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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예사
황 순 원
대구에서도 그랬는데 부산 와서도 변호사 댁 신세를 지게 됐다.
서울서 먼저 가족들을 내려보내고 뒤떨어져 부산에 와보니, 내 직속 가족들은 대구서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구가 부산보다 물가가 싸다는 것으로 해서. 크리스마스날 나는 대구로 올라갔다. 그때 아내와 애들이 들어 있는 곳이, 화재로 인해 뼈와 거죽만 남은 재판소 옆, 모 변호사 댁이었다. 굉장히 큰 저택이었다. 이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또 상당히 넓은 뜰 한구석에 끼여 있는 헛간이 내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자식들의 방이었다.
대구는 부산에 비해 무던히 차가웠다. 원래가 헛간인 데다 북향하여 출입구 하나밖에 없는 방이라, 볕이라곤 진종일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더 춥고 음산스러웠다. 애놈들은 날만 새면 손발이 얼면서도 밖으로만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다행으로 알았다. 피난민의 신세에 그래도 어느 분의 안면으로 이런 방이나마 얻어 들게 된 게 여간 고맙지가 않은 것이었다.
우리는 이 집에서 몇 가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 택 변호사 장모 되는 노파의 지시에 따라, 저녁에 어슬해지면 절대로 안뜰에 들어와 물을 길어가서는 안 되고, 아침에도 자기네가 한 바가지라도 먼저 길은 뒤에야 물에 손을 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여하한 빨래건 빨래 종류는 일절 금지라는 것이다. 안뜰에는 수도도 있고, 우물도 있다. 아침만은 일없었다. 우리는 점심을 뺀 두 끼의 식생활인지라, 느지막하게 안댁에서 조반이 끝난 뒤에 점심 겸 조반을 해먹으면 그만이었으니까. 빨래도 그랬다. 한목 모았다가 물을 길어내다 하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저 미처 물을 떠다두지 못한 날 같은 때, 밤중에 어른도 어른이지만 애들 가운데 누가 목이 마르다든지 할 것 같으면 그거 달래기에 가슴이 타야 하는 게 안됐을 뿐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룻밤 물 몇 모금 못 먹었다고 어떻게 되는 게 아니었다.
변소만 해도 이 노파가 안뜰 변소에는 들어와 더럽혀선 안 된다고 따로 지시가 있어, 이미 아내의 손으로 이쪽 뜰 한구석 다복솔 뒤에 거적닢 변소가 만들어져 있었다. 대낮에 어른들이 들어가 쭈그리고 앉기에는 좀 뭣했으나 그맛쯤은 하는 수 없었다.
두고 보니 이 댁 살림은 이 장모 노파의 손에서 우러나는 것 같았다. 아내가 이 댁 식모한테 들은 말에 의하면 이 노파는 소생이라고 현재 변호사 부인인 딸 하나뿐으로, 이 딸이 이 댁 변호사 부인이 되자 따라 들어와 온갖 살림살이를 주무른다는 것이다. 애들 방도 따로 있지만, 큰 온돌방 하나를 이 노파가 독차지하고 있어, 아침에 이 방부터 조반상을 본 뒤에야 비로소 다른 식구들이 아침을 먹는다는 것이다.
이 노파의 취미는 같은 노파들끼리 오늘은 이 집 내일은 저 집 모여서 골패를 노는 것과, 날을 받아가지고 절에 불공을 드리러가는 일이라고 했다. 이 노파가 끈을 곱게 장식한 감장 조바위를 쓰고, 비단옷 차림으로 외출하는 것을 한두 번 아니게 목격할 수 있었는데, 육순 가까운 나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맵시에 자세도 똑발랐다. 이 댁에 드나드는 노파들도 다 비슷비슷한 차림차림에 인생의 어두운 그늘이라곤 별로 깃들여보지 않은 얼굴빛이요 몸매들이었다. 인생이란 하다못해 요 맛 정도라도 안일하게 늙어가야 할 종류의 것 인지도 몰랐다.
한 열흘 남짓 지나서였다.
