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6
7월19일[연중 제1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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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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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StrDT3qx28 (우경민 헨리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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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하느님 얼굴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던 모세,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소명으로 주신 하느님께 도저히 자신 없다고 난감해하는 모세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한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탈출 3, 12)
이 세상에 이보다 더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말씀이 또 있을까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 내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 앞에 놓이던지,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큰 위로요 기쁨의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언약에 용기백배한 모세는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과 행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직도 타고난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고민하고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모세는 전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로서 강한 결단력과 추진력을 보이며 그들을 이끌기 시작합니다.
절대 권력자 파라오의 권력과 위협에도 모세는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매일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굳게 믿으며, 매 순간 하느님과 긴밀히 소통하며 이스라엘 백성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해방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그 귀중한 소명을 시작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연속인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기쁨 충만한 신앙생활을 지속해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은 바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 현존 의식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의 행보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언제나 주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심을 굳게 믿었으며, 이를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습니다.
주님의 현존을 굳게 믿고 살아가셨던 마리아에게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니 주님 현존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 기쁨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고통 중에도 기쁘게 사는 비결은 주님 현존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이런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라씨아 플레나(Gratia plena)! 번역하면 ‘충만한 은총을 받은 여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리아를 각별히 공경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을 기쁨으로, 은총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항상 자신 안에 현존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성령께서 자신 안에 현존하시고 역사하심을 수용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가 오로지 성령의 힘으로 인한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마리아는 이제 새로운 계약의 궤, 성령의 궁전, 살아있는 감실이 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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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q1E2VynfU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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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없이는 상대를 알 방법이 없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성령이 필요한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진리의 주인이 되는지 알려주십니다.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입니다. 그 어린이의 대표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는 방법이 특이합니다. 말씀으로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심으로 드러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드러내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은 ‘사랑’이고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받지 않으면 그분이 사랑인 줄 모릅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성령께서 ‘선물’이 되시는 이유입니다. 선물을 받아야만 사랑이 무엇인지, 아버지의 본모습을 알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삼위일체 신비가 매우 크게 녹아있는 내용입니다. 삼위일체는 아버지와 아드님이 성령으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령으로 하나가 될까요? 아버지가 아드님께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시작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아봐야 그 주는 사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럴 자격이 있는 자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선물을 주는 사람도 그 받는 사람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자신과의 관계가 합당한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성령을 받으시고 그 안에 들어있는 뜻을 십자가에서 완수하시며 아버지의 완전한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드러내셨습니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다시 아드님께 성령으로 모든 것을 주시는데 이것이 부활입니다. 이렇게 관계가 지속되고 그 관계가 ‘사랑’이 됩니다. 또 그 사랑을 통해 자녀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탄생입니다.
영화 ‘궁극적 선물’(The Ultimate Gift: 2006)은 제이슨의 극도로 부유한 할아버지인 하워드 레드 스티븐스의 죽음으로 시작됩니다. 레드는 자신의 자손들이 다 돈만 바라지 자신과의 관계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돈을 조금씩 줍니다. 손자 제이슨은 그렇게 돈 많은 할아버지가 자신들을 가난하게 살게 만든 것에 매우 실망해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제이슨에게 12개의 작업만 완수하면 많은 재산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 작업이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일의 선물: 제이슨은 목장에서 일하며 열심히 일하는 것의 가치를 배웁니다.
돈의 선물: 제이슨은 한정된 금액의 돈을 받고 자신의 방법으로 더 많이 벌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친구의 선물: 제이슨은 진정한 친구를 사귀어야 합니다.
배움의 선물: 이전에 몰랐던 것을 배우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문제라는 선물: 제이슨은 문제가 변장한 기회라는 것을 배웁니다.
가족의 선물: 제이슨은 가족에게 감사하는 법을 배웁니다.
웃음의 선물: 그는 인생에서 기쁨과 유머를 찾아야 합니다.
꿈의 선물: 그는 꿈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는 선물: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감사의 선물: 제이슨은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루의 선물: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웁니다.
