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7
7월20일[연중 제1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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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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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5pxBMZjvGMY (최해용 프란치스코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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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원한 물 한 잔 하고 가세요!>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자주 드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인간 존재 하나하나가 마치 어여쁜 꽃 한 송이 같다는 생각입니다. 각자의 인생이 한 송이 꽃처럼 예쁘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활짝 피어오르는가 하면, 순식간에 시들고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네 인생, 긴 것 같지만 찰나같이 짧습니다. 솜털 같은 유소년기, 어여쁜 청소년기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장년기로 넘어갑니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희끗희끗한 노년기에 접어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 보면 순풍에 돛단 듯이 인생이 술술 풀려나갈 때도 있습니다. 만개한 한 송이 꽃처럼 절정에 도달할 때도 있습니다. 만사형통하고 승승장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잠시입니다. 어느새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다양한 병고 앞에 노출되고, 결코 원치 않는 심연의 바닥체험도 하게 됩니다. 깊은 상처에 홀로 돌아서서 눈물짓곤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안쓰럽고, 가련하고, 측은한 존재가 우리 인간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오늘 주님께서는 참으로 큰 위로와 격려의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1장 28~29절)
고생 많이 하기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특별한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생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니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 결국 ‘사서 고생’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게 그 지옥 같은 ‘쌩고생’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다들 너나 할 것 없이 죽을 고생들입니다. 어디 가서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찾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 시대 우리 교회에 주어지는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어야겠습니다.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말 못할 고초에 마음 깊이 공감하며 맞장구쳐줘야겠습니다.
그들이 소리 없이 흘리고 있는 서러운 눈물을 조용히 닦아줘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리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문턱을 완전히 낮춰야겠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다양한 모습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은 세상을 향해 활짝 두 팔 벌리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모든 인간이 다 존귀했습니다. 예수님 입장에서는 생명 붙어있는 모든 인간이 다 하느님의 모상이자 거룩한 창조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앞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었습니다.
혹독한 더위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원한 물 한잔하고 가세요, 요기라도 하고 가세요,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포근하게 그들을 감싸 안고 격려의 말이라도 한마디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물이자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변장하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또 다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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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IYPQtj5by_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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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노고와 고통이 나의 십자가인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모두 당신에게 오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을 얻는 방법은 당신 마음의 온유하고 겸손한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타인에 의해 지워지는 짐도 있고 나의 잘못으로 지는 짐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무거운 짐이 십자가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일상의 십자가를 잘 지고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면이 더 많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는 참 십자가의 의미를 잃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십자가는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는 사뭇 다릅니다. 아래 이야기에서 이 사람의 진정한 십자가는 무엇인지 발견해봅시다.
마이크 블랙은 100억 대의 사업가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잠시 접어두고 무일푼 노숙자로 시작해서 1년 안에 10억을 버는 챌린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목적은 젊은이들에게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도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과 도전의 용기를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판매할 수 없는 자신의 일상을 담아야 하는 카메라, 휴대전화, 그리고 옷 한 벌입니다. 자신의 전문 분야 사업을 하면 안 되고 자신의 인맥에 도움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신용이나 가족, 친구, 현금, 자산, 전문지식, 인맥,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모든 것을 버리고 진짜로 길바닥에서 맨땅에 아무것도 없이 그의 챌린지는 시작됩니다.
