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던 계절의 이브
유옹 송창재
이때만 되면 무슨 좋은 추억이라도 되는 듯이 잊히지도 않고 어제처럼 떠 오르는 젊은 날의 기억
이것도 하나의 추억이리라.
나는 특정의 날이라든지
~~날 이라든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어려서 부터 많은 형제들과 가난한 집에서 자라다 보니 밥상에 모처럼 미역국 한 그릇이라도 올라오면 누구 생일인가 하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으면 끝이고,
축하 한다든지 선물을 준다든지 하는 것은 한 번도 해 보지를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누구의 생일을 챙기는 데에도 익숙하지 못하고 심지어 가족들 생일은 달력에 표시해 두고도 축하 전화 한 마디 전 하지를 못한다.
물론 어떤 때는 내 생일이 왔는지 갔는지 조차도 모르고 지낸다.
그런 것이 몸에 익숙하지를 않아 누가 생일축하 전화라도 해주면 고맙다 하면서도 어색하기도 하고 상대에게 내 생일이라는 것이 오히려 미안하다.
그런데 내가 내 생일은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누군가의 생일은 꼭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적은 있다.
호주머니가 비어서 아무 것도 사 주지도 못했고, 어쩌면 돈이 있었더라도 선물을 고를 줄도 몰라 우물쭈물 그냥 밥이나 먹고 말았을 것이지만…
이렇게 어떤 날들에 대하여 무심하고 관심조차 없는 나인지라, 요즘 젊은이들이 만난 지 며칠이 어떻고 하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것을 어떻게 계산을 하고 기억을 하는지? 내 머리로는 가당치가 않다.
정이 좋은 부부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그 계산만은 잘해서, 기억을 못하는 서방이 각시에게 욕을 보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 각시가 참, 웃겨 보이고 없어 보였는데~~~
그 날을 계산하여 나중에 갈라서기라도 하면 일당으로 계산해 받으려고 하나?
내가 늙은이 사고라 그런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았다.
물론 내가 아는 이 부부는 새로 만난 쉰 부부들이어서, 그래도 그들의 가슴속에는 하얀 목련꽃 이파리가 떨어지는 것처럼 하루 하루 가는 것이 아쉬워
한 날들을 세면서 날을 보냈는가 보다.ㅎㅎ
존경스러운 각시인지, 할 일없는 각시인지, 척하는 각시인지는 내 각시 아니니까 모르겠지만...
본래 생겨먹기를 이렇게 생긴 나는 우리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선천적 유전인자 덕인지, 아니면 후천적 학습 덕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어떤 특정한 날에 대한 기억은 힘이 든다.
이런 내가 예전 어느 날,
그 날은 지금도 기억한다.
1973 년 12월 24일 즉 그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이며 바로 오늘이다.
교회에는 어릴 적 여름 성경학교에 가서 노래하고 빵 타먹고, 강냉이 죽 얻어먹던 기억밖에 가지고 있지 않던 당시에
징글벨이 어떻고, 아기예수 탄생이 어떻고...
그 날을 핑계 삼아 쌍쌍이 팔짱끼고, 눈 오는 겨울을 기다리며, 선물을 주고받고...
심지어는 그들만의 성스러운 또 다른 아기예수를 기념으로 탄생시키던 날에도,
나는 그저 아무 것도 아닌 의미없는 평소의 날이었고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날이었지만 길거리마다 캐롤들만 나오니 징글벨만 따라서 부르기만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 살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내게는 아무렇지도 않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기려야 할 날도 아니건만, 객지에 나가 있으니 괜히 울적해지고 쓸쓸하고 외로웠다.
나는 그때 서울에서 재수를 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서울에 갈 일도 없었고 그래서 한 번도 못가 본 서울을,
그해 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기 위해서 난생 처음으로 올라왔던 순 깡 촌놈이었다.
애들은 말보다 욕 먼저 배운다더니
나도 서울에 와서 맨 먼저 배운 것이라고는 담배와 술이었다.
지금은 학생들이 담배도 더러 하고 술들도 제법 많이들 마시며, 무슨 날이면 당연히 술로 헹가래를 한다고 알고 있다.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 당시 우리는 아주 드물게 담배를 피우는 애들도 있었고, 술도 마시는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는 모범생 이었다.
어찌 난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힘든 환경과, 가슴 속에서는 마그마가 끓어오르는 휴화산이 있은데 일탈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아침, 저녁으로 엄마와 함께 등하교를 하여야하니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딱 한번 일탈을 하였다. ( 나중에 고백해야지 ...)
그런 내가 법대를 진학하고자 했다가 약대로 진로를 바꿔 치른 입학시험에서, 일차는 합격하고 면접에서 낙방하였으니..
그러나 그때에는 낙방의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서울이라는 곳에 올라와서 재수를 시작하였다.
형편이 좋지를 못하니 최대한 내핍생활을 할 수밖에 없어, 공순이를 하며 벌어 보내주는 누나의 돈으로 도서관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버티기 시작하였다.
친구들은 하숙으로, 친척집으로 들어 가는데 나는 학원이 파하면 도서관으로 귀가를 하여야 하였다.
초기에는 그래도 결기가 생겨 한눈을 팔지 않고 공부를 했지만, 내 가슴속에 북받쳐있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하였다.
학원도 빠지고 당구장에서 방황도 하고, 지금 우리 흔히 말하는 혼술을 시도 때도 없이 마셔댔고...
