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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14-33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19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전 10:14-33 /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조심하여 우상숭배를 피하십시오. 15) 여러분은 총명한 사람들이니 이제 내가 말하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분별해서 판단해 보십시오. 16) 우리가 주님의 식탁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주께서 축복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축복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한 덩어리의 떡을 쪼개어 함께 먹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다같이 나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7)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떡을 먹고 그리스도의 한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18) 유대인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희생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하나가 되어 다 같이 제단에 참여하지 않습니까? 19)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제물을 받는 우상이 실제로 살아 있는 참신이라고 말하자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런 제물이 무슨 가치가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20) ㄴ)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는 그런 우상에게 음식을 바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게 제물을 마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 중에 어느 누구도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이방인과 같이 먹음으로써 귀신의 짝이 되지 말 것을 경고합니다. (ㄴ. 70인역 신 32:17) 21) 여러분은 주님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놓인 잔을 모두 마시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주님의 식탁에 있는 떡과 귀신의 식탁에 있는 떡을 다 먹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22) 어쩌자고 그렇게 합니까? ㄷ) 여러분이 주님을 노엽게 하려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주님보다 더 강하다는 말입니까? (ㄷ. 신 32:21) 23)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일 여러분이 먹고 싶다면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이라도 먹을 자유가 있습니다.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내놓고 보란 듯이 먹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완전히 합법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최선이 아닐 수도 있고 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4) 여러분 자신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도 생각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최선의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25)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어느 것이든 원하는 대로 사 가지고 가십시오. 그것이 우상 앞에 놓았던 것이냐 아니냐를 묻지 마십시오. 그 대답을 듣고 여러분의 양심이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26) ㄱ) 땅과 땅 위에 있는 좋은 것도 모두 주님의 것이며 여러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ㄱ. 시 24:1) 27) 만일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 여러분이 가고 싶거든 주저하지 말고 가십시오. 그리고 식탁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이나 먹고 공연히 고치고치 묻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 음식이 우상 앞에 놓았던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다 해도 양심에 상처를 받을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28)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그 고기가 우상 앞에 놓였던 것이라고 말해 주거든 그 사람을 위해서, 또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그것을 먹지 마십시오. 29) 이 경우 그 고기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보다는 그 사람의 생각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생각에 끌려가거나 제약을 받아야 합니까? 30) 내가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먹을 수 있다면 어떤 사람이 나를 나쁘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의 비위를 맞출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31) 자, 그러면 내가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또 어떤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2) 여러분은 상대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또는 그리스도인이든 간에 아무에게도 거침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3) 이것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위해 가장 좋은 일을 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믿는 자들이 잔과 떡을 나누는 것은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지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우상 숭배를 피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18)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함으로 멸망했던 것을 가르쳐 준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가 우상 숭배를 피해야 할 차례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것임을 성찬 예식과 우상 숭배의 잔치에 함께함을 들어 설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은 성만찬에 참여했으므로 이 만찬에 익숙했고, 만찬의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의식으로서,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연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의 떡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 같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사람은 그 우상과 연합한 자가 될 것이라 말합니다(신 14:22-27).