그는 길거리에서 물 한 잔 얻어 마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조금씩 이 챌린지를 시작한 것을 후회합니다. 한 푼도 못 벌고 노숙 생활을 하며 음식도 먹지 못하여 말라갑니다. 그는 첫날 저녁부터 눈물을 흘립니다. 다행히 모르는 사람이 며칠 재워주기도 하지만, 집이 없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는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냅니다. 그러면서도 한 푼도 벌지 못합니다. 그저 만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 먹고 자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이크는 아이삭이라는 인상 좋은 사람의 도움으로 며칠을 카라반에서 지낼 수 있게 되었고 슬슬 사업을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으로 남이 버리는 가구를 팔아 이익을 배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모으는 동안 그는 돈이 없어 오로지 콩만 먹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사업화하기 시작합니다. 돈이 좀 모이자 집도 하나 월세를 내어 자신도 살고 나머지 방들은 세를 줍니다. 잠도 자지 않고 일을 합니다. 자그마한 사무실도 임대합니다. 이 과정에 실패도 겪었지만, 그래도 돈은 조금씩 쌓여갑니다. 12주 차 6,600불의 현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의 사업은 그가 관심을 가지지 못하자 매달 25,000불의 적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는 이제 인터넷으로 커피를 판매하려고 합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타깃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익 중 일부를 유기견 보호센터에 기부하는 형식입니다. 첫 판매도 이루어지고 어느 정도 사업이 궤도에 오르려고 하고 있습니다. 32주가 지났을 때 그는 임대업으로 1,600불의 현금흐름을 일으킬 수 있었고, 커피 사업으로만 34,000불을 법니다.
그러는 와중에 아버지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습니다. 전화를 받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는 얼마 못 삽니다. 그는 챌린지를 계속해야 할까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차피 시작한 것 끝까지 가보라고 합니다. 마이크는 아버지를 자신의 월세 집에 모시고 돌봐드리며 사업을 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42주 동안 달려온 그도 건강이 악화하여 건강에 문제까지 발생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챌린지를 포기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입니다. 42주 동안 맨땅에서 시작하여 그의 통장엔 64,000불을 찍었습니다. 노숙자에서 10개월 만에 8천만 원의 돈을 모으게 된 것입니다. 2개월 더 했다면 10억을 벌 수 있었을까요?
어쨌건 마이크 블랙은 자신의 건강도 챙기고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며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챌린지는 비록 실패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도 처음 사업을 할 때 5천만 원의 빚을 져서 고통스러워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이크 블랙의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요? 자기 사업이 월 3천만 원씩 적자가 나는 것? 아버지의 대장암? 친구들의 비웃음? 먹을 것이 없고 잠잘 곳이 없었던 인생 최대의 고통? 아닙니다. 그의 십자가는 이것이었습니다. “아무것 없이 시작해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분명히 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고 싶은 마음.”
이 마음 때문에 그는 그 많은 고통을 사서 겪어야 했습니다. 그 마음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곧 인간을 구원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은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고통이나 어쩔 수 없이 받는 고통은 오늘 복음에서 보면 그냥 무거운 짐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받아들여 멍에로 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십자가를 진 사람이고 좁은 문으로 가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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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28-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율법을 지키려 하지만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 악의 세력에 짓눌려 사는 우상 숭배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렇지를 못해 절망해 버린 사람들, 또한 자신의 약함과 죄의 짐으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초대하시는 말씀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세상을 건설하는 법,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는 법,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이를 되살리는 법을 배울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이것은 겸손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높이 올라가려 한다면 밑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겸손이다. 건물이 높아지면 높이 질수록 그 기초는 그만큼 깊다. 기초가 튼튼한 만큼 건물도 튼튼하게 지을 수 있으며 높이 올라간다. 건물의 기초를 세우는 사람은 먼저 아주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29절) 주님 안에서만이 이러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30절) 주님의 멍에가 편하고 그 짐이 가볍다면 왜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이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열성적인 이들에게 주님의 계명은 가볍다. 멍에는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가려고 하는 것 때문에 파생되는 갈등이다. 이 멍에를 기꺼이 받아들이면 이 멍에는 이미 멍에가 아니라, 나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는 것이 된다.
