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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유내강(外柔內剛)
겉은 부드러운데 안은 강하다는 뜻으로, 성질이 겉으로 보기에는 순하고 부드러운 것 같으나 속은 꿋꿋하고 굳음을 이르는 말이다.
外 : 바깥 외(夕/2)
柔 : 부드러울 유(木/5)
內 : 안 내(入/2)
剛 : 굳셀 강(刂/8)
(유의어)
강유겸전(剛柔兼全)
내강외유(內剛外柔)
(반의어)
내유외강(內柔外剛)
외강내유(外剛內柔)
외강내강(外剛內剛)
외유내유(外柔內柔)
사람의 성격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일상의 습관에서 더 많이 만들어진다. 좋은 습관으로 성격을 다스린다면 운명까지 바꿀 수 있다고 하니 말이다.
사람의 성격을 말할 때 많이 쓰는 표현이 있다. 겉보기에 부드럽고 마음도 어질어 도통 악의를 보이지 않는 사람을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다고 한다.
속마음은 의외로 강단이 있어 고집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성격을,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하게 보이나(外柔) 속은 굳고 굳세다(內剛)란 표현을 쓴다.
이 성어를 앞뒤로 바꿔가며 반대의 뜻은 외강내유(外剛內柔)라 하고 외강내강(外剛內剛)이나 외유내유(外柔內柔) 등 갖가지 성격을 나타낼 수 있다.
중국 당서(唐書)의 노탄전(盧坦傳)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노탄은 중국 당(唐)나라 허난성[河南省] 출신으로 관직에 올랐을 때 상관인 두황상(杜黃裳)이 노탄에게 “어느 집안의 자제가 주색(酒色)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는데 왜 보살피지 않는가?”하고 물었다.
노탄(盧坦)은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는 청렴한 관리는 축재하지 않을 텐데 재물이 많은 것은 곧 다른 사람을 착취해 얻은 것이다. 방탕한 생활로 재물을 다 써 잃는다면 다른 사람을 착취해 거둔 재물을 다시 그들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절도사(節度使) 이복(李復)의 후임으로 요남중(姚南仲)을 임명하자 군대감독관인 설영진(薛盈珍)은 요남중이 서생(書生)이었다고 하며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노탄은 요남중은 외유중강(外柔中剛)이고, 설영진이 요남중의 인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에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설영진을 비판하였다.
노탄(盧坦)의 말에 나오는 외유중강(外柔中剛)의 중강(中剛)이라는 말은 내강(內剛)과 같은 뜻이다.
이에 앞서 동진(東晉)의 시중을 지낸 감탁(甘卓)이란 사람을 표현하면서 감탁이 외유내강(外柔內剛)하고 정치를 함에 관대하고 인자롭게 하였다고 진서(晉書) 감탁전(甘卓傳)에 나온다.
內陰而外陽 內柔而外剛.
내음이외양 내유이외강.
역경(易經) 부괘(否卦)에 ‘안은 음이고 밖은 양이며, 안은 유하고 밖은 강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외유내강(外柔內剛)은 그 반대의 뜻으로 밖은 유(柔)하고 안으로 강(剛)하다는 뜻이다.
도덕경(道德經)에서 노자(老子)는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겨낸다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몸도 부드러워야 건강하지만, 마음이 유연해야 정신도 몸도 건강해 진다며 부드럽고 약한 것이 굳세고 강한 것을 이겨 낸다(柔弱勝剛强 유약승강강)고 했다. 도덕경 36장 미명(微明)에서다.
도덕경 76장 계강(戒强)과 78장 임신(任信)에도 이어진다.
堅強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견강자사지도 유약자생지도.
굳고 강한 것은 죽음의 무리이고 부드럽고 연한 것은 삶의 무리이다.
天下莫柔弱於水 而攻堅強者莫之能勝.
천하막유약어수 이공견강자막지능승.
