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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절기를 지키라
출애굽기 12:1-14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와 함께 하길 빈다.
오늘부터 창조절을 시작한다. 창조절은 그리스도교 2천년 역사 중 가장 최근에 정한 절기이다.
성령강림절을 전, 후반부로 나누어 9월부터는 창조절로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기억하고, 창조질서 회복을 실천하려는 교회의 의지를 담고 있다.
창조절은 아직 세계교회가 공인한 절기는 아니다. 그러나 공감대가 점점 확산되고 있다. 생명의 존엄을 지키고, 평화를 회복시키는 절기이다. 창조절 제정에는 그만큼 우리 시대가 부닥치게 된 현실적 고민이 담겨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자연의 신음소리와 그들이 보내오는 위기 신호에 둔감해서는 안 된다. 지구공동체의 불안한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명은 보호되고,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는 새로운 절기를 지켜야 한다. 창조절을 지키는 일은 그런 생명의 지혜에 참여하는 일이다. 창조절을 지키는 일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날마다 창조절이다.
1)
본문은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백미인 출애굽 사건이다. 특히 긴장과 적막이 감도는 출애굽 전야의 긴박한 밤을 증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셨다. 그 신음은 바로와 온갖 애굽의 우상에 억압 받는 히브리인들의 울부짖음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애굽을 심판하신다.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유와 생명을 허락하신다.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12).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애굽의 신은 누구인가? 먼저 애굽의 바로가 심판받아야 할 신이었다.
애굽의 최고 통치자 바로는 제국을 호령하면서 마치 신처럼 행세한다. 마치 인격화된 신처럼 행세하면서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취급하고, 억압하였다. 이제 하나님께서 제국의 지배자 바로를 심판하신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고센 땅에 붙어사는 소수민족에 불과하다. 그들은 바로의 말 한마디에 죽고,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 보잘 것없는 히브리인들이 믿는 신, 그 여호와가 최고의 권력자 바로를 심판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굽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소수 민족들, 이방인과 뜨내기들은 애굽의 바로를 신처럼 받들었다. 그런 노예의 처지를 자신의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다.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먼저 신을 자처하는 제국의 통치자 바로를 심판하시고,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을 믿었다.
과연 누가 애굽을 심판한다고? 그것이 말이 되는가? 누가 바로를 심판한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심판주의 위치에 있던 바로가, 제국을 호령하던 바로가 이제 심판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모세는 이제 여호와께서 애굽과 바로를 심판하신다고 전한다. 여호와가 심판하시려는 것은 제국의 죽음의 질서이고, 신적 존재를 자처하는 바로의 교만이다. 그러기에 출애굽의 심판 경고는 지금도 죽음과 억압과 강제노역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다.
여호와께서 심판하신다! 출애굽의 메시지는 장엄한 해방의 대서사시이다.
모세를 앞세워 행하신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은 모두 애굽의 바로와 우상들을 겨냥하고 있다. 먼저 행한 아홉 가지 재앙은 애굽에서 가장 비중 있는 자연현상인 나일강과 태양에 관계있다. 둘은 애굽 종교에서 인격화된 신이므로 애굽인들에게는 매우 굴욕적이다.
애굽에 내린 재앙은 모든 신에 대한 심판을 통해 여호와의 우주적 주권을 선포하고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 일상화된 죽음, 억압과 부자유, 우상의 문화로 가득한 제국을 징벌하여 그 고통과 탄식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히브리 노예들의 신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그들의 호소에 대해 하나님은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나의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다. 나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다. 나를 억압하고,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나를 죽음의 간섭과 지배에 붙잡아 두고, 생명의 존엄을 위협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하라!
그리고 열 번째 재앙인 애굽의 장자와 맏배의 죽임사건은 바로에게 마지막 심판이고, 이스라엘에게 해방의 출발이다. 유월절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밤이다. 출애굽의 전야제이다. 그 밤에 애굽인은 악몽을 꾸고, 히브리인은 잔치를 벌인다. 이 밤은 하나님 백성에게 영원히 기억하고, 기념될 출애굽의 밤이었다.
2)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전개된다. 그것은 새로운 절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출애굽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제나 새달이었다. 유월절은 모든 해의 첫 달이 되었다.
“이 달을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2).
이것은 그들이 종의 신세에서 하나님의 백성이란 신분으로 다시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날 밤에 1년 된 어린양이나 염소를 잡아 열 명 정도의 한 가족이 함께 먹는다. 이 자리에는 외국인과 뜨내기도 초대받는다. 실제로 출애굽 사건에는 당시 많은 외국인도 참여하였다.
어린양의 피는 유월절 희생의 핵심이었다. 그 밤에 어린양의 피는 하나님의 구원의 중요한 표적이 되었다.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7).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13).
