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르도가 람보르기니 막내 역할을 한창 수행할 때, 나는 생각했다. 가야르도의 인생 아니 ‘차생’이 종반에 접어들어 싫증 날 즈음에도 눈길을 사로잡는 건 여전했다. 그리고 2014년, 내 섣부른 생각에 ‘빅엿’을 날리며 가야르도보다 10배는 멋진 우라칸이 태어났다.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그 후 어느덧 우라칸이 나온 지도 5년이 지났다. 다섯 달, 아니 닷새가 멀다 하고 유행이 바뀌는 세상에 이 정도면 슬슬 옷매무새를 고쳐 입을 때가 됐다. 가야르도가 10년 동안 만들어졌으니, 우라칸도 약 절반을 산 셈이다. 람보르기니는 우라칸에 ‘에보’를 붙여, 그간의 업데이트를 단행했다. 올해 1월, 우라칸 에보가 그렇게 첫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국내 정식 출시된 우라칸 에보(이하 ‘에보’)를 만나봤다.
다운포스 7x
에보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모델은 우라칸 퍼포만테(이하 ‘퍼포만테’)다. 기존 우라칸으로 만든 최후의 하드코어 특별 버전이자,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을 6분 52.01초 만에 주파하며 세상을 놀랬던 차다. 에보에는 기존 우라칸에서 30마력, 4.1kgm가 올라 640마력, 61.2kgm를 발휘하는 퍼포만테의 심장을 그대로 이식했다.
몸무게(건조중량)는 퍼포만테보다 40kg 무거운 1,422kg. 기존 우라칸과 같은 수치다. 퍼포만테에서 보여준 다이어트의 결실이 빠져 관계자에 물었더니, 공력성능을 개선하고 출력 대 중량비(2.33→2.22kg/마력)가 향상돼 필요 없었다고 답했다. 실제로 에보는 2.9초 만에 시속 100km, 9.0초 만에 시속 200km를 찍었다. 기존 우라칸보다 각각 0.3초, 0.9초 빨라진 기록이다.
공력성능 개선은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과격하게 바뀐 앞 범퍼는 사진보다 실제가 훨씬 복잡하고 입체적이었다. 헤드램프 속 주간주행등을 닮아 알파벳 Y(람보르기니는 ‘입실론 모양’이라고 부르더라)처럼 생긴 날개는 차체 안으로 들어가 마치 텐트 속 뼈대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만든다.
엉덩이 모서리는 하늘을 향해 더 높이 꼬집어 세웠다. 퍼포만테처럼 커다란 고정식 날개는 없지만, 뒷유리를 타고 내려온 바람이 지나도록 작은 날개 아래는 바람길도 뚫었다. 솔직히 퍼포만테가 자랑했던 ALA 날개를 먼저 접한 터라 대단해 보이진 않는다.
앞모습 이상으로 뒷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차체 색깔로 된 부분이 줄고, 구멍 뚫린 검정 면적이 늘었다. 가까이 가면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여, 양산 승용차보다는 레이싱 머신스럽다. 중앙을 차지한 사다리꼴 구조는 퍼포만테에서 가져왔다. 좌우 양 끝 바닥에 두 개씩 박혀있던 배기구도 번호판 옆으로 하나씩만 옮겨 붙였다. 뭔가 더 본격적인 분위기다.
이런 디자인 변화는 수치로도 나타난다. 람보르기니에 따르면, 에보는 기존 우라칸에 비해 공력 효율이 6배, 다운포스가 7배 높아졌으며, 엔진 냉각을 위한 공기의 양(mass flow)은 16% 늘었다. 멋지게 보이려고 변한 게 아니라, 성능 높이려고 변했는데 더 멋있어진 셈이랄까? 스텔스 전투기도 100% 기능을 위해 만들고 보니 멋있을 터인데, 서로 인과관계도 닮았다.