하루 아침 일어나보니, 우리 아홉 살잡이 선아의 신발 한 짝이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온 식구가 넓은 뜰을 편담¹했다. 없었다. 누가 집어갔다면 많은 신발 가운데 하필 그애의 것만, 그것도 한 짝만 집어갈 리 만무했다. 결국 이 댁 셰퍼드란 놈이 어디 물어다 팽개쳤으리라는 결론을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없는 돈이나 겨울철에 맨발로 두는 수 없어, 아내가 거리에 나가 신발을 사들고 돌아오더니 이런 말을 한다. 신발 한 짝 없어지는 건 흔히 자기 집에 앓는 식구가 있는 사람의 짓이라는 것이다. 앓는 사람의 나이와 같은 사람의 신발 한 짝을 가져다 어찌어찌 하면. 그 앓는 사람의 병이 신발 주인에게로 옮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내는 이 댁에 우리 선아만 한 애가 하나 며칠 전부터 무얼로 앓아누웠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래서 신발 한 짝이 없어진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불안스럽고 노엽고 슬프기까지 한 아내의 표정 이었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나 역시 아내 못지않게 불안스럽고도 무엇에 노여운 감정이 가슴속에 움직임을 어찌 할 수 없었다. 그게 아무 근거 없는 미신의 짓이라 하자, 그리고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의 자식이라 하자, 자기네 애가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한 법이다. 더욱이 우리의 선아는 네 애 중에 그중 약한 애다. 이렇게 피난까지 나와 병이라도 들면 구완할 길이 그
야말로 막연한 것이다.
남몰래 불안스러운 며칠이 지났다. 이 댁 애가 나아서 일어났다는 말이 들렸다. 그러고도 우리 선아는 앓아눕지 않았다. 역시 그때 그 신발 한 짝은 이 댁 셰퍼드란 놈이 물어다 팽개친 것임이 틀림없다. 그처럼 날을 받아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노파가 사는 이 댁에서, 그 같은 몰인정한 짓이야 꿈엔들 할까 보냐.
그리고 이삼 일 뒤의 일이었다.
밖에서 들어오니, 아내가 어둡고 추운 방에 혼자 앉았다가 대뜸 근심스런 어조로, 좀 전에 이 댁 노파가 나와 이 방을 비워달라더라고 한다. 이유는 이제 구공탄을 들이는데 이 방(실은 헛간)을 사용하여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날로 아내가 이 댁 식모한테서 들은 말은 이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아까 낮에 예의 노파 한 패가 몰려왔는데, 그 중 한 노파가 이쪽 뜰 구석 다복솔 뒤에 감춘 거적닢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런 때는 늙어서 눈 안 어두운 것도 탈이었다. 그게 무엇인가 싶어 가까이 가 들여다보고는 홱 고개를 돌리며, 애퉤퉤! 대체 이런 데다 뒷간을 만들다니 될 말인가. 그 달음으로 이 댁 노파에게, 정원에다 그런 변소를 내다니 아우님도 환장을 했는기요? 여기서 주인 노파도 한바탕, 거지떼란 할 수 없다느니, 사람이 사람 모양만 했다고 사람이냐고 사람의 행실을 해야 사람이 아니냐느니, 자기네 집이 피난민 수용소가 아닌 바에 당장 내보내고 말아야겠다느니, 야단법석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아내한테 나와 방을 비워줘야겠다는 영을 내린 것이었는데, 그래도 이 노파가 우리한테 나와서는 거기다 뒷간을 만들었으니 나가달라는 말은 못 하고, 이제 구공탄을 들이게 됐으니 방을 비워줘야겠다고 한 것이었다. 실은 이 점이 이 노파로 하여금 자신이 말한 인간은 인간다운 행실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몸소 실천해 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노파 자신이 우리들에게 안뜰 변소를 사용치 못하게 하고, 거기다 거적닢을 치게끔 분부를 해놓았으니, 진드기 아닌 우리가 오줌똥 안 늘 수는 없고, 실로 면목이 없는 행실이나 거기 대소변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걸 잊지 않은 점에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들어 있는 곳이 실은 사람이 살 방이 아니라, 구공탄이나 들일 헛간이라는 걸 밝혀준 점에서.
