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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우리끼리는
황 순 원
마음을 다져 먹고 알코올빙(Alcolbing)이란 약을 사왔다. 알코올이란 발음이 첫머리에 붙었다고 해서 성급하게, 하아 술꾼이라 주독 푸는 약을 써 가며 술을 마시려는 모양이구나, 하고 속단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천만에. 알코올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사실은 안티 알코올, 즉 금주에 사용하는 약인 것이다. 이 얼마나 갸륵한 일인고.
돌이켜 보면 실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을 술로 허비해 버렸다. 끈덕지게도 매일같이 마셔 온 술.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정종 한 홉을 배급받아 마시기 위해 술집 앞에 줄서 기다려야 했을 때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아마 애인과의 데이트도 이처럼 성실치는 못했으리라. 오후 다섯 시에야 술집문이 열리는데 적어도 반 시간 이상 먼저 가 기다리곤 했다. 줄 앞 자리에 서게 되면 잔을 받아 술맛을 즐기고 어쩌고 할 새도 없이 후딱 들이켜고는 다시 줄 뒤꽁무니에 대어 선다. 운수가 좋으면 한 잔 더 얻어먹는 수도 있다. 차례가 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형편이면 사람이 덜 서 있는 다른 술집으로 달려가야 한다. 그 추접스러운 꼴이라니. 이렇듯 술로 인해 소비한 시간은 줄잡아서 하루 한 시간씩만 쳐도 30년 동안에 만여 시간이 되는 것이다. 열 시간에 책 한 권 읽는 셈으로 따져도 천여 권의 서적을 독파했을 시간이요, 그뿐이랴, 전에는 그래도 술을 먹고도 밤늦게까지 책을 보거나 원고를 쓸 수가 있었는데 요즘은 술이 들어가기만 하면 아무 것에도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다. 불혹의 나이도 지나 이제 지명(나이 50)의 나이에 접어들려 하지 않느냐, 이래서는 안 되겠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하면서도 이날 이때까지 술을 끊지 못하고 질질 끌어 왔던 것이다. 본시 우유부단한 소인이라 타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결심만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어쩌다 하루 이틀 술을 거르는 것도 이를 뽑았다든가 또는 감기 같은 것이 심해져서 통 술이 몸에 받아지지 않을 때뿐인 것이다. 작심 사흘이라지만 작심 하루도 못 가는 터라 아무래도 타력에 의한 금주법을 써야겠다고 강구한 나머지 사온 것이 알코올빙이었다.
약병과 함께 갑 속에 든 치료 방법 설명문이 대단했다. 이 약은 소량의 알코올에 대해서도 알코올 과민증을 초래하여 환자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견뎌 내지 못하게 함으로써 반 강제적인 금주 상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복용 중 위스키 15cc 정도의 분량만 섭취해도 얼굴이 상기되고 가슴이 울렁거리고 맥박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지다가 조금만 알코올 섭취량이 지나치면 혈압이 급강하하고 구토와 함께 현기증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술 냄새만 말아도 두통이 생겨 고개를 돌리게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용 전 준비와 주의가 꽤는 까다로웠다. 최초의 복용을 시작할 때까지 최소한 열두 시간은 여하한 알코올이 든 음료도 섭취해서는 안 된다. 특히 취했을 때 복용은 금물이다. 이것이 힘든 조건이었다. 밤에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 약을 사온 터라 다음 날 오전 열한 시쯤 복용해야 할 참인데 주의 사항에 또 왈, 이 약을 복용 후 졸음기가 생기는 수가 있으니 그때는 수면을 취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전 열한 시쯤은 직장에 나가 있을 시간인데 졸음기가 온다고 소파에 길게 누워 잠을 잘 수도 없는 일. 그러니 취침 전에 복용을 개시해야 할 터이나 저녁이면 또 한잔 걸치고 싶은 생각을 억제치 못해, 에라 오늘 하루만 연기하자고 술집 문을 밀고 들어서는 것이다. 다이아진(세균성 질환에 주로 사용하는 흰색의 결정성 가루로 된 약)보다 두께가 좀 얇은 모양의 약이 든 병을 테이블 한옆에 놓아둔 채, 하루가 다음 하루로, 다음 하루가 또 그다음 하루로. 지지리도 의지박약한 졸장부이다.
