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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 제 25장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
종말의 징조에 관한 예언을 통해 주의 재림의 확실성과 돌발성을 강조하신 주님은 이제 그 재림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 가지 비유로서 설명하셨다. 감람산 강화의 연속인 본장의 세 비유는 앞장의 세 비유를 보충하고 그 내용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양자 간에 유사한 점이 많다. 본장의 첫째 비유인 열 처녀 비유는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과 자세를 말하고,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는 재림을 준비하는 자의 구체적 삶의 열매를 말하며, 세 번째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는 재림으로 말미암는 심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이는 시간적 전개 방법인 점층법적 순서로 이어지고 있다.
세 비유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의 재림 때에 칭찬과 축복을 받을 무리들과, 저주와 멸망을 당할 무리로 뚜렷이 양분된다. 중요한 것은 징계 대상이 적극적으로 악을 일삼은 자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이루지 않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미련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으며,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 어둠에 쫓겨났고, 염소로 분리된 자들은 형제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영한 불에 던져지고 말았다.
1. 열 처녀 비유 (25:1-13절)
‘항상 깨어 있어 인자의 재림을 예비하라.’는 전장의 명령을 이어 받아 다시 역설한 비유이다. 따라서 이 비유는 앞에 나오는 두 비유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 비유가 24:42-44절에 ‘예기치 않은 때에 인자가 재림하실 것이니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고, 두 번째 비유에서는 24:45-51절에 ‘깨어 있는 수동적 자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시는 행동을 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제 세 번째 비유에서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때가 더딤에도 불구하고 주의 재림을 마땅히 예비하고 있어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의 재림은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유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날을 사모하고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등불을 밝히며 예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혼인은 삼 단계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진다.
첫째로, 정혼이다. 신랑의 아버지와 신부의 아버지 사이에 공식적인 합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둘째로, 약혼의 단계로서 이 때 약혼의 당사자들은 신부 측 집에 모여 여러 증인들 앞에서 서로 간에 서약을 하였으며 신랑은 신부에게 약혼 예물을 전달하였다.
세 번째로, 약혼 후 1년이 경과되면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이때에 신랑이 신부 집으로 찾아가서 신부의 집에서 종교 의식과 함께 여러 예식을 마치고 나서 신랑이 신부를 자신의 집으로 가두행렬을 하며 데리고 돌아왔다. 물론 신랑이 돌아올 때 사람들은 상당히 먼 거리까지 배웅한다. 공식적인 잔치는 신랑의 집에서 행하며 며칠 혹은 일주일 동안 진행된다. 물론 신부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는 신부의 집에서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신부의 들러리 처녀를 비유하여 마지막 재림 때에 있을 그리스도와 성도의 혼인잔치를 알리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은 신랑과 신부의 혼인 잔치로 이루어지며 이제 잔치가 끝나면 신부는 산랑을 따라 신랑의 집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 때에’라는 말은 인자가 오는 때, 즉 종말적 심판의 때이며 예수의 재림의 때이다. 예수께서는 재림의 양면적 성격을 이해시키기 위해 심판과 더불어 혼인 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신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접시 모양의 그릇 한 쪽에 둥근 심지를 담가 호롱불처럼 밝히는 기름 등을 가지고 다니는데 이 등을 기다란 막대기에 매달아 신랑을 맞으러 오는 행로를 밝혔다고 한다. 신부의 친구 열 명이 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그 중에 다섯 처녀는 슬기로운 처녀이고, 다섯 명의 처녀들은 미련한 처녀였다. 이들은 저녁 무렵부터 등을 들고 나가 신랑을 기다렸다. 그들은 혼인 잔치에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처녀의 숫자가 열 명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 ‘10’은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서 회당을 구성하는 최소의 인원이 10명이었으며, 종교 집회를 위해 필요한 정족수도 ‘10’이었다. 유대 풍속에서는 장례 행렬이나 결혼 행렬의 들러리로 반드시 10명의 인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열 처녀는 모든 시대에 예수를 신앙하는 모든 신자들을 가리킨다. 즉 예수의 재림을 대망하는 ‘기다리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항상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성도들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인 교회 안에도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있다는 것이다. ‘미련하다’라는 말 ‘모라이’는 ‘우둔하다.’ ‘얼빠지다’ 등의 의미로서 특별히 이 말이 먼저 언급된 것은 어리석은 처녀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슬기있다.’는 말 ‘프로니모이’는 지혜롭고 준비성과 분별력이 있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조절해 나갈 수 있으며, 매사에 신실한 사람을 말한다. 이 양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다를 것이 없으나 그 내면과 사실성 여부는 극명히 다른 것이다.