피를 대문의 문설주와 그 위 가로대 인방에 바르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뜻한다. 심판이 그 집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날 밤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맛짜)을 먹어야 한다. 워낙 탈출 상황이 급해 누룩을 넣고 반죽을 부풀릴 새도 없다. 경황없이 도망치느라 음식을 장만할 새가 없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누룩은 죄와 옛 생활의 상징이다.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은 구원을 받은 거룩한 자가 먹을 신령한 음식이다. 무교병은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
또 구운 고기와 함께 쓴나물(마롤)을 먹는다. 애굽에 살던 조상들은 온갖 강제노동으로 고통을 겼었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그런 애굽의 쓰라린 생활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후손들도 조상들의 고난을 겸손히 돌아보라는 의미이다.
유월절 음식을 먹는 사람들은 마치 출정하는 군인들처럼, 먼 길을 떠나야 할 순례자처럼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어야(11) 한다.
그 밤에 하나님은 애굽의 왕궁과 집집마다 심판하셨다. 그 밤에 죽음과 저주의 재앙이 들이 닥쳤다. 그런데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의 가정은 그 죽음의 재앙이 건너뛰었다.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13).
이것이 유월절의 실체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죽음을 건너뛰고, 생명을 보호하는 구원의 피였다. 애굽의 집마다 내린 여호와의 심판이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집은 유월(넘을 ‘逾’, 넘을 ‘越’), 즉 건너뛴 것이다. 비켜 간 것이다.
페사흐를 번역한 유월절은 ‘건너뛰다’라는 뜻이다. 유월절은 바로 죽음에서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해방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흔히 파스카 절기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이 날을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지킬 것을 명령하셨다.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14).
출애굽 3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 가정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이 절기로부터 시작된 사건이다.
첫 번째 유월절이나, 그리스도인의 고난주간 경험은 바로 하나님의 해방을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공통된 경험에서 출발한다.
3)
신학교 때 구약학 교수님에게 들은 경험담이다. 이스라엘에서 유학하던 시절, 지도 교수가 부부를 유월절 만찬에 초대하였다. 특별한 명절이니 잘 얻어먹을 것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기숙사 친구가 귀띔을 하길, 미리 저녁을 먹고 가라는 것이다.
뭔 소리냐고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 친구 말이 ‘유월절 예식(쎄데르)이 저녁 7시에 시작하지만 먼저 예식문(하가다) 60쪽을 다 읽고 노래까지 부르면 아무리 빨라야 두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그 중간중간 빈속에 누룩없는 빵 부스러기를 안주 삼아 포도주를 다섯 잔이나 마셔야 하니 대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말 유월절 저녁은 만찬도 하기 전에 허기가 질만큼 진지하고, 경건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학생 부부는 어땠을까? 처음 겪는 일이어서 방심하였다. 설마 손님을 그렇게야 대접하겠냐며 쉽게 생각했다가, 결과적으로 새로운 절기를 시작하는 그 날 저녁, 배는 고프고, 속은 쓰리고, 큰 곤욕을 치루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행하신 성만찬은 바로 유대인들의 유월절 예식이었다. 사실 우리의 성찬식은 얼마나 간소한가? 점점 시간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물론 우리도 세계교회가 함께 드리는 에큐메니칼 리마예식서가 있다. 이것의 길이가 두 시간이다. 설마? 아마 그것으로 성찬식을 하면 다시는 성찬식 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상기하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기억하는 일조차 너무 게으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기억하는 삶을 사는가? 그러한 삶의 예민함과 경건함이 있는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을 내 구원의 표적으로 지녀야 한다.
유월절이 과거 어느 한 시점의 사건으로 머물지 않고, 유대인에게 현재진행형이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 사건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현재진행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흠 없는 일 년생 어린양처럼 아낌없이 피를 흘려 우리가 겪을 죽음을 건너뛰게 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더 열심히 이러한 사실을 전도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성찬식을 한다. 존 웨슬리는 성만찬 초대사에서 “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여기에 오라”고 하였다. 감리교회는 성찬을 받기에 앞서서 당신은 세례를 받았는가, 입교를 했는가, 예복을 입었는가를 묻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은 이 성찬에 참여할 이유가 없다.
성찬식에서 변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떡과 포도주가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이다. 주님의 몸과 피가 내 안에 들어와 나를 구원의 백성으로, 그 생명의 삶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새롭게 각성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성만찬의 식탁에서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원컨대 이 나누는 빵과 붓는 포도주가 우리에게 부활하신 주 예수의 임재를 전하는 징표이자,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는 사랑의 상처를 지닌 채 지금 우리 가운데 서 있습니다. 이 거룩한 것들이 우리에게 양식이 되고, 당신의 종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소서”(리차드 자일스).
오늘도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바알의 문화와 애굽의 통치가 존재한다. 그것은 죽음의 문화, 억압의 문화, 지배의 문화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12).
이것이 새 절기의 의미이다. 하나님을 거스르고, 죽음을 강요하는 모든 우상의 문화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다. 하나님은 죽음을 넘어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 밤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새로운 절기를 명령하신다.
그리하여 복음과 함께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라. 은혜의 부요함을 누리라.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하나님의 평화와 생명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여러분의 삶에 언제나 축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