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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미개인 동양의 현자 (프레데릭 불레스텍스 지음, 이향⁄김정연 옮김, 청년사, 2001)
Frédéric Boulesteix.. 1959년 출생. 누벨 소르본(파리 3대학)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했다. 1960년대 프랑스와 일본의 비교문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프랑스에서의 표상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한국의 지정학적, 시적 상상의 세계에 대한 연구와 옛 여행기의 재판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어제와 오늘의 한국 문화의 다채로운 양상들을 프랑스 독자에게 제시하고자, 잡지 <한국 평론>의 전체 편집을 맡고 있다. 1986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 대학원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다.
<프롤로그>
내가 한국과 첫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5년 아주 우연한 기회에, 파리의 국립도서관 지하 열람실에서 미지의 나라에 대한 자료를 찾으면서부터이다. 우연한 나의 관심과 호기심에 의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진 이름들이 회색 먼지를 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한 자리에서 만나 서서히 서로 얽히어서, 나를 한국이라는 낯선 나라의 빛과 그림자 속으로 이끌어 갔다.
왜 하필 프랑스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우선 프랑스가 서양에서는 과거 한국에 관한 자료(1950년 이전)와 가장 오래된 자료(1254년)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으로 일찍이 이 지역을 대거 점하고(중국의 예수회, 해외선교단, 고종 고문관 등) 있었기 때문에 통시적인 관점에서 본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유럽에서는 가장 풍부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로 제공할 수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Ⅰ 첫 만남 (13~17세기)
♦ 선(善)의 땅, 극동으로의 여행
프랑스와 한국은 길게 펼쳐진 유라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양국 간의 접촉이 이루어지기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대륙의 양 극단에 위치해 있던 프랑스와 한국의 관계는 그래서 본질적으로 직접적일 수가 없었다. 두 국가가 만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커다란 문화 블록, 즉 서양과 동양의 만남이 선행되어야 했다.
♦ 한국에 대한 최초의 기록
13세기 당시 서구의 성직자들은 몽골인들을 ‘타타르 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몇몇 성직자들 사이에서 몽골의 군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겠다는 기발한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4세는 1245년, 타타르 국가에 기독교 사절들을 파견해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고 이들 선교단은 몽골의 구유크(定宗, 1246~1248) 제관식에 참가하는데 이 행사에서 한국인을 만난듯하다. 기욤 드 루브룩은 한국인과의 만남에 대해 전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 한국에 대한 구체적 이미지
한국은 이중적으로 극에 위치한다. 한국은 서구의 반대편 극에 위치하는 나라, 동시에 서구인들에게 알려진 동방에서도 극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오랜 역사의 문명국이면서도 거친 산으로 뒤덮인 반도이다. 이러한 양면성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을 따라다닌다. 남과 북으로 나뉜 정치적 상황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산도 바다도 아닌 반도가 아닌가. 남과 북의 사이, 대륙과 산의 사이, 산과 바다의 사이, 춥고 건조한 겨울과 덥고 습한 여름의 사이…….
Ⅱ 동양의 끝, 한국에의 접근 (18세기)
♦ 중국 속에서 발견한 한국
지혜롭고 교양 있는 국민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독립과 오랜 풍습을 방해받지 않으려는 국민들, 그리고 산속에서의 자유로운 삶, 사냥을 하며 마법적 효능이 있는 약초를 캐면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은둔해 사는 모습의 한국인 것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남긴 이 시기의 자료들은 착한 미개인과 동양의 현자라는 두 개의 이미지 축의 존재를 확신시켜 주고 있다. 이 두 가지 이미지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우리와 다른(고립되고 먼) 타자로서의 동양’과 ‘양면성(자연과 문화)’이라는 두 가지 표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 계몽주의 시대의 한국 이미지
볼테르의 「세계풍속사론」에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한반도를 소개하고 있다. 우선 한국은 독자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늘 중국이나 몽골, 일본과 함께 다루어진다. 이는 한국이 속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한국은 아시아에서 위의 나라들 가운데 하나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공간적으로 역사적으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중으로 먼 나라이다. 매우 오래된 나라이면서 매우 먼 나라이다. 프랑스를 기준으로 본 한국의 위치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깊숙한’의 개념은 우리가 동방의 끝, 머나먼 정점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이 단어는 뭔가 닫혀있는 곳, 그리고 어둡고, 뭔가에 싸여 있는 곳의 이미지, 그래서 훗날 수많은 침투와 탐험을 불러일으킬 곳으로서의 한국을 나타내고 있다.
