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녕하세요. 조금 전 맥과이어가 매덕스를 상대로 중월 2점홈런을 쳤습니다. 573호라고 하네요. H. Kilebrew라는 좀 이름이 생소한 선수와 통산홈런수가 타이라고 합니다. 최근 9안타가 전부 홈런이라고 하니 역시 맥과이어는 대단한 선수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ESPN 중계를 보면서 말씀드리는 중입니다. 지금 미국에 살고 있거든요. 미국에 온지 5년 정도 됐습니다. 혹시 메이저 리그를 마음대로 볼 수 있어서 부럽다고 하실 분이 계실 줄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에 계신 분들이 훨씬 더 부럽습니다. 왜나하면 여기는 미시간이라 박찬호경기를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ESPN에서 다저스경기를 중계하지 않는 한 TV채널을 아무리 돌려 봐야 헛수고입니다. 이곳에서는 리그가 다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경기만 중계해 주기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디트로이트 성적이 바닥이라 선수가 누구누구인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카고 살 때 뤼글리휠드에 두 번 간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 번 다 박선수가 등판한 게임입니다. 한 번은 97년 7월 말경, 4대1로 10승째를 거둔 게임이고, 두 번 째는 98년 5월인가 6월이었는데 그 때는 몰매를 맞고 6대3으로 패전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컵스의 새미 소사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최동원선수와 동갑나기입니다. 중학시절 부터 야구광이었는데(중학교 1학년까지 전북 군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전학왔는데 군산남중학교가 군산상고와 한울타리에 있어서 수업시간만 끝나면 군상상고선수들의 연습을 해질때까지 구경하곤 했는데, 그 당시의 주전선수중 여러분들이 다 아시리라 믿는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동원선수와 고교야구를 한 때 주름잡았던 김용남선수와는 군산국민학교 동기동창이고요. 어때요. 야구광이 되지않았다면 오리려 비정상이겠지요),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머리에 서리가 한참 내리고 있는 지금도 아무리 급힌 일이 있어도 야구중계나 뉴스가 나오기만 하면 다른 일은 올스톱입니다.
서두가 좀 길어진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어느 분인가 최, 선, 박 세선수를 객관적으로 비교해달라는 의견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야구팬 여러분들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제가 고교시절부터 지금까지 직접 경기장에 가서 보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실을 총동원해보겠습니다. 그대신 수치는 생략하고요. 여러분이 더 잘 아실테니까요.
최동원선수는 물론 고교시절부터 특급투수였지만, 그 중 압권은 역시 76년 한일 고교 교환경기입니다. 그 당시 일본 최고의 투수라고 자랑하던 사카이 선수와의 맞대결에서 통쾌한 KO승을 거두었으니까요. 삼진도 20개 가량 기록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사카이투수는 73년에 왔던 에가와투수보다는 훨씬 못한 선수였읍니다. 아마도 일본 메스컴이 만들어낸 스타라고 보여졌습니다. 오히려 일본팀 감독이 최동원투수의 신들린 듯한 투구를 보고는 "한국에 이런 투수가 있다니" 하면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아뭏튼 그 당시까지는 한국야구 전체를 통털어서 볼 때 최고의 강속구 투수는 일본서 활동하다 귀국했던 김호중씨였는데(아마 그 때는 은퇴 직후인 것으로 생각됨), 이 경기를 분기점으로 최동원 투수가 그 대를 이을 대성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고교졸업때까지는 두 명의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죠. 바로 대구상고의 김시진투수와 군산상고의 김용남투수였습니다. 주관적 견해라고 저를 비난하실 올드팬이 계실까 봐 좀 두렵습니다만, 두 김 투수도 대단한 투수였음에 틀림없었고, 대학진학시까지 누가 더 대성할까는 아무도 장담못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최선수가 연세대에 진학하자마자 그 균형은 보기 좋게 깨졌습니다. 최동원선수는 3년 선배인 이광은투수를 자연스레 제치고(박철순선배는 그 때 아마 공군 투수였죠.) 에이스가 되어 각종 대회를 휩쓰었음은 몰론,국가대표팀에서도 이선희, 황규봉과 더불어 주전투수로 성장합니다. 두 김투수도 물론 국가대표였습니다만, 이미 그 균형은 깨지고 있었습니다.
