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지식 탐방 / 운경(雲鏡) 스님
때마침 내린 봄비로 촉촉해진 숲은 마냥 싱그럽기만 했다.
푸른 숲의 새들과 나무들, 오염되지 않은 자연은 정녕 아름다웠다. 그러나 봉선사 가는 길목에서 정작 기자를 기쁘게 한 것은 자연이 아니었다. 풍광이 빼어난 곳엔 어김없이 우리의 마음의 고향인 부처님 도량이 있고, 부모님처럼 찾아뵐 어른스님이 계시다는 점만으로도 한없이 기뻤다.
"오느라고 힘들었지요. 이거 먼저 들어요. 피로가 조금은 풀릴 게야."
올해 93세의 운경 큰스님, 사탕과 드링크류를 권하며 빙그레 미소짓는 그 모습에서 스님의 그동안의 이력, 아이들에게 사탕이며 과자를 챙겨다주며 부처님 말씀을 옛날 이야기처럼 구수하게 해주시는 그 평생의 원력행도 읽을 수 있었다.
- 스님 건강은 좋으신지요.
"다른 데는 다 괜찮은 편인데 다리가 병통이에요. 두어 달 전에 미끄러져서 크게 다쳤는데 아직도 나을 기미가 안 보이는군요. 이미 몸이 낡은 수레가 되었는데 낫기를 바라는 것이 욕심이지."
- 스님께서 건강하셔야 저희들도 힘이 납니다. 도량이 매우 활기차 보입니다. 다 스님의 덕화인 것 같습니다. 보통 하루일과는 어떠신지요.
"요새는 다리 때문에 바깥 출입을 자제하고 주로 절에만 있지요. 새벽 4시에 일어나 참선하고 독경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하고, 때되면 공양하고 그저 앉으나 서나 참선하고 독경하고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게 일이에요. 또 찾아오는 분들이 있으면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 스님, 봉선사에서 출가하셔서 강원수업과 제방선원에서 보낸 때를 제외하면 평생을 이 일대에서 포교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봉선사에 대해 몇 말씀 해주십시오.
"세조대왕 알지요. 그이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즉위했지만 불교에 귀의하고 참회를 많이 했지요. 이 절은 원래 그 세조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졌는데 사후(死後)까지도 조카인 단종의 슬픈 애혼을 달래기 위한 뜻도 있는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도량입니다."
- 일설에는 고려 때 창건됐다고 하던데요.
"운허 스님을 비롯해서 일인들의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지월 스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친 운암 스님 등 여러 스님네들과 지사들이 봉선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어요. 그러니 자연 진접파출소 순사들의 눈에 가시였지요. 한일합방 후 전국토지를 측량할 때 농지만을 등기하고 임야는 하지 않았는데 그걸 구실로 부엌에 장작 한 개비만 있어도 끌어가는 겁니다. 그래 당시 주지였던 월초 노스님을 위시한 대중스님들이 사찰림 확보운동에 나섰지요. 진호 스님이 봉선사의 모든 기록에 광종 때 창건 사실을 기입하고, 왕릉을 모실 때 봉선사 임야를 모두 빼앗아갔으니 돌려달라는 소장을 내어 결국 사찰의 주봉 및 청룡백호는 돌려줌이 옳다는 판결을 얻었지요. 그러한 연유로 창건연대에 혼돈이 오게 된 것이에요."
- 스님들의 지혜로 어려움을 극복한 일, 스님들이 독립을 위해 애쓰신 이야기를 들으니 어깨가 으쓱해집니다. 스님께서도 일경에게 잡혀가 옥고를 치루셨다면서요.
"화계사에 있을 때 '조선민족해방협동당' 이라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입했지요. 대동아전쟁이 극심할 때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의 대원들은 징집을 피해 포천군 광덕령에서 산악 훈련을 하며 조국해방에 몸을 바쳤어요. 그 때 나는 포천 흥룡사의 주지로 있었는데 그이들의 양식을 대주었어요. 한 동지가 애인에게 보낸 편지가 화근이 되어 다 체포되고, 나도 8개월 동안 감옥에 있다가 해방을 경기도 경찰국에서 맞았어요."
- 그 일로 훈장을 받아도 시원찮을텐데 해방 직후에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아 곤욕을 치루셨다면서요?
