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그분의 손이 닿은 사람마다 나았다
창세 1,11-19; 마르 6,53-56 / 성녀 스콜라스티카 기념일; 2025.2.10.
12.3 비상계엄으로 내란수괴범이 된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때부터 대한민국에는 혼돈이 시작되었습니다. 외교애서는 국격이 추락햇고, 안보에서는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으며, 경제 또한 불안정해졌는가 하면 민생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민주적 질서가 실종된 가운데 정의는 사라졌습니다. 무속에 의지한 정치적 판단이 난무하면서 정치검찰의 무도한 횡포가 인권을 짓밟았습니다. 공동선에 눈 먼 언론이 무속과 검찰이 연합된 행태를 두둔하는 바람에 국민 여론도 휘청거렸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선진국 대한민국이 어느 새 전 세계인들의 조롱을 받는 후진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국회에서 대통령이 탄핵되고 헌법재판소에서 파면 심판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탄생시키기 위한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인권과 정의를 짓밟는 정치 검찰을 해체시키고,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조작하기까지 하는 언론을 넘어서고자 하는 주권자들이 제7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마터면 무너질뻔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놀랄 만큼 빠른 회복력으로 되살려 놓는 한국인들의 저력에 세계 여론은 찬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듯 역동적인 민주 사회를 현대사에서는 본 적이 없는 까닭입니다. 민주주의의 본 고장이라 일컫던 유럽과 미국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하면 약탈과 방화 등 폭력이 난무하는데, 한국에서는 축제 같은 시위가 벌어지면서 거리 청소까지 깨끗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극우 난동자들이 법원까지 공격하는 일도 있기는 하지만, 이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보듯이, 한국 사회를 대청소하는 계기를 제공할 따름입니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 사회는 격변 속에서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어둠이 심연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혼돈 속에서 땅도 지금과 같은 꼴을 갖추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창조는 혼돈 속에서 시작되었고, 빛도 어둠 속에서 비추이기 시작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에는 창조의 메아리가 아주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자 그렇게 되었다.”는 창세기의 기록처럼, 하시는 말씀마다 뜻대로 실현되게 만드는 권위를 느끼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말씀의 권위 못지않게 손길마다에서도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으로 몰려든 군중 속에서 아픈 사람들이 다가오면 손을 대어서 성령의 기운을 전해주고자 하셨고, 그렇게 손을 대신 사람마다 아팠던 증상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열려서 하느님께로 향하는 믿음이 우러났습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마르코는, “구원을 받았다.”고 썼습니다. 질병을 생리적으로 치유함은 물론, 정신도 기적적 치유 권능을 보여주신 하느님께로 열리는 한편 하느님과 친교를 회복하는 영적인 진보를 이룩했을 경우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런 치유 기적 기사의 표현은 하늘의 기운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에게 닿았음을 의미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인류는 밤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다가 본격적인 천문관측으로 발달시켰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과학지식이 축적되기 전에도 관찰의 열의와 관측의 전문성은 상당히 높았다는 증거가, 단군세기(檀君世記) 같은 문헌을 비롯해서 첨성대(瞻星臺)나 혼천의(渾天儀) 같은 유물들 심지어 별자리를 정교하게 새겨 놓은 수많은 고인돌에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집트나 마야 문명의 피라밋의 건축양식에서도 입증됩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한 동방박사들도 별을 관측하던 점성술 학자들이었지요. 분명히 우주와 천체의 작용은 지구의 땅에 영향을 미쳐왔고 그 대표적인 것이 해와 달입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첫 절이,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해 놓은 것은, 천체의 움직임이 기후와 기상의 작용으로 지상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지사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인류나 개인의 운명이 암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므로 숭배할 대상은 아니라는 진리를, 아직 인격신 개념이 없이 태양신을 섬기던 고대 인류에게 처음으로 인격신을 천명하는 일종의 문명선언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이 선언에 따라서, 하늘의 기운이 땅에 닿도록 끌어당기고, 땅에 닿은 하늘의 기운을 다시 사람에게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분이 선포하시는 복음이었습니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을 비추던 큰 빛은 태양이고, 작은 빛은 달이었지만, 우주 전체의 어마무시한 암흑에 비하면 이 크고 작은 빛은 촛불 한 자루가 비추는 것 같은 희미한 빛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늘의 기운으로 아픈 사람을 낫게 해 주시고, 치유를 넘어 구원으로까지 베푸신 행적은 물리적인 차원에서 생성 소멸하는 우주의 그 어떠한 빛보다도 인간에게 밝은 빛을 던져주는 일로서 인격적인 차원에서는 훨씬 더 귀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당신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신통한 능력으로써 발휘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믿으면, 그리고 그 하느님의 영을 받으면 발휘할 수 있는 하늘의 기운이었고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비출 수 있는 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성령의 기운을 사람들에게 전해주신 창조작업을 계승하는 일이 성사입니다. 모든 성사는 성령의 기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대한 개방성이 성사생활의 기초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사교리에서는 성사의 사효성(事效性)과 인효성(人效性)에 대해 가르칩니다. 성사의 사효성이란 성사 그 자체의 힘으로 효력을 지니는 것을 말합니다. 성사는 집전자와 수혜자의 인간적 조건 이전에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즉 하늘의 기운을 전해주시고 이를 당신 제자들에게도 허락하셨기 때문에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하지만 성사의 인효성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성사는 요술이 아니어서 성사의 집전자와 수혜자의 신앙와 인격 그리고 실천적 노력에 의해 그 열매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은 신자들이라 하더라도 그 삶의 실천적 노력 여하에 따라서 세상에 비추는 빛과 전하는 기운은 천차만별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기운을 나누어 주신 하느님께 경배드리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자세로 성사를 받아야 하고 그 은총에 따라 자신의 삶에서 보이게끔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시편 95,6-7, 입당송).
이와 마찬가지로 묵주와 상본을 비롯한 성물과 예수상과 성모상을 비롯한 성상에 대해서도 부적(符籍)이나 실내 장식품처럼 대해서는 곤란합니다. 그 성물들과 성상들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생활에서 기도할 자극을 주고, 그리하여 이미 성사에서 받은 성령의 기운을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통하여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물과 성상 등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는 행위를 준성사(準聖事)라고 하여 성령의 기운을 직접 받는 성사하고 다르다고 구분하지만 성령과 관련 없는 일상 행위와도 구분하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성사를 받을 때 예수님의 손이 성령의 기운으로 닿았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하여 구원된 여러분도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여러분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천문관측의 경험에서 깨달음을 얻은 결과로 이 나라의 건국이념으로 삼은 뜻, 즉 하늘의 기운으로 인간에게 널리 이롭게 해야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과도 상통합니다. 이러한 진리 추구의 전통이 근세에 천주교 신앙으로 꽃 피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찾던 평신도 구도자들에 의해서였고, 이 자발적 교회 설립 이후에 중국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하기 전까지 이벽과 이승훈, 권철신과 권일신, 정약전과 정약종과 정약용 등 천진암 강학회 출신 평신도 선비들이 지녔던 뜨거운 성사적 열정 덕분에 1784년부터 1800년까지 불과 십여 년 동안 입교자가 만여 명에 이르는 놀라운 선교적 성과를 거두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이 향후 우리 교회와 민족의 앞날까지도 긍정적으로 내다보게 합니다. 그리하여 신앙인들의 손길이 우리 사회 이웃들을 이롭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홍익인간의 뜻을 받들어 우리 대한민국의 문명이 널리 지구촌의 이웃들까지도 널리 이롭게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