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田惠麟 씨가 성급하게 그 틈에 낄 줄이야.
田惠麟씨를 안 것은 1955년 초가을이었다.
그날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부터 소포를 받았다.
보내온 사람은 전혜린, 보낸 곳은 독일의 뮌헨.
미지의 땅,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보내온 소포는 마른 한 묶음의 풀꽃이었다.
곱게 눌러서 종이에 붙여 보내기라도 했더라면
꽃잎의 형체도 보존할 수 있으련만 물기도 채 마르지 않은 생화를
그대로 꾸려 보냈기 때문에
모양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만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이 수수께끼는 남편이 외유(外遊)에서 돌아온 뒤에야 풀렸다.
뮌헨의 유학생 중에 田惠麟이란 비상하게 재질이 뛰어난 재원이 있는데
그로부터 초대를 받아
불고기랑, 김치랑, 한국 요리를 모처럼 맛보며
즐거운 한때를 지냈다는 것이다.
田惠麟씨는 남편이 떠날 때 역에 배웅까지 나와 주었다고 했다.
한 묶음의 진보랏빛 바이올렛을 안고.
'그 꽃을 내 아내에게 보내 주시오' 아직 여정이 남은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田惠麟씨는 그 말을 받아 그날로 내게 그 꽃을 보냈던 것이다.
그 꽃을 버리지 않고 두었던 나는 다시 꾸러미를 꺼내 보고 웃었다.
웬지 나는 그 꽃을 알핀 바이올렛이라고 불렀다.
헤세의 '피터 카멘진트'에 나오는 '알핀 로제',
아무도 모르는 염(念)을 내지 못하는 험준한 바위 그늘에 핀 아름다운 '알핀로제'
그
꽃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리하여 田惠麟은 서로 보지 못한 채 나와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그 田惠麟씨를 직접 만나 본 것은 어느 여류 작가의 출판기념회때였다.
까만 외투에 까만 머플러를 쓴 키가 작은 여성을 누군가 田惠麟씨라고 소개해 주었다.
우리들은 곧 그 '알핀 바이올렛'을 화제에 올렸다.
그때 나는 그의 눈에서 광기(狂氣)를 느끼고 무언지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에 잡혀 있다.
무엇인지 어둡고 집요하고
그리고 알수 없이 깊은 것에 사로잡혀 있는 인상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종종 만났다.
'괴짜'라는 별명도 가졌다는 그녀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정하고 알뜰하였다.
말에 허두가 없을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그녀의 소위 광기 때문이 아니고
내부에 벅차게 괴어 있는 것들이 배출구를 향하여 몰려들어 들끓기
때문에
뒤범벅으로 얽힌 것이 발언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 사람은 무엇인가 쫓기고 있다.
나는 그렇게도 생각한 일이 있었다.
그러던 田惠麟씨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아까운 나이 서른 두 살, 아깝고 분하다.
이제부터라는 나이가 아닌가.
田惠麟! 왜 당신은 그렇게도 성급했오.재빨리 죽음의 투영을 느끼고
그 죽음에 쫓기어 그렇게도 성급했던 것인가요.
그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에서 겨우 깨어난 나는 '알핀 바이올렛'을 상기하고 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꽃과 잎의 형체를 곱게 다루어 눌러
소위 압화(押花)를 만들어서 보내 주었을 그 진보랏빛의 '바이올렛' 꽃,
田惠麟씨는
보내고 싶은 마음이 앞서 채 물기도 빠지지 않은 그 꽃을
성급하게 꾸려서 먼 먼 한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내부에 담고 있는 호의가 반쯤 섞어 마른 풀꾸러미로 표현되어 버린 애석함.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은 끝났다.
불행한 '알핀 바이올렛!'
그대의 별인 토성은 그대가 보내온 '알핀 바이올렛'이 피는 풀밭 위에로 떠
있으리.
영원에서는 그 벅차게 간직한 것들을 남김 없이 베풀어 놓을 시간도 가졌으리니
빌건대 평안 속에 휴식처럼 다정한 그대 별의 눈짓을 끊임없이
보내 주기를...
<作 家>
田惠麟과 田惠麟의 글에 대하여...表文台
惠麟이 번역한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신협'에서 공연했을때다.
연습하는 자리에 번역자로서 나타난 惠麟이 연기자들의 연습 모습을 보고
못마땅한지 고개만 갸웃거리다가 옆에 있던 미이프 역의 C여사 귀에
대고 소근댔다.