생명을 원한다면 누구나 부정과 악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그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이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들게 보이는 것은, 세상의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그것을 충분히 이겨나갈 힘도 주시는 분이다. 그것을 우리의 능력 밖에서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무게는 우리가 지지 못할 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지워주는 짐은 우리의 힘을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사람들을 도와준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즉 사랑의 마음으로 정성껏 천국의 멍에를 지도록 해야 하겠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멍에가 바로 나에게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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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랫동안 절에 다니던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얘야 절에 있는 부처님은 풍채도 좋고 자비로운데 성당에 있는 예수님은 삐쩍 마르고 고통스럽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느낌을 들으면서 공감이 갔습니다. 부처님 상은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예수님 상은 대부분 십자가에 매달려 있고, 피를 흘리는 모습입니다. 부처님은 고통에 대해 ‘성찰’하였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꺼질지 모르는 욕망과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삼독에 의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고통,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것을 채우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고통은 ‘집착’에서 오기 때문에 그 집착을 버리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로 전파되었는데 큰 박해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성찰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온유한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부처님이 말한 고통과 예수님이 말한 고통은 드러나는 현상은 비슷하지만 그 원인은 달랐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고통은 그 원인이 ‘욕망’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고통은 그 원인이 ‘대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어리석은 것 같이 보였지만 그 길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기독교는 로마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한국의 기독교도 100년 정도 박해를 받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주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남에게 바라는 대로 여러분도 남에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을 자주 해야 합니다. 험담하거나,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고운 말을 하면 사랑의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나쁜 말을 하면 원망의 꽃이 피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치유의 은사가 주어졌습니다.
손을 높이 들어 하느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손을 내밀어 지친 친구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합니다. 손을 가슴에 대고 나의 허물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이웃의 짐을 들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손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도 합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손입니다. 남을 때리는 것도 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주신 것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함께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들의 곁에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셨고,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다면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많은 사람은 그릇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길, 재물의 길, 명예의 길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사랑의 길, 희생의 길, 나눔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제2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누군가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고 싶다는 뜻으로 ‘사명’이라는 글을 썼습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길 나도 따라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한 십자가 나도 따라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이다.’ 이 말에는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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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알라스카에 있는 후배 신부님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뉴욕에서 알라스카로 가기 위해서 ‘시애틀’을 경유하였습니다. 마침 시애틀에는 동창신부님이 있어서 하루 머물면서 다음날 동창신부님과 알라스카로 갔습니다. 아직 마스크를 착용하지만 공항은 예전처럼 활기가 넘쳤습니다.
3달 전에 플로리다로 가는 공항에서는 비행기의 좌석도 거리두기를 하였고, 공항에도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백신을 맞아서인지 보안검색에도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애틀은 처음 방문했습니다. 시애틀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맥라이언과 톰행크스가 주연했던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입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스타벅스 1호점입니다. 전 세계 50개국에 28,000여 점포가 있는 스타벅스는 시애틀의 작은 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분들은 시애틀에 오면 한번쯤은 방문한다고 합니다.
저는 시애틀의 또 다른 의미를 들었습니다. 시애틀은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추장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미국의 제14대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인디언 추장 시애틀에게 땅을 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요구를 들었던 추장 시애틀은 이렇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인 大地(대지)를 어떻게 사고 팔수 있나? 생명의 거미집을 짜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그 안의 한 가닥 거미줄에 불과하다. 생명의 거미집에 가하는 행동은 반드시 그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신선한 공기와 재잘 거리는 시냇물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단 말인가? 소유하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저들에게 팔 수 있단 말인가?
들꽃은 우리의 누이고 사슴, 말과 얼룩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겠다는 그대들의 제의를 고려해보겠다. 그러나 제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즉 이 땅의 짐승들을 형제처럼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우리 모두의 하느님은 하나라는 것이다. 그대들이 땅을 소유하고 싶어 하듯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하느님이며 그의 자비로움은 황색인에게나 백인에게나 꼭 같은 것이다.”
당시 피어슨 대통령은 추장 시애틀의 편지에 감복하여 이 지역을 '시애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나는 있는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힘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름다운 세상을 사람들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사람은 아름다운 세상의 주인이 아닙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추장 ‘시애틀’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은 세상이라는 거미집에 머무는 하나의 거미줄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하얗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하얗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기다려 주시는 분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어주신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려 주십니다.
