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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편 1장 :자기야 식사하셔 !
나는 김미옥 처녀가 편하게 머물도록 그렇게 애써 노력하지 않습니다. 원래 나의 성격 탓인지 누구에게 부담스러운 행동은 전혀 하지않고 오히려 편하게 느끼도록 관심을 기울이며 배려하는 것이 전부터 내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남에게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며 상대방의 요것 조것을 생각하며 가지고 놀듯이 하는데,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오랜 시간동안에 축적된 신앙 때문입니다. 내가 이곳에서 매를 맞아 한때 하느님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항의 하는 마음으로 수염과 머리도 깎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러나 내 본심에는 늘 하느님과 성모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처녀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러니 우리 사이가 너무 편한 것입니다. 27년이란 나이 차이가 아무 필요 없습니다. 우리본인들이 그걸 느끼지 못하기에 처녀도 어느날 자기도 모르게 "자기야 식사하셔"라고 해놓고 "내 정신좀 봐! 자기를 자기라고 했네 호호호"라고 하는데 전에 내가 바로 그랬잖은가? 그리고 처녀가 말을 놓습니다. 이러세요 저러세요 하다가도 `이랬어? 저랬어?` 라고 아예 말을 놓습니다. 처녀는 보름이나 열흘마다 등에 배낭을 지고 시장을 다녀 오는데 하루가 걸립니다. 아침 9시나 10시에 6km의 덕풍걔곡을 2시간에 걸어나가고 풍곡에서 기다렸다가 버스를 타고 호산이나 통리의 5일장이나 태백까지 갔다오는데 시장을 둘러보고 점심 사먹고 다시 차를 타고 풍곡에 이르면 저녁때가 되고 , 때로는 풍곡 사람들과 정담을 나누다보면 밤이 되기 일수입니다. 그러면 처녀는 겁도 없이 깜깜한 칠흑같이 어두눈 6km의 인적 하나 없는 덕풍게곡을 걸어오기도 합니다. 나는 배낭에 손전등을 넣어주고 "자기야 풍곡에 오면 꼭 전화를 주어" "응 그럴께" 나는 하루 종일 처녀를 기다립니다. 나는 그동안 혼자 살아오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지금은 내가 변했는지 처녀가 보이지 않으면 찾으러 다니기도하고 찾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데 나만 그런게 아니고 처녀도 마찬가지 입니다. 저녁에 전화 벨이 울립니다. "따르릉" "여보세요?" "응 자기야 나 풍곡에 와 있어 이제 들어갈께" 얼마나 반갑고 아름다운 목소리인가? "응 어서와 내가 나갈께" "오지마" 그러나 나는 손전등을 들고 나갑니다. 이 덕풍계곡은 대 낮에도 꼬불고불한 계곡을 걷다보면 섬짓 놀랄때가 있고 무서움이 올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없는 깊은 산길이기 때문입니다. 시골의 밤은 해만 넘어가면 금방 어두워 지고 그믐밤 같은 날은 코 앞도 안 보입니다. 나는 손전등을 비추며 멀리 누가 오는가 살펴 봅니다. 처녀가 혹시 질이 좋지 않는 남자를 만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무인고도같은 이곳에서 처녀를 끌고 숲속으로 들어가면 큰일입니다. "하느님 처녀를 보호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며 계속 걸어갑니다. 이때 저쪽에서 한 점의 불빛을 발견하면 나는 손전등을 빙빙돌리며 신호를 보내는데 그러면 그쪽에서도 불빛이 빙글빙글 돕니다. "드디어 왔구나 !" 이때의 반가움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처녀에게 다가가자 처녀는 "오지말고 거기계셔"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가가서 손에 든 짐을 받아듭니다. "힘들었지?" "뭐가 힘들다고 그러세요" "무서웠지?" "하나님이 계신데 뭐가 무서워요?" 처녀는 개신교 신자이기에 자기방에서 매일 기도하며 찬송가를 부릅니다. 개신교에서는 하느님을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한분이신 하나님이란 뜻이지만 그것은 개신교의 고집입니다. 세계 공영어가 GOD 바로 하느님인데 유독 한국에서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나는 못마땅합니다.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
제7편 1장 끝
제7편 2장:처녀의 의중을 떠 보지만...
