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 2,4-17; 마르 7,14-23 / 연중 제5주간 수요일; 2025.2.12.
오늘은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 날입니다. 설과 대보름, 한식, 단오, 추석, 동지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한국 5대 명절입니다. 설 명절은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 날까지 보름 동안 이어지던 큰 축제였고, 새해를 맞아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주고 받으며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한편 봄 농사를 준비하기 전에 마을 공동체의 단합과 일치를 추구하던 농경 사회의 풍습이 남아 있습니다. 설이 가족 단위로 이루어지던 개인적이고 혈연 중심의 명절이라면, 정월 대보름은 마을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던 집단적이고 지연 중심의 명절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윷놀이를 즐기는 척사대회는 전국적으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공동체 풍습이고,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풍습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후부터 줄다리기, 차전놀이, 고싸움, 쥐불놀이 등 공동체 단합을 꾀하던 풍습은 문화예술축제 및 경연대회에서는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또한 아직도 오곡밥, 약밥, 부럼 등 절기 음식은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실제로 행해지는 절기 음식입니다. 농경 사회에서 혈연과 지연을 비롯한 공동체의 화합을 지향하던 조상들의 지혜가 정월 대보름 풍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창세기의 두 번째 창조 설화입니다. 첫 번째 창조 설화에서 창조의 주체가 하느님이시고 그 과정도 무상으로 그리고 온전히 하느님의 자유의지로 이루어진 기적이었으며 그 결과는 피조물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 좋았음을 알려주었다면, 두 번째 창조 설화에서는 하느님께서 귀하게 창조하신 그 피조물 세상을 돌보도록 창조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소통하며 생명력을 얻을 수 있고 또 어찌하면 생명력을 잃고 죽게 되는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에 따라서 인간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재창조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이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첫 사람들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듯이, 하느님과 단절된 사람들이 여전히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계속해서 죄를 짓는 바람에 지옥이 세상에 만들어지고 있음을 예수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이런 죄의 현상이 유감스럽게도 한처음부터 오늘날까지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도 지속될 세상의 인간 현실인 겁니다.
두 번째 창조 설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생명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마감되는지에 대한 통찰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들은 하느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숨이야말로 생명의 시작이며, 하느님께 죄를 지어 그 관계가 단절되면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고 진술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과 ‘모든 이의 어머니’를 뜻하는 대명사이듯이 ‘에덴 동산’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나라를 상징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목표를 상징합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창조하셨으므로 사람이 하느님의 질서에 따라야 하는데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그 질서를 어겼습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생명 나무와 선악 나무 중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어도 좋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따먹으면 안 된다고 하느님께서는 명하셨습니다. 이 명령의 핵심은 선악의 윤리적 가치는 하느님께서 정하시는 것이고, 피조물은 이를 따라야 하며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마다 양심에 이 질서를 박아 주시고 따르도록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이를 어기면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이를 어겼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애초에 불어 넣어주신 생명의 숨은 막혀버렸고, 세상에는 죄가 잔뜩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문화인류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인류 문화에서 하느님을 섬기려던 종교 문화의 흔적은 어느 문화에서나 발견되지만, 그 이후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의 영을 받지 못한 채 식량과 영토를 둘러싼 다툼이 그치지 않았고, 국제 분쟁이나 전쟁 등의 형태로 오늘날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탄은 여전히 인간을 하느님과 떼어놓기 위한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영으로 소통해서 양심이 회복되지 않는 한, 국가의 사법질서가 생겨나고 법률이 많아지며 법률전문가들이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세상의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죄를 방지하려던 율법이 판을 치면서도 죄를 없애기는 커녕 온갖 죄가 난무하고 있었고, 심지어 음식을 금하는 규정도 많아서 죄를 짓게 만들던 형편을 지적하시며,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은 사람을 죄 짓게 할 수 없고, 오히려 사람의 마음 안에서 나오는 죄가 사람을 죄짓게 하여 더럽히는 것”(마르 7,14-15)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밝히신 바는 당시 사회 현실에서 흔히 발견되던 죄의 목록이었습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마르 7,21-23) 등 악한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근본 대책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죄도 없으시면서 굳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세상 사람들에게 근본적인 죄의 대책을 마련하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 첫 사람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와는 반대로, 다시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셨는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 왔고 이는 가장 기본적인 입문 성사입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 하느님의 영과 사람의 혼이 소통을 하게 되고, 양심이 살아있게 되면 세례받은 신자들의 가정과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는 에덴동산이 다시 열립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면서 선행과 나눔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빛이 비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하는 통공의 원리입니다(시편 104장, 화답송).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죄를 없애고 하느님 나라를 창조하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그것이 사랑과 공동체입니다. 일단 개개인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영과 소통을 하면서 양심이 살아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 서로 사랑함으로써 공동체가 세워지면 성령께서 현존하셔서 살아있게 된 그 양심을 이끌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과 공동체의 질서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금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에덴동산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길입니다.
최근의 우리 사회는 정치 권력의 최고 책임을 맡았던 무리들이 저지른 내란죄를 둘러싼 공방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국가 공동체를 무너뜨릴 뻔한 내란죄에 대한 형벌은 사형이거나 무기징역뿐입니다. 그만큼 형벌이 엄중합니다. 그러다 보니, 내란수괴의 혐의를 받는 윤석열과 그 변호인들의 저항이 상식적인 수준을 한참 벗어날 정도로 치열합니다. 더군다나 군 통수권자로서 주요 임무를 맡긴 사령관들에게 명령을 해 놓고도 모든 죄를 부하들에게 떠넘기려는 윤석열의 비겁한 행태에 분노한 사령관들의 증언 또한 점점 더 정교해 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란의 주요 종사자로 심판을 받게 된다면, 군의 최고 엘리트로서 성장한 그들의 경력은 무효가 되고 연금도 받을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한평생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감옥 안에서 보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다 보니, 이런 공방을 지켜 보는 국민들의 심정은, 이 혼란이 언제나 끝날까 하는 짜증이 넘쳐납니다. 한 마디로, 죄를 둘러싼 법적 공방이 우리 사회의 여론을 휘몰아 치고 있는 중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 원죄가 바야흐로 21세기 한국 사회를 지옥으로 몰아가고 있는 듯 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우주에는 빛과 어둠밖에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차원의 질서인 이 빛과 어둠이 인간 세상이 창조된 다음에는 선과 악으로 바뀌었습니다. 윤리적인 차원의 질서인 선과 악은 영적으로는 사랑과 죄의 질서로 나타납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사랑보다 죄가, 선보다 악이, 빛보다 어둠이 지배하는 형국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루라도 빨리 이 내란 정국을 수습하고 죄보다 사랑이, 악보다 선이, 어둠보다 빛이 다스리는 현실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정월 대보름의 풍습으로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전통대로, 마을은 물론 국가 공동체가 화합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덕담으로 가득차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