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의 항일(抗日) 독립 운동가 서영해를 아시나요?
미국에는 이승만, 중국에는 김구, 당연히 알지요. 그런데 유럽에는 서영해라니?
서영해(徐嶺海), 1902년 1월 13일 부산 초량에서 부산 3대 명의로 손꼽이던 한약방 아버지 서석주와 어머니 김채봉의 8남2녀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본명은 희수(羲洙)이다.
집 부근에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 쉽게 중국어 일어를 익혔다. 1916년에 부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학업을 쌓던 중, 1919년 3.1만세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본경찰에 쫓기게 된 17세의 소년은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싣고 중국으로 독립운동의 머나먼 장정에 올랐다. 이때부터 한 편의 대하 드라마같은 그의 일대기가 시작된다.
혈혈단신 프랑스로
이미 일어와 중국어 실력이 상당하던 소년은 중국으로 몸을 피한 후 상해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가 김구, 김규식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때 본명인 희수(羲洙)대신 태산준령(泰山峻嶺)의 더높은 기개를 품고 깊은 바다로 흘러가듯 결연한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다는 결의를 다지며 영해(嶺海)로 개명하고 김규식,조소앙등 임정요인들의 기대와 격려속에 1920년 12월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파리가 국제 외교 무대의 중심으로 임시정부에서는 불어를 할 수 있는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젊고 똑똑한 서영해에게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초등 중등 고등학교까지 10년이 걸리는 정규교육 과정을 단 6년만에 수료하고 소로본느 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그 사이 프랑스인보다 더 불어를 잘하고, 독일인보다 더 독어를 잘 한, 스페인어까지 7개 국어에 능통한 천재소년은 고국의 부친의 사망으로 후원이 끊겨 대학을 중퇴한다. 생업전선에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1929년에 파리에서 고려통신사(Agence Korea)를 설립하여 임시정부의 유럽 지부장으로,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역과 아프리카에 까지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약탈 압제를 알리고 한국의 독립을 도와 달라고 호소하였다.
1924년, 그가 프랑스의 보베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 역사시간에 프랑스인 교사가 일제의 선전만 믿고 “6백만에 이르는 한국인들은 천성이 게을러 조상이 전해준 문화유산을 지키지 못해 지금은 나라도 잃고 문화유산도 형체가 없다”라고 강의하자 책을 집어 던지며 항의하다가 퇴학의 위기를 맞았다. 교장은 서영해에게 “학교를 계속 다닐려면 한국이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 했고 서영해는 넉달동안 도서관에 파묻혀 한국역사를 공부한 후 교장과 전체 교사 학생들 앞에서 2시간에 걸쳐 한국의 역사와 문화, 일제의 한국문화 말살 정책에 대해 열변을 토하자 감동한 교장이 교과서의 오류를 인정하고 장학생으로 학교를 무사히 다니게 하였다. 이때 일을 계기로 서영해는 한국의 역사 문화와 독립 의지를 유럽에 알리는 것이 한국독립를 위한 길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과 파리에서의 항일운동
파리는 1800년대부터 이미 일본에 호감을 갖고 일본풍에 젖어잇던 친 일본 도시였다. 당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처럼 프랑스도 베트남 알제리등을 식민지로 통치하던 때라 동병상련의 처지랄까. 어쨌던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는 한국 역사 문화에 대한 왜곡을 집요하게 유럽에서 선전했다. 그들은 한국은 독창적인 역사와 문화가 없는 중국의 오랜 속방으로, 근대에 와서 일본의 지배를 받으면서 비로소 문명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고 왜곡했다. 서영해는 그런 현지에서 한국을 알리기 위해, 중학교 역사시간에 열변을 토했던 그 원고를 기초로 1929년 프랑스어로 소설 [어느 한국인의 삶]을 썼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한국인이 쓴 최초의 불어소설이란 평가를 받은 이 소설은 1년 만에 5판을 찍을 만큼 베스트 셀러였고 프랑스 대통령과 국제연맹 총재, 주불 각 국의 외교 사절들에게 헌정하였다. 1부에서는 단군조선부터 한일합방까지 우리의 역사와 문명을 알기쉽게 기술하고, 2부에서는 한국의 전통문화 전설 우화 족보등을 소개하였고 3부에서는 본인을 모델로 한 주인공의 항일의거와 3.1운동, 국내외 항일운동, 제암리 학살등의 주요사건을 소설형식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극동에 위치한 어떤 나라의 전설적 역사를 간략히 개괄해 보려 한다. 이 나라의 역사는 매우 독창적이며 무척 흥미롭다>로 시작한다. 말미에는 3.1독립선언서를 불어로 번역하여 실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는다. “이 세상에서 정의란 말은 더 이상 없다. 정의란 마땅히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세상을 비치던 빛이 갑자기 꺼지고 말았다. 모름지기 문명국가들은 일본의 범죄행위를 처벌하고 응징해야 한다. 약소민족을 억압하는 일본을 규탄해야 한다”
이 책은 프랑스 뿐 아니라 스페인 스위스 벨기에 등에도 한국 독립운동의 진실을 알리는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재불 번역가인 김성혜씨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100년 전의 문장이 아니라 현대 프랑스어처럼 구사하는 어휘가 품격이 있다. 특히 한국 시골 풍경을 묘사한 장면들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본 것처럼 우아한 정취가 묻어난다. 문장이나 어휘 표현 모든 것이 경탄을 자아내듯 완벽했다. 그러나 더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책에서 끝없이 묻어나는 조국에 대한 사랑과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이었다”고 평했다.