때 : 1991년 6월 24일
곳 : 강원도 삼척시 사직 성당
주례 신부 : 조 마태오
신랑 : 정세근 (임마누엘) 53세
수염이 가슴에 드리우고 머리칼이 어깨에 드리우고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오른쪽 다리가 쩗아 발 뒷꿈치가 한뺨이나 들려 있는데
제단 아래에 서 있습니다.
신부 : 김미옥 (엘리사벳.시튼) 26세
긴 머리칼이 등에서 찰랑이고
웨딩 드레스 대신 흰 레이스가 붙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면사포 대신 미사보를 머리에 쓰고
신랑 옆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주례 신부님의 축복
미사중에 우리 두 사람의 반지를 축성해 주시고
우리는 서로 반지를 끼워 줍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잘살 때나 못살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잃지말고..........."
신부님의 주레말씀에 나는 콧등이 시큰거려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예 그럴께요`하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 ♥ ♡♡♡
혼배미사를 마치고 우리는 삼척 버스 터미널로 와서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방금 결혼한 우리가 이 버스에 탔다는 것을 그 누가 알랴?
오직 하느님밖에 모르잖은가?
우리는 호산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풍곡에서 내린 후
6km의 덕풍계곡을 걸어갑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는거지?"
"집으로 신혼여행 가잖아요? 호호호"
"맞아 우리가 지금 가장 좋은 곳으로 신혼여행 가는 중이지 하하하"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서로를 바라봅니다.
"고마워"
"뭐가요?"
"나같은 부족한 사람을 선택해 주어서"
"원 별말씀을요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하지요"
나는 처음으로 아내를 껴 안았습니다.
내가 이 순간을 그동안 얼마나 바랬던가?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숱한 여성들을 사랑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루지 못할 사랑이었기에 혼자 마음속에 삭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맘껏사랑해 줄 아내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제7편 2장 끝
제7편 3장:신부님의 조언을 듣기위해 성당을 찾아가다.
1989년이 지나가고 1990년 새해가 돌아왔습니다. 처녀와 같이 지낸지 이미 5개월이 넘습니다. 이제는 정이 들때로 들어 잠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찾으러 다니고 그러다가 찾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처녀는 건너방에서 기도를 하고 나는 안방에서 기도를 하는데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마치 국 따로 밥 따로인것 처럼 한다는 것은 하느님이 보시기에 별로 아름답지 않아 보일 것입니다. 나는 처녀의 방으로 들어가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처녀는 개신교식의 기도 나는 천주교식의 기도를 같이 합니다. 그리고 개신교 찬송가를 부르다가 또 천주교 성가를 부릅니다. 나는 서울 수유리 삼양동 성당에서 일을 할때 가까운 곳에는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원이 있었고 수녀님들이 삼양동 성당의 미사에 자주 오십니다. 어느날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님이 내가 이곳에서 청년 성가대 어머니 성가대 어린이 성가대를 지도 하는 것을 보고 수녀님이 "임마누엘 선생님 우리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원에서는 전례를 아주 중요시하고 미사의 층게송과 알렐루야를 매일 성가로 부르는데 거기에 어울리는 곡 좀 만들어 주시겠습니까?"라고 하시는게 아닌가 ! 그래서 수녀님이 부탁한 다음 다음주의 성가를 만들어 주었더니 수녀님이 그 성가를 불러보고 너무 좋다고 하시며 그때부터 계속 부탁을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성당을 떠나 수유3동 2층 건물에서 피아노 학원을 할때 스승 예수의 제자 수녀님들 여러명에게 그냥 피아노를 가르쳐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미사곡도 4편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그 미사곡은 남녀혼성 4부 합창인데 수녀원에서는 남자가 없어 여성 3부로 만들어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고 내가 만든 성가로 미사 드리는 날 나를 초청하였습니다. 어느날은 내가 만든 미사곡으로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미사도 드렸고 수녀님들은 열심히 아주 잘 부르셨습니다. 