저의 이름은 조재형(趙在衡)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균형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중심을 잡으라는 뜻입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서 말하는 초연함(Indifferentia)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름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우유부단한 삶을 많이 살았습니다. 나의 뜻과 하느님의 뜻의 평균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적이 많았습니다.
저의 세례명은 가브리엘입니다. 이름의 의미는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소식을 전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제로 사는 저에게는 합당한 세례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나의 이름과 세례명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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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이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이고 사실은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첫 복음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입니다. 성령 강림 때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사도 2,38.40)
예수님 말씀에서, “나에게 오너라.”라는 말씀과 “나에게 배워라.”라는 말씀은, “회개하고, 나를 믿어라.”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라는 말은 “구원을 받으십시오.”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고생’하고 있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첫 사람인 아담 때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 3,17-19)
예수님은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출하려고 (먼지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오신 분이고,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태어날 때부터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고생할 일이 전혀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일에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외면하고 살다가 인생을 마친다면, 그 사람은 그냥 먼지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면서, 인생에서 크게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쉬워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무시하고 외면하면서 살다가 허무하게 먼지로 끝나버립니다.
회개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허무에서 벗어나기를, 또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길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허무에서 벗어나서 영원을 향해 나아가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허무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하면서도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사람의 경우를 보면, 더욱 깊은 허무에 빠져서 절망하는 것을 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말씀에서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다는 요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1요한 5,1-5)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하나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과 하느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도 하나입니다. 신앙생활과 계명 실천의 바탕은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또 계명들을 실천하는 일도 힘겹지 않습니다. 힘겨운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에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 하는 일이라면 ‘강제 노동’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가르침들을 ‘멍에’와 ‘짐’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렇게 억지로 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와 짐이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멍에와 짐을 제거하는 ‘해방의 열쇠’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멍에가 아닌데도 멍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짐이 아닌데도 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강제 노동을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고 계명 실천을 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억지로 하는 일이니 그 신앙생활과 계명 실천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이 없으니 생기도 없고 생명력도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하다가는 결국에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고, 신앙생활을 중단하면서 ‘냉담자’가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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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거의 같은 표현입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우리말로도 그리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처음 부르시는 것처럼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사람을 당신께 초대하십니다.
오늘 말씀은 집회서에서 말하는 ‘지혜로 안식을 찾고 기쁨을 얻으라.’는 권고와 매우 닮았습니다. “지혜의 멍에는 금장식이고, 그의 사슬은 자주색 끈이다. 너는 지혜를 영광의 옷으로 입고, 지혜를 기쁨의 왕관으로 쓰리라.”(6,30-31) “나 자신이 얼마나 적은 노력을 기울여, 큰 안식을 얻게 되었는지 너희 눈으로 보아라.”(51,27) 구약 성경은 지혜를 얻는 것을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로 여깁니다. 그리고 집회서의 저자는 자신의 ‘적은 노력’과 지혜에서 오는 ‘큰 기쁨’을 대조적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적은 노력’은 예수님께 가는 것으로, ‘큰 기쁨’은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비교적 짧은 내용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되풀이됩니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에게 배워라.’ ‘안식을 얻을 것이다.’ 초대도 안식을 얻는 것도 모두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보다 더 크신 분이시고 그분께는 안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안식은 예수님의 은총과 복으로 가득 채워진 것입니다. 우리도 초대에 응답하며 그분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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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주교님]
<사랑은 움직이는 것>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으로 살아가며 그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율법 준수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365개 금령과 248개 명령으로 구성된 총 613개의 율법을 빠짐없이 지키면서 살았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야만 의인으로 인정받는다고 여겼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율법 준수에는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만들고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서, 심지어 율법 조문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어기는 사람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결국 사람이 법을 위해서 존재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수많은 율법 조문을 두 가지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이를 통해 예수께서는 우리가 모두 불편하고 무거웠던 율법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당신의 편안한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짊어짐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주님은 이렇게 율법의 멍에와 짐에 짓눌려 있는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면서 당신의 사랑을 전해 주셨다.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보면서 지시하거나 강요하는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눈높이를 맞추시며 어떠한 강박도 없이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사랑이다.