최선수의 대학/국가대표시절 기록중 가장 인상적인 것을 들라면, 대회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읍니다만, 카나다 국가대표팀과의 대결에서 9회 2사까지 퍼펙트를 기록한 경기입니다. 그야말로 완전경기를 코앞에 두고 안타를 허용해 결국 10여 개의 삼진을 기록하면서 완봉승으로 끝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때부터 토론토 불루제이스를 비롯한 메이저구단들의 러브 콜이 본격화되기 시작되었읍니다만, 아마 그 경기를 퍼펙트로 끝냈다면 군대문제나 연봉협상과 관계없이 메이저리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하릴없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어느 분인가 80년 동경 세계선수권대회중 대일본전에서 3개의 홈런을 허용하면서도 배짱좋게 가운데로 던젔다고 하셨는데, 제 기억으로는 경기후(이선희투수의 호투와 타자들, 특히 김일권선수의 분발로 6대4로 역전승했음.) 인터뷰에서는 팔이 아파서 살살 던졌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확실히 제가 TV중계를 통해서 보기에도 전력투구하는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점은 한국야구의 에이스의존도가 너무 지나치다는 점입니다. 80년 7전 4승제로 한미대학야구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을 때도 최선수가 물론 에이스였읍니다만, 6차전에 이르기까지 (6차전에서 9회말 최선수가 역전 3전홈런을 허용하고 통산전적 2승 4패로 한국이 짐.) 최동원선수는 매게임 등판하였고, 그 중 여러 경기를 거의 완투하다시피 했습니다. 한국야구의 이 고질적인 악폐는 프로에까지 이어져 84년 코리안 시리에서도 최동원선수는 4승 1패라는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기록을 남게게 됩니다. 이 때문에 제가 지난 글 "야구는 능력과 적응력의 조화..."에서 언급했듯이 아마시절부터 프로까지의 지나친 혹사가 은퇴를 앞당기는 결정적인 이유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최선수의 연투능력은 선동렬선수를 포함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만, 그 때문에 안타나 피홈런은 물론, 방어율에서 선동렬선수와 객관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은 선동렬투수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선동렬투수의 고등학교 기록은 최선수의 경우만큼 생생하지는 못합니다. 저와는 네 학년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물론 전국대회에서 우승도 하고 그 해 고교 선수중 최대 대어였음에는 틀림없었지만, 투구 내용을 보면 직구는 상당히 위력적이었지만, 커브가 약해 상대타자들이 커브만을 노리다 안타를 쳐내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점에서 볼 때 고교시절만을 놓고 본다면 최동원선수와는 투구의 배합이나 타자 제압능력에서 판정패가 아닐까 합니다.
선동렬선수의 진가는 대학 2학년때인 82년부터가 아닌가 합니다. 한대화의 결승홈런으로 유명한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선투수는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여 세께 아마계의 스폿라이트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침 대회기간내내 시골에 있었던 관계로 TV중계를 보는 것으로 일관했지만 그정도로는 만족하질 못해서 선투수의 투구를 직접 보고자 얼마후 열렸던 연세대와 고려대, 고려대와 연세대의 정기전을 직접 가보았을 정도였습니다.
선동렬투수의 국내대회의 성적은 어떠했는데 그러냐구요. 선동렬선수의 대학입학시에는 2년 선배인 양상문선수가 에이스로 있었고, 그 밖에 진동한 투수, 그리고 1년 후에는 청춘스타 박노준까지 가세한 고대의 마운드는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선투수와 동기생이자 후에 LG트윈스의 에이스로 성장한 정삼흠선수는 4년내내 마운드에 제대로 한 번 서보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그 때문에 선동렬선수는 최동원선수와는 달리 혹사당할 염려가 없었고, 또 등판한 경우에도 그다지 시원스런 성적을 내지 못했다고 기억합니다. 말하자면 국제대회용 투수였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82년 정기전에서 본 선동렬은 저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공이 보이질 않더군요. 연세대타자들도 도대체 눈을 뜨고 치는지 감고 치는지 거의가 다 삼진이었고 외야로 공이 날라간 적이 있는지 기억조차 안날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세계선수권대회를 분기점으로 선동렬선수는 국내외 야마야구계에서 공포의 투수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봅니다.