"금강산 일대의 유점사, 표훈사, 내원암 등에서 8개월 가량 머물렀는데 때마침 조선민족해방협동당의 동지 하나가 공산당에 입당하는 바람에 그런 오해를 받은 것이에요."
- 그런데 스님, 표정을 뵈니 금강산에서의 수행생활이 무척 좋으셨나 봐요.
"금강산에 못 가봤지요? 말로는 그 아름다운 경치를 설명할 수 없어요. 그 노래도 있잖아요.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너럭바위에서 그저 앉아만 있어도 구태여 참선을 하려 한 것이 아닌데도 절로 선정에 들게 되지요. 산과 내가 한 몸이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 그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겠어요. 그야말로 일체 만물이 한 뿌리라는 경전의 말씀이 확연히 다가오는 순간순간이었지요."
- 천하절승의 풍광이 수행을 도우셨다는 말씀 같습니다. 옛부터 금강산을 불국토라고 일컬었던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가 봅니다.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바로 그 금강산이 우리의 금강산을 일컫는 말입니다. 불교가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공식적으로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인도에서 53불이 인연있는 국토를 찾아 금강산으로 왔는데, 유점사에 봉안된 53불이 바로 인도에서 온 부처님들입니다."
- 스님께서 만공 스님께도 금강산 구경을 시켜 드렸다면서요.
"만공 스님께 무(無)자 화두를 받고 한 철을 지낸 뒤에 해인사 강원에서 1년 살고 나와서 구름처럼 팔도를 떠돌아다니다 유점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렇게 좋은 도량에 선원이 없다는 사실을 듣고 적잖이 실망했어요. 당시 유점사 주지였던 서호 스님께 선원을 개원하자고 제의해서 뜻이 받아들여졌고 만공 스님을 모셔달라는 부탁을 받았지요. 정혜사에 계시던 만공 스님께 한달음에 달려가 청을 드리니 '내가 60이 넘도록 금강산을 보지 못해 금강산 구경이 소원이었는데 네가 그 원을 풀어주는 구나' 하시면 기꺼워하셨어요. 만공 스님은 유점사 53불을 친견하시고는 9불이 없다하여 새로이 불상을 조성하는 인연을 지어주시기도 했지요. 그러나 저러나 북한의 김일성이 금강산 바위마다 이름을 새겨 훼손을 시켜놓았다는데 생전에 가볼 수 있을는지... 두동강 난 나라는 힘을 못 씁니다.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가 힘써야 합니다."
- 스님 말씀을 듣다보니 금강산을 보고 싶은 열망이 통일의지를 더 부추기는 데요. 스님의 출가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나는 고향이 서산인데 어릴 때 조실부모하고 서울의 외가에서 자랐어요. 그후 외조모님도 돌아가셔서 다시 고향의 형님 댁에서 살았는데, 열다섯 살 때던가. 어느 날 서산읍내 구경 갔다가 어떤 스님을 만났는데 마음이 끌려 따라갔지요. 신심이 남달리 깊었던 외조모께서 '너는 중되는 게 좋겠다, 너 중 되라'고 하신 말씀이 因이 되었나 봅니다."
- 전생에 복을 지어야 출가할 수 있다는데, 어린 나이에 출가하시어 평생을 출가본분 잊지 않고 수행정진하며 중생제도하기란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세간의 유혹도 적지 않았을 듯 싶은데요.
"신심을 견고하게 가지면 외풍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출가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화계사 화엄경 법문을 들었는데 얼마나 환희롭던지 '나도 중됐으니 잘 해야 겠다' 는 생각을 했어요. 강화 보문사에 가서 '일생동안 중노릇 잘하게 해주십시오.' 기도드리고 나서 80여 년이 다되는 지금까지 중노릇하고 있습니다.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 여러 사람들이 스님에 대해 '자비롭기가 부처님 같고 한수 이북지방의 포교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칭송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특히 전방의 군인들에게 가장 많이 수계를 주신 스님으로 30여 년 동안 한결같이 군포교에 힘을 기울이신 데 대해 많은 분들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보고 고마워하나. 나는 그저 내 할 바를 한 것, 중이 중노릇한 것밖에 없어요. 당연한 일을 한 것이지 잘했다고 칭찬 들을 일은 아니에요. 부모가 자식 기르는 것이 어디 칭찬 들을 일인가요."