미련한 자들은 등은 가지되 기름은 가지지 않았는데 그들은 등잔에 기름이 있는 그대로 등을 들고 나갔으며 만약의 경우 등잔의 기름이 다 소진되어 등불이 꺼질 것을 대비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랑이 더디 올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정시에 올 것을 믿고 등불만 들고 나간 것이다.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만약 기름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등불이라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등불이 성도들의 외형적인 신앙생활이라고 한다면 ‘기름’은 그 신앙생활의 원초적 힘이 되는 능력인 것이다. 그렇다면 기름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생명력이 넘치는 것으로 성령 충만, 믿음 충만, 은혜 충만한 신앙생활로 생각할 수 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성경에서 ‘기름’은 주로 성령을 상징하는데 성령은 믿는 자를 중생하게 하시며, 믿는 자의 마음에 내주하셔서 가르치시고 변화시키는 충만한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 또한 성령은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며 찬양과 기도로 은혜를 받게 하신다. 성령은 믿지 않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며 전도하게 하시고 봉사하며 헌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분의 기름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성령의 체험조차 하지 못한 영적으로 무지한 신자, 즉 외형적 신자를 가리킨다. 형식적인 교회 출석, 외형적인 봉사활동을 하는 성도들은 믿음은 있으나 성령을 받지 못했으며, 성령의 체험조차 하지 못하여 에베소 교인들처럼 성령이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당시의 등불은 접시에 심지를 담가서 불을 붙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름이 담긴 용기가 아주 적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여분의 기름통에 기름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은 그들에게 계속해서 꺼지지 않고 불을 밝힐 수 있는 기름 준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의 신앙생활이 계속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 가졌던 믿음으로만 살아가는 성도는 미련한 처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서 등과 함께 가지고 갔는데 이들은 신랑이 혹시나 늦게 올 것을 대비하여 준비했던 것이다. 실로 행함이 없는 믿음이나 일회적인 은혜 체험, 그리고 영적 건강을 상실한 상태로는 예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늘 염두에 두면서 날마다 준비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자만이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5절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 새’라고 하였다. 24:48절에 ‘악한 종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했던 것처럼 심판주이신 예수의 재림이 늦어짐을 암시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이 제자들이 고대한 바와 같이 그렇게 신속히 오지 않을 것을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종말이 지연된다고 하여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거나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가 찰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려야 했던 것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와 해방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사대’가 지나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재림 역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고 택한 모든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과 슬기로운 처녀들은 다 졸았고 잠이 들었다. 이 표현은 종말이 지연됨에 따라 지치고 피곤함을 느낀 교회가 영적 어둠에 잠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랑을 기다리던 자가 졸거나 잠을 잘 만큼 종말이 지연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사탄의 역사가 더해지고 신령함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더욱 신앙생활을 견고히 해야 하는 것이다.
