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58
7월21일[연중 제1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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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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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G-yzhdiWN-8
(이정훈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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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극히 인간적이고 인본적이며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안식일 규정!>
바야흐로 여름 신앙학교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하루 온 종일 캠프 오는 청소년들의 안전을 위해 뙤약볕 아래서 콘크리트 작업을 했습니다. 모래와 시멘트, 물을 적절히 배합해서 콘크리트를 만든 후 채워 넣는 일인데, 무게가 만만치 않아 허리가 휠 지경이었습니다.
몇 시간 일하고 나니 하늘이 노란 게, 거품 물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이러다 쓰러지지 하면서, 수시로 쉼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틈만 나면 물을 마시고, 목에다 들이부었습니다.
일과 휴식의 적절한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실감했습니다. 더불어 삼복더위에 냉난방 설비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지하 주차장에서, 체감온도가 6~70도 까지 올라가는 철판 위에서 작업하시는 분들, 얼마나 고생이 많으실까, 걱정됩니다.
유다인들이 목숨처럼 중요시여기던 안식일법 규정, 그 근본 취지는 참으로 합리적이면서도 상식적인 것, 인간적이고도 유익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강요되고 있던 안식일법 규정은 참으로 모순되고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목숨처럼 중요시 여기던 안식일 규정을 통쾌하게 파기하십니다.
주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내는 동시에, 지친 우리 인간과 동물과 땅과 자연에게도 휴식 시간을 부여하는, 참으로 유익한 안식일 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안식일법 규정을 제정한 취지는 참으로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주간 내내 열심히 일했으니 주말에는 편안히 휴식을 취하자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규정이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기도도 바치고,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책도 좀 읽고, 맛있는 것도 해먹고...
그런데 안식일 관련 세부 규정이 하나하나 추가되면서 정말이지 ‘웃픈’ 규정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 제정된 안식일 규정이 인간을 못살게 굴고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드는 규정이 되고 만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심기를 거스르게 한 사건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부분을 서술함에 있어서 마르코 복음사가는 마태오 복음사가·루카 복음사가와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루카 복음사가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먹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품위를 살려주기 위해서인지 예수님께서 불편 없이 지나가실 길을 내기 위해서 밀 이삭을 뜯었다고 기록합니다.
어쨌든 밀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 39가지에 해당됩니다. 일종의 추수 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바리사이들의 특징인 지나친 확대해석,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행위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여차하면 고발할 건수 하나 잡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커다란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바리사이들의 옹색함과 완고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예수님의 모습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은 어떠합니까? 이웃들, 특히 매일 매 순간 함께 지내는 이웃들을 향한 시선, 나와 생각과 의견, 사상과 지향점이 다른 이웃들을 향한 시선이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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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IEJNgQBd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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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안식을 누릴 이들은 이 세상부터 안식을 누린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에게 들켜 비난 당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고 하시며,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라고도 하십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이 명확하게 안식일을 어기고 도둑질까지 하였는데 죄가 없다고 하실까요? 또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심선미 씨는 무당이었다가 하느님을 만나 회개한 사람입니다. 몸이 갑자기 아프고 자신 안에 신들이 들어 있음을 알았을 때 신내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신들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들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았고 학대하였으며 그녀는 결국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몰라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배를 탔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반면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글렌 스턴스는 100달러(약 12만 원)와 고물 트럭 한 대만 가지고 90일 안에 100만 달러(약 12억 원)의 부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챌린지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서 막 일부터 시작하고 그것으로 축제 때 풍선을 팔고 그것으로 중고 자동차를 수리해서 팔고 그다음은 집을 사서 수리해서 팔아 그 이익 1억 원 정도로 언더독이라는 바비큐 브랜드를 런칭합니다. 그 마을에 커다란 바비큐 행사가 있다는 것을 기회로 잡아 1등을 하여 상표 가치를 높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게 평가액은 75만 달러였습니다. 