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재기시모음 4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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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월
구재기
1
산빛은
저물녘에 이우르고
산기슭
외딴 초가
연기는
줄줄이 피어오르는데
노승(老僧) 한 분
산사(山寺)를 뒤로하여
바람 끝에
하롱하롱
오동꽃
송이송이
2
빗방울에 씻기고 씻기어
마침내 튕겨져 나온
햇살 무리들아
허리를 구부리고
무슨 금맥(金脈)이라도 찾으려는가
하늘 끝 어디쯤서
뺨 부비고 눈부시게 살이 올라
저기, 저,
젖가슴 철철 넘치는 청보리빛
눈물 찬 꽃봉오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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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구재기
지난밤의 긴 어둠
비바람 심히 몰아치면서, 나무는
제 몸을 마구 흔들며 높이 소리하더니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더 푸르다
감당하지 못할 이파리들을 털어 버린 까닭이다
맑은 날 과분한 이파리를 매달고는
참회는 어둠 속에서 가능한 것
분에 넘치는 이파리를 떨어뜨렸다
제 몸의 무게만큼 감당하기 위해서
가끔은 저렇게 남모르게 흔들어 대는 나무
나도 가끔은 흔들리며 살고 싶다
어둠을 틈 타 참회의 눈을 하고
부끄러움처럼 비어있는 천정(天頂)을 바라보며
내게 주어진 무게만을 감당하고 싶다
홀가분하게 아침 햇살에 눈부시고 싶다
대둔산 구름다리를 건너며
흔들리며 웃는 게 눈부실 수 있다
가끔씩 온몸을 흔들리며
무게로 채워진 바위
그 무게를 버려가며 사는 게 삶이다
지난날들의 모자가 아직 씌워져 남아있는
푸념의 확인, 구름다리 밑의 아찔한 거리로
가끔은 징검징검 흔들리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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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 하늘
구재기
울타리 밑에서 호박은 핑크빛으로 늙어갔다
마른 넝쿨손이 울타리목을 잡은 게 필사적이었다
은행잎이 노라니 익어가는 언덕길 끝은
푸르디 높은 하늘
어디서, 쩡쩌엉쩡, 대낮의 장끼가 울어댔다
하루가 소리 없이 빨리도 지나가지만
다가오는 먼 그림 속 빛깔들이
바람 속에서 다투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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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구재기
설거지를 하시는
어머니의 물 묻은 두 손이
오늘따라 무척 거칠게 보였다
어제는 5일 장날
배추 몇 포기 머리에 이고 가서는
푼돈을 만지시고 돌아오시더니
오늘은 또 그 푼돈을 쪼개어
꽁치 한 마리 식탁에 올리시고는
이 세상의 오직 하나, 외아들
홍역으로 잃은 입맛을 찾으셨다
문득 하늘로 먼저 가신
아버지가 생각나는 것일까?