수녀님들은 나에게 쏟는 열성도 아주 높아 내가 서울을 떠나 강원도 덕풍계곡으로 왔을때 수녀님들이 나를 찾아오시기도 하였습니다. 1990년 겨울이 지나고 봄도 다 지나갑니다. 나는 그동안 김미옥 처녀에게 몇번이나 넌지시 의중을 떠 보기도 하였지만 이상하게도 처녀는 침묵을 지킵니다. "우리의 일을 우리가 해결하기 어려울때는 남의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지요" ".............................."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남이 생각하기도 하지요" "조언이요?" 처음으로 반응을 보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신부님을 한 번 찾아가서 조언을 듣는게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신부님의 조언이요?" "신부님은 신자들의 집을 방문 하고, 또 매일 고해성사도 주시기에 신자들을 잘 알지요 아마 우리가 만나보면 어떤 좋은 조언을 주실 수도 있을겁니다." 그리하여 3월말인가 4월인가 우리는 삼척 사직성당 신부님을 찾아보기로 하였는데 가까운 태백의 장성 성당도 있지만 우리의 덕풍걔곡 관활은 삼척 사직성당의 관활입니다. 그래서 나는 처녀를 데리고 삼척으로 가는데 삼척시에는 성당이 두군데 입니다. 하나는 성내리 성당인데 시내 한 복판의 언덕에 오래된 성당이 고색창연한 위엄을 갖추고 있고 신자들도 많지만 사직성당은 성당이 생긴지 역사가 짧고 또 가난한 교구와 가난한 동내여서 그런지 성당도 별로 크지도 않고 네모반듯한 성당입니다. |
제7편 3장 끝
제7편 4장:좋습니다. 그러면 결혼하면 될께 아닙니까?
우리가 성당에 들어가 조배한 후 사제관의 문을 두들기자 젊은 신부님이 나오시더니 "어서오세요 저는 조 마태오 신부입니다."라고 하시며 손을 내 밉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세근 임마누엘이고, 이쪽은 김미옥 개신교 신자 입니다." "들어오세요" 우리는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신부님이 손수 차까지 대접해 주시며 "뭘 도와드릴까요?"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순간부터 모두 이야기를 해 드리자 신부님은 "정 임마누엘 씨는 여기에 계신 김미옥씨를 사랑합니까?"라고 느닷없이 질문을 하여 나는 깜짝 놀라 당황합니다. "예? 아 예" 나는 나도 모르게 그렇다고 얼떨결에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미옥에게 "좋습니다. 김미옥씨는 여기에 게신 정 임마누넬씨를 사랑합니까?" 처녀는 이미 나의 입으로부터 고백을 들어서 그런지 작은 목소리로 "네"라고 합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결혼하면 될께 아닙니까?" "예?" "네?" 우리는 놀라 동시에 대답을 합니다. "김미옥씨는 개신교 신자인데 천주교로 개종할 의사가 있습니까?" "네" "좋습니다.그러면 교리시간에 성당에 나와 교리를 배워야 하는데, 집이 멀어 그건 불가능 하지만, 우리 천주교회에서는 그런 분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잘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집으로 `통신교리책`자를 보내 드릴터이니 , 열심히 공무하여 그 안에 있는 문제의 답안지를 작성하여 저에게 보내주시면 됩니다. 어때요 할 수 있겠어요?" "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전혀 뜻밖의 해결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참으로 신부님의 단도직입적은 판단과 결정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상상도 못할 해결책을 그렇게 간단히 주실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부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부부흉내를 낼 수는 없잖은가? 신부님은 통신교리책자를 보내 주셨고 처녀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나도 옆에서 도와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미소한 우리는 그저 순명만 할 뿐입니다. |
제7편 4장 끝
제7편 5장:처녀가 세례를 받다. 처녀는 열심히 공부하여 답안지를 작성하여 신부님께 보냅니다. 그리고 6월에 성당에 가서`엘리사벳.시튼` 미국 성녀이 이름으로 세레를 받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세례의 의미를 알지만 신자가 아닌 분들을 위해 잠시 세례의 뜻을 올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라도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공생활 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지 않았는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이 죄를 모두 사해 주시고 은총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 후에 짓는 죄는 고해성사로 씻어내도록 고해성사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 주위에 위험에 처해 죽어가는 사람을 봅니다. 