, 강변의 자그마한 감나무밭에서 늦은 가지치기를 하는 주민, 올해 태어난 새끼들과 봄볕을 쬐고 있는 흑염소가족도 정겹다.
경호강을 건넌다. 산청은 경호강으로 확연히 동서로 나뉜다. 산청 지방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마근담 줄다리기’가 전해오는데, 이 경호강을 경계로 동·서군으로 나뉘어 며칠 동안 줄다리기를 한다. 여기서 승리하면 세금감량을 받고, 패한 마을은 그해 조세를 부담했다고 한다. 강을 경계로 해서 벌이는 줄다리기가 참 흥미롭다.
생비량면 도전리에서 찔래순 꺾어먹으며 마애불상군(경남 유형문화재 제209호)을 둘러보고, 1006번 지방도를 타고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신등면을 들어서자마자 큰 칼 옆에 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반긴다. 그 옆에는 백의종군추모탑도 보인다. 일본의 계략에 말려 수군통제사 직에서 해임된 충무공은 28일간의 옥고를 치른 후 1597년 4월3일부터 8월3일까지 4개월이란 적지 않은 기간동안 백의종군하게 됐다. 그중 5월26일부터 대부분을 경남 곳곳에서 지냈는데, 1997년 경남교육청이 교육 목적으로 백의종군 순례과정을 개발하면서 이곳에 동상과 추모탑을 세운 것이다.
백의종군추모탑이 있는 신등면 단계리는 전통 한옥이 잘 가꿔져 있는 마을이다. 전통민가와 상류층 주택 요소가 적절히 변형·결합된 경남 서부 중류층 농가의 대표적인 살림집으로, 원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 중기에 지은 율곡사(栗谷寺) 대웅전(보물 제374호)은 보수공사중이라 보지 못하고, 올라가는 산길의 벚나무 가로수에서 휘날리는 벚꽃 향내만 실컷 맡다가 돌아내려 온다.
길은 황매산으로 이어진다. 차황면 신기리의 두무재 고갯마루를 넘자 황매산 아래의 법평리 농촌 풍경이 반긴다. 법평천 주변에 펼쳐진 계단식 논의 곡선미가 일품이다. 계단식 논은 도시인들에겐 정겹게 느껴지는 풍경이지만,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기 위해 노력해온 산골 사람들에겐 냉혹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산간마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좁은 협곡을 갈아엎어 논배미를 만들었다. 경사에 따라, 바위나 나무 같은 장애물을 따라 논두렁의 모양도 바뀌는데, 그 자연스런 곡선미는 도시인들을 매료시키는 아름다움이 있다.
지리산 자락에도 이런 다랑논이 많지만, 워낙 좁고 숲이 짙어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포인트 찾기가 쉽지 않다. 또 웬만한 데는 이미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다랑논이 많이 사라진 것도 원인이다. 반면 이 황매산 다랑논은 방해받지 않고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권이 확보되어 있고, 눈에 걸리는 큰 건물도 없으니 감상하기에는 더 없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다랑논의 이름도 재미있다. 허공에 떠있는 것 같다 해서 허공배미, 우산으로 가릴 수 있다 해서 우산배미, 손바닥만하다 해서 손배미, 모내기를 다 끝낸 줄 알고 밀짚모자를 들었더니 그 안에 또 들어있는 모자배미 등등…. 한 뼘의 땅이라도 더 건져 보려한 절박함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우아한 곡선과 이렇게 해학적인 지명을 낳았으니, 산골 사람들의 여유라면 여유인 셈이다.
산골 마을의 정서를 닮은 듯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윗돌 에돌아가는 논두렁에 노란 산괴불주머니가 피었고, 그 옆엔 하얀 꽃을 피운 조팝나무 가지가 봄바람에 낭창낭창 흔들린다. 그 한쪽에는 산 맑은 고을, 산청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농부들이 무심한 듯 봄농사 준비에 한창이다.