"독일에서도 이 연극을 보았지만, 한국 배우들은 연기가 너무 좋아서 탈이야.
원작품의 의도는 염두에도 없고 제멋대로 재주만 부리는군요.
막걸리 연극이랄까. 너무 텁텁해요. 깨끗하지 못하구......"
배우들의 기품과 연기를 통하여 풍겨져야 할 원작자의 나치스에 대한 증오감,
그리고 독일 국민의 탐구적 정열과 이상주의는 냄새도 풍기지 않고
원작 인물의 격을 한국적인 토착 취미로 얼버무려 버리는
지나치게 능수능란한 연기 자세에
독일의 연극을 본 혜린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첫날 낮 공연을 끝내자
S대학의 연극반 학생 4,5명이 배우실에 들어와서 미이프 역의 C여사를 찾았다.
"C선생님. 연기에서 지성적인 연기의 서광이 보이지만,
흙냄새가 지나치게 짙은 연기엔 이젠 싫증이 나서.....
무대 예술에도 과학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
惠麟문학과 젊은 세대사이에 교환되고 있던 언어를 惠麟 자신은 생전에는 무관심했을까.
외국어와 철학과 문학에 열중했던 그 시간에 바느질과 요리법이나 배워둘 걸 했던 惠麟,
明洞 거리를 거닐면서, 로터리 저쪽에
Englischer Garten 호수가 나타나지 않고,
호수의 수면에 백조가 떠 있지 않아서 마냥 도착(倒錯) 되었고,
머리를 들면 빈약한
삼각산의 모습이 도무지 눈에 거슬린다.
백설에 덮인 북알프스의 준령들처럼 선과 형태가 준엄하지 못한
우리들의 희미한 능선들에서 향토 지성의 열등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이국의 하숙방에서 조국에는 단 한 사람의 우인(友人)이 있을 뿐이라 슬퍼하면서,
양친의 생태를 '부부의 수화'라고 비웃는 惠麟의 이 슬픔과
비웃음은
그대로 마음의 조국을 찾아 헤매는 젊은 세대들의 도착 향수이다.
한번밖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현재'를 남김 없이 가득 채워서 살지 못하면
곧 죽음을 연상케 되리만큼 충족에의 갈증에 시달렸던 다재
다능한 惠麟,
꼴레뜨처럼 차분히 살고도 싶었고, 더우기 사포처럼 사랑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도 했으나,
惠麟은 끝내 살아서도 죽어서도 식민지풍의
'못생긴 고향'에서 가진 것,
하고 싶은 일들을 끝내 다하지 못하고 좌절된 꿈의 환상을 안은 채 아쉽게 떠나고 말았다.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다채롭고 화려한 욕구 불만이, '불행하지 않은 비극'과 '
슬프지도 않은 고민'으로 도금되면,순금을 경원하고 금박을 좋아하게 된다.
이 저개발국적 창맹은 그 속에 든 호화롭고 음흉한 '욕심쟁이'를 향하여 박수를 보낸다.
이것은 예나 이제나 별로 변함이 없는 진실이다.
문학의 재미도 이런 곳에 있는지......
어쨌든 이런 진실 때문에 제 자신 속의 여자를 몹시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惠麟,
그녀의
獨逸식 지적 스토이즘이 시정의 속물 근성과
그 현금주의와 그 우물가 요설을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이와 같은 惠麟의 숙명적 척력 때문에 그녀의 육체적 소멸,
나아가서는 그 반항 정신의 소멸을 슬퍼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고독했던 작가의 죽음을 멀찍이 서서 구경만 하고
스스로의 슬픔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는,
이 어쩔 수 없는 비극의 공통
의식을 이 일기는 너무도 진하게 풍겨준다.
惠麟의 이 고독에 공감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 소녀들이 있다고 하지만,
惠麟이 넘어서지 못했던 벽에 새로운 통로를 발견해 주기를
젊은 독자들에게 희구할 따름이다.
<1968년 11월 貞陸 三憂山莊의 폐허 위에서>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는 독일문학가 전혜린을 두고 이렇게 쓴다.
"이 지상에 살고 간 서른 두해 자기의 생을 완전하게 산
여자였다.
가짜가 아닌 생이었다. 생을 열심히
진지하게 살았다.
정말로 유일한 size=-1>여자였다."
그는 원래 법학도였다. 1934년 평안남도 순천 태생.