유대인의 혼례식은 주로 초저녁에 이루어지는데 오늘은 신랑이 도착할 시간이 훨씬 넘어 열 처녀가 기다리지 못해 잠이 들었고 시간은 한 밤중에 이르렀다. 마치 유월절 날 한 밤중에 주의 사자가 애굽의 장자를 치기 시작했으며 이 시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을 맞이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예수께서는 주의 재림의 시간을 도둑의 출입에 비유하여 주인이 알지 못하는 한 밤중에 온다고 하였다. 이는 종말의 때가 정점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 밤중에 소리가 났다는 말을 번역하면 ‘마침내 한 외침이 들려왔다.’는 것이다. 이 외침은 신랑 앞에서 계속해서 신랑의 발길을 안내했던 일단의 무리들이었다.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세례 요한과 같이 신랑의 오심을 신부 측에 알리고 마중하라는 즐거운 비명이었던 것이다. ‘보라 신랑이로다.’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했던 신랑의 출현인가. 그러나 이 급작스러운 소리의 외침을 당당히 맞이하는 처녀들이 있는가 하면 기름이 떨어져 앞이 보이지 않은 소란스러운 미련한 처녀들도 있다는 것이다. 인내와 대망의 기간은 끝나고 영원한 심판과 구원, 즉 상벌의 때가 시작된 것이다.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자만이 구원과 상급을 받고, 미련하고 악한 종은 심판과 형벌을 받게 되는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7절에 ‘다 일어나’라고 했는데 외형적으로는 처녀들이 다 잠에서 깨어나 신랑을 맞이할 채비를 했다. 교회 공동체는 졸음과 잠에서 깨어나 주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 시점까지는 아직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불을 다시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두 종류의 신부가 구분되는 것이다. ‘등을 준비한다.’고 하는 말은 지금껏 타고 있던 심지의 까맣게 된 부분을 잘라내고 심지를 다시 돋우며, 예비한 기름을 등잔에 붓고 정상적인 등불을 만드는 일이다. 마치 제사장들이 아침에 성소에 들어가 밤새 타버린 심지를 자르고 새 심지를 만들며 등잔에 기름을 채우는 과정과 동일하다. 이런 일들은 평소에 잘 훈련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는 손쉬운 작업이었으나 숙달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에게는 너무나 어렵고 또한 등잔에 부을 기름이 없어 등불이 꺼져가는 당혹스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심판의 때에 미련한 자들의 등불이 꺼져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꺼져간다’는 말 ‘스벤뉜타이’는 동작의 지속성을 나타내는 말로서 기름이 말라서 심지가 희뿌연 연기를 내며 꺼져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미련한 처녀의 영적 생명력의 고갈과 은혜의 결여, 말씀의 갈급함, 성령과의 단교, 등으로 그의 심령이 강퍅하게 되어가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로 에베소 교인들처럼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신자들이 많다는 데 문제가 있다. 세속의 문제 때문에 총명이 흐려지고, 적당주의 형식주의 신앙 때문에 영성이 메말라가며, 성령과의 단교 때문에 믿음이 사라져 다시 등불을 밝히려고 해도 은총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불이 꺼져가는 안타까운 장면에서 탈피하려고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기름을 꾸어달라고 하지만 이것은 정녕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과 은혜와 영성은 꾸어주고 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앞에서 심판의 평가는 자기 수고와 공로로 결정되는 것이지 남의 것을 빌려다가 대신 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들에게 기름이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이처럼 자기 영혼의 문제와 생명의 문제는 운명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게 되는데 이것이 미련한 자들의 특징인 것이다.
기름을 꾸어달라는 미련한 자들의 절박한 호소에 슬기로운 자들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이러한 거부 의사는 매정하고 인정이 없는 행위로 보이지만 결코 도덕적 평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슬기로운 자들이 기름을 여분으로 예비한 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며 그것을 나누거나 꾸어주게 되면 둘 다 부족하여서 아무도 신랑을 맞이할 수 없게 되고 신부의 혼인 잔치에 결정적인 피해를 입히게 되기 때문이다.
‘부족할까 하노니’라는 말은 이중적 부정어가 첨가되어 절대적인 거부 의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구원은 각각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은혜와 믿음에 의해 결정되며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 사람의 신앙이 다른 사람의 구원까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기름을 파는 자들’이란 상징적인 표현으로 구원의 진리인 말씀과,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가르치고 깨닫게 하는 모든 선지자들과 복음의 일꾼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름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름을 파는 자들에게 가서 사야 한다.
*사55: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실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는 마치 값진 보화를 얻기 위해 모든 희생을 감수하듯이 어떤 값을 지르고 나서도 얻는 것이다. 물론 부르심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지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것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의 성장이나 결실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두고 땀과 피를 흘리는 수고와 연단과 희생을 통하여 인내로서 감내해야 만이 성취되는 것이다.
기름이 없는 자들은 그제야 기름을 사러 갔는데 즉 신랑이 오는 바로 그 시간에 그 자리를 비우고 만 것이다. 또 이미 밤중이라 가게 문이 모두 닫혀 있어 기름을 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랑이 더디 올 것을 이미 예상하고 기름을 넉넉히 준비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갔다. 예수께서는 주가 언제 임할는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고 하셨는데 깨어 있다는 것은 주께서 더디 오실 것을 알고 미리 모든 준비를 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다리는 공동체인 교회는 그 궁극적 목적이 주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 쓰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면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 천국인 것이다.