그런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 쪽으로 움직여서 찾아오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일이다. 그분의 사랑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어렵고 두렵고 저 멀리 계신 분으로만 생각하면서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 곁에 찾아오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 사랑을 세상 곳곳에 전해 주기 위해 어디론가 움직이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분의 사랑을 따라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마땅한 사랑을 드릴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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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가볍고 편한 멍에가 세상에 존재할까요? 무겁고 불편해야 멍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날마다 그러한 멍에를 짊어지고 산다면, 그것이 무거운지도 모른 채 살아갈 것입니다. 그 무게에 짓눌려 어깨는 망가지고 마음도 갈기갈기 찢겨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나 자신을 발견한 뒤에야, 우리는 이 멍에를 어떻게, 왜 짊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 고민의 끝자락에서 멍에로 말미암은 고통과 짓눌림의 원인을 내가 아닌 남에게서 찾고 멍에를 사정없이 내동댕이칩니다.
미사를 시작하기 전에 제의를 입으며 침묵 가운데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하셨으니 제가 주님의 은총을 입어 이 짐을 잘 지고 가게 하소서. 아멘!”
그리고 지금 제가 메고 있는 멍에의 무게를 묵상해 봅니다.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어깨에 두른 영대와 몸에 걸치는 제의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지 못할 때도 있으며 누군가를 위한 희생을 자신에게 강요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무게에 쓰러져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다시 일어섭니다. 그분께서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시며 세 번이나 넘어지셨고, 다시금 묵묵히 일어나셨습니다. 그 멍에를 내려놓고 싶다고 피땀 흘리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수많은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면서도 그 무게를 견디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무겁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 무게와 고통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더 크셨기 때문입니다. 멍에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멍에가 다른 사람들의 멍에보다 더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 무게를 견딜 수 있게 지탱해 주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멍에가 가벼워지거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움을 견디고 버텨 내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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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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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반영억_라파엘_신부님
7.20.연중 제15주간 목요일(마태11,28-30)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던 일도 멍석 펴 놓으면 안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던 일을 남이 권하면 오히려 안 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이든 자발적으로 하면 신이 나고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억지로 하면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힘이 들고 능률도 떨어집니다. 따라서 기왕이면 무슨 일이든 스스로 찾아서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신이 나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해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앞서 해야 할 일을 먼저 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11,28.3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고 더군다나 스스로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명함으로써 우리에게 멍에와 짐을 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분의 멍에와 짐은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과 당신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육체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드셨겠지만, 사랑의 극진한 표현이었기에 내적인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의 규정이라는 괴로운 멍에를 백성들에게 짊어 지게하고 내용보다는 형식에 매여 백성을 힘들게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의 의미와 내용을 자발적으로 지키고 또 가르침으로써 편한 멍에와 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유다교에는 계명이 상당히 많았는데 248조항이 명령이고 365개 조항은 금령으로 613개 조항의 계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계명 때문에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계명을 다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잡다한 조항의 계명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였고 그 두 계명을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하셨으며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고 선언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율법을 가르치시고 요구하는 것이 더 힘든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언정 그 멍에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1요한5,3-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헌신하신 부모님을 바라보면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식은 혹시 부모를 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부모는 자식을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땅에 묻지만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습니다.