그러나 가만있자. 술이 끼친 시간적 낭비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기는 하지 마는 그것이 다만 낭비만의 헛된 시간이었을까. 나면서부터 허약해 빠진 몸이 곧잘 체증에 걸려 고생을 하곤 했다. 그때 마다 이건 어떻게 돼먹은 밥주머니인지 다른 약으로는 듣지 않고 따끈한 소주로만 막혔던 것이 풀려 내려가곤 하는 것이다. 열소리를 할 때부터 그랬다. 그 후 성인이 되어 술을 대량으로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체증이 깨끗이 가셔졌다. 감히 장담하거니와 술이 내면적으로 위장이나 그 밖의 심체 어느 부분에 어떤 해를 끼치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체증만은 없애 주었던 것이다. 술의 덕이라 우선 아니 할 수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본디 주변머리 없고 소심쟁이여서 남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항상 무엇엔가 쫓기는 듯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는 위인으로, 술만이 이런 불안과 공포에서 구출해 주는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저녁마다 술집 앞에 줄섰다가 한 흡 술을 구걸하듯 얻어 들이켜고는 허둥지둥 다음 술집으로 달려가는 가련하고도 추접스러운 꼴을 해야만 했던 것도 그 당시 어쩔 수 없는 불안과 초조를 조금만이라도 덜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구차스러운 변명으로만 생각지 마시라. 그 무렵 이런 일도 있었다. 영문학자로 지금은 출판사를 경영하는 원 형이 자기 조모님 생신날 쓰려고 가까스로 구해 놓은 술 중에서 두 되를 들고 나와 같이 공동묘지를 찾아가 이름도 모르는 무덤 사이에 숨어서 오징어 다리를 씹어 가며 한꺼번에 소주 두 되를 다 비웠다. 둘이는 거나해지자 아무도 듣는 사람 공동묘지에서 당시의 암담한 시국에 대한 비판을 마음 놓고 떠들어 대어 오랫동안 쌓였던 울적을 발산시켰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어떻게든 살아야지, 죽지 말고 살아야지, 하고들 목이 메어 외쳤던 것이다. 그러다가 제물에 지쳐서, 그러나 이상스레 좋은 기분으로 이름도 모를 무덤가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으스스 몸에 스며드는 냉기를 느껴 눈을 떠보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시내 쪽은 등화관제로 어둠에 덮여 있었다. 그것은 이곳 공동묘지와 다름없는 죽음과 같은 어둠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은 둘의 가슴 속에두 덮여 있었다. 그때 둘이는 술을 조금만이라도 남겨 두지 않은 걸 얼마나 아쉬워했던고.
1·4 후퇴 때 처자를 먼저 친척이 마련한 트럭에 남쪽으로 내려보내고 혼자 피난민차 꼭대기에 올라탈 때에도 무엇보다 술 한 병을 구해 가슴에 안고 있었다. 차 지붕 꼭대기에도 사람이 빼곡하여 간신히 비집고 앉았다. 밤이었다. 진눈깨비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머플러로 머리와 얼굴을 싸매고 외투 깃을 바짝 올려세우고 낯모를 사람들의 틈에 조그맣게 박혀 앉아 되도록 눈바람을 피하기 위해 고개와 상체를 꺾고 소주병 주둥이를 빨고 빨고 했다. 기차는 당최 떠나지를 않고, 밤이 깊어 가면서 눈발은 굵어지고 바람은 세어지고, 급기야 기차가 움직였는가 하면 정거장마다 장시간의 정차, 때로는 가다가 도중에 뒷걸음질을 쳐 먼젓번 정거장으로 되돌아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진눈깨비는 머플러를 적시고 외투의 어깨와 등허리를 적 셔 내의 안까지 얼음물을 번지어 놓고, 초조와 불안과 비분은 겹쳐 가슴을 억누르는 속에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추위를 잊게 하고 초조와 불안과 비분을 덜게 해준 것은 25도짜리 술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술의 신은 단순하다. 모든 것을 제쳐 놓고 자기만을 위해 달라고 한다. 마음이 좁은 계집 같다. 질투가 심하다. 자기를 푸대접은 고사하고 딴 데 한눈만 파는 눈치를 보아도 싹 돌아서고 만다. 그러고는 담을 쌓고 이쪽이 어떻게 되든 아랑곳도 않는다. 잔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술의 신은 좀 유가 다르다. 상당히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자기의 수많은 추종자를 정신병이나 자살 직전에서 건져내 주는 은덕을 베푼다. 그러다가 자기를 버리고 가는 자가 있어도 고이 보내 준다. 그런가 하면 자기를 좋아하는 적잖은 사람들에게 횡포성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입이 비뚤어지게 하고 팔다리를 못 쓰는 병신을 만들어 놓기도 한다. 좀 짓궂은 데가 없지 않다.