산청, 어떤 곳인가
경상남도 서쪽에 자리한 산청군(山淸郡)은 백두대간의 정기가 마무리되는 지리산 자락에 깃들어 있는 고을이다. 동쪽으로 합천·의령군, 북쪽으로 거창군, 남쪽으로 진주시·하동군, 서쪽으로 함양군에 접한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쪽의 중봉, 하봉으로 뻗은 지맥과 영신봉에서 뻗어내린 낙남정맥이 함양·하동군과 서쪽 경계를 이루고, 동쪽은 백두대간의 남덕유산에서 이어진 ‘거창기맥’의 황매산이 합천군과 분수령을 이루어 분지를 형성한다. 산청의 가장 큰 젖줄은 군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경호강(鏡湖江)이다. 동쪽은 황매산에서 발원해 차황·신등·신안·생비량면을 적시고 흐르는 양천강이 단성에서 경호강에 합류하고, 또 서쪽은 지리산의 여러 계곡의 물을 받아들인 덕천강이 진양호에서 남강에 몸을 섞는다. 이렇듯 3개 강 유역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관개가 편리하며 토양이 비옥해 농경에 적합하나 넓은 평야는 적은 편이다.
산청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일부였고, 생초면의 가야고분군과 금서면의 전(傳) 구형왕릉 등의 유적에서 보듯 가야 계열의 왕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지품천현(知品川縣)이었으나 757년(신라 경덕왕 10년)에 산음현(山陰縣)으로 개칭됐다. 1018년(고려 현종 9년) 산음현과 단계현(丹溪縣)이 합천(陜川)에 복속됐고, 1390년(공양왕 2년) 산음현에 감무를 두고 단계를 합천에서 강성(江城)에 이속시켰다. 1599년(선조 32년) 산음현에 통합됐다가 1613년(광해군 5년) 단성현이 분리됐다.
1767년(영조 43년) 산음현이 산청현(山淸縣)으로 개칭되면서 비로소 산청이란 지명이 나타난다. 1895년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晋州府) 산청군으로 바뀌었다가 1906년(광무 10년) 진주의 삼장·시천·금만·백곡·사원·파지의 6개면이 산청군에 속했고, 1914년 단성군이 산청군에 통합됐다. 2003년 현재 산청읍과 차황·오부·생초·금서·삼장·시천·단성·신안·생비량·신등면의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청군의 경호강을 따르는 3번 국도, 그리고 차황면에서 산청 읍내를 거쳐 지리산의 삼장·시천면을 지나는 59번 국도가 산청읍을 중심으로 ×자 형태를 이룬다. 또 의령에서 단성면 소재지를 거쳐 중산리계곡으로 연결된 20번 국도는 산청군 남쪽을 동서로 잇는 역할을 한다. 2001년 12월 대전~진주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수도권에서도 3~4시간이면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산청은 조선시대 때 교육기관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고려 인종 때 창건되어 1752년(조선 영조 28년) 중건된 단성향교와 1440년(세종 22년) 창건된 산청향교가 있고, 1561년(명종 16년) 건립한 덕천서원과 1626년(인조 4년)에 창건된 서계서원이 있다. 그 밖에도 청곡서원·문산서원·평천서원 등의 서원과 크고 작은 서당과 사숙이 있다. 또 남사 전통마을, 신등 전통마을 등 영남의 양반과 중류층 가옥 구조를 살펴볼 수 있는 전통마을이 있다.
산청에 탯줄을 묻었거나 인연을 맺은 인물 중에 이름을 날린 사람은 고려 말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삼우당 문익점, 퇴계 이황과 견줄 만큼 독특한 학풍을 이룩한 남명 조식, 그리고 최근엔 성철 스님이 우뚝 서있다. 단계면에는 문익점이 목화씨를 처음 재배한 목면시배유지와 성철 스님 생가인 겁외사 등이 있고, 시천면에는 덕천서원·산천재·조식 묘소 등 조식 유적이 남아있다.
