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운면(龍雲面)의 전설
"그나저나 이나라, 이민족이 더욱 큰일이 올시다. 조선왕조 5백년의 운명은 왜놈들의 강요
에 의해 내려진 단발령(斷髮令)을 고비로 종막을 고한 셈입니다. 이제 조선의 운명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고 나라를 넘기는 절차만 남았을 뿐입니다. 단발령을 계기로 감각산 한
양 도읍 5백년의 왕조는 끝나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즈음한 고난의 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조선 고종 31년(甲午, 1894), 진보세력에 의한 개혁의 시작과 동학(東學)의 봉기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공식 침입한 일본은 이듬해(乙未,1895) 동짓달 14일, 친일세력으로 조직된 혁신
내각을 움직여 전국에 단발령을 선포하게 한다.
혁신내각의 경무사(警務使) 허진은 경무청 관하 순검들에게 이튿날 아침 출근시에 모두
잘드는 가위 하나씩 지참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동짓달 보름날 이른 저녁, 고종 임금은 정병하의 손에, 태자(순종)은 유질준의 손에 머리
를 깎았다. 정부의 대신들도 상투를 만지작 거리며 머뭇거리다 모두 머리를 깎았고 오직 학
부대신 이도재(李道宰) 만이 개혁의 졸속(拙速)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뒤 사표를 내고 낙
향하였을 뿐이다.
장안에 머리를 깎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머리깎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나다니기를
그치자 정부에서는 경찰은 물론 군이 까지 동원하여 가택수색을 하면서까지 끌어내다가 머
리를 깎았다. 이로 인해 민심(民心)은 걷잡을 수 없이 흉흉해지고 유림(儒林)의 반발은 더
욱 거세어져갔다.
이때 정부에서는 전국 유림의 존경대상인 면암 최익현의 상투를 잘라 단발령의 효과를 높
이려고 하였으나 이러한 유길중의 계획은 '차라리 나의 목을 베라'며 맞선 면암선생의 단호
한 거부로 인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무렵에는 특히 이에 앞서 일어났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이어서 단발령의 강행은 마침내 전국 유생의 저항을 야기, 의병(義兵)항쟁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만득은 혁신 내각의 단발령을 , 조선왕조 5백년의 종막이자,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알리
는 조짐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선생, 김선생의 손자가 될 이 아이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개벽의 기초를 다지게 될 특
별한 분입니다. 새로운 시대란 한 나라의 새 시대일 뿐아니라 지구촌 인류의 운명에 중대
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정신문명의 새 시대를 뜻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자(자) 축(丑)으
로 시작해 술(戌) 해(亥)로 끝나는 지구 일겁12회(會)중 오회(午會)말엽에서 미회(未會)초
기로 넘어가는 대전환의 시대입니다. 지천태(地天泰)운이 시작되는 미회 1만8백년은 한마
디로 신인(神人) 시대라 하겠습니다. 이 아이는, 지혜로운 안목과 자비로운 마음을 바탕으
로 하여 건설하는 신인(神人)세계의 신문명(新文明)시대의 개벽을 가능하게 하는 미증유의 성자(聖者)이지요."
김면섭은 내심 무척 놀랐다. 자신은 꿈에 봉황을 보고 며느리는 용을 봤다고 하여 한나라
의 정승 판서라도 할 인물쯤은 되겠거니 생각하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천하의 재사요, 안목
이 높기로 전국에 이름 난 김만득의 입에서 '성자'라는 표현이 서슴없이 나오는 이 아이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선생님, 선생님께서 방금 성자라고 하셨습니까? 성자라는 것은 옛적 공자(孔子)나 노자
(老子) 문왕(文王) 주공(周公) 같은 분이거나 석가모니 부처님 또는 야소(耶蘇 :예수)같은 분이 아닙니까?
장차 우리 집안에 태어날 아이가 그러한 성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까?"