사랑의 선물: 제이슨은 무조건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사실 제이슨은 몸으로 하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관계에는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친구를 사귀어본 적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어린 에밀리라는 소녀를 공원에서 만나 자신과 친구가 되었다고 증언해 달라고 합니다. 에밀리는 속는 셈 치고 제이슨과 친구가 되어줍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백혈병이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자신을 위해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진정한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받은 1,000만 달러를 아픈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수조 원에 달하는 할아버지의 재산이 다 자신의 것이 된 것입니다. 제이슨은 자신도 모르게 죽은 에밀리를 통해 위 열두 개의 모든 임무를 완수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들려고 한 것이 할아버지의 궁극적인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이 영화는 성령께서 어떻게 선물이 되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일치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성령을 받으시고 그 성령에 가장 완전한 그릇이 되셨습니다. 성모님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살과 피가 곧 성령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그분의 뜻, 곧 당신이 우리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위해 살과 피를 내어놓는 사람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러면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위해 당신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 지극한 이가 먼저 선물을 주지 않으면 관계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그 선물은 받는 사람을 정화합니다. 그래서 그도 그 선물에 합당한 사람이 된다면 비로소 서로를 온전히 알게 됩니다. 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관계에서 오는 행복은 이때 절정에 이릅니다. 삼구에 빠져 성령을 거부하지 말고 나를 죽여 성령에 합당한 그릇이 됩시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것이 참 행복입니다. 이웃에게 살과 피가 되어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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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5-27: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25절) 당신에 관한 신비를 지혜롭다는 이스라엘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인 다른 민족들에게는 드러내신 아버지의 뜻에 대한 찬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지만,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우리도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란 말은 창조계 전체의 주님으로 하늘은 하늘에 있는 모든 것, 땅은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예수께서는 이 일들을 다 하시고도 아버지께서 그 일을 하신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신다. 그럼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뜻이 하나임을 보여주시며, 우리에게 좋은 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신다.
주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나이가 어려 철부지가 아니라, 죄와 사악함에서 거리가 먼 철부지라는 것이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이유가 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으신다. 다만 감사를 드리신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져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그분의 뜻을 따리 실행하고 그분께 충성을 다하는 일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27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다가간 사람들과 전에는 반항했으나 이제는 하느님을 알게 된 모든 사람을 맡기셨다는 뜻이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27절)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아는 점에 있어서 같은 본질이다.
같은 본질이 아니면 아들은 아버지를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알고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신비를 통하여 아버지에게 있는 모든 것이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잘 아시며, 아버지를 잘 아는 유일한 분인 만큼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아버지의 모상이신 아들을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아버지만이 당신 본질의 열매인 당신의 아들을 아신다. 오직 아들만이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만이 하느님의 깊은 비밀, 곧 아버지와 아들의 생각을 아신다. 하느님을 아는 우리는 그분의 뜻을 알고 실천하여 참으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 삶으로 하느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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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를 하면서 말씀카드를 만들어서 나누어 주곤 합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성지순례에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뽑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제가 가톨릭평화신문을 만들기 때문에 ‘평화’에 대한 성경 말씀을 뽑은 것 같았습니다. 저는 좋은 기사와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독자들에게 ‘평화’를 주겠다고 묵상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환난과 시련이 있을지라도, 고통과 아픔이 있을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이탈리아 성지순례에서는 루카복음 12장 15절을 뽑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사실 그즈음에 고민이 있었습니다. 4년간 팬데믹의 시간을 보내면서 신문사의 재정에도 손실이 있었습니다. 저는 8월부터 신문사에서 급여를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직원들도 주 4일 근무에서 주 3일로 근무시간을 조정하면서 급여를 조정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동안 마음고생이 있었습니다. 성경말씀을 뽑으면서 제 마음에도 평화가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이제 하느님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는 사명을 받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파스카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신약의 파스카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라는 ‘틀’에 갇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보았으면서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누렸던 ‘기득권’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고백했을 때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동방박사들로부터 메시아가 왔음을 들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의 아들을 죽였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어렵게 쌓아왔던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습니다. 권력에 취해서 ‘진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파스카를 알아본 사람들이 있습니다. 양을 치던 목동들입니다. 양을 돌보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기에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입니다. 율법과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헤아렸기에 아기 예수님께 ‘선물’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갈릴래아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입니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자신의 재물을 기꺼이 이웃에게 나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였던 바오로도 신약의 파스카를 받아들였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뜻한 마음이 있다면, 진리에 대한 갈망이 있다면, 순수한 마음이 있다면, 가진 것을 나누는 헤아림이 있다면, 절박한 믿음이 있다면,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신약의 파스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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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식한 바보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5-26)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마태 11,27)