밖은 가을이라 수확이 한창인데
어머니는 아들 몰래
눈물을 떨어뜨려 손등을 적시셨다
아들 하나 기둥 같던
쓸쓸한 우리 가족의 머언 옛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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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갈대
구재기
나는
세상을 향해
적당히 미치려 하는데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꼿꼿이 서라고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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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거울
구재기
나를
만날 수도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설사 서로 무척이나 닮았더라도
서로 간에 어떤 복을
얼마만큼이나 주고받을 수 있겠는가
자세히 생각하고
깊이 믿고 즐거운
마음을 내어
내가 나에 의하여
마음을 빚어낼 수 있다면
헤아리고 일컬을 것이 어찌 있겠는가
밝음으로 어둠을 드러내고,
어둠으로 밝음을 나타내는 동안
본래 땅이 있으므로
씨 뿌리면 꽃이 피어나는 것
본디 바람 없는 곳에서는
작은 잎 하나 하늘거릴 수 없다
오고 가는 길
인연하는 일이란, 무의식으로
나를 풀어낼 수 있는
확실한 의식, 어슴한 빛이 되는 것
나의 두 눈에는 항상
내 얼굴보다 너의 얼굴이 먼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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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림자
구재기
세상의
맑은 곳일수록
햇살 밝은 날일수록
내 삶의
무게만큼
내려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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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금강金剛으로 향하며
구재기
금강으로 향하여
바다를 달린다
하얗게 일어서는 뱃길
발을 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자는 오라
흙탕물을 밟지 않은
전투화를 벗어 던지고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곳으로 오라, 오라
금강으로 가는 길
하늘의 모든 구름이 쏟아 부은
온갖 설움과 슬픔과 원망을 딛고
너와 나는 비로소
한 마음 한 몸이 될지니
두터운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달릴 수 있는 자는
모두 이 뱃길로 오라
이 푸른 알몸의 바다로 오라
청정의 창해
햇살이란 햇살들이
이곳에서는 애시당초
심해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것
푸른 물낯을 터전으로 하고
금강의 그림자를 얼싸안을 수 있는
너른 가슴인 자는
이 뱃길에 온몸으로 뛰어 들어라
금강으로 향하여
뱃길을 간다
청정의 순한 길
모진 두 손을 씻으며 닦으며
금강과 한 몸 되려
하얗게 일어서는 창해의 햇살로
뱃길을 빚으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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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길 고양이
구재기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한가로우면 햇볕 따스한 곳에 앉아
구름 지나는 그림자와 함께 놀고
고단하면 앉은자리
그대로 잠을 잔다
그러면서 길 고양이는
길을 간다
길 고양이가 가는 길은
알고 모르는 데에 있지 않다
마시고 먹고 앉아 놀고
잠을 자는 곳이 전부 길이다
이따금 길 위에서 운다
배고파서 울고 목마름에 울고
고단하여 앉을 자리를 찾으며 울고
걸어가면서도 운다
그러나 울더라도
콧물 눈물을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그런 슬픔의 울음이 아니다
부모나 주인을 가진 적 없는
그래서 뭔지도 모르는 길고 양이는
칭얼대며 우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
길 위에서 오가며 울어댄다
길 고양이는, 그러나 단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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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길을 가는 데는
구재기
길을 가는 데는
굽이가 있어야 한다
빠른 걸음을 좀더 더디게 할 수 있는
가로질러 갈 걸 돌아갈 수 있는
바로 곁이 아니라
좀더 멀리할 수 있는
더딤이 있어야 한다
큰 강을 건너는 데에는
다리가 없어야 한다
먼 건너를 가까웁게, 성큼성큼
너른 물을 좁으막히, 넝큼넝큼
바로 건너가 아니라
아득한 저만큼의 거리가 있어야 한다
옛길을 그리워하는 사람아
너와 내가 걷던,
빠른 걸음을 부끄러워 할 때쯤
너와 나는 분명한 이별이었나니
스러졌어도 남아 있어야 할 노래도 없이
먼 길 따라 가쁜 숨결 따라
헉헉헉헉 숨 차 오르는 지름길로 다가서서는
끝내 눈물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길을 가는 데는 언덕이 있어야 한다
함께 걸어야 할 너와 내가
산길 굽이굽이 함께 올라가야 할
무엇보다도 충분히 걷고 걸어야 할
아무리 길눈이 어두워도 함께, 찾아보기 쉽게
이 세상의 언덕을 넉넉히 챙겨 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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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꽃샘추위
구재기
꽃밭에 얼굴을 부비며
빈 꽃가지를 흔들며
또 그렇게 지나야 하는 겨울,
그 비바람을 막을 수는 없다.
