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歲寒圖)
송수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꿈꾸는 섬>(1982)-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비유적, 상징적
◆ 특성
① 말줄임표를 이용한 생략으로 시적 여운을 남김.
② 현재형 시제를 활용하여 현장감을 부여함.
③ 동일한 시행을 반복하여 시적 상황을 드러냄.
④ 미술 작품을 활용해서 의미를 확장시킴.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세한 → 설 전후의 추위라는 뜻으로, 매우 심한 한겨울의 추위를 이르는 말.
*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 화자가 상상 속에서 '세한도'의 여백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화자의 감정과 생각을
추가하려는 행위이다.
*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 길조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함.
*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 그림의 여백이 지닌 의미를 구체적이고 감각적으로 형상화함.
여백의 고요함과 '폭발하는 듯한 까치 울음소리'를 대비시킴으로써 그 의미를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나타냄.
* 까치집 하나 → 삶과 죽음이 조응하는 공간
*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 화자의 상상력이 삶과 죽음의 문제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음.
그림의 하늘을 저승의 하늘과 연결시키고, 이승의 까치 울음소리를 저승의 울음소리와
조응시킴으로써, 삶과 죽음을 연속적인 것으로 보는 화자의 시선이 나타남.
*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같이 따숩다.
→ 화자는 삶과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서로 조응하는 것으로 그려냄으로써 세상을
따뜻하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화자가 그려낸 '세한도'는 춥지 않고 따뜻한 것이다.
◆ 제재 : 추사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
◆ 주제 : 삶과 죽음의 연속성에 대한 인식을 통한 세한의 극복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선을 내는 행위를 통한 새로운 여백의 창조
◆ 2연 : 새로운 여백 창조를 통해 인식하는 삶과 죽음의 연속성
◆ 3연 :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통해 전환되는 세한에 대한 느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시인은 추사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를 바라보고 있으나 그 속에 담겨 있는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독특하고 개성적인 상상력을 활용하여 그와는 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시인은 시적 화자로 하여금 「세한도」의 빈 공간에 '까치집'을 상상하게 하고 그림의 여백에서 저승에서 들려오는 까치의 울음소리를 느끼게 함으로써 삶과 죽음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이어져 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세한(歲寒)'이 가지고 있는 차가운 이미지를 따뜻한 이미지로 전환시키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상상 속에서 '세한도'의 여백에 그림을 그린다. 그것은 길조로 인식되는 '까치 한 쌍'인데, 이들은 나뭇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폭발하는 울음을 통해 여백의 정적을 깨뜨린다. 아무 것도 없는 듯한 빈 공간에 울려 퍼지는 이 까치의 울음소리는 화자가 추가한 세계이며, 동시에 화자가 찾아낸 여백의 의미인 것이다.
2연에서 화자는 까치의 보금자리라 할 수 있는 '까치집'을 새로 그린다. 하지만 이 '까치집'은 살아 있는 까치의 집이 아니다. 까치의 울음이 이승이 아닌 저승의 하늘에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까치집'은 주인을 잃고 버려진 집이다.
3연에서 화자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이 추가된 그림을 따숩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2연에서 화자가 그려낸 세상이 삶과 죽음을 단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속되는 세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버려진 '까치집'은 상실의 아픔이 아니라 죽은 까치의 보름자리가 보존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저승에서의 까치 울음소리 역시 이승과 저승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화자는 혹독한 추위를 나타낸 '세한도'에 삶과 죽음이 서로 함께하는 따뜻한 세상을 그려냄으로써, 새로운 시적 세상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 표현 매체의 변화로 인한 내용의 변화
이 시는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를 토대로 써진 작품으로, 표현 매체가 변화함에 따라 내용의 변화도 나타난다. 특히 기존의 그림에 새로운 내용을 추가한다는 독특한 발상을 통해 시적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다. 매체의 변화에 따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작품이 가지는 온도의 변화다. 미술 작품이 지조와 절개가 돋보이는 겨울의 추위를 강조했다면, 이를 토대로 한 시에서는 이러한 추위를 극복하는 세상의 따뜻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울음'이 지닌 전통성
이 시에서 '울음'은 전체 의미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시인은 김정희의 그림에서 보이는 '하늘'을 저승으로까지 확장하여 '더 먼 저승의 하늘'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이승의 하늘'에서 들리는 '울음소리'와 조응하면서 삶과 죽음 사이의 연속성을 강하게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승과 저승,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이 시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소월의 '접동새'와 '초혼', 서정주의 '귀촉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 '울음소리'는 한국 시가에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이 시에서의 '울음소리'는 삶과 죽음을 단절로 보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탄생된 것이라는 점에서 앞의 시들과 차이를 갖는다.