여기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처하지만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교만한 위선자들, 잘난 체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기득권층 사람들, 지식인들, 권력가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을 감추시고”라는 말씀은, 그런 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자들은 자기들이 현세에서 누리고 있는 것들에 취해서, ‘하느님의 뜻’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데, 그 뜻을 외면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외면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자들이 스스로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로마 1,18-22)
이 말은 원래는 무신론자들과 우상 숭배자들을 꾸짖는 말인데, 신앙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세속의 이상하고 쓸데없는 이론에 귀를 기울이다가 신앙인들도 하느님과 예수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과 신학자 중에도 그런 ‘유식한 바보’가 있습니다.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다가 예수님의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에서의 선교활동’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회당에서 유다인들과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과 토론하고, 또 날마다 광장에 나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몇몇 철학자도 바오로와 대담을 나누었는데, 어떤 이들은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바오로가 예수님과 부활에 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 하고 말하였다. 사실 아테네인들과 그곳에 머무르는 외국인들은 모두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었다.”(사도 17,17-18.21)
오늘날에도 진리를 탐구한다고 말하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고, 이해가 안 되면 아예 안 들으려고 하고……. 그러면서 점점 더 ‘구원의 진리’에서 멀어져 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철부지들’은 겸손한 신앙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드러내 보이시니”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당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말씀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만이 단순하고 순수하게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이 세속의 지식이나 기득권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세속의 기득권층 사람들과 지식인들이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구원을 독점한다면, 그래서 가난하고 힘없고 배울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이 소외되고 차별당한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도 아니고, 그 구원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러면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들의 교만과 위선을 버리면 됩니다. 스스로,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라는 말씀은, 승천하시기 전에 하셨던 말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나라’에, 즉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도달하는 길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구원의 진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만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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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요한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그보다는 적지만 예순네 번 가량 이 호칭을 씁니다. 아버지로서 하느님은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는 친밀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면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은 성경에서 드물게 사용되지만 창조된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분명히 드러냅니다(사도 17,24 참조). 그분의 신비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이사야서 29장 14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지혜와 슬기는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지지만 스스로 지혜롭거나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은 당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 지도자들을 일컫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신비는 어린이와 같은 철부지들에게 드러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는 군중일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태 19,14)
하느님께서는 선별적으로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드러납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아버지께 의탁하는 자세로,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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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신앙은 우리에게 영원을 보게 합니다. 바로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에만 안주하지 않고, 영원에 이르는 긴 안목을 갖게 합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매일의 삶을 뚜벅뚜벅 잘 걸어가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혜이지만, 신앙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메시지는 세상의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이들,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해 내는 능력 있는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의 커다란 기둥이고 힘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공동체 안에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일하는 데 자꾸 걸리적거리는 사람이 앞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이 먼저 초대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분의 나라에는 모두가 다 초대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 비천한 이, 소외된 이뿐만이 아니라, 부자와 지혜로운 이들, 위대한 지도자들이 다 그 나라를 향하여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나라에 먼저 도달하는 이들은 스스로 더 작아질 줄 알고, 더 겸손할 줄 아는 이들일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우리의 욕심도 더 커지고, 삶이 요구하는 것들도 더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주님의 도우심을 청할 줄 아는 신앙과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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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주님의 천사는 떨기나무 한가운데서 불꽃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여기서 떨기나무는 히브리어로 ‘서네’입니다. 이 낱말은 잡초, 가시덤불, 덤불을 의미하는데, 금세 타고 없어질 듯한 존재라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서네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는데,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상징 속에서 한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금세 타고 없어질 잡초, 덤불 같은 존재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머무시면서 그들을 태워 없애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하느님께서는 표징을 달라고 청하는 모세에게 한 가지 표징을 주십니다. 바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모두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름을 가지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듯이 세상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같은 존재, 곧 제1독서가 이야기하던 ‘서네’ 같은 존재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서네’ 같은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을 알게 해주십니다.