혼인 잔치가 시작되면 손님의 안전을 위하여 주인은 대문은 닫는다. 한 번 닫힌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은데 이는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운명이 선고되었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이제부터는 기도와 회개의 눈물을 소용이 없으며 엄격한 심판만이 있을 뿐이다.
종말의 심판이 끝나고 문이 닫힌 후에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밖에서 ‘주여 주여’라고 불렀는데 ‘퀴리에 퀴리에’라는 이 말은 신앙 고백적 호칭이다. 예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이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7:21-22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미련한 자들이 닫힌 문 앞에서 아무리 화려하고 애잔한 신앙 고백을 하더라도 그들에게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애절하게 천국의 문을 열어달라고 부르짖는 자들에게 주님은 엄격하고 준엄한 심판의 말씀을 선고하셨다. ‘알지 못하노라.’라는 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가를 모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특별한 관계를 형성하거나 호의를 베풀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엄정한 선언인 것이다. 이 선언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선고와 같다.
이제 이 비유의 결론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 24:44절에는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영적으로 신령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육신적인 잠을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어 항상 성령 충만하고, 기도 충만하고, 말씀 충만하고,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면서 영혼을 사랑하고 모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항상 깨어 있어야 할 이유에 대해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결론적으로 천국은 준비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에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가를 항상 점검하고 채워나가며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날마다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달란트 비유 (25:14-30절)
앞서 나온 열 처녀 예화가 성도가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해야만 한다고 하는 성령 충만의 상태가 강조되었다고 한다면 본문은 그 은혜로운 상태가 적극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 결실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주인이 타국에서 돌아와 그 종들과 회계한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의 영성과 행실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는 시기가 필히 도래할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눅19:12-27절에 ‘왕위를 받기 위하여 다른 나라로 떠나는 귀인이다.’ 이는 아마도 헤롯 분봉왕이 책봉을 받기 위하여 로마에 간 사실을 비유했거나, 당시 부호들이 상업 차 멀리 떠난 사실을 근거했을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예수께서 승천하셨다가 이 땅에 다시 심판의 주로 오실 것을 묘사하고 있다. ‘종들’이라는 말 ‘둘로이’는 그 주인의 전적인 소유였으나 여기서는 하나의 인격적 차원에서 주인이 자기의 모든 소유를 믿고 맡기는 청지기 신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종들은 주의 승천 이래로 주의 교회를 책임질 복음의 사역자들, 즉 예수를 주로 모시고 주를 섬기는 교회의 신실한 사역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종들은 그 맡은 일에 대하여 상당한 권한과 책임이 있었다. ‘소유’라는 말은 재산이나 돈을 말하는 것으로 사업을 위하여 자본을 투자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들은 노력과 지혜로 많은 이윤을 남겨야 하고 그 모든 재물을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주님 앞에서 필연적으로 수고해야 하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각각 그 재능대로’라는 말은 ‘각자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따라’ 라는 의미인데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따라 적절하게 돈을 배분하였다. 이것은 불공평에 의한 공평의 원리를 실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반영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맡김을 받은 청지기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잘 관리해야 한다. 또한 저마다 고유의 인격과 역할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각각 소중하고 존귀한 것이다. 각 사람마다 개성과 창조적 능력은 다양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소중하고 독특한 것들이다. 따라서 무엇을 맡았든지 주인에 대한 충성과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한 달란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 노동자의 6,000일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적어도 5-6억 정도의 금액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섯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은 30억 정도의 사업 자금을 맡긴 셈이 된다. 그러나 이를 재능으로 비유하면 특별한 재능을 주신 것이다. 이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는데 이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두 달란트를 받은 종도 열심히 일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는데 두 사람 모두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장사를 하지 않고 모험을 두려워하여 안전 제일주의로 소심하게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 이 종은 주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고의로 그 재능을 묵혀 버린 것이다. 결국 그는 주인을 위한 적극적 봉사를 회피하고 등한히 하였다. 이 종은 상대적 빈곤 때문에 주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그 가치를 무시하여 사명을 방치해 버린 것이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왔다고 하는 것은 주의 재림이 곧 이루어지지 않음을 나타낸다. 주인은 종들을 불러 사역의 결과를 놓고 회계하였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에게 주인은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불렀다. 더 이상의 칭찬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극진한 주인의 칭송이다. 종의 지난날의 수고에 대한 주인의 다함이 없는 만족과 인정의 표시로 ‘잘 했다.’고 한 것이다. 주인은 ‘작은 일에 충성했다.’ 고 했는데 주인의 관심은 투자 이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충성하는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의 관심 역시 얼마나 큰일을 했고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일에 얼마나 진심으로 성실하게 일했는가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 대한 보상은 주인의 많은 것을 맡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많은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인의 많은 기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계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제 주인과 종 사이에는 신뢰감이 충만해졌는데 이 즐거움은 ‘천국 잔치의 즐거움’이며, 주인의 모습처럼 영화로운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즉 주의 영광에 참예하여 영원한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시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21:6 그가 영원토록 복을 받게 하시며 주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다. 이러한 보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심판주의 회계 기준은 은사와 능력의 크기에 있지 않고 그 맡은 바에 대한 성실성과 충성도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두 달란트를 맡은 자가 다섯 달란트를 맡은 자와 동일한 양의 상속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은 획일적인 평등주의가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능력과 충성이 모두 인정되는 성과급 차등주의인 것이다.
