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입니다. 세상 곳곳에 노랑, 빨강, 분홍 꽃들이 피어나고 초록 잎도 가득합니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봄도, 꽃도, 살랑살랑한 봄바람도, 계절의 변화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늘 만나는 사별 가족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이별하고 ‘따라 죽지 못하고 살아 내야만 하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사별 가족 모임을 하다보면 아직도 찬바람이 몰아치는 3월 초에 얇은 블라우스에 조끼 하나만을 걸치고 오는 분도 있습니다. 추위도 느끼지 못하는 듯합니다. 마음은 차가운 한겨울,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계절에 늘 겨울인 분들입니다.
칠십을 훨씬 넘긴 나이, 결혼생활을 60년 이상 하시다가 이별한 분들도 오십니다. 그 분들은 오셔서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이렇게 나이가 먹어 사별했는데 어디 가서 말도 못한다’, ‘살만큼 살다 헤어졌는데 왜 그리 슬퍼하느냐고 자식들까지 뭐라 한다며 모임에 오신 것을 창피해 하기도 하십니다. 오래 살다가 이별했으니까, 충분히 사랑하다 헤어졌으니까, 세상에 나와 할 일을 다 하고 이별을 했으니 슬프지 않을까요? 슬프면 안 될까요?
결혼 1주년을 하루 앞둔 젊은 아빠가 임종 중에 있었습니다. 아기는 태어난 지 열흘도 채 안 되었고, 아내는 제왕절개한 수술 상처에서 아직 실밥도 제거하지 않은 상태로 그 젊은 남편 곁에 있었습니다. 갓 세 명이 된 그 가족을 지켜보는 다른 가족, 친척, 병원 직원들의 마음은 한결같았습니다. 아무리 호스피스가 누구에게나 좋은 이별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애쓴다고는 하지만 정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 시간을 조금 미루어 달라고…
그런 안타까운 관심이 이 가족에게 기울여져 있을 때 그 옆 병실에서는 63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셨던 할머님이 임종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참 오랫동안 사셨으니…’, ‘백년해로 하셨으니 …’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자녀들도 이별을 아쉬워했지만 그런 마음을 부모님을, 그리고 서로를 위로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아셨는지, 그 방의 할아버님이 나오셔서 복도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저것(젊은 부부)들은 1년어치 정(情)밖에 안 들었지만 난 63년 어치의 정(情)을 어쩌란 말이냐?“며 통곡을 하셨습니다.
상대적인 슬픔이란 없습니다. 사별을 경험하신 분들에게는 절대적인 슬픔,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온 우주도 끌어안지 못할 가장 큰 슬픔을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 손영순 글(까리따스 수녀 마리아의 작은 자매회) -
첫댓글 이별의 아픔에 어디 더하고 덜하고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만나면서 이미 정리(定離)되어 있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 온 것은 아닐런지....
한식(寒食) 즈음이라 오늘 부모님 산소를 다녀 왔습니다.
역설적으로 죽은 이들의 공간에서 '바람직한' 삶의 자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아버지 얼굴도 기억 못 한 답니다. 워낙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서. 모든 분들이 지하든 천상이든 잘 계시겠지요.^^
아, 그랬었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