자신이 ‘서네’임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며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 이들은 결코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를 알려 주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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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사제로서 다른 사제의 강론을 듣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아야 하지만, 정작 가슴으로 듣지 못하기도 합니다.
제단에 올라 강론하려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교리의 내용도 오랫동안 배워 왔고,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지금 무엇이 필요하고 중요한지를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기에, 좋은 말씀과 강론인데도 마음을 열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가 해 봐서 다 알아!’, ‘왜 그 정도밖에 못해!’라며,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거나 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자신만이 옳다는 오만과 편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에 대하여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이해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시며, 우리가 바라거나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어쩌면 그런 오만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하느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함과, 자신이 바라는 방식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방식이라는 편견으로 다른 이들의 처지와 생각을 헤아리지 않은 채 자신의 방식과 뜻만을 강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러하였고 빌라도가 그러하였으며 가끔씩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편견과 선입관 없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아니 어쩌면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경험과 삶이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철부지들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먼저 많이 바라보고 들어야 합니다. 듣지도 보지도 않고서 판단하고 결정지으며 선택하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이 들으십시오.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바라보십시오. 그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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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때 묻지 않은 철부지가 되어>
노자는 “알면서도 모르는 게 으뜸이요, 모르면서 아는 게 병통”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는 것이 병입니다. 오히려 모르는 게 약입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영광은 사라지고 자신이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그는 종종 ‘내가 무엇을 했다.’라고 으스댑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철부지처럼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합니다.
진정 우리가 하는 일이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필요에 쓰십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내가 커지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배척받았습니다. 소위 잘나고 똑똑한 내로라하는 기득권층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최고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 주시기 위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 현명하고 박식한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을 가리키며 친숙해지는 것, 그리고 감정을 이해하며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결국 알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또한 남녀가 결혼을 통해 가장 깊이 만나는 것을 ‘안다’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당신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안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알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알지 못하고, 하느님에 관하여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장관, 대법관 등 고위 공직자의 청문회를 보면 잘난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로라하는 사람과 그 가족에게 감추어진 부정이 많습니다.
불법으로 이득을 챙기고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 서로를 헐뜯고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공공기업도 그렇고 존경받아야 할 무리에서 뻔뻔한 사람이 생각 외로 많아 평범한 사람들을 허탈하게 합니다. 자칭 많이 알고 총명하며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착각에서 깨어나기를 희망합니다. 아는 것이 남을 등쳐먹는 데 사용되지 않고 남을 풍요롭게 하는 데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은 철부지들, 그야말로 촌사람, 상것들, 별 볼 일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단순함이 있었고 부족하다고 인정하는 겸손이 있었습니다. 때 묻지 않은 철부지들은 새로운 가르침, 곧 근본적인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야말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마음을 활작 열고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단순한 사람을 미덥게 여기십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많아 희망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고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마태11,2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느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알려주셨습니다.
그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고 그분이 알려준 아버지를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리기 위해서 그분을 알아야 하는데 그 첫 자세가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마르10,15) 단순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단순하면 할수록 하느님의 뜻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전할 수 있는 은혜가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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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손끝에 생긴 작은 티눈을 오랫동안 방치했다가 이것이 피부암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암은 원래 정상이었던 세포가 암세포로 돌연변이를 일으키면서 발생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암세포가 발생하는 부위가 손끝에 생긴 작은 티눈처럼 하찮은 몸의 일부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몸의 지체 중에서 중요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손끝의 티눈까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데, 우리가 소홀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소중하지 않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소중한 것은 소홀히 여기는 ‘어리석음’ 안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판단이 아마 타인에 관한 판단이 아닐까요? 그들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로 소중한 존재인데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너무 쉽게 판단하고 때로는 단죄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도 판단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소중한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 우표 수집에 푹 빠져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말 가지고 싶었던 우표가 있었고, 적금을 부어 그 우표 한 장을 살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우표를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었을까요? 애지중지하며 혹시나 손상될까 늘 걱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러실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하느님께서는 혹시라도 우리가 손상될까 잘못될까 걱정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까지도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의 창조물인 사람에 대해 같은 모습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심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세상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만 인정하려고 합니다. 그에 반해 철부지들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면서 그들의 자리를 없애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십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 사랑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보잘것없는 제자들을 통해 창조 때부터 하느님의 골칫거리였던 악의 세력이 꺾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면서 악에 대한 승리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보잘것없다면서 무시하고 판단하는 삶이 아닌, 그 안에 있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찾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다가서는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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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느님의 뜻>
마태오 11,25-27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하느님의 뜻>
착한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착하신 뜻
곧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곧으신 뜻
맑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맑으신 뜻
밝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밝으신 뜻
여린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굳건하신 뜻
낮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높으신 뜻
작은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크신 뜻
찾는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감추신 뜻
열린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넓으신 뜻
믿는 이들에게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오롯하신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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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민족주의를 초월하는 신앙인>
어제와 오늘의 탈출기는 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민족주의자와 신앙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말입니다.