낙남정맥
낙동강 남쪽 울타리 역할을 하는 전통 산줄기. 지리산 영신봉(靈神峰·1,651m)에서 시작한 낙남정맥(洛南正脈)은 영남 남부지방을 동남쪽으로 관통하다 옥산(614m)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곡산(543m), 여항산(744m), 무학산(763m), 구룡산(434m), 대암산(655m)을 거쳐 낙동강 하구를 지키는 동신어산(460m)까지 약 226km에 달한다. 이 산줄기의 남쪽에는 대체로 하동, 사천, 삼천포, 고성, 마산, 창원, 김해 등 영남 남해안지방이 위치한다. 이 산줄기를 기준으로 영남 남부의 해안·내륙의 문화를 구분하기도 한다.
종주에 필요한 1:50,000 지형도는 운봉·산청·하동·곤양·진주·삼천포·함안·충무·마산·창원·김해·밀양.
산청군 금서면 왕산 기슭에 있는 전(傳) 구형왕릉(사적 제214호)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오고 있다. 금관가야 제10대 왕(재위 521-532)인 구형왕(仇衡王·?-?)은 532년(신라 법흥왕 19년) 신라에 항복하여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락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협곡의 경사진 언덕에 잡석으로 층단을 이루고 있는 이 무덤은 가야뿐만이 아니고, 한반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묘제와는 다르다. 층단은 모두 7개, 총높이 7.15m며, 꼭대기에 타원형의 봉분이 마련되었으나 일반 봉토분과는 전혀 다르다. 외형으로만 본다면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앞면 넷째 단에 작은 감실(폭 40cm, 높이 40cm, 깊이 68cm)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 용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왕릉이 아니라 석탑 또는 제단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무덤 앞의 비석, 돌짐승 등 석물들은 모두 후대에 김해 김씨 후손들이 만들어 세운 것으로 왕릉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되지 않는다.
류의태 약수터
구형왕릉 바로 앞 갈림길에서 임도를 따라 2km쯤 오른 뒤 오솔길을 200m쯤 걸어올라가면 너덜지대에서 솟아나는 시원한 샘물을 만날 수 있다. 수량은 제법 많은 편인데, 날씨가 가물거나 비가 와도 항상 일정하다.
산음현, 즉 산청 금서면 화계리는 류의태가 의술활동을 펴던 곳으로서 그는 약재를 달일 때 반드시 이 약수를 썼다고 전한다. 병명을 알 수 없던 병도 이 물을 이용하면 치료가 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도 이 약수는 잘 낫지 않는 위장병, 피부병 등에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왕산을 찾은 등산객은 물론이고, 멀리서도 물을 받아가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이 약수는 약효가 뛰어난 물로 꼽히는 냉천이다.
지리산 성모상
오래 전부터 지리산 천왕봉에 모셔온 성모상(聖母像)은 높이가 1.2m, 너비 50cm의 아담한 체구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 하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도선국사에게 자신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신 것이라고 한다. 또 성모상이 석가모니의 생모인 마야부인이라고도 하며, 무속에선 불로장수와 만사형통을 관장한다는 마고 여신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건국신화와 불교와 무속신앙이 뒤섞여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은 성모상에서, 우리 민족이 지리산을 얼마나 숭상했나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현재 중산리 천왕사라는 절에 세워져 있다. 음력 3월 7일 성모상을 위한 천왕제를 지내고 있다.
내원사
삼장면 대포리 장당계곡과 내원계곡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내원사(內院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신라 말 무염(無染, 801-888)이 덕산사(德山寺)로 창건했지만, 이후 언제 폐사 되었는지 자세히 전하지 않고, 1959년 홍원경 주지가 중건한 뒤 꾸준히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경내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1021호)과 내원사삼층석탑(보물 제1113호) 두 점의 보물이 있다.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내원사에서 30리쯤 떨어진 보선암 폐사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석불 대좌 중대석에서 발굴된 사리함 표면에 적힌 명문(銘文)에 따르면, 766년) 776년(신라 혜공왕 2)에 한 화랑이 요절하자 그의 부모가 불상을 제작하였다는 내용 등 불상 조성 연대와 동기 등이 적혀있다. 제작 기법, 사리함 뚜껑 처리 방식 등 미술사적 측면과 불교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 사리함은 1986년 영태이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라는 명칭으로 국보(제 233호)로 지정되어 현재 부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원사삼층석탑은 신라시대에 건립한 일반형 삼층석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얹었는데, 상·하층 기단석에는 양 우주와 1탱주가 모각됐다. 탑신부는 신·개 각 1석씩 조성하였는데 각층 탑신에는 우주가 모각되고 옥개받침은 4단씩이다. 1950년경 도굴꾼에 의하여 파괴된 것을 1961년 내원사 주지 홍진식 스님이 복원했으나 맨 위쪽 옥개석이 많이 부서지고 상륜부는 없다.