주의 잔과 귀신의 잔(19-22)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19)라는 바울의 질문은 8장에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고전 8:4), 음식은 중립(고전 8:8)이라는 말을 뒤집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상과 음식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상을 섬기는 일의 배후에 귀신의 활동이 있음을 언급합니다. 이방인이 신에게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만 예배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성만찬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라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도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이 귀신과 교제할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23-33) 바울의 가르침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 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의 유익을 구해야 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음식 그리고 불신자가 초대한 식탁에서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했습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바쳐진 것임이 밝혀졌다면 양심에 따라 먹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면 거침없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걸림돌과 같은 삶이 되어선 안 됩니다. 바울처럼 사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적 용 : 당신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디딤돌입니까? 아니면 방해하는 걸림돌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 거창한 듯이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 인간에게 거창할 뿐이지 하나님에게는 일의 크고 작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교회에서 먹을 것이 있을 때 나이 많은 어른들부터 챙겨주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어려움을 당한 형제가 있을 때 진실한 마음으로 손을 잡아주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다. 서로 기도해 주는 것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 설 교 >
우상숭배 하는 일을 피하라
고린도전서 10:14-22 / 손재호 목사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이 구약의 거울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을 비춰주시는 것을 배웠습니다(1-13). 출애굽 후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모습이요,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모습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상숭배, 간음, 주를 시험하는 것, 원망 등 이러한 죄악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구약의 거울을 보고서 우리 자신들을 고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구약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내용들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범죄 한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이 다 죄 아래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근본 이유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그 빛을 미워하여 죽이고 추방해 버렸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이 세상은 빛이고, 예수님은 암울한 어두움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멸시와 배척을 당하시고, 온갖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패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은 여전히 어두움 아래 갇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20절을 보면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라고 했습니다. 어두움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두움이라고 하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우상숭배의 현장인 것입니다. 우상이란 마리아상이나 불상이나 자연물에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신을 섬기는 것도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탐심이 우상숭배이기에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부른다면 그것이 다 금송아지를 섬긴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을 만들어 낸 결과가 바로 금송아지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어두움을 빛이라고 하고, 빛을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 다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숭배 하는 일을 피하라”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했습니다만 우상숭배란 어떤 형상물에 절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곧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다 우상숭배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런 것은 다 하나님을 좇아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좇아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좇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인데 이것은 무엇과 연결이 됩니까? 간음과 연결이 됩니다. 야고보서 4:4절을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세상과 벗된 자들을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합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우상숭배의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요, 간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말씀 앞에서 ‘나는 우상숭배를 하고 간음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마음이 듭니까? 아니면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당연하지! 그것이 왜 우상숭배이고, 간음인가!’하며 원망과 분노가 일어납니까? 이 말씀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 15절에서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대하여 말하는 것처럼 말하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진리를 알아서 자유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우상도 우상의 제물도 아무 것도 아니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리에 함께 참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지식으로 인해 교만하여졌지 사랑으로 덕을 세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유와 지식이 오히려 교만하여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상숭배 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다고 하면서 과연 누구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0:31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다 우상 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미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교만을 떨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16-17절을 보면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잊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축복하는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요,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성찬에 참예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표시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하셔서 성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살과 피를 잊어버리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늘 우리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해야 합니다.
18-19절을 보면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뇨.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라 하느뇨”라고 합니다. 바울은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육신으로 비유합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먹는 것은 제단에 참예하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그림자로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육신으로 난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제물을 드리면 제물이 불태워지는 제물이 있고,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제물이 있고, 제사를 드린 자가 함께 먹는 제물이 있습니다. 화목제물을 함께 먹게 되는데 그 제물을 먹는다는 것은 그 제단에 참예된 것이기에 이방 제사에 참예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우상의 제단에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하나님과 우상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에 우상의 신전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의 제사란 결국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20-21절을 보면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라고 합니다.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제사에 참예하는 것은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주님과 교제하면서 귀신과 교제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22-24절을 보면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며 책망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답변입니다.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은 우상숭배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자기를 위해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왜 우상숭배자가 된 것입니까?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잊어버릴 때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 받아서 천국 가는 것은 좋은데 세상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적당하게 예수를 믿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내고, 주일날을 지켜주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도 하지 않으니 교회에서도 십일조를 내고, 주일예배만 참석해도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인냥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래이지 하나님과의 사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참예’, ‘교제’라는 말이 나옵니다. 주님의 몸에 참예하고 주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성도인 것입니다. 그 주님과의 사귐이란 반드시 한 몸이 된 성도와의 사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들 간의 사귐이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사귐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어떠합니까? 우리는 늘 우리 자신들의 유익을 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볼 때 우리가 도대체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가 하는 의심이 생기지 않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잠언 1: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보내신 자를 믿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과 목표가 과연 주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과 이 세상을 향한 것입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 봐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세상 것을 더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입니다. 목사가 예수님보다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운영에 더 관심을 가지면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헌금이 얼마나 나오는지 개인 보고를 받지 않는다고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이 없다면 그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과 사귐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누구와 사귐이 깊어지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을 더 알고 싶고, 그분과 더 깊이 사귀고 싶고, 그분에게 무엇이든지 더하지 못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까? 이런 마음이 드는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주님과 사귐이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을 사랑하고 사귐이 있는 자는 함께 형제 된 자를 사랑하고 사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의 사귐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사귐을 가져나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이별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세상과 이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세상과 사귀고 싶어서 우리 주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요, 귀신과 사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이방인의 제사에 참예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과 사귐을 갖지 않으면 그것이 다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귀신과 사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아직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영원히 붙들겠습니까? 이 세상입니까? 아니면 주님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붙들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과의 사귐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과 사귐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84편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시편 기자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모든 우상숭배를 피하게 하시고,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님과 사귐을 갖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주님과의 사귐으로 말미암아 함께 형제 된 자들과도 사귐이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교회 가운데 충만케 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교회다움을 잘 나타내 갈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린도전서 10:23-33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상숭배를 피하라’고 권면하는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14-22).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숭배를 피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참된 도움이시요,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야 합니다. 그 길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고린도전서 10장 말씀을 공부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부터 10장에 걸쳐서 다루고 있는 우상의 제물과 자유에 대한 말씀으로써 우리가 우상의 제물을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의 최종적인 결론을 내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번 공부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그 결론인데 우리 가운데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서 있습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고 안 먹고 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일과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해야 할지와 하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분명한 기준이 서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상의 제물과 자유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써 분명한 자세를 소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설교를 하고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말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원칙은 알겠는데 실제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라고 하는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는 잘 와 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성도 안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우리 인간은 육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육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법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육신이 된 자는 아무리 법을 지켜도 그 안에서 사랑이 나오지는 않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 의가 쌓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판단할 뿐 사랑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법을 지킨다고 하여도 법을 지키는 차원에서 하는 것은 다 육신의 일입니다.
