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이 지난 번에 공부하였던 내용입니다.
복습하듯이 건둥건둥 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번은 꼭 읽고 오십시오.
중세 – 2
1. 노르만디의 윌리엄(바이킹 후손)이 영국에 침입하여 영국왕이
되었다.(1066) 영국 내전에 관여하여, 왕실을 접수하였다. 영국민은
영어를 사용하고, 왕실에서는 불어를 사용했다.
2. 노르만 왕조(1066-1154)의 왕은 영국의 왕이고, 프랑스 왕의
신하(영주)였다. 그러나 프랑스에 많은 영토를 가졌으므로 프랑스
왕과 다툴 만큼 힘을 가졌다.
3. 노르만 왕조의 후계가 끊어지자 프랑스 앙주 백작의 후손이 영국 왕이
되어 플랜태저넷 왕조(1154-1377)를 열었다.
4. 에드워드 3세(1327-1377)가 백년전쟁 시작(1337)
1346년에 칼레를 포위하여 항북을 받아내다.
*황제권과 교항권의 충돌
그레고리 7세(1073 – 1085)
종교개혁을 하여 로마 카톨릭을 재정비 하였다.
1) 성직 매매 금지
2) 성직자 독신 주의 강조
3) 세속인의 성직 금지
3. 교황권-황제권 충돌
1) 성직 임명권 싸움(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헨리) 4세와)
2) 카놋사 굴욕(1077) - 하인리히 4세 파문 – 교황에게 용서를 빌다
3) 하인리히 4세는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여 신성로마 항제 지위를
확고히 함 새 교황 클레메스 3세 임명하고 그레고리 7세를 도망가게
하다.(2명 교황)
7. 세계사 최고의 위조 문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기독교의 수장이 되었다. (황제권+종교권)
동 로마 제국이 멸방하고 로마 주교가 세속적인 업무도 맡았다. 그러나 권력이 황제를 덮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세 내내 황제권과 교황권의 우위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750-850년 사이에 콘스탄티누스 고백 문서가 나타났다.(교황의 구술이라고도 한다.)
‘오직 교황만이 황제의 통치를 가질 수 있다.’가 주 내용이다.
이 문서는 후대에 위조로 밝혀졌다.
이 문서를 최대로 이용한 그레고리 7세는 신성로마황제 헨리(하인리히) 4세에게 ‘카놋사의 굴욕’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이 문서는 나중에 위조로 밝혀졌다.
8. 신학 – 토마스 아퀴나스(1225 – 1274)
13세기가 되면 기독교 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인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 일을 했다.
신자군 원정을 통해 이슬람 사상이 들어왔다. 이슬람 사상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묻어 있었다. 이슬람 지식을 대학(볼노냐 대학에서)에서 다루면서 수도승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관심을 가졌다. 수도승 알베르투스가 시작했고, 그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었다.
아리스토테레스는 ‘자연의 세계는 자연 안에 있는 자신의 운동원리(속성)에 따라서 스스로 완성된 것이다. 초월적인 존재(신)가 만든 것이 아니다.’ 교회는 이 사상을 금지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과 신학을 나누어서, 자연 현상의 연구를 철학이라 하고, 신에 대한 연구를 신학이라 했다. 그러면서 철학은 독립 학문이 아니고 신학을 도와주는 학문이다. 철학은 창조된 실물에서 시작하여 이성적 추론을 거쳐 신을 이해하도록 해준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그 무엇이든 원인을 가지고 있다. 원인을 따져 들어가서 마지막 도달점은 신이다.
신학은 아예 신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신학을 도와주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기독교 신학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여, 학생의 교육용으로 썼다.
기독교를 설명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을 포함)의 학문 개념으로 기독교 신학을
설명했다.
신앙은 이성이 완전해지도록 돕는다.
영혼은 이성이나 지성에 속한한
인간은 기본 덕목(그리스 철학이 말하는 절제, 용기, 정의)을 가지고 하나님에게로 (믿음,
소망, 사랑) 간다.
9. 중세의 문학이 과연 있느냐의 논쟁이 있다.
수도원 중심으로 고전을 보관하고, 후대에 전해준 역할은 있다.
굳이 말하다면 성경 서사시와 성인전 서사시 정도이다.
그러나 게르만 민족의 전설(주로 영웅전설)과 민담을 통해서 구술로
만들어진 작품은 있다.
1) 음유시인이 활동했다.
경제발전이 일어나면서 빈부격차, 난삽한 샐활과 더불어 음유시인이 나탔다.
2) 음유시인은 궁정의 사랑 이야기, 서민들의 유체적 관계를 다룬 낮은 사랑 이야기 등을 노래했다.
3) 카르미나 부라나 — 떠돌이 수도사의 노래를 말하며
중세인들의 생활 감정이 담겨 있다.
4) 롤랑의 노래 – 프랑스의 대표적인 무훈시로, 영웅적인 기사를 찬미하는--
5) 노르만디의 바이킹 기사들
먼 나라로 원정, 싸움 등이 많음으로, 낯선 나라 이야기, 영웅적인 싸움
이야기를 전한다.
6) 중세의 이야기 꾼 – 이런 이야기를 여기저기 돌아니면서 한다.
고객은 성주나 귀족 — 따라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귀족 청년(기사)와
공주 등이 나온다.
7) 중세 소설은 — 운문 형식이다.(낭송이 쉽도록)
8) 독일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대표적이다.
9) 게르만 신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도 많다.
** 중세의 궁중연애시 내지 기사 문학은 음유시인의 단골메뉴이다.
기사와 귀부인과의 사랑을 다루나, 관계는 기사와 군주(귀부인)의 관계이다.
결혼과는 무관하다.
중세의 최고의 남자 생애는 사랑의 신을 섬기고 성녀를 숭배한다.