주인이 주관하는 회계의 현장에는 충성된 종이든지, 불충성한 종이든지 모두 다 나와서 주인과 정산해야 한다. 한 달란트 받은 종 역시 주인과 회계했는데 그에게는 한 달란트가 땅에 그대로 묻혀 있었다. 그 종은 자신의 불성실과 직무 유기에 대한 변명을 먼저 늘어놓았는데 자기변명에 급급하여 주인의 인격을 매도하는 더 큰 죄를 범하고 말았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이 말은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친 사람이라는 말이다. 즉 무서운 사람, 돈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를 두 가지 대었는데 하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는 사람’, 또 하나는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이다. 주인을 매우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는 광적이지만 투자하는 데는 인색하고 노동력을 착취하여 불로 소득을 얻는 파렴치한 인물로 묘사하는데 아마도 다른 두 종들보다는 훨씬 적은 양의 돈을 맡겨준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종은 주인이 탐욕이 많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비인간적인 사람인 것을 진즉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은 주인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무 엄격한 주인이기 때문에 혹시 실수라도 하여 본전을 돌려주지 못할 때에 받을 벌이 무서웠던 것이다. 이 종은 소심한 사람이며 용기가 부족하고 염려나 걱정이 앞서며 남에 대해서도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분별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인이 가장 작은 액수의 금액을 맡긴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의 실력대로 열심히 일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기 나름대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돈을 보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자기가 주인의 원금에 손해를 끼치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을 것도 없다는 주장이다. 즉 주인이 자기에게 맡겨준 것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잘못이 없다는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가지 착각한 것은 그는 주인의 종이라는 신분과, 그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은 그것을 성실히 활용하여 이윤을 남기라는 주인의 명령을 잊은 것이다. 소유를 맡길 때에는 그 소유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성실하게 애정을 가지고 일해야 했던 것이다.
주인의 일에 무익한 종에 대하여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불렀다. ‘악하다’는 말은 ‘무가치하다.’ ‘악독하다’라는 의미로 주인의 의도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무신경하고 자기 안일에만 심취하여 결국 주인에게 해를 끼치는 무익하고 무가치한 종이라는 말이다. 주인은 종이 한 말을 그대로 반문하면서 도리어 그 내용이 종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눅19:22 절에는 ‘네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라고 하여 ‘그렇게 악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라고 한 것이다. 즉 게으른 종은 자기변명에 모순이 있었다. 종의 말대로 주인이 그렇게 악한 사람이라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이윤을 불려야 했기 때문이다. 즉 은행에 장기적으로 돈을 맡겼다면 상당한 이윤이 발생했을 것이다.
주인은 종을 꾸짖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에게 상당한 물리적 징계를 내렸는데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주어진 보상에 극한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주인과 종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그 모습은 처참하게 된 것이다. 이를 영적으로 이해하면 자기에게 맡겨진 은사와 재능과 은혜를 성실하게 활용하지 않으면 그 주어진 것이 소멸될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타인을 부요하게 하며 자신은 고통이 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과 거룩한 사역은 인간의 불성실에 의해 훼손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악하고 게으른 자에게 주어졌던 사역은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되고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다.