이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굳고 강한 것을 치는 데 물보다 나은 것은 없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겨낸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가 없어도 막아낼 수가 있을까. 속으로는 실력을 갖추고 부드럽게 대해야 함부로 덤비지 못한다.
강자가 약자를 대할 때도 힘으로 누르기 보다는 부드러움으로 감싸야 진정으로 승복한다. 이럴 때라야 진정 유능제강(柔能制剛)이 된다.
조선시대 선조(宣祖)의 신임을 받고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신흠(申欽)이 세상을 떠나자 이수광(李睟光)은 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명문을 남겼다.
신씨는 명문이라, 대대로 인재를 배출하여 고관들 줄 잇다가 공에 이르러 더 떨쳤네. 성품은 외유내강 나라의 보배로세
조선조의 문인인 이식 또한 〈증 이조참판 원주목사 유공의 묘갈명》〉중에서 다음과 같이 유공의 성품을 평가했다. ‘겸허하게 자기 몸을 낮추신 우리 군자, 외유내강의 성품을 갖추고서 넉넉하게 배운 뒤에 벼슬길에 진출하여, 오직 자신의 뜻 관철하려 하였지요.’
외유내강으로 재상에 오른 맹사성(孟思誠)
흔히 여말(麗末) 선초(鮮初)를 격변기라 한다. 그래서 그 시기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아무래도 영욕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1360년생인 맹사성(孟思誠)은 당대의 실력자 최영(崔瑩)의 손녀 사위이기도 했지만 별다른 파란을 만나지 않았다.
우왕(禑王) 12년(1386년)에 문과에 급제한 맹사성은 차곡차곡 진급을 거듭했고 조선이 건국되고도 태조(太祖) 때 예조의랑(禮曹議郞)을 지냈고 정종(定宗) 때에는 주로 간언을 맡는 직책에 있었다. 그리고 태종(太宗) 때에는 좌사간을 거쳐 동부대언(同副代言),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낸다.
그는 오로지 관리의 바른 길을 걷는 사람일 뿐 시세(時勢)에 곁눈질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직무 수행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는 일은 있었다.
1408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오른 그는 태종(太宗)의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한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이 잠시 역모의 혐의를 받고 있을 때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했다.
조대림은 태종이 가장 신뢰했던 재상(宰相) 조준(趙浚)의 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태종도 조대림을 의심했다가 진행 과정을 면밀히 지켜보면서 목인해(睦仁海)라는 자의 농간에 조대림이 놀아간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서는 상황을 즐기고 있던 터였다.
즉 태종으로서는 사위 조대림을 처벌할 생각은 없이 일단 일이 흘러가던 것을 지켜보던 중이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맹사성은 대사헌으로는 원리 원칙대로 일을 처리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 옥(獄)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고 실제로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실록(實錄)을 통해 맹사성의 관력(官歷)을 추적해 보면 이 일 말고는 특별한 허물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그저 중앙의 요직과 지방의 관찰사를 오가며 치적(治積)을 쌓아간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비결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다.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남에게는 너그러운 그의 천품이 흔히 환해풍파(宦海風波)라고 부르는 벼슬살이의 고단함을 순항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맹사성은 음율(音律)에 정통했다. 그래서 1412년에는 그가 풍해도도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영의정 하륜(河崙)이 맹사성을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아마추어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종 말기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마침내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어 판서의 반열에 오른 그는 이후 호조판서(戶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세종(世宗) 초에는 인사를 책임지는 이조판서(吏曹判書)가 됐다. 그리고 마침내 황희(黃喜)보다 1년 뒤늦은 1427년에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로써 좌의정 황희, 우의정 맹사성이라는 세종 치세의 쌍두 마차가 탄생했다.
태조(太祖) 때의 조준(趙浚)과 김사형(金士衡), 태종 때의 하륜(河崙)과 조영무(趙英茂)에 이은 황희(黃喜)와 맹사성(孟思誠) 콤비의 탄생이었다. 이후 세종실록(世宗實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현 중의 하나가 ‘황희 맹사성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였다. 정사 하나 하나를 두 명의 정승과 토의해 가며 결정했다는 것을 이 표현만큼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맹사성이 우의정으로 있을 때 눈길을 끄는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에게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의 감수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려고 했다.
