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열린책들)를 읽고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유명한 대사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일본 근대 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의 첫 작품이다. 고양이에 시선으로 본 인간의 삶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책은 1905년 잡지에 발표했던 단편 소설이었는데 유명해지자 11회까지 연재했다. 다 합쳐서 무려 500~600페이지 가량 되는 방대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게 읽기 무거운 책은 아니다. 내용 자체는 좀 지루할 수 있지만 천천히 여유롭게 마치 브이로그를 보듯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의 화자는 고양이다. 그것도 뭐랄까, 굉장히 시니컬한 고양이다. 자신을 '와가하이'라고 높여 부르며 인간을 냉소적으로 평가한다. 굳이 음식을 삶고 굽고 쪄서 먹고, 잡다한 천을 몸에 걸치고 머리를 단정하는 사람들을 '어지간히 한가한 자들'이라 온갖 장난을 친다 평한다. 그러면서 맨날 바쁘다 바쁘다 하면서 태평성대한 고양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와가하이'는 말한다.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닌데 좋아보이면 그렇게 하라'(219p)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구샤미 선생'이라는 자의 집에서 사는 이 '와가하이'는 주인의 집의 드나드는 여러 사람들을 지켜보며 그들을 통해 여러 인간의 군상을 분석한다. 이런 식의 서술은 아주 새로웠다. 고양이의 시선으로 본 인간의 모습이란 것을 생각은 해봤지만 100년도 지난 그 옛날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니 신기했다. 거기다 단지 고양이가 사건을 보고 감상평을 이야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풍자와 해학이 깃들어있어서 꽤나 즐거웠다. 또한 잡지에서 이 책이 유명해진 것을 넌지시 언급하는 등, 약간의 메타픽션적인 요소도 있다.
등장인물들도 아주 재밌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구샤미 선생, 허풍쟁이 미학자 메이테이 선생, 괴짜 이학자(과학자) 간게쓰 군, 예술에 지나치게 심취한 오치 도후 군 등, 하나 같이 이상하면서도 독특한 캐릭터들이었다. 특히 메이테이의 어이없으면서도 재치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여러모로 이 책은 재미있는 책이었다.
'구샤미 선생'의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사실 그다지 스펙타클하거나 영양가있는 일들은 없다. 여러 사람들이 오가며 벌어지는 그저 그런 소소한 일상, 그것뿐이다.
하지만 고양이의 눈으로 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모두 다르고 개성과 독특함을 가진 것이 인간을 만든 신의 위대함을 보여준다는 이야기에 대해 '와가하이'는 그것은 오히려 신이 손재주가 없어 인간을 똑같이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188p) 해수욕이 몸에 좋다며 갑자기 유행하자 '와가하이'는 아무도 물고기가 물에서 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당연히 해수욕은 건강에 유익한 것이라며 인간은 그걸 이제 알았냐고 지탄한다.(259p)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는 '와가하이'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굳이 의복을 만들어 계급을 나눴다면서 그렇게 평등을 싫어하면서 다시 옷을 벗고 돌아다니다니 야만적이라 비판한다.(277p) 약삭빠르고 이른바 '교제용 표정'을 잘 짓는 사람들이 유능한 사람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 '와가하이'는 그런 사람보다 무식하고 서툴러도 솔직한 우리 주인이 낫다고 평가한다.(430p) 이런 '와가하이'의 냉소적인 비평은 유쾌하면서도 정곡을 찌른다.
이런 고양이의 서술은 처음에는 자신이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점점 후반부로 갈 수록 고양이의 서술은 책을 벗어나 좀 더 먼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워진다. 주변 인물들의 속마음까지 꼼꼼히 서술한다. 털을 인간의 배에 대고 비비면 찌르르하며 인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단다. 초반에는 단지 유쾌하고 신선한 고양이의 생각으로 느껴졌던 것들이 사실은 작가의 생각이라는 것, 점점 더 소세키가 노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소세키가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과연 무엇일까?
소세키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다. 사오십대에 고령의 나이에 소세키를 낳은 소세키의 부모님은 아이를 키울 여력이 되지 않아 그를 두번이나 입양을 보냈다. 그러나 양부모의 이혼으로 결국 소세키는 본가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양부모의 성을 썼으며 자신의 부모님을 조부모로 알고 자랐다.
그의 이런 기구한 인생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주인공과 닮아있다. 어느날 눈을 떠보니 부모와 형제 없이 홀로 남았고 어떤 선생의 집에 이름도 없이 눌러 살게 된 고양이. 마치 입양을 간 소세키의 모습같다.
또한 이것은 그 당시 일본의 상황과도 맞닿아 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하던 일본은 아시아에 있으면서 서양을 따랐고 서양적인 근대 문화와 전통적인 일본 문화가 혼재했다. 자신의 진짜 부모가 누구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왔을 소세키와 이름 없이 방황하는 고양이와 상당이 비슷하다.