52년인 19세 때 size=-1>서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은 법이 아닌 문학.
그는 독일에서
독문학을 전공한다. 어쩌면 그것이 생의 큰 변화를
몰고왔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꽉 잡고 싶다. 반복하여 습관화하고 싶다." 그의 정신과
size=-1>학문에 대한 집념은 끝이 없었다. 극내로 다시 돌아온 그는 26살의
나이에 서울대
등에 강사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남긴 것은 8권의 번역서.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 1959), 생의
한가운데(루이제린저, 1961),
태양병 (H. 노바크 1965) 등.
그러나 정작 그토록 쓰고자
했던 자신의 글은 세상에 꽃피우지 못했다.
1965년 그의 나이 서른 둘, 끝내 관념의
완전한 세계와 현실 속에서
갈등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세상 사람들은 그의 치열한 열정과 고뇌를 사랑했다.
그의 일기와 편지 size=-1>등을 묶어 유고집을 내놓았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수필집 size=-1><민서출판사, 1966>).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일기·서간집<민서
size=-1>출판사 1968> 그리고 평전으로 이덕희씨의 '전혜린(작가정신)'
등이 있다.
평전 '전혜린'은 지난 82년 초판이 나와
증보판에 이어 최근에는 신판까지 나왔다.
그 책들 속에는 전혜린이 걸었던 방황과 모험과 사랑,
학문과 완전한 size=-1>생에 대한 성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영원히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정신의
갈망,
거기에 더없이 성실했던 그의 삶의 자세가 끊이지 않은,
많은 독자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불꽃처럼 산 `광기의 천재'
전혜린
육칠십년대에 청소년기를 맞은 문학소녀라면 한번쯤 미치도록
빠져들어 size=-1>자기 분신을 발견하는 감격과 기쁨을 맛보았을 전혜린.
여성 법학도요 독일문학가로서
두권의 유고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괴 로움을 또다시>를
남기고 서른한살에 요절한 그는 3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을 사로잡고
있다.
소녀시절부터 전혜린의 가슴에 자리잡았던 명제
‘절대 평범해선 안된다’가 그대로
실현 된 셈이라고나 할까.
전혜린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의 삶을 어느 만큼 신비화시켰고
숱한 추측을 size=-1>낳게 만들었다. 그의 죽음이 자살이냐 아니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어쩌면 자살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 닐지 모른다.
그는 늘 죽음을 생각하며
되뇌었고,설령 계속 살았더라도
죽음에 대한 유혹을 떨치지 못했을 테니까.
전혜린은 일제시대 중반 부유한 관리의 맏딸로 태어나,
손에 물 한 방울 안 size=-1>묻히고 아버지가 사다주는 책을 마음껏 읽으며
경기여중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워낙 여학생이 드문 데다 도통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거리낌없는 행동, 경탄스러울
만큼 예리한 두뇌 때문에
그는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5년 가을,
전혜린은 법학을 그만두 size=-1>고 문학공부를 위해 독일 유학을 떠난다.
뮌헨의 슈바벤, 내리깔리는 축축한 안개
사이로 오렌지색 가스등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는 그곳은 곧 전 혜린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그는
뮌헨대학에서 독일 리얼리즘의 선구자 그릴파르처의 문학을
연구하는 한편, 철학자 니체와 그의 연인이며
소설가였던 루 살로메에
열중했다. 도서관에서 루 살로메의 전기를 읽다가 그 사진을 몰래
오려냈을 정도로 전혜린은 루 살로메를 좋아했다.
귀국한 전혜린은 여자는 강단에 세우지 않는다는 완고한 전통을
깨뜨리고 size=-1>스물다섯살의 나이로 서울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
희귀한 천재’라는 격찬을 들으며,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일곱살짜리 딸
정화를 남긴 채.
소설을 쓰겠다 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서.
그가 자주 입에 올린 단어는 권태와 광기였다.
광기일 만큼 치열하게 살고 size=-1>싶다는 욕구,
그러나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권태로운 일상.
전혜린은 그 둘의 충돌
한가운데서 한없이 절망하고
허무의 나락에 빠졌다.
맹렬하게 삶에 매달리는가 하면 다음 순간 허무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 양극단을 무수히 넘나들었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들 수 있었고 하루에 커피
15잔을 마셔야
정상이 될 만큼 그의 심장은 약해져 있었다.
아마도 그의 가슴에
자리잡은 ‘절대 평범해선 안 된다’는 명제가
결혼해서 아 이 낳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자신의 삶을 못견디게 만들었을 것이다.