조금씩 조금씩 뒤안길을
보듬어 스스럼 열며
꽃철을 맞아 사위어져 가는……
최후의 만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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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내일
구재기
오늘의 바람도
자정을 넘으면
내일로 가댄다
겨울 숲은 언제나
눈부시게 부서질
가슴만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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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눈엽嫩葉
구재기
물은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골짜기 작은 물도
바다에 이르는 큰물도 모두 흐른다
삽 한 자루가 길을 돌려놓아도
위에서 아래로
타고난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우듬지의 끝
온기를 가득 품은 바람이 흐른다
된서리에 시달리던 하늘이
검은 구름을 벗기 시작하고
가느스름 열리는 눈길이 탁 트여
눈물지을 만큼 자꾸만 슬퍼져 간다
생각하면 모두가
일어서고 사라져온 것들
매 순간 거듭하면서 흐르고
까마득하다 보면 다시 보이는 것들
나라거나 내 것이라거나 젖어 들다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마구 부추겨지는데
큰 나무 땅속뿌리에도
물 흐름은 여전하고 있는가
완전히 소멸된 경지가
열반에 들어서야 이루어가듯
바야흐로 지상에는, 함초롬히
두 눈 크게 뜨는 눈엽의 세상
출처 : 계간 《시사사》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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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돌부처
구재기
팔다리는 물론
귀, 입, 턱까지 문드러진
돌부처 하나
길가에 홀로 서 있다·
그러나 안쓰러워하지 말라
돌부처는 지금
본래 제 모습으로
하나씩 몸을 버리며
독경 중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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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돼지가 웃었다
구재기
살아서는 하늘을 볼 수 없는
돼지는 하늘 한 번 보기가
평생 소원이었는지라
목숨을 버려서야 목욕재계하고
온몸을 뉘인 채
비로소 하늘을 보았다
돼지는 입만 슬쩍 벌리고 헤헤헤 웃었다
살아생전 웃을 일 전혀 없었던
돼지는 몸통마저 버린 채
머리만으로 높은 상에 올라앉으니
사람들은 저승 갈 노자까지
입에 물려주며
두 손 모아 큰절을 하였다
돼지는 소리 없이 크게 흐흐흐 웃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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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드러냄에 대하여
구재기
새들은 굳이
아침만을 요란스레 울었다
어둠이 깨지는
슬픔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 장암에 걸려
수술대에 올라
눈부신 불빛에
감추어진 내장이 드러나던 날
나도 울고, 누이도 울고
그리고, 아버지까지도
슬피 울었다
어둠이 찢긴 밝음 아래
가리워진 모든 것
속속들이 드러날 때마다
새들은 어김없이 울어댔고
내 또한 덩달아
모든 걸 드러낸다는 것에
굳이 아침만을 두려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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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등불
구재기
밝히지 않고서는
기도나 염불만으로는
길을 갈 수 없고
길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출처 : 《문학과 창작》 (2021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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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목마르다
구재기
우물이 깊을수록
두레박의 끈은 길다
심한 목마름에
한 두레박의 물을 길어 올려도
목마름을 위해서는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할 뿐
하늘의 구름 사이
밝은 달이 우물에 빠지면
그때마다 나는 급히 목마르다
서둘러 두레박을 내리지만
끈이 긴 두레박의 물은
쉽게 내 입술에 닿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가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쉽게
나의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차라리 깊이 빠져드는
한 덩이 달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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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무지개
구재기
하늘이여
나는 이 순간
시인으로 태어나