대원사
지리산의 동쪽 삼장면 유평리에 있는 대원사(大源寺)는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다. 548년(진흥왕 9년)에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해 평원사(平原寺)라 했는데, 그 후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1천여 년 동안 폐사됐던 것을 1685년에 운권 선사가 옛 터에 사찰을 건립해 대원암이라 했다. 1890년(고종 27년)에 무너진 암자를 중건하면서 대원사라 했고, 큰스님을 초대해 불교를 공부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중창하면서 비구니 선원을 개설했다. 건물로는 대웅전·원통보전·응향각·산왕각·봉익루 등이 있고, 절 뒤쪽의 사리전(舍利殿)은 비구니라면 한번쯤 거쳐 가는 곳이다. 그 앞에 자리한 대원사다층석탑(보물 제1112호)은 조선시대 때 작품이다.
단속사지
단성면 운리 웅석봉 남쪽 계곡에 자리했던 단속사(斷俗寺)는 통일신라 이후 고승을 많이 배출해 1,000여 년의 법통을 이어왔는데, 1568년(선조 1년) 유생들이 불상과 경판 등을 파괴하고, 이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후 재건됐으나 현재는 폐사됐다.
보물로 지정된 단속사지 동삼층석탑(보물 제72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이 있고,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남아있다. 동·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이 같은 쌍탑 가람형식이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두 가지 설이 전한다. 748년(경덕왕 7년) 왕의 총애를 받던 이준(李俊)이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였다는 설과, 763년(경덕왕 22년)에 신충(信忠)이 벼슬에서 떠나 지리산에 들어가 삭발하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설이다.
김일손(金馹孫)이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천왕봉을 등반하고 쓴 <두류기행(頭流紀行)>에서 단속사를 ‘절이 황폐하여 중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 수백 칸이나 되고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가 있는데 하나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 기이하기만 했다’고 적고 있다.
남명 조식 유적지
1501년(연산군 7) 지금의 합천군에서 출생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이황과 함께 당시 영남유학의 쌍벽을 이루었던 대학자로 실천적인 성리학을 중시하였다. 모든 벼슬을 물리치고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인 덕산(德山)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다가 1572년(선조 5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덕산 부근에 덕천서원(德川書院), 산천재(山天齋), 남명 묘소 등의 유적지가 있다.
덕천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89호) 1576년(선조 9) 남명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강학하던 자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609년(광해군 1)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복원되었다. 경의당(敬義堂)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생들의 회합 및 토론장소로 사용되던 곳으로 ‘德川書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그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려있는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덕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의 첫 정일(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매년 양력 8월 18일에는 남명의 탄생을 기념하는 남명제가 열린다. 덕천서원 앞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은 1582년(선조 15)에 세웠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1561년(명종 16)에 세웠고, 1818년(순조 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산천재 맞은 편 언덕으로 50m쯤 오른 곳에 남명 묘소가 있다.
남사 고가마을
지리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은 단성면 남사마을은 분위기가 정겹고 고풍스런 맛이 넘치는 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남사천과 어우러진 모습은 풍수지리상 반달 모양. 그래서 달이 차지 않도록 동네 가운데는 농지로 두었고 동네 양끝에 주택을 배치했다. 둥그렇게 굽이쳐 흐르는 냇가와 마을이 잘 어울린다.