이쯤 되어, 변호사 댁 헛간에서 쫓겨난 우리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황순원 가족 부대는 대구 시내를 전전하기 수삼차,² 드디어 삼월 하순께는 부산으로 흘러 내려오게까지 되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부산 와서 방을 장만하기까지는 처제가 있는 집에 당분간 신세를 질 예정이었다. 저번에 내가 부산까지 내려왔을 때 이 처제가 있는 방이 그중 여유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집이 또 모 변호사 댁이었다. 경남중학 뒤에 있었다. 역시 상당히 큰 화양식¸ 저택으로 이 댁 다다미 여섯 장 방에 처제네가 들어 있었다. 이 방은 반침이 없는 데다, 한옆에 낡은 반닫이⁴ 하나와 낡은 테이블 하나가 들여놓여 있어, 다다미 넉 장 반 푼수밖에 안 되는 방이었으나, 애 셋인 처제네 식구가 살고도 그다지 무리할 것 없이 우리 여섯 식구가 들어박힐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부산에 와보니, 이 방에는 이미 다른 가구가 하나 들어 있었다. 애 둘을 가진 부인네였다. 남편 되는 이는 모 사단 법무관으로 일선에 가 있다는 것이었다. 본시 이 가구에게는 따로이 방 하나를 제공하기로 되었던 것이, 그 방은 손님방으로 써야겠다고 해서 처제네 방으로 모인 것이었다. 같이 애들과 여인들뿐인 가구인 데다(내 동서 되는 사람은 이공과계의 기술자 양성 교육을 받으러 도미했다가 6·25사변으로 해서 못 나오고 지금은 동경에 와 있는 것이다) 처제가 그 안면을 빌려 이 댁 방을 얻게 된 분과, 바로 이 한방 부인네가 같은 법무 계통의 분이라 도리어 서로 어렵지 않고 외롭지 않아 괜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에 바람이 불어왔다. 주인 댁에서 별안간 이 방을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이 방에 식모를 두어야겠다는 것. 그런데 묘한 것은 이 댁에서 비워달란 그 날짜가 뒤에 알고 보니, 처제가 이 방을 얻을 때 그 안면을 빌린 분이 다른 데로 인사이동이 있은 날짜 그날인 것이었다. 처제랑이 며칠 뒤에야 안, 이 인사이동을 법조계의 이름 있는 이 댁 변호사가 아직 공표도 있기 전에 알았다고 헤서, 무어 그리 괴이한 일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문제는 바로 그날로 방을 비워달랬다는 사실인데, 이것은 그 날짜들이 우연히 합치된 것으로 보는 게 온당할 것 같다. 그만한 분이 처제가 안면을 빌린 분의 인사이동으로 말미암은 앞으로의 자기 직업적인 이해타산만을 생각하여 조급하고도 노골적인 그런 행동으로 나왔다고는 볼 수 없는 까닭에. 우리가 부산 와 닿기 전에 처제가 있는 방에는 이런 말썽이 생겨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렇다고 우리가 여관을 찾아갈 수도 없는 형편인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생각다 못해 우리는 분산해서 숙박하기로 결정을 했다. 나는 다다미 열 장 방에 세 가구(그 도합 식구가 무려 열아홉 명)가 들어 있는 부모가 계신 남포동으로 가 어떻게든지 끼여 자기로 하고, 큰애 둘은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들어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고, 끝의 두 애와 아내는 하는 수 없이 그냥 처제네 방으로 갔다.
매일같이 아내한테서 직접 또는 이모네 집에 들렀다 오는 큰애들을 통해, 주인 댁에서 방을 비워내라는 독촉이 심하다는 걸 들었다. 대구에서 듣기에는 부산에 왔던 피난민이 무척 빠졌다는 말이어서, 부산 오면 어떻게든지 방 하나쯤은 얻을 수 있으려니했다. 와보니 사실 사람은 내가 처음 이곳 들렀을 적보다 현저히 빠졌다. 그러나 방은 없었다. 아내와 나는 여기저기 꽤 여러 군데 다리를 놓아보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졸리다 못해 한방 부인네가 먼저 범일동엔가 있다는 자기 시삼촌한테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이 변호사 댁에서는 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인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거기 이 댁 변호사 영감이 나타난 것이었다. 무섭게 부릅뜬 눈이었다. 그리고 성 난 음성으로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당신네들도 인간인기오? 오늘 아침으로 당장 나가소. 여관으로라도 나가소. 사람이란 염치가 있어야지 않소. 만일 오늘도 아니 나가면 법으로 해결짓겠소.
처제와 아내 편에서도 가만있을 수만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상으로나 여관으로는 못 나가겠다고 했다. 이 댁 큰딸 둘이 응원을 오고, 부인과 큰아들까지 출동했다. 서울 모 법과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는 이 댁 큰아들은 폭력 행위로까지 나오려는 것을 그래도 나이 먹은 법률가가 법적으로 따져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듯, 젊은 법률가를 떼어가지고 가더라는 것이다.