비로소
언어의 사기꾼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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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물소리를 찾다
구재기
어둠으로 하여
침묵이 눈멀게 할 수는 없다
물소리를 찾는다
그러나 후곡천*의 물속에는
작은 달그림자 하나 없다
소리가 살아있는
깊은 어둠으로 어둠을 거둘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어둠으로 길을 열어
무너져 내리는 침묵에 싸인다
한 걸음도 나아갈래야 나아갈 수 없는
지금, 자꾸만 어둠을 지어가면서
물소리를 찾는다
그러나 한걸음도 옮기지 못한다
바로 침묵을 눈멀게 하고 깨닫는 길
그렇다, 이제 그 동안
지성(知性)처럼 알고 있던
모든 것을 씻어내기로 한다
차츰차츰 흔들림 없이
멈춤 없는 물소리를 찾는다
짙은 어둠으로 세상을 덮고
본래 뿌리 없는 생각으로부터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침묵으로부터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튼튼한
물소리를 찾는다, 찾아 나선다
어느덧 저 멀리 아침을 맞고 있는
금강소나무길 후곡천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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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박꽃을 보다
구재기
창밖의 달빛이
거실 가득 들어온다
달은 비추면서 항상 고요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춘다
비추고 고요함은 분명 다른데
달은 어이하여 오직 하나일까
문득 몸을 풀어 창밖으로 나간다
빈 하늘을 우러러
달을 만난다
달은 작을 수도 있고,
클 수도 있다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다
하나가 아닌 둘이 된다
달이 허허로이 밝아
스스로 고요를 비추니
애써 마음 둘 일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뒤를 돌아보는데
펜스 위로 기어오른 박덩굴에
하얀 박꽃이
두어 송이 매달려 피어 있다
어떻게 옮겨도
몸은 변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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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보물
구재기
박물관에서
속 찬 그릇 하나
본 적이 없다
빈 그릇들
모두
천 년을 살아온
보물들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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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보석에 대하여
구재기
유리칼로 유리를 잘랐다
단단한 유리가
어떤 몸부림처럼 소리하며 둘로 잘려나갔다
유리를 자른 단단한 것이
금강석이라 했다
금강석은 보석이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의 사랑이 보석이라 했다
그 보석이 결국 우리를 둘로 갈라놓았다
잘려진 유리가 유리창에 끼워졌을 때
안과 밖이 생겼다 안과 밖에서
우리의 사랑이 마구 울었다
바람이 겨울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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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보시布施
구재기
수덕사 주차장 출구 옆
율무 흑미 수수 콩 팥 조 기장 검은깨
좌판에 날아와
지나는 관광객을 슬슬 살피며
서둘러 허기를 채우고 있는
새 한 마리
할머니는 온몸을 낮추어
두 눈을 감은 채
묵도에 깊이 빠져 있다
정오 무렵, 햇살 눈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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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비를 맞으며
구재기
마른 땅에 비가 내렸다
흘러내릴까 했는데 나무 밑에서
빗물은 이내 땅속에 스며들었다.
지금쯤 빗물은 아직 한 번 본 적도 없는
지상의 사랑 이야기를
나무 뿌리들에 속삭여주고 있을 것이다.
아, 아, 나도 빗물이고 싶다.
여자의 마른 몸에 빗물로 스며
가슴의 뿌리를 적시면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내 사랑을 속삭여주고 싶다.
그렇게 또 사랑을 고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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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빈 하늘
구재기
조금은
가난하게 살고 싶다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어 있다는 것
나의 사랑도
그렇게 비어 있고 싶다
비어 있는 곳을 찾아
자꾸만 채우며 살아가고 싶다
하늘은 늘 가난하다
그래서 곧잘 구름 벗어 비어 있다
비어 있을 때마다
더욱 푸르러지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더욱 더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는 걸 보다가
