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개란닝구
각개란닝구라는 말을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다.
아마 들어 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말도 아니고, 군대 공식 용어는 더더욱 아니다. 1980년 6월, 논산훈련소 어느 내무반의 훈련병들 사이에서만 통하던 지극히 사적인 단어였다.
각개는 각개전투의 각개이고, 란닝구는 윗속옷을 뜻하는 ‘러닝’의 일본식 발음이다. 그러니까 각개란닝구란 말하자면 ‘각개전투 전용 러닝셔츠’라는 뜻이다.
나는 1980년 6월에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마침 장마가 시작되던 때였다. 훈련소의 하루하루는 낯설고 고단했다. 체격이 왜소하고 몸도 그리 튼튼하지 못했던 나에게는 철모 하나, 소총 하나만 메는 단독 군장도 버거웠다. 건장한 동기들에게는 가벼운 차림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그것만으로도 어깨가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각개전투 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장이 있는 날이면 우리는 철모를 쓰고 소총을 멘 채 그곳까지 행군했다. 훈련장까지는 삼십 분쯤 걸렸던 것 같다.
논산 제2훈련소 군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었다.
“백제의 옛 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
관창의 어린 넋이 지하에 혼연하니
웅장한 황산벌에 연무대 높이 섰고…”
그때는 그저 군가로만 불렀던 가사였지만, 각개전투 훈련장에 도착하는 순간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 여기가 황산벌이구나.
바닥은 온통 황토였다. 거기에 자갈까지 잔뜩 깔려 있었다. 비가 오면 그 황토는 질척한 진흙이 되었고, 자갈은 무릎과 팔꿈치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역사책에서 보던 황산벌, 계백 장군이 백제의 마지막 운명을 걸고 싸웠다는 그 땅이, 내게는 황토와 자갈과 빗물과 땀으로 먼저 다가왔다.
각개전투라는 말은 그럴듯하다. 각 개인이 각자 전투를 한다는 뜻이라지만, 훈련병 입장에서는 간단했다. 그냥 땅바닥을 박박 기는 일이었다. 낮은 포복, 높은 포복,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무릎은 까지고 팔꿈치는 아프고, 철모는 자꾸 눈앞으로 내려오고, 빗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다.
장마철의 각개전투장은 말 그대로 황토탕이었다. 비가 내린 자갈밭 위를 온몸으로 기어 다니다 보면 겉옷은 물론이고 안에 입은 속옷까지 흠뻑 젖었다. 훈련을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와 옷을 벗어 보면, 하얗던 란닝구와 팬티는 이미 본래의 색을 잃고 있었다. 진노란 황토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문제는 그 색이 빨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훈련소에서 지급받은 속옷은 세 벌뿐이었다. 하루 각개전투를 하고 나면 한 벌이 황토색이 되었다. 다음 날 새 란닝구를 입고 나가면 그것도 금세 같은 색이 될 것이고, 그렇게 사흘만 지나면 세 벌 모두가 황토빛 속옷이 되어버릴 판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기지를 발휘했다.
“어차피 또 더러워질 거, 황토 묻은 거 하나를 각개전투 때만 입자.”
생각해 보면 참 단순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훈련병들에게는 대단한 지혜였다. 첫날 황토색으로 물든 란닝구를 빨아 두었다가, 다음 각개전투 훈련 때 다시 입는 것이다. 덜 말랐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훈련장에 가면 또 젖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나머지 두 벌의 하얀 란닝구는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옷을 ‘각개란닝구’라고 불렀다.
그 이름에는 훈련병 특유의 체념과 유머가 함께 들어 있었다. 누가 정한 것도 아니고, 누가 기록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 말은 우리 사이에서 금방 통했다. “내일 각개 있대.” 그러면 누군가는 말했다. “각개란닝구 챙겨라.” 그 한마디면 충분했다.
각개란닝구를 챙겨 입어야 하는 훈련 날에는, 각개전투만 우리를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엔 PT체조가
기다리고 있었다.