어쨌든 10만 원으로 석 달 만에 10억을 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석 달 동안 월급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는 이들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왠지 모를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글렌 스턴스라는 사람이 매우 친절하고 자신들을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확신에 찬 그의 행보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잡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심선미 씨 마음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글렌 스턴스는 자신을 따르는 1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돈도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키지만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꼭 이 사업을 이뤄낼 수 있고 결국엔 그들을 행복하게 할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전이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안식 안에 머무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배를 탔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립니다. 이것이 참 안식처를 찾는 방식입니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배에 절대 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하느님 창조 사업에 뛰어든 이는 이미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이미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 있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적군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책임이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된 나라를 선택한 것은 본인 책임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나라 안에서는 그런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 창조 사업에 뛰어든 이들은 이미 피 흘림, 곧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갈라 2,19-20 참조).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 4,9-10) 우리가 참 안식으로 가고 있음은 믿음으로 느끼는 평화의 감정으로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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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1-8: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안식일이란 깊은 의미를 보면, 하느님을 위한 것이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 즉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그래서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은 더구나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 한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해결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했는지 묻고는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 제물은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한다,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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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성지순례가 끝났습니다. 4월에는 요르단 이스라엘, 5월에는 그리스 터키 그리고 6월에는 이탈리아엘 다녀왔습니다. 이탈리아 순례는 제가 3년 동안 주일 미사를 도와주는 부르클린 성당 공동체와 함께 했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함께한 순례자들 이름을 처음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이번에 종신부제품을 받은 리차드 부제와 아내 세라피나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 다니엘과 브라이언 그리고 엄마 프란체스카, 가브리엘과 라파엘 그리고 엄마 보나, 요한과 바오로 그리고 엄마 요세피나가 있습니다. 모녀가 온 프란체스카와 나오미가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한 마르꼬와 수산나, 마태오와 수산나, 요셉과 벨라데따, 프란치스코와 안나, 요한과 아녜스, 유스티노와 비아가 있습니다. 혼자오신 스텔라, 헬레나, 페트리시아, 세실리아, 레지나, 율리안나, 안나, 마리아, 카밀라가 있습니다. LA에서 합류한 프란치스코와 프란체스카 부부가 있고, 코네티컷에서 합류한 마틸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부른 경우가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부르신 제자 12명이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요한, 토마, 바로톨로메오, 시몬, 유다, 가리옷 유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필립보, 마태오”가 있습니다. 비록 가리옷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상의 순례를 마쳤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던 자캐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자캐오에게 "이 집은 구원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던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니 마리아는 '라뽀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니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를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물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새겼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었고, 마귀를 쫓아내었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성지순례는 오래된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높은 절벽에 있는 수도원을 보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성물을 사고,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 또한 성인들을 모범을 따라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을 갔어도 삶의 태도가 변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번도 가지 못했어도 이미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오늘 예수님께 ‘안식일’에 대해서 토론을 합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으로만 안식일을 바라보면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세상의 것을 떠나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맞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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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가 죄인인가?>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마태 12,1-4)
안식일의 ‘첫 근거’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창세 2,2-3)
‘두 번째 근거’는 탈출기에 있는 십계명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한 것이다."(탈출 20,8-11)
‘세 번째 근거’는 신명기에 있는 십계명입니다.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
너는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하였고, 주 너의 하느님이 강한 손과 뻗은 팔로 너를 그곳에서 이끌어 내었음을 기억하여라. 그 때문에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명령하는 것이다."(신명 5,12-15)
탈출기의 십계명과 신명기의 십계명을 합해서 생각하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사랑’입니다. “네가 쉬고 싶으면 남도 쉬게 해 주어라.”
