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리에 대하여
최원현
왜 갑자기 그 소리가 이명(耳鳴)처럼 기억의 창고 문을 연 것일까.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나도 몰래 흘러나온 눈물이 눈가에서 얼어붙어 자꾸만 눈뜨기를 불편하게 했다. 하지만 그깟 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가슴에 안은 금방이라도 파닥파닥 숨을 쉬며 살아날 것만 같은 작은 새의 가슴만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조심해라. 넘어지면 큰일 난다." 무엇이 큰일 난다는 것일까. 나일까. 아니면 가슴에 안은 것일까. 조심하는데도 자꾸만 발이 헛디뎌졌다. 싸락눈이 내린 미끄럽고 가파른 산길 아니 길도 없는 길을 가고 있는 내 발걸음이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을 겨우겨우 버티며 걸었다. 나는 넘어져도 괜찮으나 내 품 안의 이 작은 새가 잘못되면 안 될 것만 같아 더욱 안달이 났다.
"여긋다 허자!" 아저씨가 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따박솔 옆 조금 평평한 곳을 삽으로 걷어내며 냉큼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난 안고 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언 땅을 파는 삽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듯 고개를 푹 숙였다. 품에 안은, 이젠 생명도 떠나고 없어 생명체랄 수도 없는 생명체를 더욱 꼬옥 가슴에 안았다. 눈발이 점점 더 짙어지고 드세지고 있었다. "인자 되얐다. 보지 말고 서서 휙 던져부러라." 아저씨가 파놓은 작은 구덩이, 이 아이가 들어갈 자리란다. 가슴이 마구 방망이질쳤다. 꺼어꺼억 나도 모르게 저 안 깊은 곳에서부터 시꺼먼 슬픔의 덩이가 목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뭣 헌다냐. 얼릉 이 구덩이에 던져부러라잉"
또 한 번의 재촉에 다시 네모난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그 사이 어느새 하얀 눈송이들이 그 안에도 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그렇구나, 느그덜이 먼저 자리를 만들었구나. 그래 이 아이도 별이 되갔재. 느그들이 친구가 되야주겄구나.’ 조심스레 다가가 무릎 꿇은 자세로 아이를 내려놓고자 했다. 그런데 또 벼락이 쳤다. "뭣 헌다냐? 너도 들어갈라고 그라냐? 휙 던져부란께. 너까지 끌고 들어가면 어쩔라고 그러냐. 빨리 확 던져불고 나와부러라." 그러나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해서 내 딴엔 조심조심 최대한 바닥에 가깝게 해서 마지막 그의 방에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내 손에서 놓아지는 그 순간 "터어ㅇ!" 소리에 가슴과 귀가 총맞은 것처럼 멍멍해졌다. 아니 하늘에서 커다란 무언가가 내 머리로 쿵 내려앉는 소리였다. 내 가슴이 아니 내 온몸도 터엉하고 울렸다. 하마터면 그 소리에 놀라 나도 구덩이 속으로 꼬꾸라질 번했다. 그 순간 내 몸이 뒤로 솟구쳐졌다. "뭣 허냐?" 마른 고함소리가 다시 내 귀를 때리면서 아저씨의 손이 나를 낚아챘는지 내 몸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아무리 애기라도 너 하나 끌고 가는 건 아무것도 아녀. 그렇게 너도 따라가고 싶냐?" 50년도 훨씬 더 된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도 가끔 그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 작은 생명체가 이 세상을 떠나며 내게 남긴 마지막 소리였다.
내게 이모부는 아버지 냄새를 맡게 해 준 유일한 분이셨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막내이모는 시집을 갔다. 학교에서 뛰어온 내 눈에 이모는 원삼 족도리를 쓴 신부의 모습으로 신랑과 맞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모는 담양 지실의 영일 정씨댁으로 시집을 갔다. 늘 내 곁에 있던 이모, 나를 업어주고 키워주던 이모가 나를 떠난 것이다. 3년쯤 되어 할머니랑 이모네 집엘 갔었다. 무등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지실 마을 앞을 지나 맑게도 흐르고 있었다. 2미터도 넘을 저 깊은 바닥까지도 한 뼘 깊이처럼 훤히 들여다보이는 맑디맑은 물이었다. 그 후로 방학을 맞아 몇 번 더 이모네에 갔었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가야 하는 힘들고 먼 길인 데도 이모네 가는 것은 늘 좋기만 했다. 이모부는 참 말이 없는 분이셨다. 그러나 그 묵묵함이 더 의지스럽고 이모 몰래 내 주머니에 살며시 용돈을 넣어주곤 하던 이모부셨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할머니께 이모네를 가겠다고 했더니 갑자기 털썩 주저앉으시며 내 손을 잡고는 “느그 이숙 죽었다” 하셨다. 난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고 “할머니 뭐라고요?” 하고 되물었다. “느그 이숙 죽었단 말이다.” 하시는 게 아닌가.