나는 남포동 예의 열아홉 식구가 들어 있는 방 한구석에서 아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변호사 영감이 우리들더러 인간이 아니라는 건 벌써 대구서 그 노파한테 낙인을 찍힌 바니 별반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가 또 법적으로 해결을 짓겠다는 것도, 그가 법률가라 응당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여관으로라도 나가라는 데는 곤란하다. 여관에 들 수 있는 형편이라면 우리가 왜 이러고 있을 것인가. 다음에 염치가 없다는 대목도 그렇다. 피난민의 신세니 가다오다 염치없는 일도 있긴 하겠지만, 이 댁에 대해서 그렇게 몰염치한 짓만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동안 처제가 있는 방에는 다다미 석 장 새로 간 것까지 합하면 매달 이만 원 가까울 정도의 금액을 내고 있는 셈이요, 어제만 해도 한방 부인네가 시삼촌한테로 옮겨간 뒤, 우리는 이 댁 부인에게 우리가 가진 옷가지를 마저 돈으로 바꿔가지고라도 보증금을 들여놓겠다는 말을 했던 것이다. 그때 부인의 대답은 자기네는 돈이 아쉬워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 방이 필요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그 방을 식모를 줘야겠다는 것이다. 아내가 다시 그러면 그 식모가 들어와 잘 자리를 내어줄 터이니 같이 들어와 자게 해달라고 했다. 그렇게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다. 방을 구하기까지 좀 참아달라는 수밖에 없었다. 식모 말이 났으니 말이지, 이 주인 댁에서 식모 식모 하는 여인은 그네 자신이 처제와 아내에게 한 말에 의하면, 주인 댁과 과히 멀지도 않은 친척으로 이번에 딸네 집에 왔다가 들러서 밀린 빨래도 해주고 바느질도 해주느라고 머물러 있다는 것이며, 본래 이 집에는 식모라고 붙어 있지를 못한다는 것과, 결국 식모 노릇 하는 게 늙은 할머닌데 지금 잠깐 시골 작은 아들네 집에 다니러 갔다는 것, 그리고 이 방만 해도 언젠가 왔을 때도 헛간 비슷이 늘 비어 있더라는 것이다. 이 댁 늙은 할머니가 식모 노릇을 한다는 건 이미 몇 달 같이 살아온 처제가 아는 일이었다. 하여튼 우리가 염치없다는 건 우리가 방을 속히 얻는 재주가 없다는 데서 오는 것뿐이었다.
아내는 눈물이 글썽 한 슬픈 얼굴에, 그러나 무슨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이, 오늘 저녁부터는 우리 식구가 다 그리로 모이자고 한다. 이왕 일이 그렇게 된 바에는 방을 얻을 때까지 모여 있자는 것이다. 문득 나는 그래서는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법과대학생의 일이 떠올랐다. 여자한테 폭력을 가하려던 그가 나를 보고 가만있을 리 만무하다. 그 이십대의 청년을 사십 가까운 약골의 내가 어떻게 대항할 수 있으리오. 그러나 한편 아무리 못난 사내기로서니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처자는 처자대로 그런 자리에 남겨둔 채 혼자 지레 겁을 집어먹고 앉았다는 것도 생각할 문제였다. 물론 아내가 한데 모이자는 것은 나더러 무어 그 청년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를 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었다. 그런 것을 생각했다면 도리어 나더러 모이자는 말도 내지 않았을 아내다. 그저 아내는 생각한 것이었다. 지금 내가 자고 있는 이곳이 나로 해서 늙은 부모가 거의 앉아 새우다시피 하시니 이왕 타협이 안 된 건 안 된 대로 벌어질 일이 벌어지고만 뒤라 방을 얻기까지 모여 있자는 것이다. 나는 저녁에 가기로 했다.
그러고는 학교로 나갔다. 서울서 봉직하고 있던 학교가 며칠 전부터 보수공원에서 격일 수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날이 그 수업 날의 하루였다. 먼저 부산 내려온 동료들한테 집 이야길 부탁해 보았다. 점잖지 못한 일인 줄 알면서도 상급생 몇한테도 말해보았다. 오후에는 차도 안 팔아주는 다방에 앉아 아는 친구를 붙들고 구차한 말을 해보았다.
저녁때가 가까워서 부둣가로 나갔다. 거기 장사진을 이루고 있는 노천 목로주점에서 대폿술을 한잔 마시기 위해서였다. 술사발부터 비웠다. 보니, 방파제 너머 저쪽에 범선 두세 척이 가는지 오는지 떠 있다. 야, 바다란 아무 때 봐도 좋다. 가까운 눈앞에 갈매기란 놈들이 껑충인다. 야, 멋들어졌다.
그러나 실은 이 바다와 갈매기에게 마음이 젖어드는 심사는 아니었다. 무슨 생선 가시와도 같은 것이 내 가슴속 한구석에 걸려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이제 내가 그 변호사 댁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법과대학생과 만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내가 한번도 본 일이 없으나, 변호사 영감만은 이번 와서 낮에 한두 번 그 댁엘 드나들며, 정원에서 나무를 매만져주고 있는 걸 본 일이 있다. 오십이 잘 지나 보이는데 아직 젊은이다운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갈라 붙인, 체구가 굵은 사내였다. 그 아들이 이 아버지를 닮았으면 상당한 체구와 체력을 소유한 청년임이 틀림없다. 어쩐지 켕기는 마음이었다.
