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화성궐리사(烏山華城闕里祠)
- 지정 : 경기도기념물 제147호
- 위치 : 경기도 오산시 매홀길 3 (경기도 오산시 궐동 147)
현재 대한민국에는 2곳에 공자의 사당인 궐리사가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가 오산시의 화성궐리사이며, 또 하나는 논산시의 노성궐리사이다.
오산시의 화성궐리사에는 공자의 생애를 그림으로 판각한 국내에 하나 밖에 없는 성적도도 보관되어 있다. 화성궐리사는 1792년(정조16년) 정조의 칙명(왕의 명령)으로 창건된 공자의 사당이다.
화성궐리사를 오르는 계단
화성궐리사의 공자성상
정조가 화성궐리사를 오산시 궐동(당시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에 창건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정조는 1769년(영조38년) 영조의 미움을 받아 뒤주에서 비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죄인의 자식이 되어 갖은 파란을 겪은 정조가 1776년(영조52년) 우여곡절 끝에 조선의 22대 왕에 등극한다.
왕위에 오른 정조는 집권 초기부터 개혁정책을 통하여 정치적 기반을 닦고 왕권을 회복한 후 숙원이었던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가 있던 화산으로 옮겨 장차 능으로 격상시키는 완전한 복권을 도모한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던 당시는 신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왕권이 쇄미했다. 이미 서울은 노론 신료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론 일당 세력에 다른 당인 세력이 대항하기는 역학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을 전환시키기 위해 교통의 요지로 손꼽히는 수원을 신도시의 거점으로 정하고 새로운 왕권의 강화를 구체화한 것이다.
이와 같은 정책을 실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민심의 호응이었다. 정조가 믿을 수 있는 세력은 백성의 힘과 유림뿐이었다. 정조는 선대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개혁의 명분으로 학문을 앞세우는 정치를 하며,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바꿔가는 길을 선택한다. 서울에 버금가는 신도시의 개창 필요성은 이러한 왕권 강화책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정조가 제2의 왕도격인 신도시를 현 수원시에 건설하여 군사와 경제의 강화를 도모하여 정치적인 힘을 키우고자 했다면, 현 오산시 궐동(당시 중규면)에 공자 사당인 화성궐리사를 개설한 것은 이곳을 조선 유림의 총 본산으로 만들어 유림들로 하여금 공자의 충(忠) 사상을 통해 그들의 단합된 힘을 정조 자신에게로 집중케 하는 것이 왕권 강화를 위한 실질적 대책이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선의 백성, 즉 자신의 백성들 삶을 책임지는 따뜻한 왕권의 단초라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의중을 담고 정조는 경기 감사에 명해 공부자의 성문을 보수토록 하고 공자가 살았던 중국 노나라에 있는 궐리사를 본떠 사액하고 당시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의 동명을 궐리로 개칭케 하니 이로부터 화성궐리사란 공자의 성묘가 이 땅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화성궐리사 은행나무, 수령이 근 500년(470년)으로 추정된다
당시 화성부 중규면 구정촌이었던 이 화성궐리사터는 중종 때 경기·황해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하고 기묘사화의 명현으로 이름난 공서린이 낙향하여 후학을 양성하던 서원의 유허이었다.
이로부터 매년 동하절기에 예조에서 관상감에게 명해 3월과 9월 상순으로 택일해 어제 축문과 봉향을 하사하여 춘추로 석전을 봉행토록 하였다. 현재도 춘계, 추계에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헐어 내어 걷어 버림)되었다가 다시 1900년 나라의 승인을 얻어 성묘를 중건하였다. 1901년 이래로 여러 차례 강당이 재건되었다. 현재 건물은 1981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그 후 삼문·홍살문 등이 갖추어졌다.
화성궐리사 성상전
화성궐리사는 외삼문에 성묘(聖廟)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계단 입구에 하마비가 세워져있다. 배치는 본 건물에 공자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사당 전면 좌측에 성적도를 봉안한 장각이 있었다.
그 사이에 1993년 7월에 중국 산동성 곡부현에서 기증한 공자의 석조성상이 안치되어 있다. 석상을 모신 기단부에는 공자가 태어난 때의 모습을 조각으로 새기고, 안자, 맹자, 증자, 자사 등 성인들이 공자를 모시고 서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사당과 담장 밖으로 한단 낮은 곳에 재실이 있었는데 화성궐리사 경재는 1996년 경기도와 오산시비 지원으로 건립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공부자문화전시관과 강당으로 새롭게 정비되었다. 2009년 8월에 상량한 화성궐리사행단이 건립되었다.
화성궐리사 공부자문화전시관
은행나무 아래 새로 지어진 학당, 양현재에서는 여전히 공자의 교학사상을 이어가기 위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방학을 이용한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비롯해,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다도, 서예, 예절교육 등이 그것이며, 그 연장으로, 해마다 효자 효부, 선행 어린이 표창 사업 등도 활발히 펼쳐나가고 있다. 전통혼례식도 이곳에서 할 수 있다.
화성궐리사의 행단
정조대왕 어진
우리가 화성궐리사를 바라봐야 하는 관점은 단지 동양의 한 위대한 사상가이며, 철학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라고만 인식해서는 부족하다.
외롭고 처절한 삶을 하루하루 살면서도 백성의 안녕을 자신의 책임으로 품고 조금이라도 정의롭고 평안한 삶을 이어주기 위해 절치부심한 정조라는 조선의 한 위대한 위민정치가의 심중과 숨결이 서린 곳으로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곳 화성궐리사를 통해 정치적인 힘으로 영글었다면 보다 나은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위민사상의 상징이 되는 곳이 이 화성궐리사인 것이다. 공자의 사당이지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면 정조의 사당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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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산시 화성궐리사에 대한 내용
화성궐리사 인성학당 밴드로
옮겨갑니다.
글 옮기느라 수고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