전혜린의 내면은 ‘자아’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나 민족, size=-1>국가 따위는 그의 의식세계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4·19와 5 ·16도 그에겐 size=-1>진정한 의미의
‘격정적인 순간’이 아니었다. 전쟁 뒤 독 일의 데카당스한 분위기에
흠뻑 젖은 전혜린에게 한국사회의 암담한 현실 은 고뇌할 가치 없는
경멸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지식인 으로서의 사명과
사회적 책임을 묻는 건 오히려 어리석은 일일 게다.
전 혜린이
문학소녀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자아에 대한
열렬한 몰두,
절정의 순간에 대한 탐닉, 이리 저리 부딪치는 열광, 정체모를 불안과
절망이란 요소들. 전혜린, 그는 전 쟁이 낳은 정신적 무국적자였나보다.
박은봉/ 역사연구가
- 한국일보 1998년 11월 4일 11면 (문화)
10년만에 새모습 출판
적어도 30대중반을 넘어선 이들에게
전혜린(1934∼1965)은
젊은 시절의
「통과제의」를 주재한 여제사장과도 같은 느낌을 주는
size=-1> 이름이다. 『평생을 인식의 제단에 바치겠다』는 다짐대로 불꽃처럼
face=굴림> 살다가 서른한 살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전혜린.
언론
인 출신 음악평론가 이덕희(61)씨가 쓴 평전
「전혜린」이 10년
만에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출판됐다.
「전혜린」은 82년 초판이 나온 이래 중판을 거듭해왔다.
신판은
88년 개정증보판 이후 10년간 저자가
손대지 않던 것을 작가정
신에서 새로 출판한 것.
전혜린의 수필·편지·일기와, 이씨가 그녀
를 알았던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의견을 들은 것이 평전의 토대다.
이씨는 전혜린의 3년 후배이자 제자다. 60년 독일 유학에서
돌아
와 모교 서울대에서 독일어 강사를 시작한
전혜린을 처음 만났던 인
상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녀의 새까만 두 눈은 나를 매
혹했다.
내가 그 시선에 닿자마자 대번에. 나는 그때까지 그러한
size=-1>종류의 눈을 결코 본 적이 없었다. 강렬하게 반짝이면서도 방황하는
face=굴림> 듯한, 집중적이면서도 동요하는 그렇게도 정신적인 눈을』.
그렇게 「정신적인 눈」으로 세계와의 불화의식을 인식에의
열망으로
메우며 살다 간 전혜린이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이씨는
앙드레 지드가
말한 이른바 「이데(idee)의 수정(受精)작용」
size=-1>이었다고 비유한다. 「타인에게 영감을 주고 다른 사람 속에 내재한
face=굴림> 창조적 불씨에 점화하는 천부적 재능」이야말로 전혜린이 사후 33
년이 지난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그의 글을 새롭게 읽고 밤을
새우게
하는 동인이라는 것이다. 『저는 무엇을
꽉 잡고 유지하고 반복하
고 습관화한다는 이런
온갖 개념에 혐오를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 유동하는 것, 매일매일 변하는 것…미칠 듯한
size=-1>순간, 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을 주는 찰나, 충만한 순간.
face=굴림>이런, 손에 영원히 잡히지 않는 것들이 나의 갈망의 대상입니다』.
64년7월 전혜린이 쓴 한 편지의 내용이다. 「생명의
유동」과
「자아와 세계의 합일」, 어쩌면 요절했기
때문에 오히려 영원히 젊
은 전혜린의 추구야말로
그의 글이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디고 오래
살아남는
이유일 것이다.<하종오 기자>
어느 문학평론가
60년대식 허무의 상징 전혜린의 평전, '전혜린'이 문학정신에서 나왔 다.
그의 대학 후배인 이덕희씨가 16년 전 펴낸 '전혜린 평전'을
컴퓨 터 세대 감각에 맞게 장정을 새롭게 한
것이다.
전혜린이 31세로 스스 로 목숨을 끊은지 벌써 33년.
20대의 열병이랄 수
있는 방황, 고독,절 망, 우수로 가득찬
전혜린 일기를 대거
인용하면서 한 우울한 영혼의 궤적을
그려간다.
저자는 "전혜린의 일생은 한마디로
안일한 부르주아 적 질서에
도전하는
아웃사이더적 삶의 투쟁"이라고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