식당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식권은 식권이 아닌 주권이 되고, 친구들이 술 사달라면 내 식권은 주권이고 밥 대신 술로 하루, 하루를 지냈다. ( 참고로 설명하자면, 그때 광화문에서는 백반이 70원이고, 막걸리가 한 되에 70원 이었으니까.. 바로 식권과 주권은 동가였다.)
그러니 늘 식권은 모자라서 일요일에 식당이 영업을 하지 않는 날은 하루 종일 굶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취중에 내가 만들어 낸 격언이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식당 개 삼년이면 당연히 라면을 끓여야지.”였다.
그 전에 한 번도 못 들어 본 말이 광화문 골목 순두부식당에서 탄생하여 그 뒤에는 상당히 회자되었던 명언이 된 것이다.
취중 명언이 나온 것이다.
아마 이것은 광화문의 재수생의 입에서 부터 퍼져 나갔을 것이다. ㅎㅎㅎ
그렇게 마셔대던 술은 나를 7층 도서관까지 기어서 오르게도 하였고....
광화문 학원가에서 술을 가장 많이 마시는 놈이라고 고향산천까지 소문이 나게 되었는데 우리 가족들만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술집에서 시비를 붙은 놈이 하필이면 중학교 동창 녀석이라, 기가 막힌 해후도 해 보았고...
그때 재수생이야 본래가 소속도 없는 낭인이지만 난 망나니였다.
어느 날 학원에도 안 가고, 대낮에도 어두운 도서관 침실에 누워 있으려니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딱히 대상도 없이 모든 것이 슬프기만 하고 세상을 모두 거부하고 싶고, 내 하는 짓이 불쌍하고 싫었고...
일주일을 어느 절에 들어가 있다 나와서, 그 도서관을 퇴실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그 동안 술 마시며 미루어 두었던 공부들을 잠을 줄여가며 했다.
그래도 아직 술, 담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는데, 군산에서 사귀던 여자 친구애가 갑자기 상경하여 담배를 끊지 않으면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공갈협박에 금연은 시작했었다.
나중에는 다시또 피웠고
술은 지금도~~ 그때처럼 그렇게 죽자고 미련하게 마시지는 못하지만!
바로 그렇게 그 도서관으로 옮긴 후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재수생들에게도 낭만은 있어 밖으로 다 나가고, 도서관이 텅텅 빈 날도 나는 혼자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 조금 이른 저녁시간이었는데,
이런 날에 별로 동요하지 않은 나였지만 도서관은 비었고 밖에서는 캐롤들이 ~~
밥을 대어 먹는 식당에 가서 혼자 밥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친구들은 이미 다 들어가고...우울하고 싫은 날이었는데!
갑자기 친구 두 녀석이 나를 찾아 식당에 나타났다.
도서관에 갔더니 없어서 혼자 술 마시는가 하고 왔더란다.
나처럼 우울한 우리는 함께 더 마셨고, 신촌에서 하숙을 하는 친구 놈이 신촌으로 진출을 해 보잔다.
다른 한 놈은 이태원의 친척집에서 기거하니 그쪽은 어렵고...
그래서 우리는 신촌으로 진출했다.
연세대 앞쪽에 즐비한 포장마차에 들어가 맛나게 한잔을 하고 나오니, 들어갈 때 오지 않던 눈이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있었다.
“야, 기분이다. 한잔 더하자!”
이미 눈앞은 흐려지고 다리는 풀려 가는데...
우리는 몇 집을 더 갔는지?
다음날 아침 내 손목에는 시계가 없었다.
어느 집인가에 술값대신 풀어주고 온 것이 틀림없다.
그때 그렇게 마신 포장마차의 안주는 피조개를 양념하여 구운 것과 꼴뚜기였고 홍합 국이 술국이었다.
나는 지금도 피조개와 꼬록, 홍합 국을 보면 그때가 생각이 나서 혼술이라도 한다. ^^^
그렇게 맛있는 소주 안주는 이 세상에 없다.
그렇게 맛있게 마시고 친구 하숙집 방에 누워서 지난 얘기를 무슨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면서, 세상을 엄청 살아온 놈들처럼 세상을 욕하고 씨부렁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소변을 보러 일어났는데, 한 놈이 보이지를 않았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화장실에 갔더니... ㅎㅎㅎ.
글쎄 그 녀석이 화장실 양 벽을 앙 손으로 턱 버티고 앉아서 혼자 씨부렁거리는 것이다.
"야, 너 뭐해?"
"야, 이것이 자꾸 나를 누르잖아.“
“야, 임마! 이거 화장실 벽이야.”
“그래, 그런데 왜 막 움직이면서 나한테 달라드냐?”
“미친놈, 빨리 골마리나 올리고 들어가...”
확실히 술은 내가 더 샜나 보다. 아무래도 경력이 있어서 그랬나?
나는 화장실과 싸우지 않고 잘 들어왔으니까.
다음날, 친구 하숙집에 미안해서 일찍 집을 나왔는데...
아침 해장국을 먹을 돈도 주머니에는 없었고...
친구 한 녀석은 이태원으로 가고, 나는 광화문 내 집인 도서관으로 와서.. 하루 종일 굶었다.
이것이, 나의 어느 젊은 날의 이그러져 슬프게 분노하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풍경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나는 밥을 굶은 날
하느님을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