밤이 깊어으나 술자리는 좀체로 끝날 것같지 않았다. 김면섭이 따라준 술잔의 술을 단숨
에 비우고 나서 김만득은 계속 아이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성자이고 말고요. 세상에 참 성인은 흔치 않은 법이지요. 태양화구의 분진으로 지구가 이
루어질 때 지구에는 성자를 위하여 각처에 자리가 마련되었지요. 그것을 보통 명당(明堂)
이라고 부릅니다. 2천 9백년전에 히말라야산 부근에서 태어나 교화를 폈던 석가모니는 그
때 지구 영문(靈門)의 절반을 열어 놓았습니다. 이제 곧 이땅에 태어나게 될 미래의 성자
가 지구 영문의 나머지 절반을 열어놓게 되지요."
김면섭은 언뜻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다만 김만득의 정신세계가 깊이를 헤아리
기 어려울 정도로 심원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저도 지리를 좀 연구한 바 있읍니다만 우리나라 곳곳의 명산에는 예외없이 인도의 석가
모니를 모시지 않으면 안되는 명당터가 적지 않습니다. 그곳은 다른 성자를 모실 수도 없
을 뿐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자손을 두고 살 수 없도록 된 묘한 집터입니다. 자손이 없는
데도 대대로 향화가 끊이지 않는 '무후만년향화지지'(無後萬年香火之地)이지요."
김만득은 김면섭의 지리를 보는 눈이 범상한 지관들과 다르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을 갖지 못하였음이 아쉽다면 아쉬움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선생의 지리 안목은 참으로 높습니다. 선생 말씀대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일본 등
지구 절반의 명산에 석가모니를 모실 집터가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태백성의 주재자였던
만큼 지구에서는 태백성의 황금가루로 도금을 해야하는 황금불(黃金佛)을 곳곳에 모시게
되지요. 그러나 미래의 성자는 황금불이 아니라 석불(石佛)로 표현되고 좌불(坐佛)이 아니
라 입불(立佛)로 조성되게 됩니다. 은진 반야산에 솟은 거대한 돌로 미륵불을 조성한 고려
승 혜명(慧明)의 안목은 참으로 밝다고 하겠습니다."
김면섭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듯 막힘 없이 이야기 하는 김만득의 설
명을 듣고 나서야 은진미륵의 갓쓴 모습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게 되었다.
용운면(龍雲面)의 전설
1909년 3월 25일 밤 10시쯤.
며칠 전부터 이상한 향내가 은은히 감돌던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龍雲面) 연흥리(連興
里) 산중 마을에, 심야의 정적을 깨는 고고(呱呱)의 울음 소리가 밤하늘에 가득 울려 퍼졌
다.
조상 대대로 독자(獨子) 또는 양자(養子)로 근근이 대를 이어 오던 김 학자(金學者) 댁의
셋째 아들은, 이렇듯 온 세상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이 땅에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운룡(雲龍). 그의 어머니는 어느날, 거대한 용(龍) 한 마리가 구름을 헤치
며 날아 내려오는 꿈을 꾼다. 그런데 같은 시각에 할아버지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 그 뒤로
잉태하여 낳은 아이라 해서 처음에는 운봉(雲鳳)이라고 부르다가 뒷날 '운룡'이라는 이름으
로 고친 것이다.
김만득은 아이가 태어났다는 기별을 듣고 김면섭과 함께 아이의 처소를 방문, 간단히 예
를 올리고 나서 얼굴을 살펴 보았다. 별처럼 빛나는 초롱초롱한 눈과 높고 시원하게 벗겨진
이마, 오똑한 코, 꽉 다문 입술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과거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老子)는 어머니 뱃속에서 다 늙어가지고 바깥세상에 나왔
다 하여 노자라고 불렀다지만 이 아이 역시 신생아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의젓하고 늠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좌우에는 화엄신장을 비롯 수많은 신장들이 호위하고 있음을 직감하
였다.
사주(四柱)를 풀어보니 '기유 기사 갑술 을해(己酉 己巳 甲戌 乙亥)' 였다. 김만득은 먹을
간뒤 붓을 들어 시를 써내려갔다. 4언(言) 1백구에 달하는 장시(長詩)로서 아이의 일생을 예
견한 내용이었다.