얼마 전 동대문께의 헌책 방에 들렀다가 저녁 때 어느 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얼근히 취해 그만 일어서려고 하는데 눈에 뵈지 않는 누군가가, 한잔만 더 마시지, 하고 속삭였다. 소리는 작고 낮으나 미묘하게 마음속을 흔드는 속삭임 이었다. 잠시 망설인 후에, 아니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즈음 금주는 못하더라도 절주만이라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참이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어느 날 여자 졸업생한테서 편지를 받았다. 문안 편지였다. 그래도 옛 선생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게 고마웠다. 그 편지 글 속에 사모님도 안녕하시냐고 하고는 ‘지금이니까 말씀드립니다마는 재학 시절 한때는 선생님을 홀아비 선생님이 아니신가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나서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로 수염을 자주 깎지 않더라는 것과 가끔 덞은(더러운) 와이셔츠를 그냥 입고 다니더라는 점을 들었던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음을 읽는 둥 마는 둥 부리나케 편지함 깊숙이 감추어 버렸다. 물론 아내가 남편에게 오는 편지를 일체 뜯어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혹시 만의 일이라도 그것이 아내의 눈에 띄게 되어, 여보 대체 어떤 모양을 하고 다니기에 나까지 망신시키는 거요? 할라치면 대꾸할 말이 없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전혀 내 탓이지 아내의 탓은 아닌 것이다. 남편의 수염을 깎아 주는 아내가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고, 와이셔츠만 해도 예비로 밀려가는 것이 많지는 않아도 두세 벌은 되니 말이다. 아내는 덧붙여 말할 것이다. 그게 다 뭣 때문인지 아세요? 술 때문예요, 술. 나이가 부끄럽지 않수? 제자한테 그런 창피까지 당하시면서. 아내의 이 말에도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다. 아내의 말이 옳은 것이다. 정말 지나치게 몸차림 같은 데에 무관심해 왔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어떤지 몰라도 술 때문에 더한 것 같다. 만취했던 다음 날 아침은 면도는 그만두고 세수하기도 싫다. 수염을 한 닷새씩 안 깎는 게 보통이다. 그러다가 수염을 깎을 때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무슨 놈의 수염은 이렇게 자꾸 자라 성활 먹일까. 숫제 수염이 될 것이 머리카락으로 보충됐으면 얼마나 좋담. 와이셔츠 갈아입는 것도 또 그렇다. 개켜 둔 것을 꺼내어 펴서 단추를 일일이 따야 하고 무엇보다도 입으면 빳빳한 깃이 목에 거북스럽고 편안치 않은 게 싫다. 그리고 갈아입은 그날로 소매 끝이 술상에 닿아 덞고 얼룩지기가 알쑤다. 그렇지만 다시 갈아입는 것이 성가셔서 며칠이고 그냥 입고 다닌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것이다. 은행에 다니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면도를 해야 하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야 하고 깨끗한 와이셔츠를 입어야 한다는데 그런 은행원이 안 되길 잘했다고. 그런데 이건 은행과 아무 관계도 없는 처지에서 제자한테 홀아비 같은 몸차림을 하고 다닌다는 지적을 받았던 것이다. 그 후부터 일대 반성을 하여 되도록 수염도 자주 깎고 덞기 전에 와이셔츠도 갈아입기에 힘써 오고 있다. 그러노라니까 자연 거울을 대하는 도수도 많아지게 마련인데, 그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마주 바라보며 새삼 감개무량해지곤 한다. 별것 아니다. 머리에 서릿발이 늘어 가고, 그것만이라면 또 괜찮으련만 점점 낙발이 심해져 이마는 위로 넓어지고 정수리께는 번번하여 그야말로 노인의 형상을 여지없이 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잇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는 절주만이라도 하여 남에게 추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지. 그날 밤은 제 딴은 그런 결심 에서 한잔 더 하라는 속삭임을 묵살하고 술집을 나와 버렸던 것이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마침 떠나려고 하는 차가 있어 올라탔다. 그게 잘못이었다.