나는 그만 좌르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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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삼월 삼짇날
구재기
어찌 강남에 간 제비뿐이랴
연한 쑥 탕을 끓여 빈 배를 채우고
아낙들은 냇가에 몰려와 머리를 감으려
첫선 보인 나비 딸라 점을 치는데
깊어 가는 하늘은 어둠뿐이다
공장에 간 딸아이의 소식은 없고
산에 가득 진달래꽃 피어
산허리에 그득 새빨간 진달래꽃 피어
괜스리 꽃전을 만들어 씹어보지만
텅 빈 들녘을 바라보면
어쩐지 마음만 바빠지는 삼월 삼짇날
보리는 아직 일러
이삭조차 보이지 아니하고
중두리에 담가 놓은 씨나락
소금물 가림에 둥둥 뜨니 배 더욱 고프구나
아낙들은 눈으로 피라미떼 몰며
냇물에 흥건히 흐르는 햇살을 건져
연신 머리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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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소나기가 지나간 뒤
구재기
지렁이 한 마리
한길로 나와
말라 죽어 있었는데
한참 후에
되돌아와 보니
사라지고 없어졌다
바람이
우듬지에
한참이나 지났는데
바람은 떨어진 잎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이지도 아니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애초부터
지상에 남겨진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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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소리에 갇히다
구재기
한동안 걸음하다
멈춰선 자리
착각에 빠져버린 듯
네가 눈을 뜨면, 이미
나는 내 안에 갇혀 버린다
서 있는 자리 그대로 굳어버린
산녘의 느티나무 한 그루 밑에
남아있는 것은 한낮의
옹크려버린 그림자뿐이다
먼 데서 가느다라니 밀려오는
저, 종소리, 종 - 소 - 리
봄눈 녹아내리는 맑은 봄물에
가둘 수 없는 시간을 지나
고개 밑으로 여울이 턱져
물살이 세차게 흐르는 곳
네가 가고 나면 그림자도 없다
눈앞에 탁, 트이는 빛도
쉽사리 어둠이 되기도 한다
물결에 원을 그리듯
내 둘레를 종소리가 맴을 돈다
이제 헤엄쳐서 건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림자도 없이 서 있는 자리
나는 나의 착각 속에
내 안에 그대로
갇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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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소주에 대하여
구재기
우리는 소주를 좋아했다.
입술을 제 빛으로 촉촉이 적시고
맑음을 가진
소주와 같은 사랑을 했다.
남들처럼 입술에 거품을 물고
배부르게 사랑하는 걸 싫어했다.
우리의 사랑은 가난해서 좋았다.
가난을 만날 때마다 슬픔이 자주 일었다.
가난은 서로 나눌 슬픔이 있다는 것
우리는 슬픔을 나누기 위해
곧잘 사랑을 마셨다.
사람들처럼 거품을 물지 않고
우리는 맑은 사랑으로 입술을 적시며
슬픔으로 가까이 슬픔을 길러
더욱 더 가난하게 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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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속 찬 배추
구재기
속 찬 배추가
속이 차는 게 아니라 실상은
속 차지 못한 어리디 어린 손이
멋모르고 밖으로 밀쳐 나오려는 걸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포대기로 감싸듯
겉으로 얼싸 안아주는 것이다
긴 바람 매운 비를 알 리 없는 어린 속잎
갓난아기 손가락 같은 노오란 어린잎이
품안을 벗어나 밖으로 밀치며 나오다 보면
어린잎도 자라나서 손톱이 굵어지고
그제서는 이미 손등은 겉잎처럼 누렇게 들뜨고
진기마저 다 빠뜨린 채 말라가면서
마지막 힘을 다해
배추 속잎을 필사적으로 얼싸안는 것이다
마른 배추잎이
그렇게 왜 살아왔는가를
왜 그렇게 살아와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다가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나면
어느 새 배추는 지상에 뿌리를 박고
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한 포기 속 찬 배추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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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아침 일곱시 반
구재기
커피를 마시며 곧 헤어질
오늘 하루의 아내와 만난다
하나 된 인연으로
얼굴을 익히며 몸과 마음으로
천 년을 움직이고도 남을
쓰디 쓴 기쁨의 이별을 준비한다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갈 길을 가야 할 시간
자신 있게 떠나 보내고 나면
의심하는 것 보다 서로를
믿는 것이 그렇게도 쉬운 일이구나
잠들기 전 혹은 잠에서 깨어 나서야
