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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합시다!
강론하기 참으로 힘든 주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올 때마다 지난 시절, 생뚱맞고 엉뚱한 이단 교리를 선포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하느님께도 크게 송구스럽고, 적절치 않은 예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셨을 교우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둘러싸인 하느님, 오묘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언어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가올 때 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틈만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삼위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시작 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찬가’를 부를 때 아주 겸손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서 11장 33~34절)
결국 하느님은 파악이나 결론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신비와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접근 방식 역시 더없이 신비스럽고 심오하며 불가사의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양식과는 완전 다른 초월적·신비적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풍요롭고, 훨씬 조화롭고, 더없이 뜨겁고 극진한 사랑인데,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상호 일치 안에서 통합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곧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4항)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삼위일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진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보통 삼위일체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하다 바닷가에서 아이를 만난 예화를 사용합니다. 아이는 조개껍데기로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을 어떻게 작은 웅덩이에 다 담으려고 하느냐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이는 “당신도 인간의 작은 머리로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채워 넣으려 하지 않느냐?”며 반문합니다. 아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단순히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도출하고 끝내야 할까요? 어쩌면 무한한 삼위일체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바다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작은 바다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가 가장 명확하게 계시되는 때는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아버지-아드님-모든 권한).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모든 능력이 성령이십니다. 성령 안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에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아드님께 전해 주시고 아드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써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세례를 베풀라고 하는 말씀에도 ‘그리스도-제자들-성령’의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는 첫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날 때 받는데 이를 위해서는 아담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여 아담이 흘리는 피가 성령입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이뤄지는 성사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믿음’으로 이뤄지는데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받아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세 분이셔야 할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고 사랑만이 창조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최소 단위는 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둘만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선물하는 ‘관계’가 일어나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1 참조). 관계의 기본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데, 하느님은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았다는 힌트를 성경에서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가난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가보처럼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빗을 사고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한 시곗줄을 사서 선물했습니다. 선물 안에는 주는 이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은 성령인데 선물을 무시할 때 관계가 끝납니다. 아내는 분명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감사해서 자녀를 낳게 될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탄생이 ‘아빠-엄마-선물’로 이뤄짐을 알지 못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 삼위일체를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자녀는 부모의 삼위일체 사랑으로 탄생합니다. ‘아버지-어머니-피’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어 길거리 짐승들처럼 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아버지-아드님-성령’ 삼위일체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교회-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받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따라서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는데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도 ‘교회-나-성령’으로 자녀를 낳으라고 파견받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파견받아 엘리사벳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나의 피에 성령을 섞어 내어주며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전해 주는 삶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삶이고 삼위일체만이 사랑이며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28,16-20: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부활시기가 부활의 가장 큰 결실인 성령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끝났다. 이렇게 부활시기가 끝난 후 바로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모든 구원질서의 원천은 삼위일체이며,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삼위일체의 업적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와 역사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 그리고 성령강림의 신비가 발하는 빛들이 삼위일체에서 구원의 업적이 이루어졌음을 이해할 수 있다. 시인 단테는 “신곡” 천국 편 제33곡 85-87에서 내세에서의 상징적인 모험 여행의 결론으로 모든 것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에 귀결시키고 있다: “그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노라. 조각조각 우주에 흩어져 있는 것들이 사랑으로 한 권에 엮어져 있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신학적인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비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신명 4,39).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의 책임을 충만히 지고 계신 분으로 나타난다.
사도 바오로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 즉 우리가 ‘하느님의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라 부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함께 하므로 하느님의 생명에 함께 참여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랑의 생명에 신비롭게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때문에 아들의 차원으로 우리가 들어갔고, 그 때문에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즉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영광중에서 부르고 계신 그 이름, “아빠!”를 우리도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신비에 참여하고 있다면, 이제는 그 때문에도 “삼위일체”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처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은 우리가 “새로운 인간”(갈라 6,15; 2코린 5,17 참조)으로 “변화”하고 우리의 생활이 윤리적, 영적으로 변화됨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 속에서 항구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노력에 성령의 이끄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을 것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기쁨을 언제나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우리 마음을 열어놓는 자세가 필요하다.