차내는 그리 만원이 아니었다. 한쪽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술을 먹고 전차나 버스를 타면 눈을 감는 게 습관처럼 돼 있었다. 눈을 감고 혼자 도연한 기분을 즐기는 것이다. 몇 번이나 정류장에 멎었다 떠났을 때일까” 별안간 차체가 왼쪽으로 급커브를 한다고 느껴진 순간 그대로 나동그라져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는 아비규환. 여기저기 신음 소리와 울부짖음 소리. 누군가가 부서진 출입구로 끌어내어 준다. 파고다 공원 좀 지난 곳이었다. 백차가 모여들고, 앰불런스가 달려오고, 들것에 사람을 실어 나르는 광경이 가로등 불빛 속에 보였다. 옆 골목에서나오는 택시를 피하려다가 버스가 전복된 것이었다. 끌어내어 준 사람이 백차를 타고 병원에 가라고 한다. 몸을 움직여 보니 등허리가 뻐근하게 결리고 이마가 좀 까져 쓰릴 뿐 제대로 걸을 수가 있어 병원에까지 가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딴 버스를 바꿔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좀 전에 술집에서, 한잔만 더 마시지, 하던 속삭임. 그리고 그 속삭임과 함께 마음속에 어떤 묘한 암시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가 잠시 망설이다 제 딴엔 용단을 내어 무엇을 뿌리치듯 그곳을 나와 버렸던 일.
최근 아메리카 해군 사상 최대의 불상사가 일어났다. 핵잠수함 스레셔호가 대서양에서 연습 중 실종된 것이다. 원인은 분명치 않으나 깊이 8,400피트의 해저에서 수압으로 말미암아 폭파·침수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승무원은 129명. 수색 활동이 맹렬히 전개되고 있으나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침몰된 스레셔호로부터 해면에 떠오른 것으로 보이는 기름과 흰빛, 누런빛의 장갑과 파편뿐이다. 승무원들의 구출은 차치하고 시체조차 찾을 길이 막연한 것 같다.
여기에 살아남은 사람이 셋 있다. 이 배에 탈 예정이었던 한 명의 장교와 두 명의 수병이다. 신문 보도에 의하면 장교는 가족의 병으로 인해 승선치 못했고, 수병 두 명은 배 타기 전날 밤 과음하여 승선 시간에 ˙늦었다는 것이다. 관심의 대상은 바로 이거다. 과음이 단순한 과음이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심해의 어두운 밑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한 129명의 생령들도 거의 전부가 음주가였을 것이다. 그것도 보통 주량이 아닌 해군 특유의 호주가들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도 승선 전날 밤에, 혹은 가족과 함께 혹은 친구나 애인과 함께 혹은 혼자서 어디서고 술을 마셨을 것이다. 곤드레만드레가 되도록 마신 사람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네 임무를 다하다 귀중한 목숨을 잃은 생령들에게 송구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나 결국 그들은 술의 신의 은총을 받지 못한 셈 이 된다.