한 참이 지난 후의 입니다만, 야구선수출신인 동기생이 술좌석에서 최, 선을 비교하면서 그러더군요. 타석에 서보니 두 투수의 볼스피드는 비슷하게 빠른데 최동원이의 공은 빨라도 하얗게 보이는데, 선동렬이의 볼은 까매서 도저히 배트를 갖다 댈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바로 그 말이 정답이라고 말입니다. 선동렬선수가 프로에 입문했을 때도 물론 숱하게 해태 경기를 보러 다녔습니다만, 제가 느꼈던 것은 한결같습니다. 저 볼을 누가 갖다 댈 수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이광은선수가 한 말이 있습니다. 정규시즌중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부인에게 "오늘은 선동렬이 선발이라 못칠거야"라고 했더니, 부인 왈 "때리고 못나갈거면 맞고 나가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경기전에 동료들에게 전했더니, 동료선수들이 경악한 것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하일성해설위원이 "광은아, 너 도대체 부인에게 무슨 잘못을 했길래, 그런 심한 말을 들었니?"라고 대답했다는 가십이 모스포츠지에 분명히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선동렬투수의 위력을 나타낸 이야기지만, 해태구단 아니 김응룡감독의 배려도 대단했다고 기억합니다. 몰론 구단 투수중 선발, 마무리 가리지 않고 가장 빈번히 경기에 출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선투수 이외에도 이름조차 거론할 필요없는 에이스급 투수들이 많았던 황금기의 해태였던지라 최동원투수처럼 혹사당할 우려가 없었고, 원정경기 선발등판 전에는 하루 먼저 비행기로 선투수를 이동시키는 끔직한(?) 배려도 서슴치 않았던 김응룡감독과 해태구단이었습니다. 따라서 대학시절부터 일본에 가기 직전까지 선동렬선수의 몸관리는 A급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본인의 각고의 노력도 간과하면 안되겠지만 말입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제 사견으로는 프로야구시절의 기록만 갖고는 양 투수를 객관적으로 비교하기가 어럽지 않나 합니다. 핑계나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아마츄어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름만 바꾸어 프로야구를 운영했던 시절의 희생양들이 바로 82년의 박철순, 83년의 장명부, 이상윤, 84년의 최동원입니다. 장명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중 장수한 투수가 누가 있습니까? 이들이 한국프로야구사에 한획을 그은 대투수들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한국프로야구가 완전히 정착하기 이전에 막가파식으로 투입되어 조로해버린 예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최동원, 선동렬 두 선수만을 놓고 볼 때, 단편적인 비교는 가능할 지 몰라도, 모든 상황을 고려한 종합적인 비교는 어렵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박찬호선수입니다. 솔직히 박찬호의 고교시절의 야구 성적은 전혀 모릅니다. 따라서 메이저리거가 되기 전의 성적이나 그에 관한 동정은 여러분의 정보덕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박찬호선수에 관해서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제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있고 또 그의 성장가도를 흐믓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중에도 메이저리그를 직접 관람한 분이 계시리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장난이 아닙니다. 좌익선상으로 빠지는 타구가 외야 펜스까지 굴러가지 않는 다음에야 100미터 달리듯 전력질주해야 2루에 세이프되는 외야수들의 무시시한 어깨만 가지고도 외경심을 갖게 합니다. 그 덩치들은 어떻고요. TV에서도 박찬호선수가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도대체 땅볼타구가 어떻게 저들을 피해서 안타가 될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하나같이 체구들이 큽니다. 물론 가끔 아담한 선수들로 나오지만, 정말 예외로 봐야지요(여담입니다만 프로미식축구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정말로 쿼터백은 볼을 마치 야구공처럼 던지고 와이드리시버가 날라오는 볼을 잡아 터치다운하러 점프했다 내려오니까 그 근방이 쿵하고 울리더군요.).
벌써 박찬호선수의 경기를 직접 관전한 것이 3년, 4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도 좋은 성적을 냈었고 볼스피드도 지금과 비슷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기억하는 한 선동렬투수의 볼같이 대포알같거나 최동원선수의 총알투구는 분명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히려 언제 큰 것을 맞을지 몰라 조마조마했었지요. 하지만 상대투수들의 볼은 분명히 더 느렸고 박선수보다도 타자들을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눈치빠른 분들은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저는 이러한 것이 모두 상대적이라고 봅니다. 워낙 거인들이 하는 경기인지라,그리고 한국에서의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는지라,박선수의 구질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구의 타자들이 타석에서 투수를 노려보는 것으로 시작하여 거구의 내야수들때문에 국내구장의 내야보다 훨씬 답답해 보이는 이곳 구장 분위기에 압도된 채 관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히 박찬호선수는 엄청난 강속구를 계속 던졌고 타자들을 압도했습니다. 6대3으로 진경기에서도 중반까지는 잘 던지다가 한참 물이 오르기 시작한 새미 소사에게 오른쪽 담장 상단을 맞는 2루타를 허용하고 나서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가 박선수의 경우만은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페드로 마르티네스도 근 1년간 양키스경기에만 나가면 죽을 쑤다가 한 달 전인가 겨우 1승을 거두었는데, 그 다음 양키스와의 경기에서는 또다시 패전투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작년 메츠를 월드시리즈에 진출시키는데 1등 공신이었던 마이크 햄튼이 지금은 콜로라도에서 어떤 처지인지 모두 잘 알고 계실 줄로 생각합니다. 이 모두가 아차하는 순간이 반복되에 일어나는 상황인데, 그 후유증이 국내야구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 메이저리그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찬호선수가 마이너리그로의 추락, 한 이닝에 두 개의 만루홈런 허용 등, 수 차례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오히려 매년 더 좋은 승수를 쌓고 있다는 점은 최,선 두 선수는 물론이고 메이저리그를 통털어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막연히 세선수를 비교하거나 우위를 가리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분 저마다의 그림은 자유이지만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박찬호선수의 공은 어떤 빛깔일까 생각하면서 이 글을 맺겠습니다.
"박찬호의 공은 무지개빛이다. 왜냐하면 그의 공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무한한 꿈과 희망을 안겨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