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
히브 13,15-21; 마르 6,30-34 / 연중 제4주간 토요일; 2025.2.8.
사람은 보는 대로 나아갑니다. 눈으로는 앞을 보면서 뒤로 가기는 어렵습니다. 우리 두뇌는 시각을 통해 수집되는 정보를 통해 가장 많은 판단 정보를 얻습니다. 이를 안목(眼目)이라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역사의식이라 하는데, 이는 선대의 조상들이 살아온 역사를 과연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기억은 대학과 공식 기관을 장악하고 있는 식민사학계와 재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민족사학계로 나누어집니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전통을 잇는 전자의 비중이 99%라면, 일제강점기에 민족적 각성으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난 후자는 1%도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리와 진실이 숫자로 결정될 수는 없습니다. 역사의 기억에 관한 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짜 놓은 식민사학적 관점이 현재 진행중입니다. 서구나 미국 등 여러 나라들의 극우파 세력이 민족주의 성향을 띠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로, 우리 나라의 극우파 세력이 친일 반민족적 성향을 띠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때문에 공동선을 실현해야 할 정의라는 가치가 정치 현실에서 실종되어 버린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초대교회 신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에 대한 체험을 바탕으로,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치열하게 실천했던 공동 생활의 역사를 반추하며 이렇게 다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제물을 바칩시다.”(히브 13,15)
신약성서 안에서 히브리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대사제로 고백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대목인 오늘 독서에서도 결론삼아 주는 권고가,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히브 13,15) 하는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히브 13,8)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권고의 뜻은 이러합니다. 예수의 제사는 소나 양을 제물로 삼아 불에 태워서 제사를 바치면 사람들의 죄가 대신 없어지리라고 여기던 고대 유다교의 소박하고 우매한 제사에 비하면 훨씬 합리적인 제사입니다. 우리를 무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지어내신 창조주께는 피조물로서 찬양을 드려야 할 존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그 찬양의 제물은 우리 자신의 인격이 담긴 노력이어야 하고 그 노력은 마땅히 우리가 하느님을 닮으려는 노력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 인격적인 제물이 선행과 나눔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또한 이 선행과 나눔을 제물로 바치는 데 있어서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이는 선행을 할 경우에 교회의 조직을 통해서 해야 한다거나 나눔을 행함에 있어서 교회의 전례가 이루어지는 공간 즉 성당에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교회적인 지향과 방식을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교회적인 지향과 방식으로 선행과 나눔을 행함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매우 구체적으로 가르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자선을 베풀 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라.”(마태 6,3)든지,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마태 6,20)든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너희도 거저 주어라.”(마태 10,8)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절합니다. 이렇듯 선행과 나눔의 동기가 세속적으로 오염되지 않고 순수해야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찬양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 관한 가장 정확한 기준은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선행과 나눔의 처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이 돌아와서 드리는 보고를 받으시고 수고했던 제자들더러 호숫가 외딴 곳으로 가서 쉬게 하셨습니다. 그 참에 밥 먹을 겨를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셔야 했던 예수님도 좀 쉬실 요량이셨겠지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본 군중이 또 쫓아왔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수의 군중이 쫓아왔고, 게다가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육로로 더 먼 길인데도 달음질이라도 쳤는지 배보다 더 먼저 다다랐을 정도로 군중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피곤한 제자들을 좀 쉬게 하시려던 예수님으로서는 난감하면서도 조금은 짜증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찬양 제물이 될 만한 희생적 노력이 발휘됩니다.
아마도 그 군중은 파견되었던 제자들을 따라서 스승을 뵙기도 하고 가르침도 직접 들으려 몰려들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마르 6,34) 같았던 그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모처럼 누리시려던 휴식을 미루시고 제자들이 이미 가르친 바를 보충해서 가르쳐주기 시작하셨고, 그러다가 끼니 때가 되자 빵의 기적까지 일으키셨습니다. 이런 수고와 기적 행위가 예수님으로서는 하느님께 바치신 찬양 제물이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바치셔야 했던 일은 생애 마지막에만 가능했었습니다. 평소에는 공생활 내내 이렇듯 시간을 내고 휴식을 희생해서 마음을 쓰고 정성을 들여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바를 채워주는 노력, 이것이 그분의 제사이자 찬양 제물이었습니다.
군중이 예수님의 가르침도 듣고자 모여 들었던 동기도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가르침보다 기적을 더 갈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막상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비유로 쉽게 가르치시면(마르 4,33)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계속해서 기적만을 요구하는 이기적이고 유치한 행태를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오죽 답답하셨으면 그 쉬운 비유마저도 알아듣지 못하니까, 나중에는 그 군중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마르 4,12) 하려고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일종의 반어법으로 말씀하셨겠습니까? 비유는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알아듣기 쉽게 하려고 동원하신 화법입니다. 그런데도 군중은 알아들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알아들을 의지가 없었습니다.
결국 제자들만 모이게 하신 최후의 만찬 때에 성찬례를 제정하신 일이 가장 결정적이고 근본적인 찬양 양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하느님을 찬양하고 희생과 노력으로 선행과 나눔을 행하셨던 당신의 삶을 기억하여 행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범에 따라서 우리는 미사를 거행하고 봉헌하며 참례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고 바쳐야 하는 가장 큰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상기해 보더라도 미사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바쳐드려야 할 제물은 우리의 일상 생활과 활동에서도 행한 선행과 나눔입니다. 이는 우리의 노력으로 번 돈의 일부를 바쳐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훨씬 더 중요해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거룩한 의무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는 것”(집회 35,4)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역사의식은 어떠합니까? 현실적으로, 신자들의 신앙 생활과 교회의 사목 및 선교 활동의 질과 수준은 예수님에 대한 기억에 정비례합니다. 근래에 냉담자들이 급증한 사태도, 사목과 선교 활동이 침체된 추세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나라의 정국도 극도로 혼란한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이 나라와 사회의 중심을 잡기 위해서라도 성경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선행과 나눔을 정성껏 실천합시다. 하느님께서 우리 나라와 교회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