실내는 센터패시아만 눈여겨보면 된다. 기존 우라칸은 아우디에서 가져와 모서리만 육각형으로 다듬은 버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에보는 이곳을 싹 밀어버리고 8.4인치 터치스크린으로 대신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스크린 속 아이콘은 죄다 육각형. 메뉴 구성은 평범하지만, 아무 때나 두 손가락을 위아래로 움직여 오디오 볼륨을 조절할 수 있는 건 특이하다.
운전자와 혼연일체
드디어 서킷에 들어설 차례다. 문을 열고 몸을 집어넣으니 엉덩이가 아래로 한~참 꺼진다. 거의 아스팔트를 스치는 수준. 알칸타라와 가죽이 섞인 버킷시트는 몸을 꽉 조여온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앞 유리인데 헬멧까지 쓰니 더 답답하다. 운전자세를 맞추고 나니 마음이 사뭇 비장해진다.
센터패시아 하단 빨간 뚜껑을 들어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 5.2리터 V10 자연흡기 엔진이 요란한 기지개를 켠다. 아이라도 옆에 있다면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리겠다. 하지만 그땐 미처 몰랐다. 아직 에보의 샤우팅은 시작도 안 했다는걸.
인스트럭터가 모는 페이스카를 따라 출발했다. 처음엔 기본 모드인 ‘스트라다’로 시작했다. 잠시 차의 거동을 살피며 친해지는 시간을 갖고 점점 속도를 높여갔다. 가장 얌전한 모드로 살살 달리고 있음에도 꽉 조여진 스티어링 기어비와 단단한 하체로 인해 몸놀림이 심상치 않다. 느리게 달려도 슈퍼카는 슈퍼카다.
두어 바퀴 달린 뒤 주행모드를 ‘스포츠’로 바꿨다. 서킷 주행 전, 슬라럼 코스를 통해 스트라다와 스포츠의 차이를 체험한 터였다. 일단 배기음이 커지고, 다음은 가속페달 반응이 빨라진다. 과격한 조작에 따른 미끄러짐도 슬쩍 허용하며 고삐를 풀어준다. 아직은 에보의 통제(ESC SPORT) 하에 있으니 안심할만 하다.
마침내 인스트럭터로부터 ‘코르사’ 모드로 넘어가라는 무전이 왔다. 운전대 6시 위치의 ‘아니마(ANIMA)’ 스위치를 딸깍여 주행모드를 바꿨다. ANIMA는 ‘어댑티브 네트워크 인텔리전트 매니지먼트(Adaptive Network Intelligent MAnagement)’의 약자임과 동시에, 이태리어로 ‘영혼’이란 뜻도 있단다. 차의 영혼을 바꾸다니! 참 이탈리아스럽고, 시적인 접근이다.
가장 난폭한 코르사 모드로 변경하자 배기음이 또 달라진다. 보통 가변배기를 갖춘 차들은 한 번 목청을 열고나면 다인데, 에보는 스포츠와 코르사가 정도를 달리한다. 코르사는 진정한 ‘득음’의 경지랄까? 코너 전 시프트 다운을 통해 엔진회전수를 ‘왕!’ 띄우거나, 긴 직선주로에서 가속페달을 끝까지 밟고 달리면 V10 자연흡기 엔진의 목청이 얼마나 전율을 일으키는지 귀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페이스카의 움직임이 처음보다 훨씬 과격하다. 가감속을 시원시원하게 전개하며 코너를 돌아나간다. 에보의 진가를 안전한 범위에서 최대한 느껴보라는 주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름 열심히 따라가지만, 인스트럭터는 매우 여유로운 경우가 많다. 괜히 프로(현역 레이서)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다지 심리적으로 불안하지 않다. 절대 속도가 느리지 않았고, 입술이 마를 만큼 집중했으며, 실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즐거웠지만 별로 무섭지는 않다. 오히려 페이스카가 좀 더 빨리 가줘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물론 ESC는 끄지 않았다. 서킷 진입 전, 절대 끄지 말라는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 솔직히 걱정은 내가 해야 맞을 텐데…… 꺼보라고 할까 봐. 3억 4천5백만 원에서 ‘시작’하는 640마력 슈퍼카를 서킷에서 온전히 내 스스로 다스리기엔 용기도, 실력도 부족하다.