조교가 외쳤다.
“PT체조 마흔 번 실시! 마지막 구호 없다!”
우리는 팔짝 뛰며 두 손을 위로 올렸다 내리고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문제는 마지막 숫자를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서른아홉 다음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런데 힘들고 정신없다 보면 꼭 누군가가 외쳤다.
“마흔!”
그러면 끝이었다. 다시 처음부터였다.
“다시 마흔 번 실시!”
이번에는 조금 전 실수한 친구가 이를 악물고 조심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또 다른 누군가가 다시 외쳤다.
“마흔!”
그 순간 모두의 마음속에서는 말로 할 수 없는 탄식이 터졌다. PT체조는 몸보다 정신을 먼저 무너뜨리는 훈련 같았다.
사격훈련 전에는 PRI도 있었다. 지금 찾아보면 PRI는 Preliminary Rifle Instruction, 사격술 예비훈련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때 우리에게 PRI는 그런 영어 약자가 아니었다.
P는 피 나고,
R은 알 배기고,
I는 아이고 죽겠다.
정식 명칭보다 그 우스갯소리가 훨씬 더 실감 났다. 훈련병들에게 언어란 늘 그렇게 현실을 따라갔다. 어려운 영어 약자보다, 몸으로 겪은 고통에서 나온 농담이 더 정확했다.
지금 생각하면 각개란닝구 하나가 뭐 그리 대단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에게 그것은 작은 생존 전략이었다. 세 벌뿐인 속옷 중 두 벌이라도 하얗게 지키고 싶었던 마음. 아무리 힘들어도 조금은 덜 망가지고 싶었던 마음. 훈련소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훈련병들이 스스로 찾아낸 아주 작은 자유 같은 것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는 그때 함께 황산벌을 기던 동기들의 얼굴도 흐릿하다. 누가 처음 그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각개란닝구라는 말만은 선명하다. 진노란 황토빛으로 물든 란닝구 한 벌, 장맛비에 젖은 훈련장, 자갈에 까진 무릎, 마지막 숫자를 말하면 안 되던 PT체조, 그리고 피 나고 알 배기고 아이고 죽겠다는 PRI.
그 모든 기억이 그 한마디 안에 들어 있다.
각개란닝구.
첫댓글 나도 군대에 갔다 왔다구요
나는 용감한 육군 공병 병장 출신 입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각개란닝구’라는 말 하나에
훈련소의 고단함과 그 시절 훈련병들의 해학이 다 들어 있네요.
황토에 물든 속옷 한 벌을 지키려던 작은 지혜가,
지나고 보니 청춘을 버텨낸 생존의 표식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보충대로 입대해서 각개란닝구란 말을 처음 들어봅니다
그런 애환이 있었군요.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그당시 일은 어제일처럼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지금도 저,사진속
란닝구를 가지고 계신지
궁굼합니다.
제 막내 아들이 81년생
논산훈련소에서 분대장 하고
병장 제대 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83년 5월에
논산에 입대를 해서 훈련 받았습니다.
누런 란닝구를 보니 그때 생각이 나는데,
더 생생하게 기억나는 추억 하나는
호남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 건너서
사격장을 새로 만든다고 매일 훈련
끝나고 큰돌덩이를 등에 지고 오가던
추억입니다. 한번 등에 지고 다녀오면
그날의 일과가 끝이 났지요.
비가 억수같이 오는날 각개전투훈련 받으며 땅에서 뒹굴때 진흙탕에 물들었던 처참한 난링구를 보니 군대가서 눈물나게 고생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읺는 황토색 난링구. 1974년 3월1일부터 10월20일까지 저는 원주 1하사관학교에서 정말 빡세게 28주 훈련을 받았답니다. 그때 사연은 정말 책으로 써도 한권입니다.
한동안 영어로 난링구라고 써서 팔던 티셔즈가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