그의 영혼이 구원되느냐 못하느냐 기로에 서 있는 아주 절박한 순간이기에 누구라도 세례주는 방법만 알면 그에게 세례를 줄 수 있습니다. 맑은 물을 조금 준비하여 그의 이마를 씻으며 그에게 성인의 이름을 하나 지어주고 남자면 베드로나 바오로나 안드레아나 혹 여자라면 마리아 세실리아 안나등의 이름을 지어 주고 "김안나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라고 하면 다 끝이 난 것입니다. 나중에 그의 이름과 본명과 주소등을 작성하여 관할 신부님에게 보고하면 됩니다. 나의 장인도 정신을 잃었을 때 아내가 달려가서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악하던 장인이 구원되게 한 것입니다. * * * 삼척 사직성당의 밖의 게시판에는 이런 혼배공시가 나 붙었습니다. 혼배공시 이 두 사람은 1991년 6월 24일에 결혼하고저 하오니 만일 이들이 결혼해서는 안될 사유를 아시는 분들은 교회 당국에 고발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주의깊게 바라보실 것은 6월 24일 이라는 날짜입니다. 1989년 6월 24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날 밤중에 두 명의 청년들이 찾아와서 아버지뻘 되는 나를 개패듯이하여 내가 거의 사경에 이르도록 한 것이고 나는 간신히 살아나 그들을 고발 하여 겁을 주다가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나는 버릇없는 그들을 한 번 혼내주려고 한 것이지 정말 벌 주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와서 용서나 감사따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아주 지겨운 모습이 아닌가? 하느님은 그의 아버지를 나처럼 누구에게 맞아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징벌이 아니고 뭔가? 그리고 내가 두들겨 맞던 그날에 하느님께서는 나와 김미옥이 부부가 되도록 축복을 해 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기적의 은총인가? 제7편 5장 끝 제7편 6장:혼 배 미 사 (천주교 결혼식) |
때 : 1991년 6월 24일
곳 : 강원도 삼척시 사직 성당
주례 신부 : 조 마태오
신랑 : 정세근 (임마누엘) 53세
수염이 가슴에 드리우고 머리칼이 어깨에 드리우고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고
오른쪽 다리가 쩗아 발 뒷꿈치가 한뺨이나 들려 있는데
제단 아래에 서 있습니다.
신부 : 김미옥 (엘리사벳.시튼) 26세
긴 머리칼이 등에서 찰랑이고
웨딩 드레스 대신 흰 레이스가 붙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면사포 대신 미사보를 머리에 쓰고
신랑 옆에 나란히 서 있습니다.
주례 신부님의 축복
미사중에 우리 두 사람의 반지를 축성해 주시고
우리는 서로 반지를 끼워 줍니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잘살 때나 못살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의를 잃지말고..........."
신부님의 주레말씀에 나는 콧등이 시큰거려 눈물을 흘리며 속으로
`예 그럴께요`하며 머리를 조아립니다.
♡♡♡ ♥ ♡♡♡
혼배미사를 마치고 우리는 삼척 버스 터미널로 와서 남쪽으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방금 결혼한 우리가 이 버스에 탔다는 것을 그 누가 알랴?
오직 하느님밖에 모르잖은가?
우리는 호산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풍곡에서 내린 후
6km의 덕풍계곡을 걸어갑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는거지?"
"집으로 신혼여행 가잖아요? 호호호"
"맞아 우리가 지금 가장 좋은 곳으로 신혼여행 가는 중이지 하하하"
집에 돌아와서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서로를 바라봅니다.
"고마워"
"뭐가요?"
"나같은 부족한 사람을 선택해 주어서"
"원 별말씀을요 제가 오히려 더 감사하지요"
나는 처음으로 아내를 껴 안았습니다.
내가 이 순간을 그동안 얼마나 바랬던가?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숱한 여성들을 사랑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루지 못할 사랑이었기에 혼자 마음속에 삭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맘껏사랑해 줄 아내가 생겼으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제7편 6장 끝
계속해서 제7편 7장이 연재되오니 많은 구독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4월18일(목) 형광등등 씀
캐나다 몬트리올 累家에서
2022년4월19일(화)에
청송(靑松) 카페지기 베드로 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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