안식일에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서 그들도 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먹고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쉬는 날도 없이 노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도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은 ‘내가’ 쉬는 날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쉬는 날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작업을 마치시고 나서 그 후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기만 하실까?”라는 점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보호하고 사랑하는 일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 그래서 나도 안식일에도 쉴 수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쉬는 날’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것만 보았고, 제자들의 배고픔은 보지 않았습니다. <못 본 것이 아니라 외면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셨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그냥 심심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것이라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지금 그 밀밭이 누구의 밭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제자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제자들의 사정을 먼저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배고픔’이라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먹을 것을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먼저라는 가르침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안식일 준수만 강요하는 것은 ‘폭력’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십계명과 ‘하느님의 뜻’을 내세우지만, 그런 폭력은 결코 하느님의 뜻도 아니고 계명 실천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느라고 안식일 규정을 어긴 제자들은 죄인이 아니고,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지는 않고 율법 준수만 강요한 바리사이들이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배가 고프기만 하면 안식일을 안 지켜도 되는가? 배고픔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얼마나 배가 고파야 하는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각자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싫어서 안 지켰으면서도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진심으로 지키고 싶었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못 지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실제 현실을 보면, 정말로 몸이 아파서 누워 있느라고 주일을 ‘못 지킨’ 사람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고해성사를 보는데, 놀러가느라고 ‘안 지킨’ 사람은 대충 가볍게 대송을 바치는 것으로 때우고 마음 편하게 지나갑니다.
진짜 율법주의자는 누구인가? 이 시대의 바리사이들은(위선자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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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유다교의 안식일에 관한 규정은 그 수가 많기도 하거니와 매우 철저하였습니다.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유다인들의 종교 생활에서 하느님의 창조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복음서는 주로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의 갈등을 안식일 규정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먹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와 관련된 규정은 신명기 23장 26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 여기에 안식일에 대한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율법을 해설한 문헌에서는 안식일에 이렇게 하는 것을 금합니다. 복음에서 말하는 다윗과 그 일행에 관한 이야기는 사무엘기 상권 21장 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안식일에 바치는 제물에 관한 것은 민수기 28장 9-10절에 나옵니다. 안식일이지만 사제들은 제사를 바칩니다.
예수님께서 예로 드신 것은 모두 ‘하면 안 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대조처럼 보입니다. 종교적인 규정들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을 정하여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규정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본뜻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라는 말씀도 맥을 같이 합니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주간의 축제입니다. 규정을 따르는 것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본뜻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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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배상희 마르첼리노 신부님]
<내 스스로 율법의 족쇄에 자신을 옭아매지 맙시다>
주일 날 공원에 가면 놀러 나온 사람들 상대로 아이스크림이나 솜사탕을 팔면서 생계를 꾸려 가는 난전 상인들을 봅니다.
그들에게 ''주일에는 일하면 안 된다. 쉬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는 생계가 걸린 문제입니다. 그래도 ‘굶는 한이 있어도 주일은 쉬어야 한다’ 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들에게 신앙은 구원이 아니라 죽음일 것입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금하는 계명은 사람을 힘든 노동에서 해방시켜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마음껏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과 규칙은 자유와 질서를 보장받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법과 규칙이 그 본래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사람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경우를 봅니다.
바리사이처럼 배가 고파서 밀 이삭 하나 잘라먹은 것도 추수한 거라고 우겨대면 할 말 없습니다. 너무 쉽게 내 편한 데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지만 형식적인 규정 준수에만 급급하는 모습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오늘날 안식일 계명은 주일에 관한 계명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복잡하고 바쁜 현대인들을 배려해서 한국 주교회의는 토요일 오후 4시 이후에 바치는 미사는 주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규정을 자기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루를 휴식하면서 하느님을 위한 날로 봉헌하려는 마음은 간데없고 어떻게 해서든 미사에만 참여하면 된다는 때우기 식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건 좀 났습니다. 아예 습관적으로 주일 미사에 빠지고도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다음에 성사 보면 되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 스스로 율법의 족쇄에 자신을 옭아매지 맙시다. 오늘 하루 나는 교회의 법 규정 앞에 얼마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안식일은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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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신부님]
<무엇이 더 중요한지?>
최근 인터넷상의 명예훼손이나 개인정보 유출 등 사이버 테러가 빈번해지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말이 ‘인터넷에 올린다.’는 말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사이버 명예훼손과 협박·사이버 스토킹·성폭력 등을 포함한 사이버 범죄가 무려 3배 가까이 늘어서 지난해만 해도 무려 6만 1709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를 대변이라도 해주듯이 내가 평소 좋아하는 가수 성시경의 앨범 속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함께 나눠볼까 한다.
