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 주위 실업자는 통계보다 많아 보이는가?
실업자로 통계 분류되는 조건 까다로워
20대 5명 중 1명이 사실상 실업 상태
청년들 직접 나서 정책 비전 요구해야
다음 세 명은 오늘 통계청에서 전화를 받고 실업에 관한 설문에 답하였다. 이 셋 중 누가 실업자일까?
A는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 30대 여성인데 두 달 전부터 아이가 유아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한다. 구인광고를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는데 아직은 적당한 자리가 없어 초조하다. 취업을 포기한 B는 제발 정신 차리고 일을 하라는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매일 저녁 세 시간씩 부모님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서빙을 돕고 있다. 급여는 따로 받지 않는다. 낮에는 주로 게임으로 시간을 보낸다. 중소기업 사원이던 C는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졸지에 직장을 잃었다. 차마 가족에게 말은 못하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고 있다. 지난주 화요일 전단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가 한 시간 만에 그만두었는데 그래도 그날 점심값은 벌었다.
A는 실업자도 취업자도 아니다. 만일 A가 지난 4주 동안 보다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면 실업자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구인광고를 낸 업체에 전화를 하거나 방문만 해도 적극적 구직활동을 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단순히 구인광고만 찾아보는 것은 적극적 구직활동이 아니다. A처럼 취업자도 실업자도 아닌 사람은 비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된다.
B는 취업자다. 지난주 일주일간 부모님 식당에서 모두 21시간을 일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경영하는 사업체나 농장에서 조사대상기간(조사가 실시된 날의 전주 일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중 18시간 이상 일했으면 보수가 전혀 없었어도 취업자로 분류된다. 만일 B가 18시간 미만 일했고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다면 실업자로 분류되었을 것이다. 한편 18시간 미만 일했고 적극적 구직활동이 없었다면 A처럼 비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된다.
C도 실업자가 아니라 취업자다. 조사대상기간에 수입을 목적으로 한 시간 이상 일했기 때문이다. 만일 C가 전단 돌리는 일마저 하지 않았다면 실업자로 분류될 것이다. C는 A와 달리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실업자는 ‘조사대상기간에 수입 있는 일을 하지 않았고, 지난 4주간 일자리를 찾아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일자리가 주어지면 즉시 취업이 가능한 사람’을 말한다. 실업자가 되는 조건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국제적으로 통일된 기준이다.) 우리 눈에는 A, B, C 모두 실업자로 보이지만, 그들은 실업자 통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통계청은 이런 괴리를 고려하여 2015년부터 세 가지 종류의 고용보조지표라는 것을 발표하고 있다. 실업자를 보다 광범위하게 정의한 것인 셈인데, 그중 가장 광범위한 고용보조지표3은 적극적 구직활동이 없었더라도 취업을 원하는 사람과, 실제 취업 시간이 36시간 미만인데 추가 취업을 원하는 사람을 둘 다 실업자로 분류한다. 이 지표에서는 A와 C가 실업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B는 여전히 취업자다.
올해 3월 한국 20대 청년의 실업률은 7.0%였지만 고용보조지표3은 20.1%로 그 세 배였다. 예년보다 개선되기는 했지만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이 실업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B와 같은 케이스 외에 고용보조지표3도 놓치고 있는 실업자가 적지 않다. 그들 중 일부는 취업에 실패해서 졸업을 미루고 있는 학생들이다.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한 그들은 실업자가 아니라 비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 주위 실업자는 늘 통계보다 많아 보인다.
2017년 대선 때는 모든 유력 후보가 청년 실업의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섰는데, 올해 대선에서는 청년실업이 주요 의제에서 한참이나 밀려나 있었다. 청년들 자신조차도 젠더 문제에 몰두해 취업난에 대한 대책을 이슈로 부각시키지 못했다. 취업난이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역대 정부가 모두 호언장담했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자 아예 포기한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든다. 이래서는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다. 당사자인 청년들이라도 나서서 대책을 촉구해야 한다. 조국의 시간, 검증의 시간이 지나니 이제 검수완박의 시간이다. 정치인들은 청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권력을 위해서 싸운다. 청년들은 그 싸움에 선동되지 말고 청년 자신들을 위한 정책 비전을 요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상준 객원논설위원·와세다대 국제학술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