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스테파노 할아버지
글/ 김웅렬 신부
지금은 전국의 나병 환자 마을이 많이 없어졌지만,
제일 유명한 곳이 소록도이죠?
저는 신학교 두 방학을 소록도에서 보냈어요
큰 가방 하나를 들고 소록도의 비탈진 길을 오르는데,
처음에는 정말 개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팔다리가
하나도 없는 나병 환자 였어요. 배에 타이어 반으로
자른 것 대고 팔꿈치로 기어가고 있는 거였어요.
‘아저씨 어디 가세요?" 하며 얼굴을 보니 더 흉칙했어요.
구멍만 뻥뻥! 코도 없어진 지가 오래 되었죠.
저 위에 성당에 기도하러 가신대요.
목에는 묵주를 감고 계셨죠.
그래서 ‘아저씨,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안아 드리면
안될까요? 전 신학생입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오늘 천사를 만났다고 고마워 하셨어요.
다른 사람은 5분이면 갈 거리를 이분은 지렁이처럼
기어가니 3-40분이 걸렸죠. 게다가 비탈길에 눈이 오면 열심히
올라가다 배에 있는 타이어가 죽 미끄러지고...
그 분 성함이 스테파노 셨어요.
산 중턱에 공소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죠.
어느날 저도 기도하러 그 공소를 들어 가려는데,
공소 밖에서 스테파노 할아버지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할아버지, 왜 못 들어 가셨어요?’
세상에, 문고리를 열 손이 있어야 문고리를 열죠.
다른 때 같으면 머리로 몇 번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대요.그런데 그 날은 너무 추워서
기도하는 사람이 없었던 거죠.
그 닫힌 문을 머리로 열려고 하다 머리가
터져 얼어 붙은 거예요. 그래서 밖에서
여기가 1처겠다, 2처겠다 하면서
혼자 배로 기면서 14처를 하고 계셨어요.
‘아이구, 아저씨 저랑 같이 해요.’
정말 아기 몸뿐이 안 되는 아저씨를 품에 안고
함께 14처를 했지요.
나중에 제가 신부가 되고 어느 날 소록도에 계시는
수녀님 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스테파노 할아버지 아시죠?’‘
네, 잘 알죠.’
‘지금 위독하신데 자꾸 신부님을 찾으시는데
오실수 있으실까요?’
밤에 차를 몰아 소록도까지 갔어요.
‘할아버지 눈 떠보세요. 저 왔어요.
왜 빨리 천당 못가시고 힘들게 계세요.
이제 가셔도 되요.’
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어보고 싶으신 게 있대요.
‘신부님, 저는 평생 이 몸뚱아리만 가지고 살았어요.
소록도 바위에서 자살도 5번이나 시도했는데
모진 목숨이라 하느님이 살려주셨지.
난 주님을 안 후 몸 성한 사람이 부럽지 않았어.’
그런데 부러운 것이 손가락 두 개만 있어서,
내 손으로 묵주 한 번 굴려 보았으면!
그 분은 팔꿈치에 고무줄을 걸고
거기에 나무를 입으로 끼어, 땅바닥에 묵주를 펼쳐 놓고
하나하나 집어가면서 기도하셨죠.
자기는 손가락 5개도 필요 없대요,
하나는 걸고 하나는 돌리는
손가락 2개만 있으면 족하대요.
그러면서 ‘신부님, 나 죽으면
청년 시절처럼 부활시켜 주실까요?
천국에서는 내 손가락으로 묵주 기도 할 수 있을까요?
신부님 입을 통해 확인 받고 싶어 못죽고 있어요.
’‘암, 그럼요, 깨끗한 몸으로 바꿔 주실 거예요.’
언제가 그 분의 빛바랜 사진을 보았는데
정말 잘생기고 준수한 청년이었어요.
할아버지는 ‘그럼 안심하고 가겠습니다.’
마지막 강복을 받고 스테파노 할아버지는
제 품 안에서 아이가 잠자듯 숨을 거두셨죠.
일주일이 지났을까?
제가 꿈을 꾸는데 꽃밭 한 가운데 있었어요.
순간적으로 여기가 천국이구나 생각했죠.
별의별 꽃이 다 있었어요.
그런데 저 쪽에서 누가 막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오는 거예요.
가까이 올수록 어디서 뵌 분인데?
다시 보니 그 흑백사진에
스테파노 할아버지의 젊었을 때 모습인 거예요.
손가락마다 묵주를 칭칭 감고 나를 끌어 안으면서
‘신부님, 손가락이 10개 생겼어요.’
여러분들 꿈에서 울어본 적이 있으세요?
그 양반을 끌어안고
'성모님 우리 아저씨에게 손가락을 10개나 주셨네!
이제는 아저씨 손가락으로 묵주기도 드릴 수 있겠네!‘
이분은 하느님을 체험하고 난 다음
숨이 끊어질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별만을 바라보면서 한눈 팔지 않고,
비록 몸뚱이는 짐승 같고 배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처참한 몰골 이었지만, 그 분은 성인 이셨어요.
