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부활 제7주간 (월) 말씀 묵상 (사도 19,1-8) (이근상 신부)
바오로가 다시 “그러면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니, 그들이 대답하였다. “요한의 세례입니다.” 바오로가 말하였다.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면서,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님을 믿으라고 백성에게 일렀습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오로가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시어, 그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사도 19,3-6)
페북으로 이미 몇 차례 성령께서 실은 아주 가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나누었다. 소박하고 단순한 사랑의 마음보다 더 성령에 가까운 움직임은 없다고 확신한다. 오늘 사도행전의 이 대목, 바오로에게서 세례받고 안수 받은 이들이 신령한 언어로 말을 하게 되었다는 보도도 같은 맥락에서 좀 새겨볼 수 있다.
먼저 방언을 하는 분들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중학생 즈음이었을텐데, 엄마가 나를 성령기도회같은 곳에 데려갔었다. 가뭇한 기억이지만 화양동 성당이었다. 늦은 밤까지 하는 기도회였다. 기도회가 끝나갈 무렵 사람들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몇 몇을 제외하고 많은 이들이 쓰러지는 상황이 펼쳐졌다. 줄을 서서 다가간 내게도 봉사자가 소위 '방언'을 하며 머리에 손을 얹었고, 정확하게 내 느낌에는 내 머리를 밀어서 뒤어 넘어뜨리는 듯 싶었는데, 뒤에 받쳐주는 이가 또 있으니 위험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좀 묘한게 힘으로만 나를 넘어뜨렸다기보다는 뭔가 아스라하게 힘이 좀 빠지는 기분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내게 이 체험은 반은 맞고 반은 아닌 것같은 신령할 것까지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속된 사이비라고 할 수는 없는, 참 익숙치 않은 체험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는 기적과 기적이 아닌 두 가지만이 있으리라는 이분법이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의 사고법일터이니... 그저 이건 어디에도 넣기에 애매한 체험정도였다. 그리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둘 것도 아니었다. 그 후로 다시 또 가자는 엄마의 초대를 거절했던 것 같다.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방언이란, 보통의 방언이란 딱 이만큼의 움직임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신령한 언어라 말하는 방언은 세상 사람들을 뒤집어 놓을 깊은 힘이 있지만, 결국 그건 우물거리는 소리요, 뭉개진 소리이며, 신음이기도 하고, 아픔이기도 하며, 외침이기도 한 우리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이, 바로 성령의 소리다. 성령은 대부분의 경우 왕들을 무릎 꿇게 만드는 이적과 기적이 아니라 작고 무너진 이들의 어깨에 손을 얹는 작은 빛, 순한 소리일 수 밖에 없다. 힘으로 우겨버리는게 성령이라면 예수께서 어찌 십자가를 지시며 침묵하셨으랴. 성령은 대부분의 경우 누구도 쓰러뜨리지 않는다. 성령은 말을 건네시며 초대하시는 분이지, 찍어누르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외곽-그 때만해도 변두리 본당의 저녁을 가득 메운 이들의 마음에 내린 그 분의 순한 활동을 지금은 온전히 믿고 또 믿는다. 완벽하고 엄청난 이들에게 담기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집에서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우리들 중의 한 분이 또 다른 약한 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위로하는 밤이었으니...
바오로에게 안수받고 신령한 언어를 말하였다는 걸, 마치 어떤 특별한 외국어라도 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황당하다. 그들은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며 말씀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토해 내었을터. 그건 결국 사랑, 사랑, 사랑 그 밖에 다른 해석이 필요치 않았을 작은 자들의 연대였을터.
출처: https://www.facebook.com/simonksyi/posts/pfbid02aNZKPso2QoYFvSiR3VMbUkgQahA8FuWx6wRgTVj5yM9UrLjnhpLKUWVRCcos4qyyl
첫댓글 작은자들의 연대,
작은빛.
순한소리
초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