복음에서는 명확하게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19절)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는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그 신비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께 종속되는 그런 멍에와 같은 것이 아니라, 성 삼위께로 가는, 그 신비에 참여하는 움직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개인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이 신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을 예수께서는 하시고 계시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가르쳐라!”(19-20절). 이렇게 이루어진 공동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봉헌된 믿음의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신비에 참여하여 그 생명을 누리는 이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알리고 생활의 증거로써 온 세상에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 영광을 받으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20절)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로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성령 안에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의 은총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자기 확산적 사랑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완전한 사랑은 하나가 되어,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이 완전한 모습이며, 그 사랑은 당신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창조와 구원의 역사로, 그리고 아들의 강생과 파스카 신비로, 그리고 성령강림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번 묵상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제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 진정한 친교를 나누려면, 우리의 삶이 삼위일체적인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여러 식구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분명하게 아버지는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즉, 사랑 안에서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도 우리 가족 사이에도 진정한 사랑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여럿이라도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사는 것이며,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예전에 있었던 갑곶성지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여름 태풍에 쓰러지는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나무가 쓰러질까요? 키 작고 약한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태풍에 쓰러진 나무는 모두 키가 큰 나무였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아름드리 거목들이 태풍을 잘 견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옆에 있는 키 작고 약한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태풍에는 자신을 낮추고 굽힐 줄 아는 나무만 살아남습니다. 보란 듯이 자신을 과시하는 나무는 쓰러지고 맙니다. 한 그루의 거목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까요? 그러나 태풍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강한 존재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연약해 보이는 볼품없는 풀잎은 어떨까요? 너무 약해서 그냥 날아가 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태풍이 지나가고 얼마 뒤에 누워 있던 풀잎은 다시 고개를 듭니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를 높이고 과시하는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갈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태풍 앞에 고개 숙이는 풀잎만이 살아남듯 주님 앞에 고개 숙이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풀잎의 삶을 기억하고 또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기억하고 또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입니다. 성부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고 이스라엘 민족과 계약을 맺으며 그들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이스라엘 민족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성부께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성자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시면서, 교회를 성화하고 인도하도록 성령 하느님을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세 위격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통해 우리는 나의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도 일치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나의 이웃들과 어떻게 일치하고 있을까요? 혹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면서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다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이웃과의 일치를 이루는 것.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우리 역시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 안에 머무는 사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더 큰 은총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주변이 어둡다고 투덜대지 말고 네거 먼저 촛불을 켜라(간디).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상호내주(相互內住)
내가 그 안에 있도록,
그가 내 안에 있도록 하는 사람이
삼위일체의 사랑이며,
우리는 그러한 사랑에 초대받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신비로 남아있지만,
그 신비를 삶 안에서 내 몸으로
구체적으로 살아낼 때 체득될 수 있는 신비입니다.
친교가 부족한 교회는
그 심장에 사랑이 식어 있다는 표지입니다.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아직도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우리가 덜 사랑한다는 겁니다.
아직도 나만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우리가 덜 사랑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믿는 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그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퍼주고 전하는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랑은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깨닫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삼위일체의
사랑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되는
일치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깊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우신
업적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다름 아닌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개별적이면서도
고유한 활동성으로
우리의
참된 구원을 위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넘치는 생명력으로
구체적인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삶또한
삼위일체의
지극하신
사랑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어제의 신비가
아닌 살아있는
오늘의
신비입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 사랑을
닮아갑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마태28,19)
'사랑의 신비!'
오늘 복음(마태20,16-20)은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란?' '삼위(三位),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지만, 본성으로 일치를 이루고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다.'라는 교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시키신 교부는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년)'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325년)'와 '두 번째 공의회인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가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던 '아리우스이단'을 단죄하고, 삼위일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숨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시작되고 행해지고 마쳐집니다.
'성호경, 영광송, 사도신경, 세례식, 사죄경, 미사시작인사, 등등' 이러한 표지들이 삼위일체 교리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일체 신앙을 삶으로 살아낼 때 이해될 수 있는 참으로 어려운 교리입니다.
'사랑의 신비!'
'삼위일체 신앙의 본질은 사랑이며, 사랑의 신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각 위격을 향해 내어졌고, 또한 인간 구원을 향해 내어졌습니다.
우리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힘으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가정 안에서, 본당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아가페 사랑'을 통해 사랑의 신비를 이루어 냅시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10,30)
복음 말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