그러므로 자발적으로 일상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내적인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결코 무거운 짐이나 멍에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멍에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 안에서 오는 위로와 평화의 원천입니다. 기쁨을 위한 희생과 봉헌의 기초입니다. 혹 힘들고 지칠 때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을 귀찮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하신 주님을 꼭 붙잡기 바랍니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주님 말씀을 기억하며 의탁하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말씀에 힘입어 끝까지 희망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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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아카데미 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혼 후 싱글맘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린 두 아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남편이 언론에서 자기 험담을 할 때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평이야. 서러움이 있지 왜 없어. 그런데 그 서러움을 내가 극복해야 하는 거 같아. 나는 내가 극복했어.”
또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살아있는데 어떻게 스트레스를 안 받겠냐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행복한 일이야.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딨어?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지만 다 아프고 다 쉬워. 하나씩 내려놓고 포기할 줄 알아야 해. 난 웃고 살기로 했어. 인생 한번 살아볼 만해. 진짜 재밌어.”
윤여정 배우처럼 관점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관점을 바꿔보면, 사는 모습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진짜로 재미있는 인생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점 바꾸기 어려워합니다. 관점은 다른 이가 바꿔주지 않습니다. 또 상황이 바뀌어야 관점이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관점은 바로 나만이 바꿀 수 있고, 또 외부 상황이 변하는 것이 아닌 내 마음이 변해야 바꿀 수 있습니다. 나만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 우리 힘이 부족함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커다란 위로가 되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보통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덜어주실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멍에까지 다 벗겨 주시면 좋으련만 그것은 그냥 씌워 놓으십니다. 왜 그럴까요? 모든 고통과 시련을 다 없애시면 좋지 않을까요? 바로 우리의 몫을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사라지게 할 수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하지 않고서 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몫은 나의 관점을 바꾸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나의 관점과 나의 마음을 바꿔서 주님을 향하는 것, 주님과 함께하는 것, 주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불공평하고 서러움이 많은 세상이라면서 불평불만 속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아닌, 스스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더 큰 은총과 사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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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직 당신 곁에서>
마태오 11,28-30 (내 멍에를 메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직 당신 곁에서>
당신께서 몸소
나를 있게 하시니
어떻게든 드러내려는
헛되이 부푼 마음
가벼이 거두고
오직 당신 곁에서
나는 참으로 나입니다
당신께서 몸소
나에게 모두 주시니
끝없이 가지려는
텅 빈 마음
기꺼이 내려놓고
오직 당신 곁에서
나는 참으로 나입니다
당신께서 몸소
나를 귀하게 여기시니
쉼 없이 오르려는
부질없는 마음
쉬이 내려놓고
오직 당신 곁에서
나는 참으로 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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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인생은 고생이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신 주님 말씀을 삐딱하게 이해하면 그러니까 오해하면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만 당신께 오라고 초대하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초대치 않으시는 줄로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실 리 없으시고, 또 고생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고, 다만 주님께 가는 자와 가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인데, 그런데 주님께 가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루의 힘든 일을 끝내고 선술집에 가는 사람이나 피로를 풀기 위해 오락이나 쾌락을 찾아가는 사람이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에게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고단한 인생의 해법을 찾고자 하는 사람일지라도 점쟁이나 인생 스승을 찾아갈 뿐 주님께 가지 않는 것입니다.
참 스승이요 구원자이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고 그분이 두 팔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찾아갈 주님이 있는 우리는 얼마나 복됩니까? 이는 힘들 때 찾아갈 친정엄마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주님을 찾는 이유가 잘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짐을 벗겨 주시기 위해 오라고 하신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 가운데 그런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안식을 주겠다고 하셨지 짐을 벗겨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어떻게 안식을 얻을 수 있을까요? 무거운 짐을 진 채로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고, 그러니 그 비법을 배우라고 하시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비법이 바로 주님의 멍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매고 짐을 지면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멍에가 편한 이유는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짐을 거부하지 않는 마음이기에 편하고 안식을 줍니다.
그리 좋은 예는 아니지만 처음 목줄을 매는 강아지는 거부하기에 목줄이 불편합니다. 목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조이고 더 불편해지지요.
