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9일(목)
* 시작 기도
주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가 있습니다.
‘함께지어져가는교회’, 이 성구를 따라 교회의 이름을 지었고 내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넓은 문보다 좁은 문을 지향하며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교회입니다.
오늘날 찾아보기 쉽지 않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숫자는 비록 몇 명 안 되나, 작지만 영적으로 큰 교회임을 믿습니다.
여기서 선포되는 복음이 그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양식이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심령을 만지사 성령 안에서 정결함을 유지하게 하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 하루도 새 사람으로 살기 원하오니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엡 2:11-22
제목 : 더 이상 나그네나 손님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의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 나의 묵상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들이었다.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서 신음하며 화마에 고통당하는 그런 신세 말이다.
이런 우리는 바로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우리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구덩이 속에서 건져내시고 그을린 곳을 씻어주시며, 상처 난 곳을 싸매 주시고 게다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기까지 하셨다.
나의 어떠한 수고도 노력도 애씀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하신다.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헌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만드신 바’는 헬라어로 ‘포이에마’로써 영어의 ‘poem’이 여기서 나왔다.
이는 하나님이 쓰신 詩로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최고의 걸작품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신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선한 일’이란 세상에 속한 일이 아니다.
땅에 속하여 사라질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인 ‘영생’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영생을 위하여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또한 포이에마로 지으신 우리들에게도 영생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영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복음’이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아들과 함께 약속하신 일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런 일을 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이었던 우리는 하나님도 몰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할례 받지 못한 자’라는 놀림까지 받아야 했다.
그런 우리는 그리스도를 몰랐기 때문에 약속의 언약 밖에 있었으며 오직 세상에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고아들이었다.
그런 우리를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심으로 하나님과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전에는 유대인의 놀림을 받는 천덕꾸러기 같은 존재였지만, 이제는 그들과 주 안에서 하나가 되어 진짜 화목한 형제가 되었다.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되게 하셨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도 온전히 화목하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도,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에도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한 형제가 되어 함께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다.
더 이상 낯선 나그네나 쭈뼛거리는 손님이 아니다.
우리는 성도요 하늘의 시민이며,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의 한 가족이다.
가족은 가정을 이루는 근간이다.
가정은 house가 아니라 home을 말한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닦아 놓은 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다.
이것은 피를 흘리며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사도와 선지자들에 의해 아들의 생명을 얻은 우리들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이신 주님은 그 성전의 모퉁이돌이 되어 주셨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한 가정(home)이요, 성전인 우리는 서로서로 연결되어 점점 자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이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시골 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생과 청년 시절에는 도시로 나와서 섬기던 교회에서도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결혼을 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교회를 떠나서는 나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교회와 거의 한 몸처럼 생활하였다.
직장 생활을 할 때도 그렇고, 개인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교회 일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나 많은 성도들에게 신앙이 참 좋다는 인정을 받으면서 살았다.
이렇게 신앙이 좋은 나였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는 넘어지곤 하였다.
그것은 외적으로 보기에는 제법 신앙이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신앙의 내공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공이란 참된 복음을 말한다.
사실 나는 청년 시절까지 복음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복음에 대해서 자세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들어 본 적이 없다.
물론 목사님들은 복음을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는 복음이 무엇인지 남아 있지 않았다.
청년 때까지는 몸으로 섬기고 열심히 교회에 나오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믿음이요 또한 좋은 신앙인 줄 알았다.
신앙 좋은 사람으로는 인정받으면서도 정작 내 안의 복음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였다.
이것에 대해서 갈급함도 없었고 갈등도 없었으며 더욱이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외적 섬김으로도 충분히 신앙생활이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철저히 유대주의화 되어 갔다.
주일은 절대 어기면 안 되는 일이었으며, 술 담배는 나의 적이었고, 음란과 정욕은 개 같은 일이었다.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등부 대학부를 섬길 때, 본 교회 장로님 권사님들의 자녀들이 많은 경우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정죄하고 손가락질 하곤 하였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그들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개 같은 이방인들이었다.
나는 이렇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였다.
그런데 결혼하고 어른이 되어서 내가 정해놓은 율법적 규례들에 내가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고민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데 왜 이렇게 자꾸만 넘어지는 것일까?”
복음을 알고 아들의 생명을 얻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이 내게는 복이었다.
만약 넘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진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되어 ‘하나님처럼’이라는 자기 義로 가득 찬 유대인으로 굳어져 갔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과 갈등 속에서 복음을 듣고 복음을 알았지만 넘어지는 것은 여전하였다.
물론 복음을 안다고 해서 그 순간 180도 바뀌는 것은 아니다.
거지로 살던 그 습성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런 습관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십자가 복음만 아니라 무덤에 장사됨과 부활 그리고 현현 등 통합복음이 성경에 나와 있음에도(고전 15:3-5),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에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죄인이 아니며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기뻐하였다.
그에 대한 자유와 기쁨이 나를 춤추게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십자가로 죄사함을 받고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거기서 다시 세상의 것, 땅의 것, 만물 안의 것을 구하며 그것이 내게 복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땅의 것을 구하는 것에서 만물 위의 것을 구하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한, 구원받은 자라도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사는 이 땅에서는 보란 듯이 성공하여 윤택하고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내 맘대로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경험하는 실제이다.
영원한 생명은 지금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실재여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그 구원과 영생의 감격을 오늘 이 시간에도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완전한 구원이 성취되는 그 날을 기대한다.
이제는 구원에서 멀어진 자도 아니고 나그네나 손님도 아니다.
초대받지 못한 손님은 잔치 자리에 와서도 자기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면서 쭈뼛거리며 서성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만물 위에 속한 나라의 한 가족이다.
그리스도께서 모퉁이돌이 되셔서 지으신 영원한 나라요 성전이다.
이런 성전된 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룩한 영생의 공동체가 되며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이다.
(고전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제 나는 이런 성전이 되어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죄로 인하여 죽었던 나를 살리시고 주의 자녀 삼아주셨으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나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나를 성전 삼아주셨사오니 날마다 거룩으로 지어지는 아름다운 성전이 되게 하옵소서.
금과 은으로 장식한 솔로몬의 성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주님의 귀한 보혈로 지은 성전이기에 이 성전은 돈으로도 세상의 값진 보화로도 살 수 없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께서 창세전의 세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를 십자가로 이끄시고 영생의 나라,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음을 믿습니다.
아직 몸이 구속되지 않았기에 흑암의 권세 아래 있지만, 이 세상에서도 주님이 보았던 그 영광을 보며 날마다 죄와 싸워 이기게 하시고 오직 주의 보혈의 능력으로 날 지키소서.
소망 중에 인내하며 주의 나라를 기다립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