가족의 병으로 인해 승선치 못한 장교는 예외로 치고, 술 때문에 승선치 못하여 오히려 희생된 동료들에 대해 면목 없고 불명예스럽게 생각할 두 명의 수병더러 술의 신의 은총으로 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고의적으로 폭음을 하고 배 타는 것을 회피하지 않은 이상 역시 술의 신의 은총을 받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날 밤 아마 한 수병은 포츠머스 항구의 어느 뒷거리 싸구려 술집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한시바삐 바다에 나가길 원하며 냉수 마시듯 술을 들이켰을지 모른다. 혹시 결혼 전에는 술 못하는 남잔 모든 면에 여유가 없어 싫다던 아내가, 그가 술을 먹고 명랑해지는 것을 퍽이나 좋아하고 허튼소리를 잘 받아 주던 아내가 요즘 와서 늘 이런 앙탈을 부리지는 않았는지. 제발 술을 끊으세요, 밤낮 이러고만 살 수 있어요? 저축 하나 없이 월부금 붓기에도 진력이 났
어요. 어디 완전히 우리 물건 된 게 있어요? 텔레비전도 내달까지 치러야죠? 세탁기는 아직도 여덟 달을 더 부어야 끝이 나요. 벌써 돌이 지난 딸애 생각도 해야 할 게 아녜요? 우선 당신 술부터 좀 끊으세요, 라고. 다른 한 수병은 아파트 불도 켜지 않은 자기 방 창가에 앉아 먼 밤하늘을 바라보며 술을 마셨을지도 모른다. 그는 뭍의 온갖 모진 것에서 받는 말할 수 없는 중압감을 못 견뎌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지. 네모나게 구획 지어진 거리, 거기 즐비하게 서 있
는 네모진 빌딩, 거기에 무수히 붙은 네모꼴 창구들, 그 안 네모진 방에 놓였을 네모진 뭇 도구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의 모진 사고방식. 이러한 모에서의 해방감을 가져다줄 바다를 생각하면서 찔끔찔끔 술을 마셨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두 수병이 각각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심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눈에 뵈지 않는 누군가가 그들에게 속삭였다. 두 사람이 제가끔 이젠 술을 그만 마셔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속삭임이 들려왔으니 그 시각도 서로 달랐을 것이다. 그저 속삭임의 내용만이 같았다. 한잔 더 마시지. 두 사람의 마음속 대답도 같았다. 아냐, 낼 아침 승선 시간에 늦음 안돼. 속삭임이 또 들렸다. 그대가 남달리 바다에 나가고 싶어 하는 심정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한잔 더 마시지. 그때 두 사람은 똑같이 자기 마음속 깊이에서 조용히 솟아나는 어떤 계시와도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잠자코 냉수 마시듯, 다른 한 사람은 찔끔거리며 술을 마셨다. 한 잔 더. 두 사람은 묵묵히 그 속삭임을 좇았다. 이런 속삭임과 묵시가 왜 하필 이 두 수병에게만 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그것은 술의 신의 소관이지 인간이 관여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추량할 따름.
윌리엄 제임 스의 「신비주의」 라는 글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알코올은 그 숭배자를 사물의 냉랭한 외곽 지대로부터 사물의 찬란한 핵심으로 이끌어 준다. 그리고 술 취한 동안 그로 하여금 진리와 일체가 되게 한다.
일전에 학생들과 함께 선생 몇이 정송강 묘소를 찾은 일이 있다.
천안까지 기차로 가, 거기서 진천행 버스로 바꿔 탔다. 길도 좋지 않기는 하지만 이건 마냥 버스가 기어간다. 충청도 사람들의 유장한 말씨를 닮아서 그런가. 하지만 버스가 느린 탓에 옆에 끼고 가는 산마다 한 벌 깔린 진달래꽃을 천천히 완미할 수 있어 노상 갑갑하지 만은 않았다.
진달래 감상에서 딴 데로 주의를 끌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앞 자리에 앉은 두 여인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창 쪽으로 앉은 여인이었다. 지난겨울 눈 쌓인 이 길에서 버스가 미끄러져 길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는 것이다. 여인이 창밖 낭떠러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 여인도 그 버스에 타고 있었다. 어린것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참이었다. 버스가 전복하는 순간 딴 생각은 없었다. 어린것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어린것을 품에 꼭 보듬고 무릎과 가슴을 안으로 꺾어 몸을 동그랗게 했다. 탔던 사람들이 모두 부상을 입고 한 사람은 죽기까지 했다. 그런 속에서 이 여인과 어린것만은 손가락 하나 다친 데가 없었다는 것이다. 숭고하리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으며, 공과 같이 둥근 것이 전복되는 차내에서 구르는 광경이 눈앞에 떠올랐다. 어떤 험한 장애물에 부딪쳐도 퉁겨나가는 탄력을 가진, 게다가 안팎이 성스러운 것으로 채워지고 둘러싸인 공과 같이 둥근 것이. 반쯤 몸을 일으켜 조심히 앞자리 등받이 위로 넘겨다보았다. 입술을 보일락 말락 연 채 어린것이 엄마 무릎 위에 안겨 잠이 들어 있었다. 돌이 아직 안 돼 보이는 사내애였다. 축복해 주고 싶었다. 아가야, 이 세상 제일가는 엄마를 가진 아가야, 마음 푹 놓고 자거라. 그리고 구김살 없이 무럭무럭 자라거라. 이때 퍼뜩 생각나는 게 있었다. 언젠가의 밤에 있었던 일. 술집에서 한잔 더 마시지, 하는 말을 듣지 않고 냐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차가 전복됐던 일. 그때 이마를 가볍게 무엇엔가 스쳤을 뿐 다른 데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를 않았다. 그것 역시 술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술을 안 먹었던들 버스가 전복하는 순간, 이젠 죽는구나 하고 허둥대다가 큰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를 것을 얼근히 취해 있어 심신을 술기운에 내 맡기고 있었기 때문에 떼구루루 구른 탓이 아닐까.