장석홍 국민대 교수는 이 책 번역본의 해설에서 “서영해선생은 고유한 문명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독립의 정당성을 내세우려 했다. 때문에 이 책은 훌륭한 문학서일 뿐만 아니라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 및 홍보책자와 같다.” 라고 했다.
[거울, 불행의 원인]과 [구두장수의 딸]이라는 소설도 썼다. 일제가 말살하려던 한국의 민담 구전 전설등의 민족 고유문화를 유럽에 소개한 내용의 책이다.
1929년, 그가 17세에 부산을 떠난지 10년 되는 해,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반 제국주의 대회>가 열렸다. 전 세계의 국가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모인 국제회의장에서 서영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유창한 불어 영어 스페인어로 조선의 독립문제를 주 의제로 상정시키는 대활약을 하였다. 이 활약상을 본 프랑스의 <르 쁘티 주르날>이란 잡지의 기자가 서영해를 인터뷰했다. “서영해는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가느다란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수줍은 중학생 같은 인상이었다. 그러나 한국을 말하기 시작하자 단연 그의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활기를 띄고 얼굴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열정적인 웅변가의 모습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의 고통과 수난의 이야기를 엮어 나갔다”고 전했다. 이 기자는 서영해의 인생사를 소개하며 “한국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들”이라고 기사를 끝맺었다.
1932년 중국 상해 흥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사건과 관련되어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도산 안창호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임시정부는 서영해에게 이 사실을 즉각 통보하여 유럽에서 도산의 석방을 위해 교섭에 나서라고 지시했다. 그는 그 해 5월 12일자 프랑스 언론에 배포한 호소문인 [유럽의 자유 양심에 고함(APPEL A LA CONSCIENCE LIBRE DE LEUROPE)]을 통하여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안창호가 체포되었음에도 프랑스가 이를 방관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의 수치라고 비판하므로서 안창호의 석방을 의한 투쟁에 나서 프랑스 사회는 물론 전 유럽에 경종을 울렸다.
그는 임시정부 주불대표인 외교관으로서,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프랑스뿐만 아니라 벨기에 제네바 스페인등 유럽 전역과 중동의 이집트,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까지 활동영역을 넓히고 유럽의 지식인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임시정부와 독립의지를 전파하는데 진력하였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과도 인연이 깊다. 1933년 이승만이 임정 전권대사로 스위스의 제네바에 파견되어 국제연맹 본부에 대한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5개월간 머무를 때 서영해는 그와 숙식을 함께하며 그를 지원했다. 심지어 이승만과 프란체스카여사와의 연애편지를 배달해 주기도 하고 나중에 결혼식에 들러리를 설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지만 이승만의 독선적인 독립운동 방향에 대하여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중국침략은 세계평화에 대한 위협이다”라는 글을 통해 베를린. 로마. 도꾜의 삼각 축 동맹을 설명하면서 2차 세계대전을 예견하자마자 나치 독일의 유럽 침공이 시작되었다.
그는 한국의 독립 문제가 세계 평화와 함께 이루어 질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유.평화에 기초한 인도주의를 굳게 신뢰한 독립 운동가였다.
첫 결혼.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서 엘리자를 만나다.
대부분 한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분들이 그렇듯이 서영해도 변변한 가정생활을 해보지 못했다.