(성모 마리아 숭배와 관계 있다고 한다.}
11세기 이전에는 없다. 11세기 이후에 성곽이 나타나면서 나타난
사랑 이야기이다.
궁정풍 사랑을 통해서 왕권을 수호하려는 군주의 전략도 숨어 있다고 한다.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였다가 영국왕 헨리 2세의 왕비가 된 엘레오느르를 찬미하는 시가 많고, 궁정에서 장려했다고 한다. -- 독일 서정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런 류의 시이다.
(헨리 2세는 헨리 1세의 외손자이다. 어머니가 헨리 1세의 공주인 마틸다이다. 헨리 2세의 아들이 사자왕 리처드와 존 왕(마그나 카르타)이다.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는 것도 이 범주에 속한다.
(궁정풍 사랑에서 사랑은 신비의 대상이 된다.)
-->영국으로 넘어오면, 시가는 실용적이 되어서 구혼하는 사랑 이야기가 된다.
3. 마그나 카르타(권리 대장정)
헨리 2세 – 프랑스의 앙주 백작 후계자로 앙주, 메인, 노르만디의
주인이기도 하다.
아들 — 1. (사자왕) 리차드,
십자군 원정에 거의 매달리다 시피 했다.
2. 둘째 아들 존 왕(리차드의 동생)
형이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을 동안 왕위에 올라 실정을
많이 하다. 국민대표들이 강력히 항의 하여 왕권을 제한하고
자유를 신장한 마그나 카르타(권리 대장정 21199년)에
서명토록 했다.
3. 의회제도의 신장을 가져왔고,
서양 정치사에 미찬 영향은 어마어마 하다.
(이때 로빈 훗이 활동했다.)
** 헨리 1세 --> 헨리 2세(플래테네제 왕조의 시작)
헨리 2세의 왕바는 엘레아노르 이다. 엘레아느로가 기사 문학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함으로 이야기를 조금 ---
프랑스의 대 영주로 보르고뉴 지방의 기욤 10세의 딸이 엘레아노르 이다. 기욤 10세는 딸에게 많은 교육을 시켰다.(당시의 풍습은 딸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기욤 10세가 콤포스텔라(야고보 성지)로 성지 순례를 가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사망한다. 15세 였던 알레아노르가 넓은 영지를 상속 받는다.
기욤 10세는 딸을 프랑스 왕 루이 6세에게 부탁하면서 영지를 지키기 위한 많은 장치를 유서에 담아 놓는다. 루이 6세는 영지가 탐이 나서 아들 루이 7세와 결혼시킨다.(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딸이 영지 소유권을 가지도록 유언)
엘레아노르는 문화의 차이로 루이7세의 궁중의 여인과 사이가 나빴다. 이로서 루이 7세와도 사이가 벌어져서 이혼했다.
자기의 영지로 돌아오는 중에 영지를 차지할 목적으로 납치를 하려는 시도가 있었다.(이때는 보쌈제도가 관습화되어 있었다.) 알레아노르는 자신을 보호할 목적으로 앙리(후에 헨리 2세가 된다.)와 결혼하여 5남3녀를 낳는다.(네 째 아들은 자기이 아들이 아니라, 헨리 2세의 사생아이다.) 아이는 많이 낳았으나, 헨리 2세의 여자 편력은 유명하였다. 이에 알레아노르는 앙심을 품는다.
이에 알레아노르는 아들들을 부추겨서 반란을 일의키도록 한다. 많은 이야기를 남긴 끝에 헨리 2세가 죽자 3남 리처드가 왕위에 올라 사자왕 리처드가 된다.
아들들의 반란을 사주한 죄로 헨리 2세는 왕비 알레아노르를 유폐시켜서 16년 간이나 갇혀 있었다. 알레아노르가 사주한 아들은 프랑스 왕과 연합하여 처들어 오기도 하고 등등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었다.
리처드도 왕위에 오르자 3차 십자군 원정에만 정신이 팔려 국내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엘레아노르가 유폐 생활을 할 동안에 남편도, 아들 리처드도 죽었다. 헨리 1세는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실망과 분노로 참지 못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녀가 죽자 남편 헨리 1세와 아들 리처드가 묻혀 있는 묘 옆에 묻혔다.
에레아노르는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음유시인은 그를 여 주인공으로 하는 시가를 많이 불렀다고 한다.
4. 대학의 설립
대학은 고급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이다.
1088 – 볼로냐 대학이 최초이다.
12세기, 유럽의 5대 대학은-파리, 볼로냐, 오를레앙, 옥스퍼드, 캠브리지
1) 수업은 라틴어로
2) 대학의 자치권 — 막강한 권력을 가지다.
3) 대졸자는 부와 권력을 얻기가 쉬웠다.
대학은 중세의 무지함에서 한 줄기 빛이었다.
5, 기술의 발달
1) 윤작, 쟁기의 개량
2) 가축을 농사일에 이용한다.
3) 수력-물레방아. 풍력
4) 중국의 종이, 화약 등이 들어오다.
5. 페스트 대유행
1) 1347-48년 대유행 이후 여러 차례 대유행이 있었다.
2. 도시가 농촌보다 사망률이 높았다.
3. 페스트, 전쟁, 굶주림으로 1300 – 1450년 사이에 인구가 반으로 줄었다.
4) 노동인구 감소로 자유 무역업 체제로 바뀌었다.
--> 결과로 살충, 소독으로 일반 전염병 방역술이 발달했다.
6, 백년전쟁(1337 – 1453)
프랑스는 영주, 기사 계급의 몰락으로 왕권이 강화
7) 비잔틴 제국 멸방(1453)
이슬람 세력의 확장 — 발칸 반도가 이슬람 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