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리에 엘레이손
눅 17:11-19
지난 2013년 7월 5일자 국민일보 30면에
달콤한 메시지만 전하는 설교가 옳은가 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칼럼을 통해 은혜에만 치중한 나머지 성경의 본질까지 훼손하고 있는 교회들을 꼬집는 기사 이였습니다.
그는 과잉 은혜에 사로잡혀 복음의 본질을 잊는 교회가 보이는8가지 징조를 아래와 같이 꼽았습니다.
1) 설교자가 죄에 관해서 설교하지 않는다.
죄라는 단어를 설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며 예수님이 죄를 사해 주시는 장면에서만 간혹 들을 수 있다.
2) 목회자가 현 시대 문화에 대해 의로운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
새로운 교인들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서 낙태와 같은 문제가 나오면 슬쩍 피한다.
3) 구약은 무시한다.
구약은 설교를 위한 도구 정도로만 사용되고 오늘날 우리의 삶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4)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사역을 이끌게 한다.
5) 목회자가 제도적 교회(institutional church)를 거부한다.
6) 목회자가 십일조에 관한 설교를 거부한다.
7) 설교자가 긍정적인 동기만을 유발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과잉 은혜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건강, 부, 번영, 하나님의 사랑, 용서, 인생의 성공만을 말한다.
물론 이것은 다 성경적인 가르침에 있는 내용이지만 균형감을 상실할 때는 건강하지 못한 영적 양식이 된다.
8) 교회 중직들이 아무런 제재 없이 죄적 일상 속에서 산다.
죄나 회개, 지옥에 대한 가르침이 없이 오직 은혜만 강조하면 죄에 대해 느슨한 분위기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는 도덕폐기론은
현대 복음주의 교회의 위험한 경향이며 이런 경향을 지지하는 형제들에게 사랑을 갖되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예수님은 달콤한 말씀을 하셨습니까?
복음의 본질을 말씀하셨습니까?
첫째로; 믿음은 예수와의 만남 키리에 엘레이손’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12절 말씀입니다.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나병 환자 열 명을 만나셨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나병 환자들의 삶의 모습이 레위기 13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레위기 13장 45절-46절 말씀입니다.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병 환자는
첫째, 옷을 찢고 머리를 풀었습니다.
죽은 자를 애도할 때 슬픔과 애통을 표현하는 히브리적 방법입니다.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는 상징입니다.
둘째, 윗입술을 가렸습니다.
자신의 입술을 치는 행위로 자신을 비하하는 것입니다.
셋째,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쳤습니다.
자신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넷째, 진영 밖에서 혼자 살았습니다.
마을에는 거룩한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에 부정한 나병 환자는 마을에 거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만나주셨습니다.
만남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7장 13절 말씀입니다.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크게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헬라어로 ‘키리에 엘레이손’(Κύριε Ελέησον)입니다. ‘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나병환자들이 예수님을 만난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4세기 초대 교회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키리에 엘레이손’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키리에 엘레이손’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키리에 엘레이손’ 이러한 마음이 주님을 만나는 시작점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4절 말씀입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키리에 엘레이손’) 라고 고백하는
나병 환자 열 명에게 제사장들을 찾아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몸을 보이는 이유가 레위기 14장 1절-7절에 있습니다.
나병 환자라는 판정과 치유 판정을 제사장들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다가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열 명이 나병 환자라는 것, 예수님을 만난 것, 치유 받은 것, 여기까지는 같습니다.
이제 열 명에게 다른 점이 나타납니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5절 말씀입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열 명 중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 하나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이것이 하나님의 사건인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한 것도 아닙니다.
우연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하나님의 사건임을 알았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6절 말씀입니다.
예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그래서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7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질문하셨습니다.
나머지 열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
왜 감사를 드리지 않느냐’라는 질문보다도 ‘하나님이 개입하신 하나님의 사건인데,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없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감사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18절 말씀입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감사를 드리러 온 자가 없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열 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은혜에 응답을 한 것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7장 19절 말씀입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말씀하신 다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열 명이 몸의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명만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
키리에 엘레이손’은 주님을 만나는 통로, 치유의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통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유혹을 이기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몸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