이렇게 높은 안정감을 주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터다. 기본적으로 우라칸이 노면 충격과 하중 이동을 든든하게 받아줄 수 있는 차체를 지녔고, 낮은 무게중심에 끈적끈적한 타이어를 신었기 때문. 엔진 힘을 네 바퀴에 안정적으로 쏟아낼 수 있는 AWD(사륜구동)도 크게 한몫 한다.
여기에 에보는 그동안 선택사양이었던 ‘마그네라이드’ 전자식 댐퍼를 2.0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해 기본 적용했다. 코너에서 타이어 한계 이상으로 운전대를 꺾어도 에보가 되묻는다. “롤링이 뭐예요?”
아벤타도르S를 통해 처음 선보인 AWS(사륜조향시스템)도 도입했다. AWS는 상황에 따라 뒷바퀴를 미세하게 조향하는 기능. 저속에서는 앞바퀴와 반대로 꺾어 회전반경을 줄이고, 고속에서는 같은 방향으로 틀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 덕분에 에보는 저속에서 ‘휙’ 방향을 틀고, 고속에서 ‘스윽’ 차선을 바꾼다. 관계자에 따르면 스타라다에서는 약 시속 70km, 스포츠부터는 시속 100km를 기준으로 뒷바퀴의 방향이 달라진다.
하나 더. 앞서 언급한 AWD와 AWS를 비롯해 토크벡터링과 트랙션컨트롤을 모두 하나로 묶은 LDVI가 남았다. 지금껏 각자 따로 작동하던 기능들을 하나의 CPU가 통합 관리해, 보다 정교하고 예측 가능한 움직임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게 람보르기니의 설명이다.
주행 중에는 센터패시아 모니터를 통해 LDVI 작동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앞뒤 바퀴의 조향각도와 구동력 배분, 토크벡터링을 위해 제동 중인 바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다 보면 마치 아이언맨 수트라도 입은 듯하다. LDVI의 효과를 몸으로는 체감하지 못할지라도, 눈으로 즐길 수 있다.
코르사에서는 변속기도 수동으로만 작동한다. 계기반은 엔진회전수를 부채처럼 활짝 펼쳐 보여주고, 8,500RPM 안에서 자유롭게 엔진 힘을 뽑아 쓸 수 있다. 높은 회전 한계와 번개 같은 반응이 합쳐지니 변속하는 맛이 일품이다. 엔진회전수가 한계에 달해도 절대 다음 기어로 바통을 넘기지 않는다. 코너 탈출 후 재 가속 시 잠깐 멍 때리던 자동모드와 달리, 수동에서 훨씬 만족감이 높다.
서킷에서 만난 에보는 손발 끝에서 시작해 엔진과 바퀴, 노면에 이르는 과정이 부품 하나로 이뤄진 듯했다. 신호와 반응에 유격이 없다. 수많은 전자장치가 에보를 운전자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철통같이 지키는데, 그 와중에 이질감은 없었다.
의도치 않은 반응과 이를 해결하는 과정까지도 모두 ‘재미’로 여길 만한 실력자라면 에보가 자칫 심심할 수 있겠다. 반면, 의도대로만 움직여주길 바라는 나 같은 ‘쫄보’에게는 에보야말로 최고의 슈퍼카가 아닐까?
여기서 더 어떻게?
람보르기니의 ‘우라칸 업데이트 프로젝트’는 에보로 완성됐다. 부분변경의 한계를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진화다. 에보를 타고 든 생각은 ‘막내가 이 정도라니’와 ‘부분변경이 이 정도라니’ 두 가지.
에보가 이럴진대, 람보르기니가 우라칸 후속작을 위해 개발 중이거나 아껴둔 기술이 무엇일지, 그 기술들이 모두 들어간 차기작은 어떨지 벌써 궁금하다. 이번엔 여기서 더 좋아질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을 테니, 이 또한 뛰어넘어주길 바란다. 가능……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