“발라드 가수는 화장실도 못 간다. 학교에서 화장실을 가면 성시경 화장실에서 봤다고 인터넷에 올리고, 사인해 달라고 해서 사인해 줬더니 성시경 손톱에 때꼈다고 다음날 바로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싶어서 며칠 간 머리 몇 번 안 감았더니 냄새 난다고 올리고, 뒤에서 누가 ‘저기요, 저기요.’ 하기에 ‘네?’ 하고 돌아봤더니 ‘실물은 별로였어요.’라는 글이 인터넷에 올려져 있다.
나도 사람인데…. 또 한번은 화가 나서 뭐라 그랬더니이번에는 성격 안 좋다고 올린다.
나는 모든 글 쓰는 사람들을 다 존경하지만 그런 글들은 좀 그렇다. 난 인터넷 가요제 출신 가수지만 인터넷이 싫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가수 해봤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는 비단 가수 성시경의 하소연만은 아닐 것이다. 공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겪어보았을 그런 흔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내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고, 2천 년 전 예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불쌍한 병자들이나 고아·과부들과 함께 계시면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뭐라 하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시거나 밀 이삭 몇 개 뜯으셨을 뿐인데도 안식일법을 어겼다고 책망을 한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만 감시하면서 살아가나 보다. 오랜만에 만난 사촌 여동생들과 술 한잔 했는데 다음날 ‘우리 신부님 여자랑 술 마시더라.’ 소문나고, 어쩌다 미사 시간에 늦어서 급한 마음에 신호 한 번 무시하고 지나치면 ‘난폭 운전 좀 그만 하세요.’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누군가가 있나 보다.
무엇이 중요한지 제대로 알면 좋겠다.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아껴주셨던 예수님 마음,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값비싼 희생제물보다는 이웃들에게 베푸는 소박한 관심과 사랑이 더 위대하다는 진리를 모든 이들이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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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처음 만난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눈에 반하여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매력에 이끌려 설레는 것이지, 진정한 사랑의 모습과는 다를 것입니다.
사랑하려면 많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의 장점과 단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꿈과 목표 등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부터 열까지 잘 알아야지만 사랑할 수 있겠지요.
또한 서로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을 공유하고 서로 배려해야 합니다. 상대와 자신의 모습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 거리를 좁혀 갈 때 사랑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다름을 같음으로 만들어 가려면 상대를 배려하고 내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며, 때로는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견디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서로 닮아 가며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려 주십니다.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시는지, 무엇을 바라시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려 주십니다.
이를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는 당신께서 ‘너희의 하느님이 되어 주고, 너희는 그분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 (신명기 26장 16절-19절 참조)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리와 신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앎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함께 살아가고자 같은 생각과 뜻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것으로 채우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을 채우지 않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권위를 세워 자신을 드러내려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또한 나름의 규칙과 법을 정해 놓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법을 정해 놓았습니다. 그 법이 누구를 위한 법이고 규칙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편하려고, 나에게 위로와 희망과 즐거움을 주려고 만든 법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뜻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지키는 법인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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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핵심을 놓치지 마라>
가끔은 많은 것을 아는 척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면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무안을 주면 다음부터는 좀 겸손해질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마음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고 넘어갑니다. 그야말로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그를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각 분야에 전문가가 넘쳐나는 현실에 섣불리 아는체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은 행위에 대해서 좋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안식일 법에는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서는 안 되는 노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 항의하자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에 있다” 하시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려주신 것입니다. 메시아이시고 안식일의 주체이십니다. 그러니까 시쳇말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밀이삭을 잘랐다는 것은 안식일에 추수하지 말라는 규정을 어긴 것이고 손으로 비벼서 먹었다면 타작하지 말라는 조항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손으로 비벼서 후후 불어 껍질을 털어냈다면 키질하지 말라는 법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를 뜯는 것도, 불을 지피는 행위도 금지사항입니다. 닭이 안식일에 알을 낳았다면 그 역시 먹을 수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렇게 철저히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기 위하여 만든 규정들이 오히려 올가미이고 짐이 되었으며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유다인이 살고 있는 이웃에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을 두드려서 나갔더니 자기 집의 가스 불을 꺼 달라고 부탁을 하더랍니다.