남사 마을은 500년쯤 전 진양 하씨의 이주로 마을이 시작됐다. 대개 오래된 마을이 한 성씨로 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이곳은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 전주 최씨, 연일 정씨, 재령 이씨 등 여러 성씨가 이주해 와서 살고 있다. 비록 많은 집들이 세월에 따라 개조되어 원래 제 모습을 잃어가고, 인적을 찾기 어려운 집도 있긴 하지만, 18~20세기 초 사이에 지어진 한옥 80여 채가 남아 있다.
화적의 칼을 자기 몸으로 막아 아버지를 구한 영모당 이윤현의 효성을 기린 사효제가 있고, 마을의 길흉을 예견한다는 하씨 가옥의 감나무도 옛날 이야기를 전해주는 듯하여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연일 정씨 가옥, 선산 최씨 가옥은 남부 지방 양반가옥 형식을 보여주는데, 이상택 가옥은 200년이 넘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안채가 잘 보존되어 있다.
성철 스님 생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진주 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 스님 생가와 겁외사(劫外寺)가 있다. 스님의 생가터에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관과 동상, 그리고 겁외사라는 사찰을 창건해 2001년 문을 열었다.
성철 스님 생가는 겁외사 입구인 벽해루(碧海樓)를 거쳐 들어가게 되어 있다. 벽해루를 지나면 정면에 스님의 동상(사리탑)이 서 있고, 동상 좌측으로 대웅전이 있다. 스님 동상 뒤쪽의 혜근문(惠根門)을 통해 스님의 생가와 기념관으로 들어갈 수 있다.
혜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스님의 생가를 복원해 놓은 율은고거(栗隱古居)이고, 우측 건물은 사랑채, 좌측 건물은 스님의 기념관인 포영당(泡影堂)이다. 포영당에는 스님이 입으셨던 누더기 두루마기와 덧버선 등의 유품과 유필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등 성철 스님이 26살로 절에 들어가기 전에 속세에서 읽었다고 기록한 목록들도 눈에 띈다.
목면시배지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목면시배지는 고려 말 공민왕 때 문익점이 면화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목면시배유지 전시관 면적은 15,295㎡, 전시관의 제1전시실에는 목화에서 무명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면화의 역사, 베틀, 물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무명으로 짠 각종 전통 의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에는 문익점의 목화씨가 자랐던 300여 평의 목화밭이 있다. 전시실 옆 건물에선 전통 베짜기 및 천연염색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준다. 염색을 시연하는 건물 앞에는 문익점의 효를 높이 평가한 고려 우왕이 내린 효자비가 있다. 1965년 이 일대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됐다.
신안면 신안리에 있는 도천서원(경상남도 유형문호재 제 237호)은 문익점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1461년(세조 7년)에 나라에서 처음 세웠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중건됐으며, 1787년(정조 11년)에 도천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891년(고종 28년)에 단성 사림들에 의하여 노산정사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사당인 삼우사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했다. 이 서원 옆산으로 100m쯤 올라간 곳에 문익점 묘소가 있다
도전리 마애불상군
생비량면 도전리 어은마 을 입구 20번 국도변에 있는 마애불상군(경남 유형문화재 제209호)은 29구나 되는 대량의 불상군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희귀한 예로 꼽힌다. 이 불상들은 바위절벽에 4단으로 줄을 지어 새겨져 있는데, 맨 아래 1층 14구, 2층 9구, 3층 3구, 4층 3구가 배치돼 있으며, 크기는 대부분 30cm 안팎이다.
여러 가지 형식으로 새겨졌지만 대개 비슷해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소발의 머리칼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머리는 둥글고 단아하지만 이목구비가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정하며 통견의 옷주름이 불상의 크기에 비해 다소 많은 편인데, 나말여초, 특히 고려시대의 불상 특징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다.
단정한 형태의 불상군은 불상의 옷 입음새나 수인 등 세부 표현에서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수인의 경우 선정인·시무외인·보주를 든 손 모양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불상 옆에 새겨진 ‘□□先生’이란 글귀가 흥미를 끌지만, 아직 밝혀진 바는 없다.