진천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아침 청주행 버스를 타고 한 20리 쯤 가 문백이라는 데서 내렸다. 여기서 송강 묘소가 있는 어은동까지 약 3킬로미터. 국도에서 얼마 들어가지 않아 길 오른편에 초등학교가 있고, 그 교정 한끝에 아름드리 거목이 일고여덟 그루 드문드문 서 있는 게 보였다. 굵다란 가지들이 죽죽 미끈하게 하늘 높이 뻗어 있다. 대체 무슨 나무일까. 잎이 아직 나 있지 않았다. 일행은 그중 제일 큰 나무를 배경하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나서 한 나무에 써 붙인 패짝을 보니 어럽쇼, 그 흔해 빠진 플라타너스가 아닌가. 거리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서 있는, 줄기에는 헌데 자국투성이요 가지는 인위적인 전정으로 비틀어진 플라타너스도 이렇듯 대기 속에 자연스럽게 자라면 딴 모습으로 보이는구나 하는 어이없는 감탄을 하며 싱거운 웃음을 웃었다. 마을을 하나 지났다. 거기서부터는 계곡의 오솔길이다. 좌우 산에 낭자하게 핀 진달래꽃. 산 몸뚱이가 온통 연분홍 흙으로 덮인 것만 같다. 남녘에서 처음 풍성하게 보는 진달래꽃이었다.
어은동은 계곡 맨 끝 좀 두드러진 곳에 자리 잡은 20호가량의 작은 마을이었다. 대추나무 감나무들을 많이 심었다. 담배 건조장이라는, 지붕 한가운데 통풍구를 만들고 그 위에 또 조그만 지붕을 만돈 집이 두셋 눈에 띄었다. 송강의 16대 종손이란 분의 집을 찾아가 사랑채 툇마루에서 잠시 쉬고서 여기 온 목적인 송강의 묘를 찾았다.
산소는 마을에서 3백 미터쯤 서남쪽으로 떨어진 등성이 위에 있었다. 앞에는 둘째 아드님 부부의 합장묘요, 그 뒤에 송강이 부인과 함께 합장으로 묻혀 있었다. 비석은 돌옷이 끼어 글자가 희미하나 애석(검푸른 잔 점이 많고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든 상석만은 해방 뒤에 후손이 새로 갈아 놓아 아직 돌 빛이 생생했다. 상석 앞에 분향을 하고 가지고 온 약간의 음식과 술을 부어 일행이 음복을 한 뒤 학생들은 아드님 무덤 앞으로 내려 보내고 선생들은 송강의 분묘 앞에 둘러앉아 송강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술잔을 나누었다. 술맛이 좋았다. 좀 전 쉴 때 마신 물도 그랬지만 진천 일대의 물맛이 그리 좋으니 술맛이 나쁠 리가 없다.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어느 고장에 가서든 물맛을 보고 그곳의 술맛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이다. 거꾸로 술(주로 막걸리) 맛을 보고 그 고장의 물맛을 짐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태껏 다녀 본 고장의 술맛우로는 전의 것이 제일이고, 다음이 장흥, 그다음이 선산. 충주와 안성 것은 그저 쑬쑬. 그밖에 이공저곳의 급락의 선을 오르내리는 술 가운데 제주도의 토주만은 완전히 낙제. 물맛도 여기에 준한다. 이곳 진천 술은 장흥 것과 비등하달까. 송강의 「권주가」가 생각났다.
