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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재벌들의 흥망
1980년대와 1990년대 한국 아파트 기업의 대명사 우성이 등장한다.
원래 중화동의 일개 보도블록 제조업체에 불과했던 우성은 고속버스터미널 맞은편인
잠원동에 아파트 건설 허가(12층 4개 동 208세대)를 받고 1977년 1월 분양공고를 냈다.
놀랍게도 신청자는 4천 명을 넘었다. 그 유명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한창 올라가던 때였는데,
이렇게 우성이 분양 대박을 터뜨리자 많은 업체들이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었다.
마침내 오늘날 40만 호에 이르는 아파트 수에 아파트 거주율 80퍼센트에 달하는 강남 아파트
시대가 활짝 열렸다.
남쪽의 대치동과 도곡동 지구에서는 대한주택공사에서 1973~ 1974년에 세운 도곡아파트를
중심으로 삼호주택의 개나리아파트와 진달래아파트가 들어섰고, 동쪽에는 한보주택의 은마아파트가
건설되어 대규모 주택단지가 형성되었다.
특히 개나리아파트는 오늘날 감각으로는 촌스러운 이름이지만 당시에 놀랍게도 44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였다. 이 정겨운 이름의 아파트는 재건축되면서 현재 사라지고 없다.
이런 열기는 단순히 서울에 주택이 부족한 탓만은 아니었다.
1977년은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룬 해였고 중동 특수까지 겹치면서 경기가 과열되고
있었다. 아파트 분양 때마다 청약 창구 앞에는 장사진이 생겨났다.
그러자 정부는 ‘국민주택 우선 공급에 관한 규칙’에 ‘불임 수술자 우선 제도’를 새로 포함했다.
한마디로 정관수술을 받은 이들에게 우선 분양권을 준다는 의미였다.
이에 많은 이들이 정관수술을 받았다. 보건소와 병원들은 시술확인서를 발급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해 업무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반포 일대는 ‘내시촌’이라는 조금 민망한
별명이 붙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정반대로 아이를 많이 낳아야 청약 혜택을 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197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대한민국의 아파트 건설업체들은 말 그대로 땅 짚고
헤엄치는 식으로 돈을 벌었다. 건축허가만 받아내면 그 다음부터는 노다지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건축허가를 받은 뒤 입주자를 모집하고 그 계약금으로 정지(整地)
공사와 기초 공사를 한다. 한편으로는 분양계약서를 담보로 막대한 자금을 대출받는다.
그 다음, 아파트가 올라가면 매달 납부금이 들어오고, 완공 후 입주가 시작되면 잔금이
들어온다. 이러니 건설업체는 결코 손해 볼 일이 없었다.
건설업체들은 이렇게 번 돈으로 다시 땅을 사고 또 아파트를 지었다.
무명의 보일러 회사였던 한신공영은 반포 일대의 땅을 싸게 사들였다가 1976년 10월부터
무려 11개 단지 1만 1,672세대를 분양하여 떼돈을 벌었다. 우성 역시 반포를 시작으로
서초동, 개포동, 대치동, 역삼동, 잠실, 가락동에 아파트를 지었고 이어 잠실에 아시아선수촌아파트를 지어 재벌 반열에 올라섰다. 리베라호텔도 우성의 작품이었다.
그 외에도 삼호, 라이프주택, 진흥기업, 경남기업, 한보, 삼익, 삼풍그룹 등이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다.
그런데 이 기업들 대부분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사이 몰락의 길을 걸었다.
강남의 대지주 조봉구의 삼호가 가장 먼저 쓰러졌고, 한양건설이 넘어졌으며, 진흥, 삼익,
라이프주택, 우성, 한보가 뒤를 이었다. 경남기업이나 한신공영 등 남아 있는 회사들도
대부분 창업주의 손을 떠났다. 이 기업들의 수명은 보통 15년 안팎에 불과했으며 길어야
20년이었다. 지금까지 건재한 곳은 현대산업개발과 현대건설 정도이고 사실 이들조차도
현대그룹이라는 거인의 덕을 많이 보았다.
승승장구하던 이 기업들이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업마다 몰락의 계기는 달랐으나 결정적인 요인은 같았다. 과다한 부동산 투자와 부채였다.
아파트 건설업체는 사실상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은 채 사들인 땅을 담보로 은행 돈을 빌렸고
그 돈으로 또 땅을 샀다. 부채로 인한 이자 부담은 안중에 없었다. 땅값은 계속 오르고
아파트는 지으면 팔린다. 기업들은 이와 같은 환상에 빠져 있었다. 실제로 1980년대
말까지는 부동산의 가격 상승에 힘입어 땅 장사로 돈을 벌었고 외형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토지공개념이 도입되는 등 경영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땅값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고, 아파트도 지으면 팔려나가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정부가 아파트 분양가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분양가를 규제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상황이 급변하자 그 전에는 신경도 안 썼던 부채가 기업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아파트 장사로 쉽게 번 돈을 기업 경쟁력 강화에 투자하지 않은 탓에 아파트 재벌의
영화는 10여 년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물론 우성 같은 경우는 타이어 산업에 진출했다가
실패했고, 한보는 제철소를 만들었다가 실패한 탓도 컸다. 우성은 1991년 독특한 외양의
사옥을 양재동에 지었는데 지금은 ‘학원 건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강남에서 아파트가 아니라 빌딩 건설로 성장한 기업도 많다.
나산의 안병균 회장은 1981년 선릉역 주변의 대지 1,600평을 사들여 샹젤리제 오피스텔을
지어 큰 차익을 남겼고 이를 바탕으로 한때 나산을 재계 57위의 중견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거평그룹의 나승렬 회장 역시 1988년 서초동에 지은 지상 19층, 지하 6층의 센추리오피스텔과
역삼동 빌라를 성공리에 분양해 큰돈을 벌었고, 1991년에는 논현동에26층짜리 거평타운을
세우기도 했다. 6년 후 거평그룹은 30대 기업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실속이 없는 사업이 많았고
결국 IMF 외환 위기 때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강남은 이렇게 많은 기업들을 성장시켰다. 하지만 오래간 기업은 많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남긴 수만 채의 아파트와 빌딩은 여전히 건재하며 한 시대를 증언해주고 있다.
- 한종수, 강희용 저, ‘강남의 탄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