단숨에 또 술사발을 내었다. 나도 스물 안팎까지는 숱해 싸움을 해온 사람인 것이다. 내 얼굴에는 그 기념물이 수두룩하게 남아있다. 코피도 수없이 흘려보았고 남의 코피도 적잖이 내주었다. 남의 이빨을 두 개나 꺾어놓고 내 머리 꼭대기에 뜸뜬 자리 같은 흉터도 받아보았다. 사실 말이지 한창때에는 하나 대 하나에는 누구한테 지지 않아왔다. 그게 서른이 지나면서부터 싸움이라면 극력 피해만 왔다. 그게 또 사십 가까운 오늘에는 싸움이라면 겁부터 앞서는 것이다.
술사발을 또 들이켰다. 그러나 상대편이 먼저 도전해오면 가만 움츠리고 앉았을 수만도 없지 않은가. 정당방위란 게 있다. 법학을 하는 자니 이 정당방위로 나가리라. 그래 도전해오면 받아주자. 한번 오래간만에 옛날 실력을 발휘해주리라. 싸움이란 체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여기서 나는 거나하게 취해오는 술기운을 빌려, 그자가 이렇게 나오면 나는 이렇게, 그자가 저렇게 나오면 나는 또 저렇게 하고 이미 다 잊어버린 지난날의 싸움 솜씨를 들추어가지고 얼마든지 상대편을 거꾸러뜨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혼자 흥분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주머니를 털기까지 황혼에 덮이는 부둣가를 떠날 줄을 몰랐다.
이날 밤은 아무 일 없었다. 이튿날도 그다음날도 아무 일 없었다. 그동안 식모라던 여인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이 댁 할머니가 시골서 돌아왔다. 파뿌리 머리에 허리까지 굽은 아주 파파노인이었다. 이 할머니가 부엌 동자⁵며, 집 안 치우기며, 심지어는 변소까지 맡아 소제를 하는 것이다.
한번은 처제와 아내가 소곤거리기에 무엇이냐고 했더니, 이 댁 할머니가 저번 시골 내려가기 전에 몸이 편찮아 약을 지어다 쓴 일이 있는데 그 약값을 이번에 와보니 아직 갚지 않고 있어, 할 수 없이 집안사람 몰래 간장 두 병을 퍼가지고 들어와 사라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이런 것도 법에 비추어 도둑질이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샀으니 장물죄에 걸리는지 어떤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리로 옮겨온 지 사흘째 되는 날 저녁, 아내와 나는 의논한 결과, 어쩌면 주인 댁에서 타협을 받아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아내가 한 달 방세를 가지고 가서 다시 사정을 해보기로 했다. 그래, 가지고 갈 방세의 금액이 문제였는데, 이만 원, 삼만 원으로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고, 사만 원으로 할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오만 원으로 결정을 했다. 방세 오만 원씩을
물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들리는 말에 다다미 한 장에 만 원씩이란 말도 있고, 정하고 있던 방세를 올릴 참으로 방을 비워달라는 수가 비일비재란 말이 있는 데다, 더욱이 우리는 변호사 영감의 말대로 법적으로 해결을 지어서 노상이나 여관으로 쫓겨나가는 날이면 큰일이라, 이런 방세나마 내고 타협을 얻은 후 마음놓고 나가 열심히 장사를 해 살아나갈 변통을 하는 게 나을 성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벌써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은 옷가지를 갖고 국제시장으로 나가고, 큰애 둘은 서면에 가서 미군 부대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의 오만 원도 아내의 장삿돈에서 떼어낸 돈이었다.