신등 한옥단지
산청 동쪽의 신등면 소재지를 돌아가면 한옥과 흙돌담길이 눈길을 끈다. 신등면 한옥단지는 단성면 남사 마을에 비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권씨 고가와 박씨 고가가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박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19호)는 5동.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와 곳간채가 어우러져 ㅁ자형 평면을 갖춘 집이다. 안채는 1918년에 지었고 그 외 가옥은 1940년경에 지은 것으로, 앞면 5칸 반 옆면 2칸 규모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대청마루 북쪽면은 틔우지 않고 도장방을 만들어 물품을 보관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동향집인데 1칸 마루를 넓게 처리하고 2개의 온돌방 앞에 툇마루를 두었다. 안마당의 곳간채는 가운데 기둥 하나와 흙벽이 지붕을 지지하는 구조로서, 민가의 원형에서 발전한 것으로 주목된다. 경상남도 서부 중류 농가의 대표적인 살림집으로, 원래 모습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다.
모두 7동으로 이루어진 권씨 고가(문화재자료 제120호)는 안채, 사랑채, 곳간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가운데 있는 대청을 북쪽으로 트지 않고 마루방으로 만든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는 앞면 4칸 옆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이고, 곳간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크기이다. 문간채는 앞면 4칸 옆면 1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리산 한방약초 축제
지리산 기슭의 산청은 전통적으로 1천여 종의 약초가 자생하는 한방 약초의 보고로 여겨졌다. <동의보감>의 저자인 허준도 당시 산음이었던 산청에서 한의학의 거성 류의태를 스승으로 만나 이래저래 산청은 한방약초와 관계가 깊은 곳이다.
올해로 3회째인 지리산 한방약초 축제는 5월3일(토)부터 7일(수)까지 5일간 열린다. 이 축제에는 산청의 약초를 전시 판매하며 약초를 배우는 체험행사, 한방약초 체험 산행, 한방음식 먹을거리 장터, 한방약초 관련 세미나, 한방술과 차 전시판매, 약초동산 만들기, 관람객 한방 무료진료, 사상의학 체험실 등을 운영하고, 경호강 래프팅, 황매산 철쭉제 등 행사도 열린다.
황매산 철쭉제
산청 동쪽의 황매산(1,103m)은 바위산의 모양이 매화가 피어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 5월이면 수십만 평의 고원에 선홍빛 철쭉이 군락을 지어 피어난다. 산청군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황매산 철쭉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매년 5월 초순에 황매산 철쭉제를 연다. 올해로 21회째를 맞이한 황매한 철쭉제는 지리산 한방약초 축제 기간인 5월4일(일), 5일(월) 양일간 열린다. 황매산 풍년대제 산신제, 초대가수 초청, 산행인 노래자랑, 사물놀이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
황매산 영화주제공원
황매산 철쭉밭 아래에 있는 영화주제공원은 영화 ‘단적비연수’의 촬영장으로 산속에 작은 원시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3,000여 평의 공간에 31채의 가옥과 풍차, 영화에 쓰였던 은행나무와 주인공의 캐릭터 등 1,000여 점의 소품이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면 좋다. 올라가는 길에 식사 가능한 식당이 몇 군데 있고, 산 중턱의 공원 입구에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간이식당도 있다.
경호강 어탕국수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맑기로 이름난 산청의 젖줄인 경호강 맑은 물에서 잡은 피라미, 붕어, 미꾸라지 등의 민물고기를 뼈째 푹 곤 국물을 이용해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다. 맛이 정갈하고 담백하여 경남 향토음식으로 이름나 있는데, 특히 산청 경호강 유역의 어탕국수가 유명하다.