가스 불! 자기가 끄면 되지! 그런 부탁을 하러 오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안식일이 되기 전 불을 켰는데 끄기도 전에 안식일이 온 것입니다. 불을 지피는 일을 금지하고 있으니 안식일이 다 지나가기까지 켜 놓을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겉모양에 묶여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당신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법조문을 지키기에 앞서 법의 의미와 내용을 살리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푼 다음 의식상의 규정을 준수하라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알맹이보다는 껍데기에 충실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오늘 우리는 알맹이를 빌미 삼아 규정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여 꾸중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편리에 따라 정당화시키면서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찾기보다는 내 취미와 즐기는 일을 더 우선시하고 기도와 미사는 뒤로 미루고 있으니 말입니다.
주님의 날은 주님과 함께 쉬어야 합니다. 주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면 거룩함이 넘쳐나게 되고 이웃도 우리 안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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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방송 프로를 통해 알게 된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개소리에 대하여’(해리 G.프랭크퍼트)
이 책에서 개소리를 영양가 없이 무작정 내뱉은 어른들의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개소리가 어떤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자녀는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들 탓이라는 거 인정하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 욕망을 솔직하면서도 품위 있게 말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 반대가 될 때가 참 많습니다. 자기 욕망을 꼭꼭 숨기려고만 합니다. 그럴싸한 말을 하고 있지만, 자기를 드러내려는 말뿐입니다. 결국 위와 같은 개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개소리를 통해 자신이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히려 사람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맙니다. 서로가 상처가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겸손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맨 앞자리가 아닌 맨 끝자리를,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개소리’보다 진정한 사랑이 담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말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중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가지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에 걷는 행위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km 이상을 걸으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밀밭 사이를 걸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줄 알았지만,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항의합니다. 율법을 확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추수가 되고, 손으로 이삭을 비볐다고 타작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자기들은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확대해석했던 것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바리사이들의 이 말들은 분명히 ‘개소리’가 됩니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개소리’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으로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율법으로 사람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지금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함께하시는데 어떻게 이런 ‘개소리’를 남발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개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와 아픔을 주는 말이 아닌,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대립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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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까이>
마태오 12,1-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가까이>
사람과 규정
사이에서
사람 가까이
속뜻과 글자
사이에서
속뜻 가까이
자비와 제물
사이에서
자비 가까이
포용과 단죄
사이에서
포용 가까이
살림과 죽임
사이에서
살림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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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이 오늘 제게는 두 가지 차원에서 묵상하게 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종이 아니라는 것이고, 안식일의 종이 아니라는 것은 안식일에 자유로운 것이라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아들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니 사람의 아들인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차원입니다.
먼저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기에
안식일에 자유롭다는 차원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자유롭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안식일에 내 마음대로 한다는 뜻입니까?
우리 인간이라면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면 당신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답게 또는 주인 의식을 가지고 안식일을 지내실 겁니다.
무엇이 참 안식이고, 어떻게 해야 참으로 안식을 얻고 누릴 수 있는지 알고 지내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느님 안에 머무시는 것이 진정한 안식이라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안식을 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제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 당신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는 말씀을 우리가 들었는데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을 오늘 이어서 듣는 이유가 주님처럼 사람의 아들인 우리도 이렇게 안식을 얻으라는 뜻일 겁니다.