안방에 들어갔다 좀 만에 아내가 돌아왔다. 손에 돈이 들려 있지 않다. 그러면 됐나 보다 했다. 그러나 아내의 말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방을 비워달란다는 것이다. 영감과 큰아은 다다미 여덟 장 방에서 자고, 큰 온돌방에는 작은아들과 부인이 각각 자고 있는데, 그러고는 좁아서 못 견디겠다는 말은 못하겠던지, 장발한 딸들의 말이 할머니 코고는 소리에 도시 잠을 잘 수 없으니 기어코 그 방을 할머니 방으로 쓰게 내달라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내는 또 우리가 어떻게든 할머니 주무실 자리를 넉넉히 내어올릴 테니 그렇게 하자고 해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인이 한다는 말이. 자기네 딸 친구가 있어 방 하나만 구해주면 금 손목시계를 프레젠트하겠다는 것도 못하고 있단다는 것이다. 나는 간이 서늘해옴을 느꼈다. 금 손목시계라니 문제가 좀 큰 것이다. 그래, 가지고 갔던 돈은 어쨌느냐니까, 좌우간 딸들 책이라도 한 권 사보라고 놓고 오긴 했다고 한다. 그 돈만 돌아오지 않으면, 하는 것이 희망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그 돈은 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이었다. 나는 학교 나가는 날은 학교로 해서, 그렇지 않은 날은 아침에 직집 남포동 부모가 계신 곳에 가 하루를 보낸다. 이곳 피난민들은 대개 담배 장사를 하느라고 애들만 남기고 모두 나간다. 부모도 그 축의 하나였다. 나는 여기서 서면 간 내 큰애들이 돌아오길 기다려 국제시장엘 들러 애들 엄마를 만나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한 일과였다. 그날도 그랬다.
우리가 저녁에 모여 들어가니, 방 안에 말 같은 처녀 둘이 와서 버티고 섰다. 이 댁 딸들인 것이다. 누가 형이고 동생인 것도 구별 안 되는, 좌우간 큰딸은 시내 모 여학교 졸업반이라는 것이고, 작은딸은 사학년이라는 처녀들이었다. 이들이 오늘 저녁엔 이 방에 와 자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말 같은 처녀 중의 누가 친구한테 방 하나만 구해주면 금 손목시계를 프레젠트받을 수 있는 아가씨일까 생각해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이 자리를 피해야 할 걸 느꼈다.
그러는데 이 말 같은 두 처녀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이삼 일 내로 반드시 방을 내놓으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시선을 한 번씩 던지고 나가버렸다. 그 시선들이 멸시에 찬 눈초리였든 어쨌든 그것은 벌써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이들의 전법이 그 효과에 있어서 내게는 이들의 오빠 되는 청년이 내 따귀를 몇 번 갈기는 것보다 더 컸다는 것만은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침이면 나가는 나는 이날은 어서 이곳을 나가고만 싶었다. 이날은 학교 가는 날이기도 했다.
풍경 달린 현관문을 열고 나서니, 응접실 앞 거기 꽃이 진 동백나무 이편에 변호사 영감이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회양목인지를 매만져주고 있다. 첫눈에도 여간 그것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태가 아니었다. 좋은 취미다. 인생이란 이렇듯 한 포기의 초목까지도 아끼고 사랑하면서 유유자적할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할 종류의 것 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엇에 쫓기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학교에서는 동료들에게 또 방 얘길 해보았다. 상급생에게도 점잖지 못한 소릴 해보았다. 학교가 파한 후에는 차도 안 팔아주는 다방에 앉아, 아는 친구를 붙들고 구차한 얘길 또 했다.
그러고는 남포동에 와서 장사 간 애들을 기다렸다. 어둑어둑해서야 애들은 왔다. 시장의 애 엄마는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들어갔을 것 같다. 곧장 가기로 했다. 남포동서 경남중학 뒤에까지 오는 동안, 아주 깜깜하게 어두웠다.
철판으로 된 대문을 밀어보니 안으로 잠겼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대문에서 마주 뵈는 우리 방이 새까맣다. 아마 애들 엄마는 아직 시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고 애들 이모가 일찌감치 어린것들을 재우느라고 불을 끄고 있는 것이리라. 아내를 기다렸다 같이 들어가기로 하고, 나는 에들을 데리고 애 엄마가 돌아오려면 으레 그곳을 거쳐야 하는 개천가로 나와 쭈그리고 앉았다.
둘째 놈이 곁에 와 붙어 앉는다. 큰놈도 와 앉는다. 좀처럼 아내가 돌아오지 않는다. 둘쨋놈 남아가 앉은 채 꼬박꼬박 존다. 이렇게 초저녁인데 꼬박꼬박 존다. 열두 살짜리 어린 육체로서 자기 하는 일이 고된가 보다. 나는 그만 검은 하수구 개천으로 고개를 돌리고 만다. 담배를 꺼내 문다. 성냥이 일어서지 않는다. 공중에서 검은 빗방울이 듣기 시작한다.
큰놈 동아가 혼자 일어나 집 쪽으로 간다. 좀 만에 뛰어오면서, 어머니도 돌아오고 대문도 열렸다고 한다. 큰놈이 문 앞에 가봤더니, 방 안에서 어머니 말소리가 들려 불렀다는 것이다.
방에 들어가 알아보니, 전등은 고장인지 고의인지 저녁부터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 댁 전등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특수선으로, 물론 지금도 다른 방엔 모두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잠시 우리들은 어둠 속에서 말이 없었다.