어제의 모세는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자기 민족이 이집트 왕과 백성들에게 억압받고 괴롭힘당하는 것 때문에 분노하고 동족을 구해 내는 모세였습니다.
오늘의 모세는 그런 단순한 민족주의자였던 그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동족을 이집트 억압으로부터 구출해 내라는 소명을 받는 모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단순한 민족주의자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초월합니다.
이렇게 모세는 초월하는 사람인데 요즘의 저는 어떤 사람인지, 아직 민족주의자인지 모세처럼 초월한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과는 적대시하고 일본과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후쿠시마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하며 그냥 해양 방류하려 합니다. 그렇게 문제없는 처리수라면 일본 내에서 처리하지 왜 해양 방류를 하는지 저는 일본의 양심을 이해할 수 없고 그래서 분노합니다.
그런데 더 이해할 수 없고 더 분노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태도입니다. 우리 대통령과 정부가 우리 국민을 보호하고 대변하려는 사람들인지, 일본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사람들인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화까지 납니다.
그런데 화까지 나는 저를 보며 이것이 민족주의자로서의 분노인지 그것을 초월한 사람으로서의 의로운 분노인지 자신이 없는 겁니다.
저를 솔직히 반성하면 저의 분노 안에는 두 가지가 섞여 있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저의 분노는 아직 민족주의자의 분노이고, 그러나 모세처럼 그것을 초월하려고 애쓰는 차원입니다.
중요한 것은 민족만을 보는 것을 넘어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하시고 어떤 명령을 나에게 내리실까 성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후쿠시마 오염수뿐 아니라 모든 원자력 발전을 반대하시고, 북한의 핵무기뿐 아니라 미국과 중국의 모든 핵무기까지 반대하시고, 탈핵, 탈원전, 탈화석연료 사용을 명령하실 겁니다.
하느님이라면 그리고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을 대변하는 모세라면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불의를 반대하고 그 불의에서 돌아서라 할 것입니다.
역사 안에 늘 있었던 강대국에 의해 왜곡되는 정의와 그들의 횡포, 예를 들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와 개발은 괜찮고, 힘없는 나라들의 핵무기와 개발은 막으려는 강대국의 횡포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분노하시고 막으실 것입니다.
물론 북한의 핵무기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도 핵 무장해야 한다고 하는 일부 주장에 대해서도 반대하실 겁니다.
아무튼, 저는 그리고 여러분은 민족주의자인지, 모세처럼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고,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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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광야 인생의 수련자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평생 수련장이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1-2)
끊임없는,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의 사랑이 있어 마음의 순수와 겸손의 관상가요 신비가입니다. 어제는 아름다운 시화詩畫가 잘 어울리는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란 시를 참 많이 나눴습니다. 무궁화꽃나무의 고백이지만 실은 제 고백이기도 합니다.
7월16일 아침 산책중 장마철 어둔 날 환하게 무수히 송이송이 피어나는 무궁화꽃들이 하늘 사랑의 끝없는 고백처럼 느껴졌고 순간 떠오른 시였습니다. 그런데 날마다 제 강론을 카톡으로 정리해 보내주는 자매님이 꽃과 시가 어울린 아름다운 시화를 만들어 보내줬고 자매님의 기발한 착안과 솜씨에 감사했고 감동했습니다. 얼마전 나눴지만 또 좋아서 나눕니다.