*에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워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반대로, 주신 재능과 은사를 주를 위하여 활용하면 할수록 더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마무리 짓는 결론적인 말을 당시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격언을 사용하여 말씀하셨다.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을 현세대의 ‘빈익빈 부익부’의 경제 논리에 적용하여 ‘마태 현상’이라고 부르는데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종말적 심판에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정녕 영적 세계에서도 물질세계처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주인은 이 종을 ‘무익한 종’이라고 단정하고 그에 합당한 형벌을 내렸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나 짐승이나 그 수하들이 저지르는 악한 행위가 하나님께 패역한 죄가 되지만, 소극적으로 하나님께 은사를 받고 은혜를 받은 종이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역시 하나님 앞에 패역한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동일한 형벌을 받게 되는데 주인과 영영한 단절을 암시하는 바깥 어둠에 쫓겨나는 것이다. 그곳은 사탄의 세력이 거할 최종적 심판의 장소이며 영원한 흑암이 있는 곳이다. 그나마 주인의 덕택에 잠시 동안 빛에 거했던 종은 이제부터 거기서 영원토록 슬픔과 후회와 고통 속에 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빛의 세계, 진리의 세계, 자유의 세계에서 쫓겨나 흑암과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방황하며 고통할 것인데 이런 사람은 가룟 유다와 같이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나았을 것이다.
3. 양과 염소의 비유 (25:31-46절)
감람산 강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본문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주제로 하고 있다. 이 예언이 천국의 종말론적 도래를 다루는 예수의 마지막 강화의 결론이다.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거듭된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듯이 예수의 재림과 심판 또한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본문은 그것을 시사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심판의 주께서 최후의 순간 재림하실 때에는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시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재림의 모습을 장엄하고 화려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기 영광’이라는 말은 세상의 어떤 것도 신적 광채가 충만한 예수의 모습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주의 재림 때에는 천사들과 함께 오시는데 이는 주의 재림이 전우주적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심판주와 동시에 왕으로 오실 것을 제시하는 것이다. 왕은 자기 보좌에 앉는데 ‘보좌’는 하나님의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행사될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초림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한하여 이루어졌으나 그의 재림은 복음이 이미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에 유대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 미치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심판의 의미를 보여 주고 있으며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때에는 모든 인류를 주 앞에 모으는 일이 일어나는데 추수 일꾼인 천사의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계14:14-16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양과 염소는 낮에 풀을 뜯을 때는 무리에 구분이 없이 섞여 지내다가 밤이 되어 우리에 들어갈 때에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리하여 구별시킨다. 왜냐하면 양은 추위에 강하지만 염소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다른 우리가 필요한 것이다. 양은 털의 색깔이 희고 염소는 털의 색깔이 검다. 이 둘은 서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저희끼리 무리를 지으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밤이 되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각각 나누는 것이다.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의 무리는 왼편에 양분하여 심판의 명료성을 보여주는데 즉 중간 지대나 제 3의 자리는 없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에는 옳거나 틀린 것만 있으며 복 받는 자와 저주를 받는 자만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오른편과 왼편을 확실하게 구분하는데 오른편은 위엄과 영광과 존귀와 생명의 자리로 이해하고, 왼편은 저주와 사망, 미련함, 힘의 상실로 이해했다. 따라서 심판 때에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다는 말이 되고, 왼편에 선다는 것은 영영한 멸망에 떨어지게 됨을 나타낸다.
이제 심판의 주체가 인자에게서 임금으로 바뀌었는데 이는 인자와 임금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모든 민족의 통치권과 심판의 권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라는 표현은 인간에게 내리는 복은 복의 궁극적 시여자이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전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은 현세와 내세를 초월한 축복의 영속성을 보여준다. 이런 자들에게 내리는 복의 정체는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이다. 바울은 이 복에 대해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이미 계획되었던 것이다. 즉 하늘나라는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우리의 입국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속 받으라’는 말은 우리에게 당연히 물려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복 받는 자들이 하늘나라 상속권을 소유한 까닭은 그들이 평소에 왕의 가난한 형제들을 진심으로 섬겼기 때문이었다.