● '질화로'가 가진 따뜻함
'질화로'는 진흙으로 구운 화로를 말하는 것으로, 옛 촌가(村家)에서는 어느 가정에서나 필수품으로 갖고 있었다. 이 화로는 보통 안방이나 사랑방에 있었는데 그 쓰임새는 달랐다. 안방에서의 화로는 보통 찌개를 보글보글 끓이는 취사도구로 사용되었다.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찌개를 끓여 먹는 모습은 그 어떤 풍경보다 행복한 모습이었다. 이와 달리 사랑방에서의 화로는 동네 노인들이나 젊은이들이 모여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놀 때의 난방 기구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질화로'는 결국 가족 또는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의 도구였다. 되는대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화로였지만, 그 화로의 쓰임새만큼은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따뜻함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존재였다. 이 시에서 화자가 자신이 창조해 낸 세계를 '질화로'에 비유한 것은 그러한 따뜻한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작가소개]
송수권[ 宋秀權 ]
<요약> 송수권의 시는 재래의 무력하고 자조적인 한의 정서가 아니라 한 속에 내재한 은근하고 무게있는 남성적인 힘을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출생 – 사망 : 1940. 3. 15. ~ 2016. 4. 4.
출생지 : 국내 전라남도 고흥
데뷔 : 1975. 문학사상에 시 「산문(山門)에 기대어」가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
1940년 3월 15일 전남 고흥 태생. 순천사범학교를 거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다. 문공부예술상, 금호문화재단 예술상, 전라남도문화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1975년 『문학사상』에 시 「산문(山門)에 기대어」가 신인상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한 이후, 시집 『산문에 기대어』(1980), 『꿈꾸는 섬』(1982), 『아도(啞陶)』(1984), 『새야 새야 파랑새야』(1986), 『우리들의 땅』(1988),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1991), 『별밤지기』(1992), 『들꽃세상』(1999), 『초록의 감옥』(1999), 『파천무』(2001), 『언 땅에 조선매화 한 그루 심고』(2005), 『시골길 또는 술통』(2007)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산문집 『다시 산문에 기대어』(1985), 『사랑이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1989), 『남도 기행』(1990), 『쪽빛 세상』(1998), 『만다라의 바다』(2002) 등을 발간하였다.
그의 시는 재래의 무력하고 자조적인 한의 정서가 아니라 한 속에 내재한 은근하고 무게있는 남성적인 힘을 강조하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남도의 토속어가 가진 특유의 맛과 멋을 무리없이 살리는 데 성공하였으며, 역사 의식을 매개로 한 민족 재생의 의지를 담은 작품들도 많이 발표했다.
<학력사항>
순천사범학교, 서라벌예술대학 - 문예창작학
<수상내역>
1975년 작품명 '산문(山門)에 기대어' - 문학사상에 시 「산문(山門)에 기대어」가 신인상으로 당선, 문공부예술상, 금호문화재단 예술상, 전라남도문화상, 소월시문학상
<작품목록>
산문(山門)에 기대어, 꿈꾸는 섬, 아도, 벌거숭이, 우리나라 풀이름 외기
우리들의 땅, 네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인다, 자다가도 그대 생각하면 웃는다
들꽃세상
[네이버 지식백과] 송수권 [宋秀權]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