雁行八九 一雁獨飛 기러기 8~9마리가 날아가다가
안행팔구 일안독비 그중 하나가 홀로 행렬을 떠났다
每逢三災 堂上有憂 매양 재난을 만나
매봉삼재 당상유우 어버이에 근심 끼치고...
靑山夜月 杜鵑作伴 푸른산 달빛에
청산야월 두견작반 두견 벗삼으니
庭蘭之實 其實五六 뜨락의 난실(蘭實)은 대여섯
정난지실 기실오육
左右財星 書中有祿 좌우에 재성(財星) 있으니
좌우재성 서중유록 글 가운데 녹이 있을 것이요
驛馬得祿 離鄕大吉 역마에 녹이 있으니
역마득록 이향대길 고향을 뜨면 크게 길하리라
活人有德 龍門貴客 사람을 살려 덕을 베푸니
활인유덕 용문귀객 나라의 귀한 손이요
九十之年 玉輪朝天 아흔 살 무렵에는
구십지년 옥륜조천 옥수레 타고 하늘 나라 가리
半萬史中 天降彌勒 반만년 역사의 땅에
반만사중 천강미륵 하늘은 미륵을 보내었고녀
塵土佛生 識者其誰 풍진 세상에 부처 났으니
진토불생 식자기수 알아보는 이 그 누구더냐
龍樹開華 東方瑞光 용수(龍樹)에 꽃 피니
용수개화 동방서광 동방에 상서로운 빛 발하고
慈悲得道 名傳千秋 자비로써 길을 여니
자비득도 명전천추 그 이름, 천추에 전해지리.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김만득은 김면섭에게 아이의 일생을 예견한 백구시(百句詩)를 써주고는 그길로 행장을
꾸려 훌쩍 떠나가 버렸다.
반도의 동북쪽 귀퉁이에 자리한 흥원군의 용운면 연흥리는 1백 5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조그만 마을이다. 용운면에는, 언제부터인가 인류를 액난(厄難)에서 구원할 위대한 성자(聖
者)가 여기서 탄생하리라는 예언이 전설처럼 구전(口傳)되어 온다.
어떤 이는 성자란, 부처(佛)를 지칭하는 말이라 하고 혹자는 미륵(彌勒)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출현 시기나 그 밖의 사항에 관해서 더 이상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사람
들은 아무튼 그 말을 신(神)의 계시인 양 믿으며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은, 운
룡의 집안의 묘(墓)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면내에는 바닷가 부근에 거대한 용소(龍沼)가 있는데 보통 '번개늪'이라 불리운다. 용소 못
가와 그 곳에서 20리쯤 떨어진 지점에 조선 성종때 성균관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의 정
언(正言) 등을 지낸 운룡의 선조(先祖) 김사지(金四知)의 장남과 제 5남이 묘소가 있다. 제5
남 김한공(金漢功)은 곧 운룡의 직계 할아버지로서 임진란 무렵 좌수(座首)를 지냈다 한다.
바닷가 쪽에 위치한 장남의 묘는 천주낙반(天珠落盤), 용소 부근 5남의 묘는 백로규어(白
鷺窺魚) 형국이라고 지관(地官)들은 말한다. 그리고 면내 세전동(世田洞) 일대의 장군대좌
(將軍大座)에는 운룡의 조상묘들이 모셔져 있다.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앉은 장군대좌는 앞에 용마산 - 안장봉이 보이고 왼편으로 오방
패 투구봉 칠성검산 삼정수(三井水) 칠반석(七盤石)이 있으며 바른 편으로 큰 산들이 백호
를 이룬다. 응소형국(鷹巢形局)에 할아버지의 양가(養家) 쪽 할아버지 내외와 부모의 묘가
있으며 노승예불(老僧禮佛) 형국에는 할아버지의 생가 어머니 묘가 모셔졌다.