이것은 비단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변화와 발전이 있는 모든 나라와 상황에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항상 변화와 발전이 있는 곳엔 혼란도 존재한다. 갑작스런 변화에 사람들이 방향을 잃어버리곤 한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결국 그런 이야기이다. 발전의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 또 그 사람들에게 속하지 못한 고양이 한 마리의 이야기.
이 이야기에 마지막에 '와가하이'는 인간이 마시던 술의 맛이 궁금해 먹어보게 된다. 술을 마시고는 잔뜩 취해 물이 담긴 항아리에 빠져버린다. 처음에 '와가하이'는 빠져나가려 시도했다. 하지만 곧 '와가하이'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내가 굳이 살아야 할까? '와가하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다.
상당히 충격적이고 갑작스런 엔딩이다. 소세키의 소설이 원래 우울한 것은 알았어도 솔직히 놀랐다. 이런 유쾌한 분위기에 갑자기 고양이를 죽이다니 더 이상 쓰기 귀찮아서 죽인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이 엔딩이 의미하는 바는 크다.
현재 세상은 많은 것이 변하고 있다. 이전의 우리나라는 예절을 중시했었다. 법에 맞지는 않더라도 예의를 갖춘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쓸모없는' 예절, 예식, 전통적인 의식보다는 법과 규칙이 더 중요시되며 법에 맞지 않는 것은 허용할 수 없으며 법제화된 것이 아니라면 지키지 않는다. 서로 참견하며 정이라면 정, 참견이라면 참견을 하던 우리나라는 점점 더 개인주의가 퍼지고 있다. 출산율은 미친듯이 하락하며 결혼은커녕 연애도 하기 어렵다. 점점 날씨는 기이해지고 경제는 휘청휘청거린다.
이런 수많은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돈? 돈이 많으면 행복하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네다 군이나 스즈키 군을 봐라. 돈이 많을려면 그만큼 치밀하거나 비굴해져야 한다. 가족? 누가 요즘 가족을 꾸리려 노력할까? 혼자 먹고 살기도 바쁜데 말이다. 메이테이 말마따나 혼자 사는게 최고다. 지식? 나쁘지 않은 목표다. 메이테이는 본래 상이란 자신이 이룬 것보다 대단한 것을 주는 것인데 지식보다 대단한 것은 없으니 그리스의 지식인들에겐 상이 없다 말했다. 그럼 우리는 '목매닮에 역학' 같은 주제를 공부해야 할까? 아니면 유행? 뭐 유행을 따라 운동을 하러 가거나 해수욕을 하러 바다로 뛰어들까?
'와가하이'는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말한다. '늘 태평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을 두드려 보면 어디선가 슬픈 소리가 난다.' 어떤 삶이든, 어떤 목표든 슬픔과 고통이 없을 수 없다. 어떤 인간도 결국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진짜로 미래에는 죽음의 종류가 자살밖에 없는 일이, 뭐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우리의 삶은 덧없다. 그런 의미에서 '와가하이'는 굳이 억지로 살려 시도하지 않는다. 죽음이 다가왔으니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아니 어쩌면 덧없는 작고 작은 목표에 너무 집중하면 저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은 별로 대단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소세키에게는 소세키의 학생 중 한 명이 자살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아주 센세이셔널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보기에 그 학생은 젊고 엘리트였으며 미래가 창창한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학생의 삶에서 그런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소세키는 영국 유학을 갔다온 엘리트에 안정적인 직업과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전업작가로 활동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힘도 빌리지 않고 조직의 일원도 되지 않고 오로지 내 스스로의 길을 가겠다. 자연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이 대하지만 냉혹하고 사회는 가끔 정을 베풀어 주지만 부조리하다. 그러니 자신은 자연에게도 사회에게도 속하지 않고 내 길을 가겠다. 교수나 박사는 100년도 못가지만 나는 내 책 하나만으로 100대를 도전해 보겠다.' 소세키가 고양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다른 사람이 지어준 대로 살지 않고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살겠다고.
내가 다니고 있는 홈스쿨 아카데미에는 현재 많은 변화가 있다. 변화 중에서 좋은 것도 있지만 사실 불편하거나 달갑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처음에 내가 이곳을 통해 바라고 누렸던 것,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해 이 아카데미에 오래 계신 집사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 아카데미가 몇번을 변하는 것을 봤다. 어차피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변화는 일어난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변화에 적응하거나 새로운 공동체를 찾아 떠나는 것이라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근데 그저 이런 한낱 작은 나 한 사람의 생각대로 변화를 막거나 일으키거나 하는 일이 말이 될까?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평가하는 일 따위엔 신경 끄자. 우리는 변화를 받아드려야 한다. 하지만 변화에 휩쓸리면 안된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니까. 나는 너가 지어준 이름으론 불리지 않을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