- 3,40년 전 당시만 해도 스님들이 대부분 수행에만 힘을 쏟을 때 스님께서는 60년대에 이미 의정부 포교당을 건립하시고 어린이, 청소년, 군포교, 재소자 교화, 심지어 산골의 자그마한 보살절에도 가셔서 법문을 해주시면서 군부대나 교도소 등에 인연을 맺어주시는 등 그 동안의 행적은 찬탄해 마지 않을 일입니다. 포교에 원력을 세우신 데에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허참 불자라면 누구나 포교를 해야 하는데 거기에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겠어요. 아까 말했듯이 무자 화두를 받고 공부하면서 느낀 바가 있었어요. 옛날 중국의 조주 스님께 어떤 학승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물었는데, 조주 스님이 '무(無)' 하셨어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개에게는 불성이 없습니까' 하고 되물었으니 조주 선사께서 '분별하기 때문에 없느니라'고 하셨지요. 결국 모두가 부처인데 나는 인간이고, 저것은 동물이라고 분별하는 마음이 부처의 성품을 가로막는 것이에요. 참선이고 염불이고 경전공부고 제 마음 닦아 제 본성 찾아가는 길, 분별심 버리는 길이에요. 그리고 깨달았으면 그것에만 열중하지 말고, 강을 건넜으면 뗏목을 버리듯이 수행정진해서 깨달은 바를 널리 회향해야지요. 모두 부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분별심에 가려 아옹다옹 살아가는 세상사람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중노릇하면서 가장 큰 보람이 있다면 부처님 만나서 개과천선하는 불자들을 볼 때지요. 앞으로도 한 사람이라도 더 불교인연을 맺어주는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 스님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본래 불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짐짓 함부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 양상입니다. 그래서 사회가 더욱 황폐화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부처님 성품을 지닌 절대 평등한 존재이지만 전생과 현생에 지은 업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인과법과 인연법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모 자식간 . 친척간 . 이웃간의 고귀한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고, 언제 어느 때든 선연(善緣)을 심기 위해 노력해야 해요. 또 설사 악연(惡緣)일지라도 좋은 인연으로 돌리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다 제 스스로 짓고 제 스스로 받는 것입니다. 잘 생긴 사람, 못 생긴 사람, 심지어 건강한 사람, 병약한 사람 등도 전생에 지은 대로 거둔 것이에요. 불조심을 하라고 강조하는데, 숲이 불에 타게 되면 숲속에 있는 온갖 가지 생물이 다 죽게 되지요. 무고한 중생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불낸 과보로 간질병을 앓게 되는 겁니다. 또 낚시질을 많이 하면 언챙이 과보를 받아요. 그런데 요샛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되는 대로 살아가며, 심지어 제 부모 형제까지도 외면하는 이들이 있는데 참으로 답답해요. 우리 불자들부터 인과법 인연법을 철저하게 믿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오로지 착하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 스님, 끝으로 불자들에게 한말씀 더 해주십시오.
"무엇보다도 육바라밀 실천으로 몸가짐 마음가짐 단도리를 잘해야 합니다. 첫째 보시, 물건과 마음, 부처님의 법을 남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이에요. 보시는 실인즉 다른 이에게 주는 게 아니라 자기복을 저축하는 것이에요. 모쪼록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고 부드럽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말을 해줘야 해요. 둘째 지계, 불살생 . 불투도 . 불망어 등의 계를 지켜야 해요.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어쩔 수 없이 모기나 파리를 죽일 때에도 '그 몸 벗고 극락가거라'하고 축원해 주는 게 불자의 도리지요. 셋째 인욕, 그저 어려운 일을 참고 또 참아 일체의 장애를 조복받아야 해요. 넷째 정진, 가나오나 염념히 부처님 생각하며 정진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을 드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정진하라시던 간곡한 부촉을 늘 생각하며 정진해야 합니다. 다섯째 고요히 선정에 들고, 여섯째 진리를 관하는 지혜를 깨달으면 제 몸 제대로 운전할 수 있게 되고, 제 몸 운전 잘하게 되면 다른 이들에게도 복덕(福德)을 운반해 줄 수 있고, 현대 사회의 온갖 병리 현상도 치유할 수 있습니다."
- 스님, 감사합니다.
대담 : 사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