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통문(沙鉢通文)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김길남
참 무심(無心)하기도 했다.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바로 가까이 두고도 몰랐다. 사발통문이 바로 그것이다. 전봉준 장군이 동학혁명을 일으키면서 지역의 집강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그런데 그렇다고만 알고 어떤 내용을 알렸는지 전혀 모르고 지나쳤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랬다.
사발통문이 알려지기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내가 학교에서 배울 때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1968년 11월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평화동에 사는 송기태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송기태는 통문서명자 송국섭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집을 손보다 마루 밑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사발통문 발견으로 동학혁명의 성격이 확실해졌다. 민란으로 보던 것을 혁명으로 그 의의를 재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 전봉준 접주를 위시하여 동학도인 20명이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모여 숙의한 끝에 봉기의 거사계획과 내용을 정한 문서를 각 마을의 집강들에게 보냈다.
사발통문
계사(1893년) 11월 일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목, 송주성, 황흥모, 최흥렬, 이봉근, 황찬오, 김응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홍, 송민호.
각리 리집강 좌하
우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빠르게 전하니 여론이 물끓듯하였다. 매일 같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어디 남아 있겠나’하며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더라. 이때 도인들은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의 대책을 논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구름 같이 모여 순서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一,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一,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을 괴롭힌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一,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할 것
우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군략에 능하고 세상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장··(아하 판독 불능)
사발통문은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고부관아에서 처음 봉기를 시작할 때 작성한 것이라 허술한 데가 있다는 평이다. 언제 어디로 모이라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동학혁명 때 큰 역할을 한 손화중 김개남 등 거물들의 서명도 없다. 이걸로 봐서 초기에 작성한 사발통문이 아닌가 싶다.
민란이냐, 혁명이냐? 아것은 결의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의 목을 베며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뒤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뒤 서울로 직행한다 했으니 혁명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 지역의 봉기가 아니고 전국의 동학도가 참여하였으므로 그 의미가 컸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 벼슬을 팔고 사는 때라 가렴주구가 심해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집권자가 주인이 아니고 사람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려는 외침이었다. 그게 동학의 이념인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이다. 당시는 시천주(侍天主)라 했다한다. 내 마음에 한울림을 모셨다는 뜻으로 사람마다 한울림이라는 뜻이다.
대한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제침략기는 동학란으로 의미를 축소했다. 광복 뒤에도 친일세력이 정권을 잡으며 계속했다. 군사독재세력도 민중이 일어서면 안 되므로 동학란으로 평가절하 했다. 집권세력은 국민의 뜻을 누르려고 민란이라 했다. 그러나 만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백주년을 맞아 동학혁명으로 명예를 되찾은 것이다.
이런 혁명사상을 지금까지 너무 소홀히 여겼다. 기념일을 정하는데도 많은 시일이 걸렸다. 고창은 무장기포를, 정읍은 황토현승전을, 부안은 백산집회를, 전주는 전주성 입성일을 기념일로 하자고 맞섰다. 서로 다투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세월만 보냈다. 정부가 동학농만혁명 기념일 선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심의을 거쳐 정읍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을 기념일로 정했다. 참 오랜만에 국가지정 공휴일이 된 것이다.
수십만 명이 생명을 걸고 일으킨 동학혁명이 제자리를 찾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 늦게나마 역사가 바로 쓰이게 되어 다행이다. 이 혁명의식이 민중에 살아남아 한말의병이 되고, 독립군이 되었으며, 이어서 3·1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오늘의 민주주의정신은 동학혁명정신에서 싹텄다.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들어온 게 아니고 우리 동학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단군의 홍익인간부터 이어온 정신이다. 서양보다 앞서가는 정신이니 만큼 길이길이 보전해야 하리라 믿는다.
(2019.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