그러다가 벗어나길 체념하고 목줄을 받아들이는 순간 편해집니다. 고생이나 무거운 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생이?
왜 나에게 이런 무거운 짐이?
이렇게 거부하는 마음에는 안식이 없습니다. 거부하는데도 주어지는 것 때문에 분노하면 그 마음에는 더더욱 안식이 없습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이란 고생과 무거운 짐이 마땅히 내 거라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사실 인생은 고생입니다. 이걸 받아들이면 안식이 마음에 평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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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영원한 안식처’이시다>
- 정주와 환대 -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습니다.”(시편 90,1)
바티칸에서 일하는 분들의 자녀들중 5세에서부터 13세까지 250명 아이들을 위한 여름 캠프에서 교황님과 아이들이 주고 받은 대화들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세대를 초월하여 80대 후반의 할아버지 교황님이 10대 전후반 아이들과의 기탄없는 대화가 참 경이로웠습니다.
“교황님의 슈퍼 영웅(superheroes)은 누구입니까?”
한 아이의 질문에 대한 교황님의 답입니다.
“조부모가 나의 슈퍼영웅이다. 나는 그분들의 지혜를 생각한다. 그분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다.”
어렸을 때, 어른들의 좋은 영향력은 아이들의 밑거름이 되어 노년에까지 큰 성장 동력이 됨을 봅니다. 노인은 많은데 어른이 없다는 세상에 참 어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열정의 교황님입니다. 어른하면 생각나는 바 든든한 배경의 산같은 분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여기서 산은 제가 35년 동안 정주하면서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다 본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불암산은 제 정주와 환대의 스승인 주님을 상징합니다. 요셉 수도원의 정주영성과 직결된 환대영성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방문하여 면담성사를 본 착한 자매와의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의 청담淸談도 향기처럼 남아있습니다.
“늘 멋지고 품위있게 사세요! 사랑하는 자매님! 마가렛꽃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꽃말은 ‘진실한 사랑’이라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신부님, 계시는 존재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참 좋습니다. 꽃말이 너무 이쁩니다.”
“단아端雅하기가 자매님을 닮은 마가렛꽃같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이런 향기로운 청담은 주고 받는 모두에게 사랑의 자양분이 됩니다. 어제 산책중 처음 발견한 마가렛꽃이 참 반가웠습니다. 꼭 1년을 기다렸다가 아무도 돌보지 않았는데 거기 그 자리에 다시 피어난 정주와 환대의 청초한 보라색 마가렛꽃을 보니 수차례 인용했던 ‘환대는 꽃처럼’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언제나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반가이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 옆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구나
볼 때 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무려 23년전 여기 요셉수도원에서의 시입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과 꽃들이 상징하는 바 정주와 환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삶의 중심 자리에 정주하시면서 마음 활짝 열고 모두를 환대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래서 주님의 집인 정주의 요셉 수도원은 환대의 집이 되고,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 됩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축복, 환대의 아름다움등 끝이 없습니다. 사랑의 초대에 이어 사랑의 환대입니다. 반면 무시와 냉대의 아픔은 얼마나 길게 지속되는 지요! 주님이야말로 끝없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사랑으로 초대하시며 환대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초대와 환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예수님의 초대요 환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강렬합니다. 제가 고백성사 보속시 참 많이 써드리는 처방전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차별없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안식의 품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환대를 그대로 반영하는 요셉 수도원입니다. 대부분 무거운 짐을 지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생존에 허덕이는 광야 여정중의 참 측은하고 가엾은, 영육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짐은 가볍다.”
그러나 값싼 은총은, 안식은 없습니다. 부단한 선택과 훈련, 습관화없이는 은총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참된 안식도 없습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사랑의 학교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이기에 평생공부는 필수입니다. 무슨 공부입니까?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날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의 멍에를 메고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주님을 닮아 온유와 겸손의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불편한 내 멍에는 주님의 편한 멍에로, 무거운 내 짐은 주님의 가벼운 짐으로 변합니다. 값싼 은총, 값싼 평화, 값싼 자유, 값싼 안식은 결코 없습니다. 100% 주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 했습니다.
