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기사단
성전 기사단은 십자군과 관계가 깊다.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기독교 왕국을 세운다. 십자군의 성공으로 레반토에 여러 기독교 국가가 들어섰다.
아르메니아, 에데시(백작) 안티옥(공국) 트리폴리, 예루살렘(왕국)
제일 중요한 왕국이 예루살렘으로 프랑크가 맡았다.
유럽에서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대 인기였다.
성지 순례단이 많아지자 이들을 노리는 도둑도 많아졌다.
프랑스 기사단이 예루살렘 왕국에 순례단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기사단 창설을 요구
승낙을 받고, 본부를 옛 솔로몬 성전 자리에 두고, 성전기사단을 했다.
수도사(사무 업무-대다수) + 기사(싸움-소두)로 구성했다.
*상징 의복은 흰색 사제복에 붉은 색 십자가 표시
이때는 이 지역의 기독교 세력도, 이슬람도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다투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레반토 기독교 국가는
아랍어가 능통하고, 이슬람의 선진문화를 이해했고, 종교보다는 같은 사람임에 공감
유럽서 온 십자군(8차까지 왔다.) -- 이슬람의 적대국이고, 이슬람과 친하게 지내는
기도교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 십자군은 이스람이 자기보다 훨씬 강하다는 정보를 갖지 못해서 무뫄게 도전했다.
==> 십자군의 두 세력이 반복-알력이 심했다.
1200년 대가 되면서 십자군이 밀렸다. -이슬람이 예루살렘 탈환
*예루살렘의 말뜻 - ‘평화의 마을’이란 뜻이다.
성전 기사단은 본부를 이리저리 옮겼으나, 레반트 지역의 기독교 국가가 소멸되고 나서는
본부를 파리로 철수 했다.
조직이 비대해져서 유럽 곳곳에 지부를 두고, 이제는 상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은행까지 차렸다.
재정에 쪼달리던 프랑스 펠리페 4세는 ‘국가 안의 국가’로 행동하는 기사단을 없앨 궁리를 했다. 이때 교황은 아비뇽에 데려다 놓은 클레멘트 5세로, 필리페 4세의 친척이었다
교황에게 압력을 넣어, 1312년에 이단으로 선포하고 종교재판을 한다.
===> 기사단 총장을 위시하여 30여 명을 화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한다.
*2001년 9월에 비티칸에 비밀 문서 보관소에서 ‘시농 양피지 문서’를 찾았다.
1308년 8월에 작성한 것으로, 성전사의 재판 기록으로, 무죄였음을 나타냈다.
**오늘의 카톨릭의 입장
성전 기사단은 무죄이다.
***성전 기사단의 잔존 세력은 교황청에 흡수되어서 여러 이름의 기사단이 되었다.
--> 이러한 기사단이 오늘의 영화, 소설 등에 많은 소재가 되어 있다.
3. 기사 이야기의 대 유행
문맹이 많아서 이야기 들려주는 일이 유행했다. 순례하는 이야기군이 나타나서 돈을 받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나타났다.(음유시인) 이들은 성을 찾아다니면서 왕, 성주, 귀족을 고객으로 했다. 나중에는 글도 남겼다. 이것이 중세의 기사 문학이다. 이야기의 주인공도 고객에 맞추어 왕, 성주, 귀족이 되었다. 곧 궁정 기사 소설이다.
중세의 영주와 귀족이 살던 성은 좁고, 살기에 무미건조한 곳이었다. 이런 궁전-성을 찾아다니는 전문 이야기꾼이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기사와 궁전의 여인이 주인공 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대표적인 영국 작가는 아서왕 이야기를 쓴 크레티앙 트루아 이다. 아서왕 이야기를 위시하여 성배 이야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