서영해는 1937년 파리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유학 온 엘리자벳 C 브라우어(엘리자)를 만나 결혼하여 한국의 독립운동가와 오스트리아 여성 예술가의 사랑으로 나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불과 2년을 채우지 못하고 생이별로 귀결된다. 임신한 엘리제가 출산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떠난 뒤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합병되어 둘은 이후 만날수가 없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파리의 일본 대사관의 밀고로 나치에 6개월간 구금되었다가 겨우 풀려나지만 한국출신 항일 독립운동가에 대한 나치의 감시는 집요했다. 이후 한국인으로서 3년 넘게 프랑스의 독립운동이라 할수 있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여 나치군과 숱한 전쟁을 치르는 등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 때도 아내와 아들을 만날 희망을 품었지만 해방된 프랑스에서 들려 온 소식은 엘리자가 남편을 찿지 못하자 다른 남자와 재혼했단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헤어질 당시 엘리자의 배 속에 있던 그의 아들 스테판 왕이 후에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아 비엔나에 살고 있다. 그 딸이 최근 보훈처의 초청으로 할아버지의 고향 부산을 방문한 바 있다.
서영해는 1945년 5월 독일이 마침내 항복했을 때도 김구 임정 주석이 드골 프랑스 임시정부 대통령에게 프랑스 해방 축하전문을 보내고 드골의 답신을 받을 때도 중심적 역할을 했다.
마침내 귀국하지만
서영해는 해방된 조국에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1947년에야 돌아왔다. 이십 팔년을 유럽에서 독립운동을 한 그를 해방된 조국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다.
그가 파리에 머물 당시의 1940년 8월 1일자 <신한민보>에 <고려통신사의 외치는 소리>라는 칼럼에 그는 이렇게 썼다.
“우리의 혁명 동지들아! 우리가 나라를 잃고 왜놈의 총칼 밑에서 고통받고 있는 지가 벌써 30년이 되었다. 혁명 경험이 적고 정치훈련이 없던 만큼 우리는 3.1운동 이후로 자상어육의 당파 싸움으로 원통한 실패를 얼마나 거듭하였더냐! 나라가 있고 난 뒤에야 주의와 당도 뜻이 있을 것이니 제발 당파 싸움을 그치자”.
그러나 그가 돌아 온 해방된 조국은 이승만과 김구로 나눠지고 좌와 우가 서로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에 들어와 보니 내가 파리의 일본 대사관에서 박해를 당하여 피해 다닐 때 나를 밀고하고 조선민족을 부인하던 그러한 종류의 인물들이 공공연하게 돌아 다니는 것과 정신을 잃은 허깨비같은 정치객들이 많은 것에는 눈에 쌍심지가 날 지경이었다”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그는 임시정부와의 인연으로 김구쪽 사람으로 분류되어 평양 남북협상에 통신사 기자자격으로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이승만으로 부터 대우를 받지 못한 어정쩡한 위치에서 당시 한국정치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그의 탁월한 유럽에 관한 지식과 어학 실력으로 연희전문(연세대) 이화여전(이화여대) 경성여자의대(고려대 의대 전신)등에서 불어교수로 활동하며 일본인이 만든 불어교과서를 불태우고 한국최초의 불어교과서를 직접 간행하기도 했다.
두 번째 결혼, 그리고 또 하나의 영원한 이별
이런 와중에 서영해는 1948년 3월 24일 동경 가정전문대를 나와 경남여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26세의 재원 황순조와 백년가약을 맺는다. 부부는 서울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학교 강의와 강연등으로 바쁘면서도 행복한 신혼의 단 꿈을 잠깐 맛보기도 하였지만, 김구선생이 암살되고 남과 북에 각각 다른 성격의 정부가 들어서자, 1948년 10월 그는 부인과 같이 한국을 떠나 유럽으로 가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 갔다. 중국에서 프랑스행 여권을 준비하던 중에 장개석이 대만으로 밀려나고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에 의해 중공이 들어서면서 출국이 금지되어 사랑하는 황순조와 결혼 1년만에 또 헤어지게 된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천명과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오, 그래서 오늘같은 안타까움도 웃어 넘길만큼 행복하게 살아 봅시다”
다시 만날 그날을 기약하며 상해 부둣가에서 연락선에 태워서 황순조를 한국으로 떠나 보내고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을 테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서영해는 그 이후 행적이 묘연하였다가 올 해 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개최된 서영해의 전기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 출판 기념회 자리에서 서영해와 첫 부인 엘리자의 손녀인 수지왕에 의해 그의 조부가 중국 상해에서 교사로 있다가 문화대혁명때 구금된 이후 행방불명 되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사랑하던 두번 째 부인 황순조는 1952년에 부산 제일여고 교사로 복직한 후 경남여고 교장, 부산교육청 장학사등을 역임하고 부산의 여성교육자로서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남편 서영해를 기다리다 1985년 63세의 나이에 암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는 남편 서영해로부터 받은 사진과 프랑스에서의 각종 기록 문서들을 다행히 경남여고에 보관하였다가 최근 그녀의 후배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어 그나마 서영해의 편린들을 대할 수 있었다.