이 가운데 할아버지의 생모, 즉 운룡의 증조 할머니인 청주 한씨(淸州韓氏) 묘에 얽힌 사
연이 운룡의 출생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 묘는 운룡의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어머니 한 씨를 위선(爲先)한 것으로 어머니의 남동생인 명지관(名地官) 한모(韓某)씨가
자리를 잡았었다.
백두산의 산맥이 동남동으로 흐르다가 평지에서 거대한 산을 이루니 곧 두무산(頭無山)이
다. 두무산의 한 줄기가 북청군과 신흥군에 걸쳐 있는데 증조 할머니의 묘소는 그 산자락에
안겨 있다. '늙은 스님의 부처님 전에 예배하는 모습으로 이뤄졌다'고 하여 지관들은 그 묘
역을 '노승예불(老僧禮佛)이라 부른다.
그 묘를 다 완성하고 나서 지관 한씨는 아쉬운 듯 이런 말을 남겼다.
"자네들 기량(器量)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대지(大地)의 복(福)을 온전히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탈이 생기면 자네(할아버지)가 지혜롭게 대처하게......"
한 씨는 땅 기운이 돌아서면 우선은 패가(敗家)할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표연히 떠나갔
다. 그 묘를 쓰고 난 뒤로 집안은 계속 기울어져 갔다.
소를 비롯한 여러 가축들이 원인 모르게 죽어가고 농사는 계속 흉작을 면치 못했으며 전
담(田畓)은 날로 줄어 들었다. 이렇듯 가세(家勢)가 급속도로 기울고 우환이 끊이지 않자 집
안 여론은 묘를 잘못 써서 그럴 것이라는 쪽으로 집약되었다.
할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형의 주장에 따라 결국 이장(移葬)하기로 결정
이 났다. 묘를 쓴 지 1년이 갓 지났을 즈음이었다.
온 식구들이 빙 둘러서서 지켜보는 가운데 장정의 곡괭이가 묘 한 귀퉁이에 내리 찍혔다.
그 순간 묘에서는 마치 거대한 범종(梵鐘)이 울리듯 "쩡-" 소리가 나더니 하얀 수증기가 분
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다. 순식간에 묘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뜻밖의 사건에 모두들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몰랐다. 유독 할아버지만이 재빨리 자신의 옷
을 벗어 쥐고 수증기를 헤치며 뚫린 구멍을 찾아서 틀어 막았다.
할아버지는 이때 뜨거운 김에 등이 구부러져 평생 허리를 펴지 못하는 불구자로 살게 된
다. 수증기가 걷힌 뒤 식구들은 곧 묘를 원상태대로 복구했다.
몇 년 뒤 한(韓)지관이 집에 들러 외조카(할아버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이윽고
크게 탄식을 한다.
"결국 파묘(破墓)했구나. 너의 허리가 그 모양인 걸 보니...... 3대(三代) 부처가 나오는 대
지(大地)에서 이제 겨우 한 분밖에 나올 수 없고 그나마 평생 '운학(雲鶴)의 신세'를 면치 못
하리라."
할아버지는 그 뒤 장남 경삼(慶參)의 밑으로 얻은 두 아들을 어린아이때 모두 잃는다. 뒷
날 외아들 경삼이 낳은 7남 2녀 가운데 셋째 아들이 바로 운룡이다.
할아버지는 운룡이 10살 나던 1918년 무렵,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셋째 손자를 데리고
간산(看山)차 선산(先山)을 찾아 장군대좌의 지세와 '노승예불'형국의 묘에 얽힌 이야기를 들
려준다.
할아버지는. 일곱 살 때부터 이미 난치병 치료에 있어서 늙도록 의원(醫員) 노릇을 해온
자신의 의술을 까마득히 뛰어넘은 천재 의사(醫師) 손자가 대견스럽기만 했다. 타는 듯한 저
녁놀이 유난히 곱다. 그는 놀빛 속에 늙은 스님이 부처님께 합장 배례하는 듯한 모습을 물
끄러미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비록 그때 이 허리가 이렇게 꼬부러지긴 했지만 결코 헛되지 않았어. 암, 헛되지 않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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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이야기 (4) 용운면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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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1.26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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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풍수공부 잘했슴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