안식일에 쉬라는 것은 일을 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쉬라는 것이고, 일하지 않고 놀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쉼으로써 힘을 얻으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주님처럼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차원을 보겠는데,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오시고, 계속하여 당신은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처하십니다. 그 뜻은 당신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으니 사람의 아들들인 우리는 당신처럼 되는 것, 곧 하느님의 아들이 되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안식일의 종이나 노예가 아닌 주인이라는 고귀한 정체성을 부여하시며, 고귀한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에게 촉구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고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으로 자기들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그렇게 중요한 안식일보다 우리가 더 소중하다고 높여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가 헛것으로 만들고 값없이 만들어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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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살림의 주님, 구원의 주님, 시詩같은 인생>
- 사랑은, 예수님은 분별의 잣대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깨어나 당신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어제의 만남을 잊지 못합니다. 시詩같은 만남이요 시詩같은 수녀님이었습니다. 한주간 조용히 피정집에서 휴가하다 떠난 수녀님인데 20년만에 왔다 했습니다. 선량하고 순수한 모습에 마음이 편했는데 알고보니 서울예대 문창과를 나온 동시童詩 작가 수녀님이었습니다. 수녀님과 시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지막 제 청담淸談에 제가 감동했습니다.
“수녀님 동시가 좋다한들 수녀님만 하겠습니까? 수녀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참 좋은 시입니다.”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그대로 한편의 시같습니다. 아름다운 인생은 그대로 한권의 성서같고, 한편의 시같고, 한폭의 그림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렇고 탈출기의 모세가, 또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 그러합니다. 제 소박한 소원도 시같은 인생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수녀님은 크게 깨달은 듯 무척 기뻐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수녀님의 인생이나 모습이 시처럼 보였습니다. 서울예대라 했는데 우리 삶은 인생의 예술대학이라 해도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장은 살림의 주님,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이구요.
마침 떠날 때 어느 착한 자매님이 많이 제본해준 “하늘과 산”이라는 자작 시집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제가 가장 아끼는 1997년 첫 번째 제본한 시집입니다. 26년전 시들로 지금도 자주 인용하지만 인용할 때 마다 좋고 새롭습니다. 시들중 제가 참 좋아하는 두편을 읽어달라 했고 감상했습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제가 사랑하는 여기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볼 때 마다 되뇌이는 시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2
하느님 찾는 일에 지쳐있을 때 조용히 주님 안에 머물러 읽어보며 자신을 충전시키는 시입니다. 시같은 인생, 얼마나 멋진지요. 그 빛나는 모범이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참 좋은 최고의 시입니다. 온통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에 온힘을 다 쏟은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시같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어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 예수님의 말씀후에 오늘 전개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이를 본 바리사이들의 지적입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배고픈 살아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고 안식일법의 잣대로 판단하는 바리사이들입니다. 도대체 그 마음에 연민의 사랑이 없습니다. 자유롭게 하는, 생명을 주는 사랑이 없습니다. 안식일법에 매어 있는 자유롭지 못한 영혼입니다. 이어 다윗 일행을 예로 들면서 이들의 무지를 일깨운후 최종적 결론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감동으로 와닿는 너무나 멋진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법이 아니라 자비가, 성전보다 큰 분,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이 분별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자비에 정통했던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름다운 시같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온통 사람을 살리는 일, 구원하는 일뿐이었습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사랑뿐이요 사랑의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자유로운 처신은 자비하신 하느님과 일치의 깊은 관계에서 기인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을수록 자비롭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대자대비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대자유인입니다. 자유롭고 싶습니까? 자비로운 하느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자비와 지혜의 주님 한분뿐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앞에서는 상대화됩니다. 절대적 법은 사랑의 법입니다. 살리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치유하는 사랑, 구원하는 사랑이 바로 분별의 잣대입니다. 과연 이런 경우 예수님은 어떻게 하였을까? 깊이 생각하면 답은 곧 나옵니다. 그러니 사랑이신 예수님 역시 참 좋은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한결같이 주님과의 일치를 추구하며 다음처럼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늘 읽어도 좋고 새로운 주님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이런 주님을 닮아갈수록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참 좋은 분별의 지혜에 참으로 자유롭고 자비로운 참나의 실현이요 아름다운 시같은 인생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바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입니다. 희생제물이 상징하는 바 전례의 무시가 아니라 최종의 분별의 잣대는 율법도, 전례도 아닌 자비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탈출기의 모세를 통해서도 당신의 살리시는 구원활동을 계속하십니다.