할머니의 울음 속에 나는 멍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모부가 가시다니, 왜? 무엇 때문에?’ 나는 그 길로 담양 지실의 이모네로 향했다. 나주로 나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광주로 갔다가 담양까지 가는 길을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갔다. 저만치로 당산나무가 보였다. 이모네는 그 뒤쪽으로 관사에 산다. 집은 인기척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가느다란 애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방문을 열었다. 이모가 마치 유령처럼 앉아있었다. “이모! 나 왔어!” 했더니 겨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왔냐?”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반가움도 의아함도 없는 무표정으로 멍하니 다시 창문만 바라볼 뿐이었다. 영혼이 떠난 사람 같았다. 방 한쪽 구석에서 아기가 울고 있었다. 울 힘도 없다는 듯 잦아드는 울음이었다. 다가가 아이를 안았다. 순간 아기가 아니라 불덩어리였다. 너무나 놀라 나도 모르게 아기를 안고 냅다 달렸다. 버스정류장께에 있는 이모부 친구가 하는 약국에 이르러 아기를 내미니 아저씨도 놀라 빨리 광주 큰 병원으로 가라 했다. 다시 달려가 이모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여전히 정신없는 멍한 상태로나마 주섬주섬 옷을 걸쳐 입었다. 택시를 부르려는데 마침 버스가 왔다. 택시가 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버스가 빠를 것 같았다. 버스에 올랐다. 자리 하나가 있어 이모를 앉히고 나는 아이를 안은 채 버스에 흔들리며 갔다. 얼마나 갔을까. 아기가 나를 보더니 시익 웃었다. 순간 내 몸의 털이란 털이 모두 곤두서는가 싶더니 식은땀이 온몸을 둘렀다. 무서움증이 확 몰려들었다. 순간 ‘이놈 가나보네’ 하는 느낌이 오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기가 스르르 눈을 감아버렸다.
병원 응급실로 냅다 달렸다. 숨이 멎은 지 15분이라고 했다. 어찌해 볼 방도가 없었다. 터덜터덜 하릴없이 다시 아기를 포대기 채로 안고 나오는데 누군가 “순산하셨나 보네요” 했다. 순산, 참 사람들은 편하게들 생각한다. 아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숨이 떠난 아기를 안고 이모와 집으로 왔다. 이웃에서들 왔다가 이 상황을 보고는 동네에 알렸다. 아기는 그것도 죽은 목숨이라고 윗목에 두란다. 동네 친척 두 분이 돕겠다고 나섰다.
이모는 아들만 셋을 두었다. 이모부도 딸을 갖고 싶어 했다. 이모도 딸을 원했다. 딸을 낳아서 자신이 못 입어본 여학생 교복을 꼭 입혀보고 싶다고 했었다. 계집이 무슨 공부냐던 시대였다. 그래도 큰이모는 어떻게 학교엘 들어갔던가 보다. 큰 이모가 학교에 가면 작은 이모는 몰래 그 뒤를 따라가 유리창 너머로 동냥 공부를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친구였던 교장 선생님이 그러지 말고 같이 학교에 보내라고 했지만 그것도 못 하게 하셨단다. 그럼에도 이모가 하도 그러니 큰이모랑 같은 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교장 선생님이 살짝 넣어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2년가량의 교실 수업이 전부인 이모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만 보면 한참씩 넋 놓고 바라보곤 했었다고 한다. 자신이 못 이룬 한을 딸을 통해 풀어보려 했던 이모 그리고 딸 하나 키우고 싶다던 이모부의 소망 속에 다행히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출산 한 달을 앞둔 추석 전날 이모부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농협에 근무하던 이모부는 공대 출신답게 기계를 좋아하여 여기저기 취미를 살린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추석 연휴기간 동안 금고에 현금을 두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며 그걸 가지러 갔다고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오토바이와 사람이 20미터 간격으로 날아가 떨어졌는데 몸에는 아무 상처도 없이 논에 떨어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유난스러워 보일만큼 금슬이 좋은 부부였다.