그러자 평소 직언을 잘 하지 않던 맹사성이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하고 반대하니 세종도 이에 따랐다. 즉 성군(聖君)이라는 세종도 실록을 보고 싶어 했고 그것을 저지시킨 장본인이 바로 맹사성이었던 것이다.
조선 초의 관리이자 문필가인 성현(成俔)의 책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그의 넉넉함을 보여주는 일화가 실려 있다.
고향인 충청도 온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그가 비를 만나 경기도 용인의 어떤 숙소에 머물게 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경상도에서 올라온 부호(富豪)가 패거리를 잔뜩 거느린 채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고 우의정 맹사성은 방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부호는 맹사성을 불러 함께 장기를 두자고 했다. 이에 응한 맹사성과 한창 장기를 두던 중에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서로 공(公)자와 당(堂)자를 끝에 붙여가며 문답을 하자는 것이다.
이에 맹사성이 먼저 물었다.
“무엇 하러 서울에 가는 공(公)?”
“녹사(錄事) 벼슬을 얻기 위해 올라간당(堂)?”
“내가 그대를 위해 그 자리를 얻을줄공(公)?”
“우습구나. 당치도 않당(堂).”
이들의 공당(公堂) 문답은 여기서 끝났다. 한양으로 돌아온 맹사성이 의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녹사 시험을 보러 들어왔다가 맹사성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떠한공(公)?” 그 사람은 물러가 엎드리며 말했다.“죽을 죄를 지었습니당(堂)!”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맹사성이 전후사정을 이야기해줬다. 함께 했던 재상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맹사성의 추천으로 녹사가 되고 훗날 지방의 유능한 관리가 됐다고 한다.
여기서 짚어야 할 맹사성의 면모는 여유로움과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다. 그 여유로움이 환난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줬고 그 눈이 그를 이조판서와 정승 자리에까지 올렸기 때문이다. 그후 황희는 영의정으로 자리를 비키고 그가 마침내 1432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도 처신 명망맹사성은 고려 말부터 태조, 정종, 태종, 세종까지 마치 하나의 임금 밑에서 일을 한 듯이 관품이 높아졌다. 태종 때 고초를 겪은 것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정치 바람을 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윗사람에게 아첨을 일삼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논어(論語) 태백편(泰伯篇)에서 공자(孔子)가 말한 이 한 마디가 아닐까?‘그 자리에 있지 않을 때에는 그에 해당하는 정사를 도모하지 않는다.’ 아랫 자리에 있을 때는 윗 자리를 넘보지 않고 윗 자리에 나아가서는 아랫 사람들의 일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7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실록은 그의 치적보다는 그의 행실을 높이 평가해 이렇게 말했다. “벼슬하는 선비로서 비록 계제가 얕은 자라도 만나보고자 하면,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 맞아들여 상좌에 앉히고, 물러갈 때에도 역시 몸을 꾸부리고 손을 모으고서 가는 것을 보되, 손님이 말에 올라앉은 후에라야 돌아서 문으로 들어갔다.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이 사성에게 선배가 되는데, 그 집이 사성의 집 아래에 있으므로 늘 가고 올 때마다 반드시 말에서 내려 지나가기를 석린(石璘)이 세상을 마칠 때까지 하였다.”
맹사성은 예(禮)를 알아 재상에 오른 인물이다.