90년만에 세상에 드러나다.
서영해는 오랜 기간 국내가 아닌 먼 유럽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국내 활동기록이 극히 적고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도 있듯 그는 해방후의 정국속에 이승만을 따르지 않고 김구선생 노선이었던 점 때문에 그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묻혀버린 안타까움이 있다. 한 평생을 낯선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였지만 개인적으로도 단란하고 행복한 가족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불운한 분이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파리에서 반 파쇼운동에 가담하고 현지 레지스탕스들과 함께 나치와 싸우면서 조선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한 사람의 한국인, 언론으로 소설로 유창한 현지어로 조선독립을 외치던 고독한 엘리트 독립투사 부산 출신 서영해, 사람들은 친일 안익태는 기억하면서도 서영해를 잘 몰랐다.
이렇게 잘 알려지지 않은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가 최근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정상천 박사의 책 때문이다. 정상천 박사는 경북대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 프랑스 파리 제1대학(팡테옹소르본느)에서 역사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외교통상부에서 15년간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한.프랑스 관계 연구에 매진하던 중에 프랑스의 외교부 문서창고에서 서영해에 관한 기록물을 발견하고, 파리의 언론사 문서고, 도서관, 그가 다녔던 학교등을 뒤져 먼지에 뒤덮혀 숨어 있던 서영해의 흔적들을 찿아냈다. 서영해가 임시정부에 보낸 보고서, 학교 생활기록부, 임시정부에서 내려 보낸 지시문, 그의 작품들, 기고문, 연설문, 반나치 반파쇼 투쟁기록등 그의 독립투쟁의 생생한 활동상들을 처음 접한 정박사는 뛰는 가슴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흥분하였다. 정상천 박사는 그 자료들을 정성스럽게 정리하여 2019년 2월 한권의 책으로 출판하여 비로소 세상에 서영해를 알려지게 하였다. 공무원이면서도 서영해를 현대사회로 이끌어 내 준 고마운 분이다. 한국 국사 편찬 위원회는 <미주에는 이승만, 중국에 김구, 유럽에는 서영해>라고 이승만 김구와 같은 레벨의 독립 운동가로 높게 평가하였고 정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 운동사 연구자인 장석홍 국민대 교수는 “서영해는 프랑스는 물론 스페인 스위스 벨기에등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정작 그의 삶은 오랬동안 신비에 쌓인채 가려져 있었다. 그는 독립운동의 불모지였던 유럽에서 20여년간 독립운동에 몸바친 주역, 마치 삼국지에서 단기필마로 조조의 대군과 맞서 싸웠던 조자룡에 비유할 만한 독립 운동가”라 하면서 “자유. 평화 사상에 바탕을 둔 그의 독립운동은 외롭고 힘든 가시밭길이었지만, 그 자취는 한국 독립 운동사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 차원에서도 꼭 기억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2019년 2월 재 프랑스 독립운동사학자 이창규(파리 제 7대학교 한국사 박사과정)씨와 리베라산 교수는 파리 근교의 프랑스 경찰 문서 보관소에서 1936년 프랑스 정보경찰이 작성한 서영해 사찰문건을 찾았다고 17일자 연합뉴스에 밝혔다. 파란 잉크로 선명히 타이핑된 이 문서에는 서영해의 출생사항(부산출신의 독신 한국인,) 프랑스 입국시점(1920년12월 13일), 프랑스에서의 학창생활, 대학에서 공부한 내용(언론학 학위취득), 언론, 정치활동, 유럽의 각 진보적 단체와 언론사와의 연대, 반파쇼 레지스탕스 활동, 임시정부와의 관계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서영해의 항일 독립운동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게 된 것은 큰 다행이라 할 것이다. 아마도 당시 일본대사관의 요청으로 프랑스 경찰이 서영해를 사찰한 것으로 보이나 사찰내용은 프랑스 경찰이 서영해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다.
역사는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하여 줄 때 진정한 역사는 현재속에 살아 숨쉰다. 숨쉬는 역사가 되었을 때 그 사회는 발전하여 나간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서영해선생이 제시하고 있다.
_ 광복 74주년에 정상천 박사의 <파리의 독립운동가 서영해>를 읽다_
판서공파 한내문중 서용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