로마서 8:7-9절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고, 굴복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어야 합니다. 곧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얼마나 잘 지켰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보면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이 무려 613가지입니다. 그런 율법의 명령 중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입니다. 유대인들이 십계명을 잘 지키기 위한 보조 계명을 몇 가지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365가지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것입니까? 십계명을 생활 속에서 실천을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구체적으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적 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키기 위한 보조 계명이 무려 365가지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이 한 가지 법에 따른 보조 법만 39가지입니다. 안식일에 불을 피워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몇 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짐승을 건져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사람이 다치면 치료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상처에서 피가 나면 지혈은 하지만 약은 바르지 못하게 하는 등, 이러한 법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우리에게 제시하면 우리는 이들을 다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로마서 8:9절을 다시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누가 무엇을 가르치지 않아도 그 기름 부으심이 다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7절을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속에는 기름 부음이 곧 그리스도의 영이 거합니다. 그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십니다. 이 그리스도의 영은 참되고 거짓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그리스도의 영의 가르침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각자에게 친히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의 제물 문제만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그 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23-24절을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것이 가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이 다 자유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나는 자유하다고 내 편한 대로 하였는데 그것이 덕을 세우지 못하였다면 나의 지식으로 인해 교만하게 행한 것이지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합니다.
24절을 다시 보면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8장에서부터 10장까지 다루어 온 우상의 제물과 자유에 대한 권면의 말씀의 최종적인 결론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자유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곧 자신의 자유로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3:4-7절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씀에 보면 사랑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칙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자기의 자유로 형제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자유한 자로서의 이러한 분명한 삶의 원칙을 소유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 자유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서로의 덕을 세우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 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잘 나타내 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25-30절을 보면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시장에 나오는 음식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사람이 식사를 마련하고 초대를 하면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당시 시장에 파는 것이나 차려진 음식이나 고기의 대부분이 우상에게 제물로 드려졌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는 것입니다. 손님을 대접하고자 하는 자는 시장에서 파는 음식을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사온 것입니다.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식사에 청함을 받은 자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감사함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그 음식이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것이라고 알려 준다면 그 알게 한 자와 그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바울은 그 알려준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나의 양심은 자유 합니다. 거리낄 것이 없지만 그 사람의 믿음이 연약하여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이라고 알려주면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곧 그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하여, 그 믿음이 약한 자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대원칙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일에 자유 하지만 그러나 그 자유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형제의 유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원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33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 단락 곧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와 자유에 대한 총 결론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대원칙입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며, 형제의 유익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봉사를 하든지, 가정에서 생활을 하든지, 사회에서 생활을 하든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사랑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서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합니다. 32-33절을 다시 보면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거치는 자’란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를 말합니다. 형제에게 유익을 주기보다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에 나오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과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신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남의 유익을 구하는 이런 삶에 본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 사도의 삶을 본받아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8장에서부터 10장까지 말씀에서 다룬 우상의 제물과 자유에 관한 권면의 말씀의 결론인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많은 형제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덕을 세우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우리교회 가운데 있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를 통해서 교회다움이 잘 나타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