-일년내내
아니 평생을
날마다
위로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사랑을 배웠고
날마다
아래로
땅 어머니를 바라보며
흙의 겸손을 배웠습니다
“사랑합니다!”
때되니 하늘 사랑 고백하며
송이송이
환대의 사랑으로 환하게 끝없이 피어나는
무궁화꽃들
깊고 깊은 하늘 사랑의 고백이구나!-
깊고 고운 나라꽃 국화國花 무궁화꽃에 시가 참 잘 어울렸습니다. 7월부터 10월까지 약100일간 날마다 새롭게 줄기차게 피고 지는 무궁화꽃말은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은근, 끈기”라니 꽃말도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사람들인, 광야인생의 수련자들인 우리와 참 잘 어울립니다.
“멋지십니다. 깊고 깊은 하늘 사랑” 댓글의 카톡도 받았고, “감사합니다. 신부님이 무궁화꽃이네요!”라는 위로와 격려가 되는 메시지도 받았고, “시화 감사합니다. 시의 내용이 참으로 깊습니다.”라는 메시지에, “모든 사람에게 축복을 비는 기도같습니다.” “무궁화꽃 시화 너무 예쁘네요.”
이어 조카의 “무궁화 삼천리가 아버지 아이디였던거 같은데 마침 삼촌 신부님께서 시를 쓰셨네요.” 댓글 메시지에 예전 제 강론에 “사랑의 향기마을” 카페에서 꼭 느낌을 달아주던 조카의 아버지, 셋째 형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궁화 삼천리” 바로 사랑했던 지금도 그리운 셋째 형님의 아이디였고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애국가 후렴도 생각납니다. 오늘 시간되는 대로 애국가 4절까지 불러보고 가사도 익히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입니다. 날마다 평생을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며 넓고 깊은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때 마음의 순수입니다. 어디서나 하늘 사랑 배우라 눈만 들면 하늘입니다.
아, 바로 그 모범이 탈출기의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모세야 말로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두분 다 광야인생중 수련장 하느님을 일편단심 사랑했던 참 순수하고 겸손한 수련자였습니다. 두분 다 우리 국화 무궁화꽃을 닮았습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500권을 저술한 원동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국심愛國心”이라 답했던 박석무님의 지체없는 고백도 문득 생각납니다.
우리 역시 평생 예수님을 수련장으로 모신 평생 수련자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수련자로 선택하셨고 우리는 평생 예수님께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요 평생 수련장이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광야의 고독과 침묵은 축복입니다. 한밤중 강론 쓰는 시간이 저에겐 광야의 고독과 침묵중에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누구나 광야 인생을 살아갑니다. 참으로 예수님 수련장과 함께 할 때는 예수님을 닮아 성인이지만 예수님을 떠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 모세가 광야 인생의 축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광야에서의 수련중 정화되어 마음이 순수와 겸손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때가 됐을 때 모세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그 장구한 세월을 끝까지 겸손히 인내하며 기다렸던 것입니다. 불타는 떨기나무속에 나타난 주님입니다. 다음 장면은 읽을때마다 감동이요 새롭습니다. 아브라함을, 야곱을 다정하게 불렀던 하느님은 이번에는 모세를 다정하게 부르십니다. 주님과 모세의 숨막히는 긴박한 대화가 오고 갑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우리 역시 똑같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찾을 때 바로 오늘 지금 여기는 하느님을 만나는 꽃자리요 신을 벗어야 할 거룩한 땅이 됩니다.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고, 이어지는 하느님의 파견명령이요 서로 주고 받는 대화가 또 감동입니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광야에서의 관상축복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파견되어 하느님의 구원 활동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과 관상 친교의 꽃은 세상의 선교로 열매 맺어야 함을 배웁니다.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아, 이래서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수한 모세를 택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겸손히 비워졌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평생 당신의 수련자인 겸손하고 순수한 모세와 함께 하겠다는, 영원히 모세의 살아 있는 배경이 되어 주시겠다는 모세의 수련장이신 하느님의 확약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탈출기가 주님과 모세의 만남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순수와 겸손의 철부지 예수님에게 나타나신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 예수님의 감동에 벅찬 감사와 찬양의 고백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한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고독과 침묵의 광야 여정중 하느님 아버지를 만났기에 이런 감사와 찬양의 고백입니다. 대우가 대지입니다. 철부지들이 상징하는 바, 생각없는, 영혼없는 바보가 아니라 순수하고 겸손하고 지혜롭고 자비로운 거룩한 바보들입니다. 바로 모세는 물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에 속하고 무수한 교회의 성인성녀들이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고백이 우리에게도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됩니다. 모세를 능가하는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드님이자 하느님의 종으로 계시되는 예수님입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아드님의 은총이 있어야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데 이런면에서 예수님을 평생 수련장으로 모신 우리들은 참 행복한, 축복받은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 그리고 장구한 세월에 무수한 예언자들에 성인들에 이어 마침내 때가 되어 예수님이 나타났으니 복음의 이때가 오기를 지금까지 기다렸을 하느님 아버지의 인내와 겸손의 기다림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광야인생의 오아시스와 같은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의 수련장으로 평생 수련자들인 우리와 함께 지내고자 오십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2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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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아버지,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6)
