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나는 부추의 꽃은 하얀 색이다. 시어머님이 살아 계실 때, 당신의 친정집 밭에서 나는 부추를 캐다가 화분에 심으신 적이 있다. 특이한 냄새가 나는 납작하고 길쯤한 이파리를 먹는 채소로만 여겼는데, 여름 되면서 꽃이 피자 신기했다. 빳빳하게 올라와 차츰 옆으로 눕는 이파리들 사이에서, 가늘지만 곧은 꽃줄기가 몇 대 올라왔다. 그 끝에 달린 작은 꽃자루에서 하얀 꽃이 촘촘히 피어나 반원의 모양을 이루니, 화초로도 손색이 없었다. 교직에서 물러나면서, 밭부추꽃이 나와 연관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임식 날 받은 공로패가 그 실마리였다.
누구의 착오인지, 유리로 만든 그 패의 내 이름 한자가 틀렸다. 음은 맞는데, 가운데 자인 ‘靜’이 ‘貞’으로 박혀 있었다. 담당했던 분이 미리 확인을 못해 미안하다며, 두고 가면 수정을 해서 보내겠다고 했다. 모든 걸 마감하고 떠나는 마당에 번거로운 게 싫어서, 그러마 하고는 그냥 가지고 왔다. 받을 때는 몰랐는데 돌아와서 다시금 들여다보니, 그 패의 주인이 내가 아닌 듯했다. ‘1979년 3월 2일 경희의 배움터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22개 성상을 투철한 교육관과 애교심으로…’ 공로패 문안의 ‘투철’이니 ‘애교심’이니 하는 내용이야 미화된 것이라 쳐도 앞부분의 경력은 틀림없는데, 이름자 하나가 바뀌니 생소한 느낌이었다. 물론,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면서 전과는 판이하게 살리라 생각은 했다. 퇴직이라는 게 목숨이 지고 새로 피는 과정도 아닌데 무슨 다음 생이 되기야 할까마는, 그동안의 생활 습관과 사물이나 사람을 대하는 눈까지 완전히 바꿔 다른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돌아보면, 내가 교직을 떠나면서 한 생의 마무리라고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학 졸업을 채 하기도 전에, 급히 국어과 강사를 의뢰 받은 지도 교수님을 따라 한 학원에 속한 중학교의 교무실에 발을 들여놓은 뒤, 정식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만 이십이 년이었다. 그 교수님은 글짓기 당선으로 국문과에 들어간 나를, 교사가 되기에 앞서 수필가로 키워준 분이기도 했다. 같은 학원내라고 해도 몇 년에 한 번씩은 여중과 남중의 교류가 있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한 번도 자리 옮김을 하지 않고 그대로 머물다가 옷을 벗었다. 여러 사람 중에 나와 같은 예는 지극히 드물었다. 공교롭게도, 왜 가르치는 이로서의 그 기간을 기리는 공로패에 내가 아닌 듯이 여겨지는 이름이 새겨졌을까. 그 동안 나는 정말, ‘고요할 靜’ 대신 ‘곧을 貞’ 의 자세로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남학생을 다루는 게 고요함을 지닐 수 있는 생활은 아니었다. 늘 입을 열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나중엔 평상말이 아예 반소리높임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대강은 안 통하는 선생님이라고 학생들이 붙여준 ‘칼날’이라는 별명이 끝 무렵엔 ‘쌍칼날’로까지 승격되었으니, 곧음을 잃지는 않았다는 뜻일 게다. 그 안에서 항상, 미루고 있는 숙제처럼 남아있는 게 있었다면, 쓰는 작업의 미진함이었다. 반짝 머리를 스치는 게 있어 원고지를 대할라 치면 시작종이 나고,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 갈등의 골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어지기 전에,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게 몇 년 전부터의 다짐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교사로서는 비교적 올곧았다고 여겨지니, 틀린 이름자 ‘貞’이 오히려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서 나는 부추의 꽃은 붉은 빛이 도는 보라색이다. 밭에서 나는 부추에 비해 키가 약간 크고, 이파리의 모양새 또한 비슷하지만 그처럼 무성하게 나지는 않는다. 역시 납작하고 길쯤한 이파리들 사이에서 꽃줄기가 올라와, 그 끝에 달린 꽃자루에서 보라색 꽃이 둥글게 뭉쳐 피어나 원형을 이룬다. 시어머님의 산소로 향하는 길의 풀섶에서 두 대 정도 나와 핀 산부추꽃을 발견한 것은, 퇴직을 하던 해 가을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꽃을 잘 찾아내는 내 눈에도 그 꽃은 아주 새로웠다. 꽃줄기 끝에 연보라색 작은 꽃이 촘촘히 박혀 공 모양으로 피는 알륨이라는 꽃을 닮기는 했는데, 산길에 피어 있어선지 화사함보다는 젖은 흙 냄새가 배어 있는 차분함이 느껴졌다. 그 꽃이 산부추꽃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자, 채소로만 여겼던 밭부추의 꽃을 보았을 때보다 몇 배 신기했다.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의 산소가 함께 있어, 시집온 뒤 시어머님을 따라 이십 년 가까이 오르던 길인데, 전에는 한 번도 눈에 띄지 않던 그 꽃이 어째서 그 무렵에야 보였는지. 공로패의 바뀐 이름자처럼 생각의 실마리가 됐다. 학교를 그만두면서 앞으로는 글 쓰는 일에만 전념하면 된다고 홀가분해했지만, 막상 그런 생활의 울안에 드는 것도 수월치는 않았다. 내 지식의 대부분을 누구에겐가 전달하는 일에 하도 젖어 있다 보니,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지식을 건네다 보면 느낌이나 사고까지 함께 실어보내기 다반사였는데, 글로 써내야 할 것을 말로 날려 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해서 아까워한 적도 있었다. 나 홀로 작업에 얼마든지 몰두해도 좋은 생활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걸 오롯이 받아들이게 된 건, 퇴직한 지 일 년이 넘어서였다. 내적인 조용함에 길들어 가고 있는 이즈음에야 비로소, 내 이름자인 ‘靜’ 을 찾는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하얀 색으로 피는 밭부추꽃 안에 가르치는 몸짓으로 늘 곧게 서고자 했던 ‘貞’자의 내가 있고, 붉은 보라색으로 피는 산부추꽃 안에 외따로여서 고요해지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자 하는 ‘靜’자의 내가 있다면, 지나친 의미 부여가 될까. 보통 이 생에서 받은 목숨이 끝나야 다음 생으로 넘어간다고들 한다. 나는 단지 긴 기간의 교직생활에서 작가만의 생활로 그 방향을 바꾼 것이니, 이파리와 줄기의 모양은 같고 꽃빛깔만을 달리하는 밭부추꽃과 산부추꽃에 빗대어도 괜찮을 듯하다. 다만, 전에는 밭부추꽃의 하얀 정결함에만 마음이 쏠렸으나, 이제는 산부추꽃의 붉은 보라색이 지닌 원숙함으로 우물 속처럼 깊어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