선비의 겸손과 의연함에서 인생의 좌표를 찾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겸손하라는 의미로, 선조(先祖)들의 삶의 지혜를 보여준다. 벽립만인(壁立萬仞)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만 길 높이의 절벽이 온갖 풍상(風霜)에도 변함없이 우뚝 서 있는 의연한 모습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이 속담과 사자성어는 삶에서 겸손(謙遜)과 의연함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특히 유학(儒學)을 숭상한 선비들은 겸손과 의연한 삶을 이상으로 여기며 실천하였다. 겸손과 의연함 속에는 험난한 역사와 현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타자를 배려하고,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살아 온 선조들의 절의(節義)와 삶의 좌표가 담겨 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의연함은 자신을 견결하게 지켜나가는 삶의 자세와 실천이다. 겸손과 의연함은 얼핏 관련이 적은 듯하지만,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둘을 인생의 덕목으로 설정하여 실천한 선비 정신에서 우리가 계승할 정신 자산을 확인할 수 있다.
유학은 선인들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유학의 일부 덕목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한다. 유학의 이념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존재는 선비[士]다. 선비는 유학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구현하고 일상생활에서 그 덕목을 실천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삶에서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겸손과 의연함이다.
유학 경전인 서경(書經)은 선비들이 이상적 제왕으로 여긴 요(堯) 임금의 덕(德)을 열거하면서 ‘진실로 공손하고 능히 겸양했다’라 하여 제왕의 덕목으로 겸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주역(周易)에서는 ‘천도(天道)는 가득한 것을 덜어내고 겸손한 것을 더해 주며, 지도(地道)는 가득한 것을 변하여 겸손한 데로 보내주고, 귀신(鬼神)은 가득한 것에 화를 주고 겸손한 것에 복을 주며, 인도(人道)는 가득한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 겸손이란 높고 빛나며 나직해도 넘어질 수 없는 것이니, 군자의 도(道)이다’라 하여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겸손을 실천하면 이로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지와 사람은 물론 귀신의 도움까지도 받을 수 있는 후원의 원천임을 함께 일러주고 있다.
공자(孔子) 역시 논어(論語)에서 겸손과 의연함이 중요한 덕목임을 강조하였다. ‘군자는 크거나 작거나 많거나 적거나 간에 감히 거만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라 한 언급과 ‘군자는 의리를 기본으로 하여 예의 있게 행동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라 제시한 경구는 겸손을 강조한 메시지다.
또한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여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의연함을 강조한 바 있다.
전근대 사회는 위정자로부터 선비에 이르기까지 정치와 일상생활에서 유학 경전에서 제시한 겸손과 의연함을 중요한 덕목으로 인식하고 이를 적극 실천하였다. 그런데 선비들이 추구한 겸손은 단순히 외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수양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저절로 밖으로 우러나왔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견결하게 지키려는 의연함과도 통한다.
의연함이 있는 자는 항상 겸손하고, 겸손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그 의연함을 지켜 나가는 힘을 지닐 수 있다. 그래서 선비들은 겸손을 통해 내면을 닦고 그것을 밖으로 발현하여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의연함을 삶에서 드러내었던 것이다.
황금 천 냥이 자식 교육만 못하다고 했다. 인간의 교육에 관한 예(禮)는 예기(禮記) 내칙(內則)편에 나온다.
十年 出就外傅 居宿於外 學書記.
십년 출취외부 거숙어외 학서기.
(남자가) 열 살이 되면 밖으로 나아가 기거하면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女子十年不出 娒敎婉娩聽從.
여자십년불출 모교완만청종.
여자가 열 살이 되면 밖에 나가지 않고, 현모의 도리를 온순하게 듣고 따른다.
모(娒)는 여자 스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의례(儀禮) 사혼례(士昏禮)에 그 본뜻이 기록돼 있다. ‘여자가 쉰 살이 될 때까지 자식이 없으면 집을 나와 다시 시집을 가지 않고, 부녀의 도리를 가르치는 선생이 된다.’라고 했다.
娒, 婦人年五十無子 出而不復嫁 能以婦道敎人者.
모, 부인년오십무자 출이불복가 능이부도교인자.
이러한 내외(內外)의 강유(剛柔)는 남존여비(男尊女卑)와는 다르다. 음양(陰陽)이 배합(配合)하는 우주 만물의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기운으로서 자연의 법칙인 것이다.