애들 이모가 혼잣말처럼 내일은 언 다리 밑으로라도 나가고 말아야겠다고 한다. 이모의 말이, 여태껏도 그래왔지만 오늘은 이 집에서 더 어린것들을 못살게 굴더라는 것이다. 이모네 일곱 살짜리 큰놈과 우리의 여섯 살짜리 끝놈이 어쩌다 노래를 부른다든지, 변소에라도 가려 복도로 나가면 시끄럽다고 꽥 소리를 지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자기네 일곱 살짜리가 여봐란 듯이 보무당당히 복도를 행진하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할 때, 이쪽 애들이 따라만 해도 다시 고함 소리가 연발되더라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보기에 안된 것은 우리 선아가 역시 계집애는 달라, 동생애들이 주인한테 꾸지람 듣는 게 보기에 안된 듯, 조금만 애들이 소리를 내도 안타까워하는 모양이 차마 옆에서 볼 수 없더라는 것이다.
애들 이모가 어둠 속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운다. 내 가슴속도 화끈 불이 붙는 결 느낀다. 그건 대구서 선아의 고무신 한 짝을 잃었을 때에 느꼈던 분노와는 또 달랐다. 그러나 그들이 여하한 전술을 바꿔가지고 나오더라도 우리가 여기 있는 동안 참는 수밖에 없다. 그저 그 전술을 최대한 피할 도리를 강구하면서.
그래 우리가 생각해낸 것 이 내일부터는 낮에 이 방을 진공 상태로 해두자는 것이었다. 우리의 어린것들은 남포동에 가 있기로 하고, 이모네는 외갓집에 가 있다가 이모만이 먼저 와서 저녁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이러고 나서야 우리는 무슨 안심이나 얻은 듯이, 어둠 속에서 싸늘히 식은 밥덩이를 찾아 목구멍에 넘길 수가 있었다.
선아와 끝놈 진아를 데리고 나는 남포동 부모가 계신 곳에 가 하루를 보냈다. 엊저녁에는 빗방울이 듣더니, 오늘은 그래도 날이 개어서 됐다.
어둡기 전에 아내가 왔다. 그런데 어두워도 큰애와 둘째 애가 오지 않는다. 진아가 졸린다고 하더니 엄마 품에서 잠이 들었다.
아주 깜깜하게 어두운 뒤에야 두 애는 돌아왔다. 어제 오늘은 전차 얻어타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두 애는 어미 아비와 조부모 앞에 흥겹게 품속에 넣어가지고 온 담배 보루며 껌갑을 솜씨 빠르게 꺼내어 놓는다. 나는 도리어 그 익숙한 손놀림이 슬퍼서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잠든 진아는 내가 업고, 아내는 보퉁이를 이고 우리는 나섰다. 동아극장 앞 큰거리를 걸어 올라갔다. 큰놈 동아가 내 곁으로 다가서며, 물건 살 때 이렇게 말하면 잘 팔아준다고 하면서, 풀리즈쌜 투 미, 하고 영어 회화를 해보인다. 쌜 투 미가 아니고 쎌 투 미라고 내가 고쳐준다. 동아는 초등학교 졸업반이다. 이제 학교엘 보내서 졸업을 시켜야 중학교엘 들어갈 수 있는 애다. 이 애가 껑충 뛰어서 영어 회화부터 배워오는 것이다. 이것을 이 아비는 또 정정까지 해줘야 하는 것이다.
둘째 놈 남아가 또 한옆으로 다가오더니, 오늘 참 약은 자식 하나 봤다고 하며, 이런 이야길 지껄여댄다. 어떤 꼬마 하나가 붙잡히게 되니까 거기 논바닥에 번듯이 나가자빠지더라는 것이다. 물을 잡은 논이었다. 귀까지 잠기는 물속에 사지를 쭉 뻗고 나가넘어져서는 눈을 까뒤집고 입을 막 히물거리더라는 것이다. 이 꼬마의 품안에는 몇 센트의 군표가 들어 있는 것이다. 꼬마의 이러는 모양을 저편에서 한참이나 내려다보다가 도리어 걱정되는 듯이 꼬마의 배를 몇 번 꾹꾹 늘러보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꼬마는 알은체 않고 그냥 눈을 까뒤집은 채 입을 자꾸 히물거리더라는 것이다. 지랄병이라도 있는 앤 줄 안 것이리라. 저편에서 훌훌 가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나는 내 옆에서 지껄여대는 우리의 이 남아도 몇 센트의 군표를 위해서는 지금의 꼬마처럼 그 지랄을 해야 할 걸 생각했다.