한 달 후 태어난 유복녀가 이 아이였다. 채 백일도 되지 않았는데 엄마인 이모는 여전히 정신 줄을 놓아버린 상태였다. 세 아이는 큰 엄마네로 보내 놓았지만 젖먹이는 어쩔 수 없어 같이 두었는데 엄마가 정신이 없어 저 모양이라 아기에게 젖도 제대로 주지 못하다 보니 이리 된 것 같았다. 이모는 하루 종일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으면서 밥도 챙겨 먹는 둥 마는 둥 그러길 석 달째라 했다. 엄마가 그러니 아기가 영양실조에 급성 폐렴으로 이렇게 된 것 같았다. 이름조차 가져보지 못한 아이, 아빠 얼굴은커녕 엄마 품에조차도 제대로 안겨 따뜻한 젖 한 모금 맘껏 먹어보지 못한 채 그렇게 가버린 것이었다.
나도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동란 중에 태어나 돌 달에 돌아가신 아버지였으니 나도 아버지 품에 한 번도 못 안겨보았을 것이다. 이심전심 동병상련으로 아기가 더욱 안쓰러웠다. 그런 아기를 이 추운 날 차가운 땅속에 묻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 마음이 어땠을까.
소리란 공명(共鳴)일 때 더 크게 들리는 것 같다. 어떤 소리는 무섭고 어떤 때는 안도감을 준다. 어떤 때는 소름이 끼칠 만큼 싫고 어떤 때는 하늘의 소리처럼 환상적이고 듣기에 좋다. 어떤 때는 그렇게 듣기 싫은데 어떤 때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그리운 소리가 된다. 하지만 그날 아기를 내 손에서 놓는 순간에 들리던 그 소리는 내게는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크고 무서운 소리였다.
바람결에 사운대는 댓잎 소리도 아니었다. 겨울밤 눈을 떴을 때 하얀 달빛 아래서 떨던 문풍지 소리도 아니었다. 솔잎 사이로 불어오던 솔잎 내 나는 솔바람 소리도 아녔다. 늦은 저녁 마실에서 돌아오시던 할아버지의 대문 여는 소리도 아니었다. 어린 날엔 그런 소리도 다 무서웠다. 하지만 그런 자연이 스스로 울림을 통해 만들어낸 자연이 내는 소리가 아닌 내가 들은 터엉 소리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떨어지는 소리여서였을까.
떨어지는 소리는 결코 무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폭포수처럼 크고 웅장하게 떨어지는 소리도 있고 눈발처럼 사뿐히 떨어지는 소리도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때는 아주 청명한 소리로 들려오고 어떤 때는 소음이 되는 것도 무게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 그 소리는 그가 내게서 정을 끊고 떠나는 소리였다. 그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러고 보면 처음 본 내게 내 가슴에서 시익 웃어보이던 그 웃음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오빠 고마워, 그래도 오빠가 이렇게라도 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여기까지만이네. 잘 있어. 그 어린 것이 그렇게 나를 만나자마자 떠나면서 보낸 마음 씀이라고나 해야 할까.
사실 그때까지 난 이미 형과 아버지 어머니를 그리고 큰 이모부와 작은 이모부까지 차례로 떠나보낸 이력이 있는 상태였다. 이름조차 가져보지 못한 그 아이를 보내는 데는 더 어렵지 않을 법도 했다. 한데 내가 정작 철이 든 후의 첫 이별이라 이리 깊이 그리고 충격으로 왔던 것이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그 소리가 반백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왜 생각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모가 가신 달이다. 맞다.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 내려갔더니 영정 속에서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모는 내게 “왔냐?” 하셨다.
세월이 가면 잊혀지는 게 있고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다. 어머니 대신이었던 이모가 생각난 것은 아무래도 이모에 대한 그리움이 이모가 가신 달을 맞아 내 잠재의식 속에서 아이의 기억을 일으켜 냈나 보다. 내 눈으로 처음 목격했던 죽음 그리고 그를 직접 묻던 날의 기억이 초록이 푸르른 날에도 눈발 흩날리던 날의 기억으로 살아나는 것은 단순한 그리움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쯤 그 영혼은 어디서 우리를 보고 있을까. 그가 보기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는 있는 것일까. 터-ㅇ, 그 소리가 제대로 살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만 같다. 새삼 오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