사람은 남자는 굳세고[剛], 여자는 부드러워야[柔] 한다. 사람은 이처럼 음양의 조화를 이루면서 천지와 더불어 숨 쉬는 것이다. 인간은 또 굳세고 부드러운 성품을 아울러 지니고 있으니 외유내강(外柔內剛) 해야 하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이치에 순응하는 아름다운 삶이라 해야겠다.
▶ 外(외)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동시에 음(音)을 나타내는 저녁 석(夕; 저녁)部와 卜(복)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점(卜)을 아침이 아닌 저녁(夕)에 보는 것은 관례에 어긋난다는 뜻이 합(合)한 글자로 밖을 뜻한다. 外(외)는 ①명사 어근(語根)에 붙어서 외가(外家)에 간한 뜻을 나타내는 말 ②일부 명사의 어근에 붙어 밖 바깥의 뜻을 나타내는 말 ③밖 이외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바깥, 밖, 겉, 표면, 남, 타인, 외국, 외가(外家), 어머니나 아내의 친척, 사랑, 바깥채, 타향, 남의 집, 언행, 용모, 앞, 이전(以前), 민간(民間), 조정에 대한 재야, 안일에 대한 바깥일, 사사(私事)에 대한 공사(公事), 멀리하다, 벗어나다, 빗나가다, 떠나다, 잊다, 망각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가운데 중(中), 안 내(內)이다. 용례로는 일을 하기 위하여 밖의 사람과 교제함을 외교(外交), 자기 나라 밖의 딴 나라를 외국(外國), 겉면이나 밖으로 나타난 모양을 외면(外面), 바깥 쪽이나 그 조직에 속하지 않은 범위를 외부(外部), 겉으로의 모습을 외모(外貌), 성 밖으로 다시 둘러 쌓은 성이나 바깥 테두리를 외곽(外廓), 외국의 화폐를 외화(外貨), 자기 고장 밖의 남의 땅을 외지(外地), 어머니의 친정 또는 외갓집을 외가(外家), 가정이 아닌 곳에서 식사하는 일을 외식(外食), 겉으로 보기에는 부드러우나 속은 꿋꿋하고 강함을 외유내강(外柔內剛), 겉치레는 화려하나 실속이 없음을 외화내빈(外華內貧), 겉으로는 굳게 보이나 속은 부드러움을 외강내유(外剛內柔), 겉은 허술한 듯 보이나 속은 충실함을 외허내실(外虛內實), 겉으로는 알랑거리며 아첨하나 속으로는 해치려 함을 외첨내소(外諂內疎) 등에 쓰인다.
▶ 柔(유)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矛(모, 유)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柔(유)는 나무를 폈다 굽혔다 하는 일, 또는 쌍날창의 자루로 쓰는 탄력성 있는 나무의 뜻을 나타낸다. 그래서 부드럽다, 순하다, 연약하다, 여리다, 무르다, 복종하다, 좇다, 편안하게 하다, 사랑하다, 쌍일(雙日; 짝숫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약할 약(弱), 나약할 나(懦), 거둘 수(收), 연할 취(脆), 쇠할 쇠(衰), 연할 연(軟),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굳셀 강(剛)이다. 용례로는 성질이 부드럽고 약하며 겁이 많음을 유나(柔懦), 양의 부드러운 털을 유모(柔毛), 연약하고 예쁨을 유미(柔媚), 부녀자에 대한 교훈을 유범(柔範), 어린 뽕잎을 유상(柔桑), 미인의 부드럽고 고운 손을 유악(柔握), 몸이나 마음이 약함을 유약(柔弱), 연하고 무르고 약함을 유취(柔脆), 부드럽고 연한 가죽을 유피(柔皮), 성질이 부드럽고 온화함을 유화(柔和), 부드럽고 매끈함을 유활(柔滑), 성질이 부드럽고 온순함을 유순(柔順), 부드럽고 연함 유연(柔然), 유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유능제강(柔能制剛) 등에 쓰인다.