ᄒᆞᆫ盞 먹새근여
쪼 ᄒᆞᆫ蓋 먹새근여
곳 것거 算 노코
無盡無盡 먹 새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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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른히 흰들 ᄀᆞᄂᆞᆫ비
굴근 눈 쇼쇼리 ᄇᆞ람 불 제
뉘ᄒᆞᆫ 蓋 먹쟈 ᄒᆞᆯ고
ᄒᆞᆫ물며 무덤 우희
ᄌᆞᆫ납이 ᄑᆞ람 불 제야
뉘우ᄎᆞᆫ들 엇디리
물론 송강이 생전에 이 진천 술맛을 보았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1536년 서울서 태어나 파란곡절이 심한 생애 끝에 임진 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에 별세하여 선친의 묘소가 있는 고양군 땅에 묻혔었다. 향년 58세. 후에 송시열이 이곳에다 산소자리를 선정하고 이장해 온 것은 1665년. 그러고 나서부터 후손들이 이 진천 땅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니 송강 생전에 이곳 술맛을 보며 읊은 「권주가」로는 볼 수 없다. 그건 어찌 됐든 송강의 분묘 앞에서 그가 지은 「권주가」를 입 속으로 외며 이처럼 감칠맛 있는 술을 마신다는 것은 또 별미가 아닐 수 없었다. 송강처럼 꽃을 꺾어 셈을 놓아 가며 마시는 멋은 못 가졌을망정 그 대신 술 한 잔에 산 가득히 핀 진달래꽃을 한 번씩 바라보며 잔을 기울이는 것도 짜장(과연 정말로) 흥취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산소를 내려와 황송스럽게도 송강의 종가 댁에서 차려 내온 국수로 점심 요기를 하고 나서 집 뒤에 있는 사당으로 갔다. 방 안쪽 벽에 위패가 모셔 있고 그 좌우에 송강과 후손들의 문집이 옛 냄새를 풍기며 차곡차곡 쌓여져 있다. 그리고 송강과 친교가 있던 분들의 서한이며 후손들의 교지가 보관되어 있다. 여러 가지 유물 가운데 특이한 것이 둘 있었다. 옥배와 은배. 옥배는 송강이 중국 사신으로 갔을 때 신종 황제에게 선물로 받아 온 것이라고 한다. 옥을 깎아 만든 잔으로 크기와 모양이 꼭 홍차 잔 같은데, 양쪽에 손잡이가 있고 바깥 면은 중국의 산수화가 새겨져 있다. 한편 은배는 복숭아를 세로 가른 형상의 이른바 도배(桃杯)라는 것으로 선조 임금이 하사한 술잔이다. 웬만한 쪽박만 했다. 요즘 서울 거리에서 파는 대폿잔 반은 실히 담길 것이다. 선조 임금이 이 은배를 하사하면서 아침 조례에 들어오기 전에는 이것으로 석 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석 잔이면 서울의 대폿잔으로 다섯 잔 푼수(얼마에 상당하는 정도). 송강이 애음한 술의 종류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지금 서울 거리에서 파는 그런 뜨물처럼 밍밍한 막걸리는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니, 이 은배로서 석 잔도 결코 적은 술이라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조례 전의 아침 술에 있어서랴. 미루어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했었는가와 그 주량이 어느 정도였었는가가 가히 짐작이 된다. 그런데 과연 송강이 선조 임금의 분부대로 꼭꼭 석 잔 술만 마셨을까. 기분에 따라서는 그 이상도 마시지 않았을까. 물론 석 잔을 다 마시고도 지금 자기가 마신 것이 두 잔째지 하고 한 잔 더 마시는 그런 소인의 옹졸한 행위는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임금께, 죄송하오이다, 하고는 다섯 잔이고 일곱 잔이고 마시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옛 기록에 보면 송강의 성격이 협애하다(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소견이 좁다)는 평을 들을 만큼 강직했던 모양이나 한편 기분에 좇는 이토록 약한 구석도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럼으로 해서 「권주가」를 비롯해 「관동별곡」이며 그밖의 「미인곡」이며 「성산별곡」이며 그 밖의 여러 귀중한 작품들을 낳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망상에 지나지 않는 생각을 하며 은배를 두 손에 받들고 있노라니 좌우 만산의 진달래꽃이 잔 듬뿍 와 담기는 것 같았다.
아직도 알코올빙은 책상 위에 놓인 채 한 알도 줄지 않고 있다. 내일은 꼭, 내일은 꼭, 하고 다짐하는 마음조차 흐려지고 말았으니 설마 송강을 빙자 삼으려는 심사에서는 아니겠지. 아무튼 이 무슨 지지 리도 못난 소인의 소위(하는 일) 인고.
-끝-
2016년 11월 2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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