민물고기를 깨끗이 씻은 후 통째로 중불에서 2~3시간 정도 푹 곤다. 그리고 뿌옇게 국물이 우러나면 체에 걸러 가시를 추려낸 다음,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뒤, 국물에 국수를 넣고 끓인 후 산초가루와 함께 그릇에 담아낸다. 한 그릇에 4,000원. 경호강 상류 생초면 소재지의 경호정 앞에는 생초식당(055-972-2152), 우정식당(055-972-2259) 등이 어탕국수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많다. 바로 뒷골목의 생초제일식당(055-972-1995)도 어탕국수 전문집으로 소문이 나있다.
지리산 산채돌솥비빔밥
산청에 들렀다면 지리산 자락에서 나는 표고버섯, 느타리버섯, 도라지, 취나물, 고사리 등을 푸짐하게 담아낸 산채비빕밥을 맛봐야 한다. 공기 좋은 곳에서 수확한 참깨로 짠 참기름의 고소한 맛과 달래순의 달콤하고도 상큼한 맛과 취나물 등 산채의 쌉싸롬한 맛은 잃었던 미각을 살리기에 충분하다. 식당에 따라 찔레순을 넣기도 한다. 지리산 더덕구이와 동동주 한 잔 곁들이면 더 없이 좋다.
산채돌솥비빔밥은 이런 산채를 돌솥에 넣어 요리한 것이다. 산채 비빔밥 4,000원, 산채돌솥비빔밥 5,000원. 대원사 위쪽에 유평식당(055-972-9587) 등 산채요리를 잘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산머루, 더덕, 영지, 오미자 등으로 담근 술도 맛볼 수 있다.
산청 흑돼지
예전 시골서 흔히 볼 수 있던 흑돼지들이 요즘엔 단시일에 크게 자라는 외국산 흰 품종으로 바뀐 지 오래지만 토종 흑돼지의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고기를 산청에서는 맛볼 수 있다. 지리산 맑은 공기와 심심산골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물로 사육된 산청 흑돼지는 특히 고기의 맛을 좋게 하기 위해 사료에 지리산 산록의 황토를 섞어 먹여 산청 흑돼지 고유의 육질을 만든다.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고기 맛이 좋다. 일반 돼지는 6개월이면 완전히 성장하지만, 산청 흑돼지는 8개월이 되어야 상품 가치가 있다.
산청읍 옥산리의 흑돼지와 누렁이(055-973-8289), 금서면 주상리의 천왕봉 식육식당(055-973-0037), 차황면 소재지의 은행나무식당(055-972-7444) 등은 흑돼지 전문식당으로 유명하다. 또 산청군청 근처의 도매식육식당(055-972-8650) 등에서 파는 흑돼지를 구입하면 비교적 싼 가격으로 푸짐하게 먹을 수 있다. 부위마다 가격이 다르지만 보통 600g 1근에 5,000~6,000원 정도 한다.
일정별 길라잡이,교통·숙박
2001년 대전~진주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산청 접근이 획기적으로 수월해졌다. 천왕봉 산행이나 경호강 래프팅을 곁들이려면 제시하는 일정보다 하루를 더 잡아야 한다. 산청은 대체적으로 구형왕릉과 황매산을 중심으로 한 북부권, 지리산 중산리계곡을 중심으로 한 서부권(지리산권), 단성면을 중심으로 한 남부권 세 개의 권역으로 나눠볼 수 있다. 한 권역에 하루쯤 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단성장은 5·10일장이고, 산청장은 6·11일장이다. ●당일 예전 같으면 꿈도 못 꿀 일정이지만, 이젠 조금은 산청을 맛볼 수 있다. 산청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을 3~4시간쯤 잡았을 때 한 권역을 정하고 그중에서도 명확한 목적지 한 곳을 선정한 다음, 오가는 길에 짬을 내서 다른 곳을 들러야 한다. 드라이브만 간단히 할 계획이라면 산청 나들목~59번 국도~시천면~중산리~20번 국도~목면시배지~단성 나들목으로 코스를 잡으면 된다. ●1박2일 지리산의 품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일정이다. 