▶ 內(내)는 회의문자로 内(내)는 통자(通字), 内(내)는 간자(簡字)이다. 토담집 따위에 들어가는 일의 뜻으로, 멀경몸(冂; 경계, 성곽)部는 여기에서는 나중에 갓머리(宀; 집, 집 안)部로 쓰는 것으로서 궁전이나 집을 나타낸다. 궁전이나 집에 들어가는 일을 말한다. 어느 범위 안으로 들어감의 뜻으로 들어감, 안쪽의 뜻이다. 內(내)는 무엇의 안이라는 뜻으로 안, 속, 나라의 안, 국내, 대궐, 조정, 궁중, 뱃속, 부녀자, 아내, 몰래, 가만히, 비밀히, 중(重)히 여기다, 친하게 지내다 등의 뜻과 들이다(납), 받아들이다(납)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깥 외(外)이다. 용례로는 사물의 속내나 실속을 내용(內容), 국내에서의 수요를 내수(內需), 물체나 장치나 구조물 등의 안쪽 부분을 내부(內部), 분명하고 자세한 내용을 내역(內譯), 남에게 대하여 자기의 아내를 일컫는 말을 내자(內子), 나라 안과 나라 밖을 내외(內外), 어떤 성질이나 뜻을 그 속에 지님을 내포(內包), 아낙네들이 거처하는 안방을 내실(內室),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를 내륙(內陸), 나라 안 싸움을 내전(內戰), 나라 안에서 정권을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는 난리나 반란을 내란(內亂), 안쪽 또는 마음을 내면(內面), 나라 안의 걱정 근심을 내우(內憂), 어떤 사물이나 범위의 안에 있음을 내재(內在), 마음속으로 작정함을 내정(內定), 속은 부드럽고 겉으로는 굳셈을 내유외강(內柔外剛), 겉으로 보기에는 유순하지만 속마음은 단단하고 굳셈을 내강외유(內剛外柔), 내부에서 일어나는 근심과 외부로부터 받는 근심이란 뜻의 내우외환(內憂外患), 겉으로 보기에는 가난한 듯하나 속은 부유함을 이르는 말을 내부외빈(內富外貧), 마음속으로는 소홀히 하고 겉으로는 친한 체함을 내소외친(內疏外親) 등에 쓰인다.
▶ 剛(강)은 형성문자로 㓻(강)과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선칼도방(刂=刀; 칼, 베다, 자르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岡(강; 단단하다)으로 이루어졌다. 쉽게 굽거나 부러지지 않는 단단한 칼이, 전(轉)하여 강하다는 뜻이 있다. 그래서 剛(강)은 굳세다, 강직하다, 억세다, 단단하다, 성(盛)하다, 한창이다, 강철, 강일(剛日), 임금, 수소(소의 수컷), 양(陽), 바야흐로, 굳이, 겨우, 조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굳셀 간(侃), 굳셀 건(健),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부드러울 유(柔)이다. 용례로는 마음이 곧고 뜻이 굳세며 건전함을 강건(剛健), 성품이 단단하고 빳빳함을 강견(剛堅), 성품이 단단하고 꿋꿋함을 강경(剛勁), 과단성 있게 결단하는 힘을 강단(剛斷), 금속성의 물질을 잡아 당기어 끊으려 할 때 버티는 힘의 정도를 강도(剛度), 물체의 단단한 성질을 강성(剛性), 굳세고 용감함을 강용(剛勇), 굽히지 않는 굳센 의지를 강지(剛志), 성미가 깐깐하고 고집이 셈을 강퍅(剛愎), 스스로의 재능과 지혜만 믿고 남의 말을 듣지 않음을 강려자용(剛戾自用), 강하고 부드러움을 아울러 갖춤을 강유겸전(剛柔兼全),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을 비유하는 강의목눌(剛毅木訥), 마른 나무에서 물을 내게 한다는 강목수생(剛木水生), 굳센 창자의 뜻으로 굳세고 굽히지 않는 마음을 비유하는 강장(剛腸)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