제가 이 세상 살면서 존경하는 분 중 한 분이
바로 스테파노 할아버지예요.
나도 저분의 신앙 백분의 일이라도 닮자,
그러면 나도 성인 사제가 될 수 있다
여러분들 묵주 알을 굴릴 수 있는 손이 없으십니까?
성당 문턱을 넘어 설수 있는 발이 없으십니까?
얼마나 여러분들이 은총 가운데 부자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짊어진 등의 짐은 포기할 수도 벼릴수도 없습니다.
끝까지 용기 잃지 마시고 희망을 갖고 정진 하시면
언젠가는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낡은 묵주 한개
- 마종기 -
나는 중학시절부터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를 좋아했다.
...마지막 한 잎이 남아 있는 그날 저녁에는
초겨울의 진눈깨비가 바람에 날리며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마지막 잎새가
틀림없이 바람에 날아가 버렸으리라고 생각하고 밖을 내다본 '존시'는
그 마지막 잎새가 아직도 가지에 달려 있는 것을 본다.
그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추위와 바람에 날려가지 않는 강인한 잎새를 보면서
사경을 헤매던 존시는 생의 의욕을 느끼고
그때부터 극적으로 기력을 회복하여 건강을 완전히 되찾는다.
존시가 완쾌되던 날, 늙은 '벌만'은 죽음을 맞이한다.
바로 진눈깨비가 내리던 그날 밤새,
'벌만'이 사다리 위에서 추위를 무릅쓰며 일생 일대의 그림,
바람에 날려가지 않는 담쟁이 잎새 한개를 벽돌담에 그리고
그날 이후 병을 얻어 외롭게 죽게 된다는 이야기.
소설 속의 '벌만'. 그는 실패한 화가가 아니고
작품 하나로 젊은 사람의 생명을 살려낸 위대한 화가이다.
아,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예술가라니!
나도 시인이 된다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시를 쓸 수 있을까 고민하던 고등학생 시절,
나는 결국 그런 엄청난 시인이 될 수 없을 것 같아
엉뚱하게 의사가 되어 평생을 지냈다.
그리고 그간 부끄럽지만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생명을 구하는 자리에서도 작은 역할을 했던 기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거의 40년이 된 내 의사생활은 파란만장한 온갖 경험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몇 해 전 좀 이른 은퇴를 할 즈음에 일어난 일은
아직도 가슴에 훈훈히 남아 있다.
내 은퇴 소식이 주위에 알려지자
여기 저기서 다투어 은퇴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 부산한 와중의 하루, 내가 일하는 병원의 홍보실장이 달려와
세계적인 패션 모델과 그 가족이
나를 만나러 내일 비행기를 타고 온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오후,
그 유명하다는 모델을 보겠다고 몰려온 병원 사람들과
조명을 밝힌 이 도시의 3대 텔레비전 방송사 관계자들로 북적거리는 복도에
병원장의 인도를 받으며 그 모델이 들어섰고,
모델은 멋쩍게 서 있는 내게 반갑다며 껴안고 키스를 했다.
그리고 내 팔을 꼭 낀 채 기자들에게 자기가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열 살 때 입맛이 없고 자주 미열에 시달리며 등이 아팠다.
여러 명의 의사에게 진찰도 받고 약도 먹고 여러 검사를 했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고 의사마다 진단이 달라 무슨 병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있는 이모가 닥터 마를 소개해 주었다.
닥터 마는 자기 환자도 아닌데 귀찮아하지 않고
여러 검사 결과를 살펴보고는 몇 마디 묻더니
희귀한 백혈병이 틀림 없다며
당장 큰 도시에 있는 백혈병 전문병원에 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우리는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혼비백산해 사무실을 나가려는데
닥터 마가 무엇인가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었다. 바로 이것이다."
그러더니 그 모델은 자기 가방에서 낡은 묵주 한 개를
소중하게 꺼내 들어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후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병원에서는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가망이 없었다며
어떻게 이렇게 일찍 희귀한 종류의 백혈병을 진단했는지 신기해했다.
결국 우리 식구는 닥터 마 때문에 살아나게 된 것을 다시 확인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이 묵주는 다시 돌려줄 수 없다.
이 묵주는 내가 평생 가지고 살 것이다.
잃어버리지 않고 묵주기도를 자주하며 늘 감사하며 살겠다."
그 소녀의 병명을 정확하고 자신있게 진단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내 실력이었다기보다는 그 바로 며칠 전,
희귀한 소견에 대한 최신 논문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를 우연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또 내가 늘 지니고 다니던 묵주를 그때 병마에 시달리던
그 소녀에게 정신없이 건네주었던 것도 그냥 우연만이었을까?
이제 나는 의사 일에서 은퇴하고
다시 어릴 때의 희망대로 시를 열심히 쓰려고 한다.
내 시로 감히 생명을 구하지는 못하겠지만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용기를 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는가.
마종기/시인. 재미의사 / 야곱의 우물 '07-1월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