하지만 산청 전체를 둘러보기는 어렵다. 산청에 도착하는 날 구형왕릉과 류의태약수터를 들른 뒤 밤머리재 넘어 대원사계곡에서 하룻밤 묵는다. 이튿날 내원사·중산리계곡을 들른 다음, 단성 나들목으로 가면서 남사 고가마을, 목면시배유지, 성철 스님 생가 등을 차례로 둘러보면 된다. ●2박3일 지리산의 웬만한 계곡을 비교적 꼼꼼히 둘러본 다음, 경호강 동쪽 지역도 들를 수 있는 일정이다. 첫날은 중산리쯤에서 묵고, 이튿날은 단성면의 청계계곡이나 남사 고가마을 근처서 묵는다. 마지막 날 아침, 지리산 참숯굴에서 땀을 뺀 뒤 남사 고가마을, 목면시배유지, 성철 스님 생가, 문익점 묘도 들러볼 수 있다. 오후엔 도전리 마애불상군, 이순신 장군 행로비, 율곡사, 황매산 영화주제공원을 둘러보고 산청 나들목을 통해 귀갓길에 오르면 된다. ●필자 답사코스 대전~진주 고속도로 생초 나들목→경호정→구형왕릉→류의태약수터→산청→59번 국도→중산리(1박), 천왕사 성모상→빨치산 토벌전시관→거림계곡→고운동계곡→덕천서원→내원사→안내원마을→대원사→유평 마을→시천면→산천재→단성 5일장→청계계곡(2박), 단속사지→정당매→남사 고가마을→목면시배유지→성철 스님 생가→단성향교→도천서원→3번 국도→산청 5일장→어천계곡→1001번 지방도→청계계곡(3박), 1001번 지방도→심거나루→3번 국도→마애불상군→1006번 지방도→이순신 장군 행로유적지→신등 고가마을→율곡사→황매산 영화주제공원→59번 국도→산청 나들목. 교통·숙박 ●승용차
대전~진주 고속도로를 타고 산청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나들목은 모두 3개(생초·산청·단성)다. 구형왕릉이나 류의태 약수터를 들르려면 생초 나들목을 이용하고, 직접 지리산으로 들어가려면 산청 나들목이나 단성 나들목을 이용해 접근한다. 황매산 철쭉을 감상하거나 영화주제공원으로 가려면 산청 나들목으로 나오는 게 제일 낫다.
●고속버스 서울→진주=1일 57회(06:10~24;00) 20~40분 간격 운행. 3시간50분 소요. 일반 14,300원 우등 21,300원 심야 23,400원.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전화 02-535-4151, 진주 고속버스터미널 전화 055-752-1001. *고속버스 안내센터 : 1544-5551 ●시외버스 서울→산청=1일 8회(08:30~23:00) 운행. 3시간10분 소요. 서울 남부터미널 전화 02-521-8550, 산청 시외버스터미널 전화 055-973-2207. 진주→중산리=1일 15회(07:00~21:00) 운행. 1시간20분 소요. 진주 시외버스터미널 전화 055-741-4120 진주→대원사=1일 15회(06:30~20:30) 운행. 1시간20분 소요. 진주→산청=6:40~21:30 약 10분 간격 출발. 1시간 소요. ●열차 산청으로 직접 연결되는 열차편은 없다. 진주역에서 내린 다음, 진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산청이나 지리산행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철도고객 안내센터 : 1544-7788 *승차권예약 : 철도회원전용(1544-8545 www.barota.com) *철도청홈페이지 : www.korail.go.kr ●숙박 읍내에도 숙박시설이 몇 개 있지만, 산청군내에 있는 대부분의 숙박시설은 지리산 기슭에 밀집해 있다. 그 중 천왕봉 등산 기점인 중산리계곡에 모텔, 여관, 민박집 등 숙박시설이 가장 많다. 또 대원사계곡, 내원사계곡, 거림계곡 등에도 민박집이 많다. 단속사지가 있는 청계계곡에도 숙박시설이 몇 곳 있다. *산청군 홈페이지 www.sancheong.ne.kr *산청군청 문화관광과 055-970-6421~3 *지리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055-972-7771~2 *지리산국립공원홈페이지www.npa.or.kr/chi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