<기도의 모범이신 예수님!>
오늘 복음(마태11,25-27)에서 우리는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의 모범이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구원의 길을 앞서 걸어가셨습니다. 참으로 낮아지셨고, 땀을 흘리셨고, 수난당하셨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이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이 순종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이셨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만나는데, 외딴 곳인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기도가 오늘 복음(감사와 찬미 기도)과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기도(탄원기도)와 당신 자신과 제자들과 믿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요한복음 17장(청원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나누는 진솔한 대화'입니다. '가식 없이 그리고 어떠한 틀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매우 아프고 힘들면 욥이나 토빗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울부짖으면서 하느님과 대화하고(탄원기도), 또 기뻐할 일이 있으면 감사와 찬미의 대화(기도)를 하고, 간청할 것이 있으면 온 마음을 다해 우리의 소망을 말씀드리는 것(청원기도)입니다.
구약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해 보면, '순종과 불순종의 역사'입니다.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역사'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느님께로 돌아와 간절하게 매달릴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주님, 불쌍한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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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VrM0Qx846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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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 25)
우리 곁에 있는
철부지
하나하나가 모여
하느님의
진실한 뜻을
드러냅니다.
마땅하고
당연하게
여겨야 할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시는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랑의 힘이며
그 사랑 앞에
감사를 배웁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하느님이
먼저입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자라납니다.
가본 적
없는 길을
사랑으로
걸어가시는
주님이십니다.
철부지들의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축을
이루시는 분을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사랑의
생명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와
슬기롭다의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니
모두가 사랑이며
모두가 생명입니다.
모든
사랑을 가로막는
구별과 차별을
봉헌합니다.
그 어떠한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사랑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랑의 흐름
영원한 기쁨을
막을 수 없습니다.
막는 사람만
어렵고
힘들 뿐입니다.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는
철부지들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받아주시기에
소중한 것이며
열어주시기에
영원한 것입니다.
이미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졌습니다.
모두가 가야 할
생명과 진리
사랑과 믿음
감사와 기쁨의
길이 먼저
철부지들 삶 안에
드러났습니다.
무엇 하나
사랑과 생명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을 감사를
노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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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 26)
오히려의
철부지와
참으로의
십자가 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비 그친 하늘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거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철부지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의
기쁨이며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낮아지는
기쁨입니다.
낮아질수록
더 깊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철부지들은
단순합니다.
어려운 것이 아닌
쉬운 것에서
기쁘게
출발합니다.
약하고 작으며
모자라고
부족한 데서
하느님의 뜻은
더욱 풍요롭습니다.
넘치는 것이 아닌
모자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버지의 선하신
참된 뜻입니다.
어리석은
십자가에서
오히려
선하신 뜻이
드러납니다.
철부지들처럼
기꺼이 아래로
내려올 수 있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철부지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은
기쁨이며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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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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