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창조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는 하느님
창세 1,20-2,4ㄱ; 마르 7,1-13 / 세계 병자의 날; 2025.2.11
입춘한파가 엄습한 가운데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곳에 따라서는 영하 10도를 밑도는 강추위가 며칠째 지속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입니다. 하지만 봄은 멀지 않았습니다. 봄이 완연해지면 자연은 생명의 기운을 온 천지에 불어 넣을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조성하신 자연의 섭리는 어김이 없기 때문입니다. 추위 속에서도 가장 먼저 봄 소식을 알리는 꽃은 매화입니다.
오늘 독서인 창조설화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다시피,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창조되었고, 창조된 세상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습니다. 이 같은 하느님의 창조 업적에 대해 경탄하며 찬미한 시편이 있으니, 바로 오늘 화답송입니다. 다윗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사울로부터 물려받고 명실상부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마무리 짓고 나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습니다.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시편 8,4-5). 하지만 다윗 이후 이스라엘은 물론 세상 전체가 사람들이 저지른 죄 때문에 망가져 있었으므로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새롭게 복원해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민족들의 빛’(이사 51,4)으로 삼으신 이스라엘 백성이 세상에 하느님의 창조 신앙을 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병고와 장애에 시달리던 이들이나 마귀 들린 이들을 고쳐 주시고 하느님 백성으로 편입시키셨습니다. 병자도 부마자도 아니었던 더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이처럼 당신의 치유와 구마 활동을 돕고 계승할 제자들을 선발하시어 하느님 백성을 모으시는 일에 파견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백성과 그 역사를 창조하시는 과업으로서, 두 번째 창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느님께서 기적적으로 이루신 창조 과업에 대해서 감사드리려는 마음도 없었고 그저 인습적으로만 조상들의 전통을 지켜왔던 탓으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전혀 반갑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오히려 작은 흠이라도 찾아내서 비난하고 그분의 명성과 권위에 흠집을 내려고 안달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던”(마르 7,6; 이사 29,13) 위선자들이 그 당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조상들의 전통을 내세우며 정작 하느님의 계명을 상습적으로 어기던 그네들의 종교적 위선이 그들을 사실상 우상숭배자요 무신론자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던 집단 유배 체험은 민족적 각성을 낳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구전으로만 전해 내려오던 창조 신앙을 창세기라는 기록에 담아 문자로 남겨 놓게 된 것도 그 결과입니다. 다만 바빌론 유배 중에 수메르 문명에서 배운 칠진법에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 과업을 7일로 기록하였을 뿐입니다. 이 당시 창세기 저술 작업에 관여한 일단의 지식인들은 하느님께서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이 그 창조주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임을 일깨움으로써 민족적 자부심과 정통성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민족의 혼은 하느님의 영을 부음 받아야 비로소 생겨나는 이치를 일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신앙인 개개인도 이 민족 혼 안에서라야 영혼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잊지 않고 백성들이 종교적 전례 중에 낭독할 수 있도록 규칙적이고 운율감 있게 기록해 놓은 것도 대단히 창의적인 발상이었습니다.
창세기 저술에 관여한 지식인 그룹의 이러한 문제의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위선은 후대의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반면 거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240여 년 전에 천신만고 끝에 복음을 진리로 알아보고 들여온 이 땅의 선각자들의 문제의식이 외면당하고 온통 서구화 일색으로 치닫는 사태도 매우 심각합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처음부터 중국 선교사들이 전해준 천주교 교리를 토착화시켜 이해하고자 무진 애를 썼습니다. 서양식의 논리와 분석적 사유방식으로는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사유방식을 지닌 한국인들이 이해하고 섭렵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 그리고 ‘주교요지’ 등은 그러한 신앙 토착화의 위대한 산물입니다.
박해와 식민지 체험, 분단과 전쟁 등 민족이 겪은 고난에 대한 각성도 필요하거니와, 선각자들의 신앙 토착화 노력은 올바르게 계승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창세기 저술 작업에 관여했던 이스라엘 지식인 그룹의 문제의식처럼,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기적의 산물이며, 우리의 인간 생명도 당연히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기적임을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혼이 하느님의 영을 부음 받아야 정통성과 정체성이 확립될 것이라는 이치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 창조의 기적을 당연시하거나 자연적으로 발생한 우연의 산물로 여기는 사람들은 하느님께 드려야 할 흠숭의 의무를 귀찮아하거나 싫어합니다. 무분별하게 세속화된 서구의 정신풍조에 묻어온 이러한 무임승차적 태도가 무신론을 낳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창조는 기적이며 생명은 사랑의 산물이라는 신앙이야말로 정통 신앙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민족이 주체성을 지니고 민족적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이 질병으로 고통 받을 경우에도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기운을 불어 넣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마침 오늘은 세계 병자의 날입니다. 이 날의 유래는 프랑스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께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라고 밝히시면서, 이 메시지를 믿게 하기 위해서 본래 병원 쓰레기를 버리는 황량한 곳이었던 마사비엘 언덕에 게르마늄 성분이 다량으로 함유된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고, 그 물을 마신 사람이나 그 물에 몸을 적신 사람들의 불치병이 기적적으로 깨끗하게 낫게 된 데 있습니다. 그 마을에 살던 어린 아이의 불치병이 나았다는 기적 소문이 퍼지자 삽시간에 프랑스 전국은 물론 유럽 각지와 나중에는 세계 도처에서 불치병 환자들이 몰려와서 일부는 기적적으로 낫기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효험을 보지 못하기도 했는데, 그 덕에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라는 메시지가 퍼지게 되었습니다.
루르드에 성모님께서 처음 발현하신 때는 1858년 2월 1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황청에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믿을 교리로 반포한 때는 그보다 4년 전인 1854년이었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라서 교황청의 공식 발표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지지 못했는데, 루르드에서의 성모 발현 덕분에 그 메시지가 유럽은 물론 세계 각지로 알려지게 된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은 원죄 없는 잉태 즉 무염시태 교리를 알리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메시지는 뒷전이고 루르드에만 가면 그 기적의 샘물을 마시고 그 물에 몸을 적시는 데에만 관심을 쏟아 왔습니다. 마시고 적신다고 모든 병자가 낫는 것은 아닌데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날을 세계 병자의 날로 지내도록 권고하면서, 아픈 이들에 대한 관심과 사목적 배려를 당부하게 된 것입니다.
기적으로 인해 메시지가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기적 소문에 묻혀 메시지가 가려지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병든 이들이 기적적으로 낫기를 원하면 원죄 없는 잉태라는 메시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모 마리아께서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신다는 신심이 밑받침이 되어야 병자들을 진정으로 돌볼 수 있습니다. 이 신심이 뜻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를 본받으려는 신자들도 세례성사를 통해 원죄에서 벗어났으니 만큼 세상의 죄에 대해서도 물들지 말고 생명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기운을 받아서 깨끗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프랑스 루르드에서 발현하셨던 성모 마리아의 메시지인,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여인”이라는 말씀을 오늘 세계 병자의 날에 되새기는 뜻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세계 병자의 날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메시지도 이것입니다. 즉,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세상의 죄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하느님의 자비를 믿고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생명의 기운인 면역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면서 하느님의 자비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의 마음과 자비 실천이야말로 치유의 완성이며, 하느님께서 일으키시는 진정한 기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