*사58:6-7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에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이 섬김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들의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순결한 믿음, 참된 신앙만이 표출할 수 있는 선행인 것이다. 이는 자신들의 선행을 상기시키는 왕의 대답에 놀라움을 표시하는 의인들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의인들의 선행은 총 6가지였는데 35절에 제시된 세 종류의 선행은 율법적 의무 조항에 근거한 선행이며, 36절에 제시된 세 가지 선행은 율법의 의무 조항을 넘어 자원적이고 헌신적인 섬김을 강조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의식주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많은 질병과 억울한 누명과 과중한 채무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어려웠다.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중에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옥에 갇힌 자를 방문하는 것은 복음 시대 기간에 공적인 핍박을 받을 수 있음을 은영 중에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그들에게 한 선행이 곧 자기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자가 임금으로 호칭이 바뀌었듯이 복 받은 사람들의 호칭이 의인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고난 받는 자들에게 선행을 베푼 사람을 의인이라 선언하고 있는데 ‘의인들’이란 그 생활에 있어서 철저히 이타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이 땅에서의 자기만족과 온갖 고초를 이겨내고 끝내 선행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장식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칭의’에 대한 선언은 재판장이신 그리스도의 주권적 선언일 뿐 그 사람의 인격이 절대 순결하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 의인들은 임금이 조목조목 나열한 항목을 똑 같이 반복하여 질문함으로써 자신의 선행을 부인했으며 상급을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최대의 겸손한 자세를 취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형식주의 신앙을 하는 사람에게는 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호와 경외의 가장 기본이 되는 형제 사랑을 도외시한 채 외식하며 겉치레적인 신앙을 하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여러 기회를 통해 격렬하게 비판하셨다. 결국 본문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마음가짐을 제시하신 것이다.
임금은 대답하기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고 하셨다. ‘내 형제’라는 말 ‘아델포스’는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그 형제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라는 말은 축소 지향적인 묘사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 라는 최소 숫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가장 작은 자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가장 큰 자에게 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실천이며 이웃 사랑에 그 진수가 있는 것이다.
‘내게 한 것이니라.’ 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가장 소외 받고 궁핍하며 고통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자신을 일치시켜 그들과 강한 연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의 영광 보좌를 버리시고 친히 성육신 하셔서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고뇌에 동참하셨다. 또한 전 생애를 인간의 연약의 한계 아래 머무시고 그 속에서 모든 아픔을 다 맛보신 것이다.
이어서 왼편에 앉은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아’라고 하심으로 ‘복 받은 자들아’와 대칭을 이룬다. ‘나를 떠나라’는 말은 예수와 단절을 의미하는데 저주 받은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어둠에 쫓겨나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과 영영한 단절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의로운 자들을 위해서는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했지만 저들은 사탄과 마귀들을 위하여 예비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영영한 불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형벌을 선고 받고 실형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이곳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철저히 분리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그 고통의 정도는 최고치에 이를 것이다.
왼편에 있는 저주받은 자들이 정죄 받는 이유는 ‘아니 하였고’이다. 이를 다섯 번이나 반복했는데 악한 일을 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 것이다.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남에게 비록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할지라도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로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성도에게 태만과 무관심은 크나큰 죄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적극적으로 불쌍한 이웃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고통하는 때가 이르게 되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게 된다.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신자라 할지라도 결국 바깥 어둠의 세상에 쫓겨날 것이며 영영한 불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44절에 저주를 받은 자들은 자기들이 왜 저주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선행을 한 양들이 자신들의 선행을 잊어버렸듯이 선행을 하지 않은 자들도 이웃에게 무정과 무관심을 나타내지 못했던 일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3가지로 질문한다.
첫째, 자기들의 기억으로는 주를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주를 공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둘째, 심판의 주 이신 임금님께서 어떻게 굶주리고, 나그네 되고, 목마르고, 옥에 갇히고, 고난 받는 자와 동일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셋째, 양들이 마지막 날에 상급을 받기 위해 가나한 자들, 소자들에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염소들도 마지막 날에 보응 받는 것을 멸시해서 형제들에게 무관심하고 무정하게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약 형제들에게 대하는 태도 여하에 따라 영생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자기들도 예수의 형제들에게 온정과 사랑으로 대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즉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예수께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다. 실로 소외받는 자, 고난 받는 자, 가난한 자에게 무심한 자는 그들의 형제이신 예수를 무시하고 그의 뜻을 짓밟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내리는 형벌은 영벌이었다. ‘콜라신 아이오니온’이라는 말은 ‘영원한 징벌’을 뜻한다. 즉 최후 심판으로서 형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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