든 눈으로 마주하는 데는 겨우 서너 시간
하루 이십 사 삼.사를 위하여 눈물 없이 맞아야 할
아침 일곱 시 반
출근 전 아내와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신앙 같은
이별의 만남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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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오늘이고 싶다
구재기
매양 오늘 같이
사랑에 취하고 싶다
바람이 불고
간간히 소나기 내리듯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싶다
산등성이로 이는 구름 속에 묻혀
지상의 어느 누구도 바라볼 수 없는
하늘의 자리를 마련하고
햇살처럼 찬연히, 뜨거웁게
온 몸을 달구고 싶다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른다 해도
오늘 같이
오늘의 사랑은 오늘이고 싶다
☆★☆★☆★☆★☆★☆★☆★☆★☆★☆★☆★☆★
《34》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신다
구재기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신다
그러나 과연
맛으로 마시는가
아니면 그냥 마시는가
소리가 들리면
바람소리인지
짐승 우는 소리인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인지
과연
깨달으며 듣는가
물을 마시며
바람을 따라, 우리가
낙원을 꿈꾸고 있을 때
물속의 돌은
움직이지 않으며
스스로 소리하지 않지만
돌에게는
들리는 것도
마시는 것도 없지만
우리는 또,
매일 물을 마신다
☆★☆★☆★☆★☆★☆★☆★☆★☆★☆★☆★☆★
《35》
으름 넝쿨 꽃
구재기
이월스무아흐렛날
면사무소 호적계에 들러서
꾀죄죄 때가 묻은 호적을 살펴보면
일곱 살 때 장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붉은 줄이 있지
돌 안에 백일해로 죽은 두 형의 붉은 줄이 있지
다섯 누이가 시집가서 남긴 붉은 줄이 있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많은 호적의 붉은 줄 속으로
용하게 자라서 담자색으로 피어나는 으름넝쿨꽃
지금은 어머니와 두 형의 혼을 모아 쭉쭉 뻗어나가고
시집간 다섯 누이의 웃음 속에서
다시 뻗쳐 탱자나무숲으로 나가는 으름넝쿨꽃
오히려 칭칭 탱자나무를 감고 뻗쳐나가는
담자색 으름넝쿨꽃
☆★☆★☆★☆★☆★☆★☆★☆★☆★☆★☆★☆★
《36》
잡초 뽑기
구재기
별나게 울어대는 까치 한 마리를 보고
이른 아침 골아실 돌밭에 앉아
잡초를 뽑아내는 것일까, 아버지는
허이연 뿌리째 뽑혀지는 잡초를 볼 때마다
훌훌 옷의 먼지라도 털어내듯
땅을 마다하고
모조리 도시로 떠나버린
자식들의 생각을 되살려낸다
어느 잡초더미에서 작물로 자라
연약한 목을 내밀고 있을까
때로는 손끝이 바르르 떨리기도 하지만
하나의 잡초가 뽑힐 때마다
그만큼 넓어지는 視野
돌밭 둔덕에 학처럼 앉아
마지막 힘을 더하여 날개를 퍼득이며
세상의 구석구석 모든 잡초를 뽑아낸다,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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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잡초
- 둑길行
구재기
밤새도록
폭풍우가 몰아쳤는데도
자고 일어나 나아가 보니
둑길의 잡초들이 살아 있었다
아, 아침 햇살 속에서
진땀을 흘리며
하이야니 저런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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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저수지에서
구재기
물결이 흔들리자
모든 게 사라지는가 싶더니
모든 게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물결이 조용해지면서부터였다
조용해진다는 것은
제 몸을 스스로 낮춘다는 것
저수지는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고
맑은 물밑까지
훤히 보이는가 싶다가
항상 높이 존재할 수 있는 하늘이
조용한 물 속에
몸을 내릴 줄 안다는 것을
머리 숙여 하늘을 우러르며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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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좋은 일
구재기
슬픔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기다릴 수 있는 슬픔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 좋은 일입니다
막차는 이미 떠나고
차마 돌려지지 않는
발걸음을 무겁게 돌리면서
눈물 한 종재기라도 흘릴 수 있는
사랑을 가졌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오늘의 날은 이미 깊이 저물어
또 다시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곳에
내일이 있다는 것은
조금은 더디게 만날 사랑이 있다는 것은
그렇게 좋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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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주름진 사과