참으로 평생학인이 되어 부단히 치열히 온유를, 겸손을 배우고 훈련하여 습관화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참된 안식에 참된 평화에 참된 자유입니다. 이래야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고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탈출기의 모세와 복음의 예수님이 너무 닮았습니다. 어제 봤다 시피 두분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친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입니다. 예수님의 예표로 손색이 없는 참 매력적인 인물이 모세입니다.
광야여정의 수련중 단련되어 황금같이 단단하고 순수로 빛나는 모세를 찾아 오신 하느님을 환대하여 긴밀한 기도의 대화를 나누는 참으로 진지하고 침착하며 열정많은 모세입니다. 모세를 환대하는 주님이요 주님을 환대하는 모세입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시고 흉금을 열고 자신의 계획을 소상히 밝히십니다. 얼마나 모세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주님이신지요! 주님과의 이런 깊은 친교의 만남이 주님과 관계를 한없이 깊이 했을 것이며 모세에겐 내적 힘과 안식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주님을 닮아 겸손과 지혜, 신뢰와 자비의 사람이 되었을 모세입니다.
바로 여기서 계시되는 “나는 있는 나다.” “있는 나”로 계시되는 하느님이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모세의 하느님,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이 되시는 분입니다.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I AM sent me to you)
영어로 쓰면 분명히 드러나는 “I AM(있는 나)” 하느님 이름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있는 하느님(I AM with us)”, “우리를 위해 있는 하느님(I AM for us)”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은혜로운 하느님 이름인지요! 바로 이런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으니 바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늘 우리를 위해 계신,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하고 복된 미사시간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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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11,28)
<나에게로 와서 배워라!>
오늘 복음(마태11,28-30)은 '내 멍에를 메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쳐있는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물 폭탄과 그리고 폭염으로 지구촌 곳곳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너무 많은 희생자들이 나왔고, 큰 피해를 입은 분들이 많아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매일 미사 드릴 때마다 이번 장마로 희생된 영혼들과 힘들어 하는 형제자매님들을 기억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지 말고, 모두가 함께 정신을 바짝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찾고, 그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 지혜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의 지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 방식대로 서로 사랑하는 지혜, "네 탓이요!" 만을 외치지 말고, "내 탓이요!"를 더 외치는 지혜, 조건 없이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지혜. 나에게로 와서 이런 지혜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생각과 말로만 예수님께로 나아가지 말고, 구체적인 행위가 지혜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이 더 힘들어 하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참으로 힘에 겨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배우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부활의 길입니다.
모두가 많이 부족하지만,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천사가 되어 함께 부활의 길로 나아갑시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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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uqQcLnOw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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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살아내느라
모두 고생이
많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소중한
사람들이
주님께 갑니다.
안식도 사랑의
가장 소중한
일부분입니다.
무거움을
풀지 못하면
쓰러짐도
나약함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고 풀 수 없습니다.
헤매는 사람들의
십자가가 드디어
주님을
향합니다.
휴식 없는
십자가는
마치
주님 없는
십자가와
같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휴식을 배우고
편안함을 배웁니다.
휴식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도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한
휴식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의
생활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무거운 생활이
이제 편안한
생활이
됩니다.
불편하고
아픈 마음이
치유를 받는
안식입니다.
바라는 것이
마음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새 마음으로
편안하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와
함께 제 십자가를
기쁘게 집니다.
우리의 생활도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십자가도
십자가의
주님 사랑에서
참된 휴식이
필요한
우리들입니다.
휴식 없는
사랑은
가짜입니다.
안식 없는
노동은
소중한 인격을
멈추게 합니다.
그래서
안식과 사랑은
가장 조화로운
구원의
합작품입니다.
지치고 힘든
마음이
온유하신
주님께
머무는
사랑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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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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