부성교에 이르러 우리는 오른편으로 꺾인다. 개천둑 길은 어둡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한데 어둡다.
남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리 노래 불러요, 한다. 내가, 노래는 무슨 노래, 하려는데 엄마 곁에 붙어서 가던 선아가, 노래라는 말에 기다리고나 있었던 듯 부르기 시작한다. 전우의 시체를 넘어 넘어…… 나는 이 선아가 변호사 댁에서는 꾸지람이 무서워 어린 동생에게 노래는커녕 소리 한번 못 내게 주의시키던 일을 생각하고, 노래를 그만두라는 말을 못한다. 남아, 동아도 따라 부
른다.
이 노래가 끝나기가 바쁘게 남아가, 찌리링 찌리링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찌리리리링, 하며 자전거를 탄 시늉을 하고 어둠 속을 달린다. 엊저녁에는 그렇게 졸던 애가 오늘은 웬일일까. 오늘 장사에 수지가 맞았다는 것인가. 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이번에는 자전거가 이리로 달려와 아빠 새를 돌아 나간다. 아빠 되는 이 영감은 자전거에 치지 않기 위해 비켜나야만 했다.
등에서 진아가 잠을 깼다. 깨어나서는 누나가 다시 부르기 시작한,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 오너라를 같이 불러본다. 선아는 율동까지 섞어가며 한다. 흡사 어둠 속을 날아가는 나비와도 같이.
누나의 노래가 끝나자, 그제는 온전히 정신이 든 듯 진아가, 산토끼 토끼야를 꺼낸다. 이놈은 또 토끼 뛰는 시늉을 하는 것이었는데, 내 등에서는 맛이 안 나는지 어깨로 기어 올라가 무등을 타고서 야단이다.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밤토실 주워서 올 테야. 진아는 노래가 끝난 뒤에도 그냥 토끼 뛰는 시늉을 한다.
나는 여섯 살잡이 진아의 엉덩이 밑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생각한다. 토끼라고 하면 이 아빠도 엄마도 토끼띠다. 그러나 이 아빠토끼는 깡충깡충 산고개를 넘어가 토실밤을 주워오기는커녕 이렇게 어두운 개천둑에서 요맛 무게 요맛 움직임 밑에서도 비틀거리며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곡예사라는 말을 떠올렸다. 오라, 지금 나는 진아를 어깨에 올려놓고 곡예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진아도 내 어깨 위에서 곡예를 하고 있고, 선아는 나비의 곡예를 했다. 남아는 자전거 곡예를 했다. 이 남아가 이제 몇 센트의 군표를 위해 그 꼬마와 같은 지랄을 해야 하는 것도 일종의 슬픈 곡예인 것이다. 그리고 동아의 풀리즈 쌜 투 미도 그런 곡예요, 이들이 가슴이나 잔등에서 또는 허리춤에서 담배 보루며 껌 갑을 재빨리 꺼내고 넣는 것도 훌륭한 곡예의 하나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황순원 곡예단의 어린 피에로요, 나는 이들의 단장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무대는 이 부민동 개천둑이고.
피에로 동아가 소렌토를 부른다. 그래 마음대로들 너희의 재주를 피워보아라. 나는 너희가 이후에 오늘의 이 곡예를 돌이켜보고, 슬퍼해할는지 웃음으로 돌려버릴는지 어찔는지 그건 모른다. 따라서 너희도 이날의 너희 엄마 아빠가 너희들의 곡예를 보고 웃었는지 울었는지 어쨌는지를 몰라도 좋은 것이다. 그저 원컨대 나의 어린 피에로들이여, 너희가 이후에 각각 자키의 곡예단을 가지게 될 적에는 모쪼록 너희들의 어린 피에로들과 더불어 이런 무대와 곡예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바란다. 이거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쓸데없는 어릿광대의 넋두리였습니다. 자, 그러면 피에로 동아군의 독창을 경청해주십시오.
한 걸음 떨어져 오던 아내가 가까이 와 한 팔을 내 허리에 돌린다. 이 단장 부인은 남편 되는 단장의 곡예가 위태로워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염려 말라고 아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는데 피에로 동아의 노래가 마지막 대목 다 가서 뚝 그친다. 이미 우리는 그 변호사 댁이 있는 골목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밤 프로는 이것으로 끝맺기로 하겠습니다. 준비가 없었던 탓으로 이렇게 초라한 곡예가 되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내일을 기대해주십시오. 우리 곡예단을 이처럼 사랑해주시는 데 대해서는 단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표해 마지않는 바입니다. 그러면 안녕히들 주무세요. 굿바이 !
-끝-
2016년 5월 1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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