모세 인생 역시 하느님의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는 부활성야 구약독서중 생략해서는 안되는 독서에 속합니다.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신 주님 사랑의 위업을 기리는 파스카 축제입니다. 오늘 탈출기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이날이야말로 너희의 기념일이니, 이날 주님을 위하여 축제를 지내라.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일로 지내야 한다.”
우리는 매일 미사전례를 통해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파스카 주님을 업적을 재현합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아름다운 살아있는 시가 파스카 예수님이요 파스카 미사전례입니다. 말 그대로 파스카의 현재화를 이뤄주는,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변모시켜주는 미사은총이요, 날로 주님을 닮아 시같은 아름다운 인생으로 변모시켜주는, 날로 분별의 지혜를 더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리라.“(시편116,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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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8)
<법의 근본!>
오늘 복음(마태12,1-8)은 '율법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밑밭 사이를 지나가고 계실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윗 때에 일어났던 일을 상기 시켜주시고 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12,7-8)
모든 법의 근본은 살리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을 살리고 보호하기 위해 법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특히 약자들을.
하느님의 법인 율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은 십계명과 모세오경의 말씀인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사람들이 율법의 세부 규정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는데, 그것이 613개나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그 규정들이 율법의 근본을 파괴했습니다. 사람들을 판단하고 단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이러한 법들과 싸우셨습니다. 율법이 법의 본질이요 근본인 사람을 살리는 법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눈에 가시였던 예수님께 율법 파괴죄를 씌워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법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에 분명하게 계시되었습니다. 이 법이 교회 공동체에서나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을 살리는 법으로 자리 잡고 있는지... 더 나아가 우리나라가 만들어 놓은 헌법이나 여러 규정들이 사람들을, 특히 약자들을 살리고 보호하는 법으로서의 근본 구실을 잘하고 있는지, 한번 곰곰이 성찰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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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6B3drfxOP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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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 7)
오만과 편견을
내려놓는
사람의
안식일입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안식일의 자리에
오히려 사람이
없습니다.
안식일의 폭력이
사람을 향하는
무자비한
단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단죄는
일방적이고
단죄는
무책임하며
단죄는 지나친
착각이며
욕심입니다.
어디까지가
안식일의 규정이고
어디서부터가
안식일의 규정이
아닌지를
묻게 뎝니다.
하느님 앞에
안식일 규정집을
꺼내 내미는
어리석은
우리들 삶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에
결코 끌려다니지
않으십니다.
단죄받지 않는
사람의 인식일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사랑을 빚어
만드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잘못된 삶
잘못된 심보를
고쳐나가시는
예수님의
안식일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안식일은
가짜입니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을 안고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성한 빈말과
무성한 단죄를
멈추고 자비를
실천하는
사랑의 날입니다.
안식일 앞에
우리의 오만을
내려놓습니다.
단죄만 있고
자비가 없습니다.
언제든
희생당해도
상관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악순환을
멈추는
안식일의
사랑입니다.
손봐야 할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이용하고 버리는
몸쓸 우리들
마음입니다.
존재의 자유로움과
존재의 존중을
일깨워주는
안식일의
소중한 마음입니다.
자멸을 자초하는
오만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을
다시 만나는
오늘이라는
새로운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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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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