구재기
주름진 사과를 깎는다
칼날을 드밀어도 주름에는
쉽사리 칼날을 허락하지 않는다
골 진 부드러움이
탱탱한 피부보다도 강하다 했던가
긴 세월 동안 아버지는
얼굴에 주름을 얶어 놓으셨다
아버지의 얼굴에
무디어진
나의 칼날
주름진
사과가 더 달다
온몸을 감싸주시던
아버지의 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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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태산목꽃 피던 날
구재기
태산목 하얀 꽃을
그리도 덩달아 좋아하더니
무슨 까닭으로 돌아간 것일까요
아침에 불던 맑은 바람처럼
눈부신 햇살 품은 이슬처럼
잘 웃던 웃음조차
함께 사라져버린 오후
텅 빈 뜨락에 서서
태산목꽃 홀로 피고 있으니
차라리 그 향기에나 묻혀야겠네요
장지문으로 다가서는
한낮의 허기진 구름 무리
웃다 울다 지쳐버린 눈물 자죽 처럼
메말라 붙어버린 가슴속 아픔을
한 올 한 올 꺼내 보아도 되겠지만
이제는 정말
싸늘히 아름다워지던
뒷모습이나 그려볼 수밖에 없네요
향기 아슴아슴 피워 올리는 태산목
꽃잎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면
젖은 눈조차 감은 채로
저절로 자라나는 슬픔이나
아낄 대로 아껴가며 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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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햇빛 사냥
구재기
사과나무에서 사과알로 미처 다 익지 않은 것은
햇빛 사냥을 시작한다
멍석 위에 동그마니 앉아
하늘을 닮아 가는 연습을 하다가
바람 한 줄기를 만나면
바람에 실린 햇빛까지도 사냥한다
청청청청 가을 하늘이 살아서
죄 없는 지상의 자리
넉넉한 햇빛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로
붉은 기억의 흔적으로 남기기 위하여
미처 다 익지 않은 사과 알들은
멍석에 동그마니 앉아
햇빛 사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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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헌책방을 찾아서
구재기
헌책방에 들려
누군가 읽다가 버려 예까지 와버린
헌 시집 한 권을 샀다
정가의 오분 의 일도 되지 못한 시집 한 권
왜 그렇게 싸냐고 물으니
요즈음 같은 때 시 같은 걸 누가 읽느냐
한 두어 편 읽다가 버리는 것이지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
헌책방 주인이 오히려 이상하게 날 바라보았다
시내버스 제일 뒷좌석에 앉아
떱뜨름한 가슴을 열어 시집을 펼쳤다
누가 그랬을까?
사랑, 별, 햇살 등이 나오는 시 구절 마다에
붉은 볼펜으로 굵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시집을 처음 펼쳤던 사람에게도
뜨거움이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그렇구나, 그렇구나
한때의 뜨거움을 가진 자는 이렇게 버릴 줄도 안다
그 동안 어떠한 뜨거움도 없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탕진하며 미적거려 왔던가
문득 나의 사랑과 별과 햇살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만 달리는 버스에서 내려
잊고 살아왔던 내 사랑과 별과 햇살을 찾아
다시 헌책방을 찾아서 힘차게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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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휘어진 가지
구재기
열매가
가득 차면
가지는 절로 휘어진다
열매를
다 쏟아내고서야
휘어진
가지는 비로소
똑 바로 돌아간다
일 년 전
하던 짓 그대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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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흔들의자
구재기
등을 기대고 앉아 있으면
세상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것이
이토록 편안할 줄이야
창밖으로 보이는 바다, 그 물결이
출렁이면서 바다가 살아있다는 것이
보인다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은 것들도
한 번쯤 흔들리고 나면 정이 붙는다
흔들릴 때마다 하늘이 내려와 앉고
멀리 보이는 작은 섬들이 치솟다가
물 속에 잠기기도 한다 한여름
무더위가 씻은 듯이 사라질 무렵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것이 안심이 된다
배 한 척이 수평선 위에 뜨기까지
얼마동안이나 육지를 밀어내며
흔들려 나아갔을까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세상에서 혼자서만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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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