Ⅲ 고요한 나라로의 방문 (19세기)
♦ 제국주의, 선교사 그리고 한국
프랑스가 한국과 직접적이고 파격적인 접촉을 이룬 계기는 병인양요이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인 진출로 인해 두 나라가 상대방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일 것이다. 오늘날까지도 병인양요는 한국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특히 외국에 의해 강제로 문호개방을 하기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일련의 상황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된다. 이 이야기는 한국의 모든 역사책에 소개하고 있으며, 특히 프랑스 군대의 공격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 그리고 프랑스의 패배가 강조되어 있다.
♦ 문호개방과 한국학 성립
1880년대의 한국의 이미지에는 매우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한국인들의 다양한 성격에 대한 관심, 풍속 연구, 기타 관행들이 다루어지며 이로 인해 한국인들의 종교적 성향, 높은 교육열, 뛰어난 손재주, 예술적 취향 등이 취급된다. 이러한 표상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이미지와 ‘은둔의 왕국’의 이미지,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함께 담고 있는 상징적인 두 가지 표상이 된다. 이 새로운 표상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발전해 더욱 강하고도 전형적인 클리셰로 자리잡게 된다.
(클리셰 ; 인쇄에서 사용하는 연판(鉛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판에 박은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문학용어)
Ⅳ 세기전환기의 한국 체험 (20세기 전후)
♦ 한국에 관한 본격적인 기행문
사진 사건이란 한국의 국내문제와 대원군의 태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선교사들이 유괴한 어린아이들에게서 눈을 뽑아 이방인들의 사진을 제작하는데 쓴다는, 대원군이 퍼뜨린 소문을 말한다. 이 사건은 똑같은 사물도 ‘바라봄을 당하는 자’, 사진을 ‘찍히는 자’에게는 달리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진기를 통해 ‘바라본 것’은 타자의 삶과 시각을 떠나서만 전달 가능해질 뿐 아니라, 사진기를 통해 타자를 본다는 것은 타자를 보존하고, 서양이 세계를 바라보는 표상 방식(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따라 분류, 정리하고자 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라봄을 당하는 자’, ‘사진을 찍히는 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사진기를 조작하는 자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행가는 ‘보고자’했던 것들을 보고, 본 것을 보존, 분류, 정리하는 자세를 취한다. 사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이르기까지 타자를 조정하고, 타자를 표현하며, 타자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자이다.
Ⅴ 동양의 신비와 근대적 현실 (20세기)
♦ 한국 안에서 들여다본 한국
피에르 로티와 조르주 뒤크로는 1901년 한국의 수도에 극히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는데도, 이들의 독창적인 경험과 글의 성격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피에르 로티는 쇠퇴일로의 부동의 문화와 땅, ‘은둔의 왕국’에서, 비록 근원은 다르지만 자신이 살아온 51년이라는 세월의 개인적인 발자취를 돌이켜보고자 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조르주 뒤크로는 스물세 살의 젊은 혈기로, 단순한 일상생활에서 한국의 정체성을 찾아내어 구축하고 주의 깊게 전달함으로써, ‘조용함’에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 프랑스 현지의 눈으로 본 한국
20세기 초 격동기의 한국의 표상이 어떻게 변천되어왔는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론에 실린 기사들을 다루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프랑스에서는 특히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작가 잭 런던의 글들이 알려져 있다. 잭 런던의 글 속에 나타난 한국인들은 당시의 어려웠던 시대상황의 포로로서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그 속에서 두려움과 대조를 이루는 날렵하고 강인하고 유연한 몸, 유령 같은 느낌 등을 다시 만날 수 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측면은 한국이 지리학 관련 일반 저작물에서 더욱 자주 다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글에서 한국은 역시 중국이나 일본의 상황과 연관지어져 설명되고는 했지만 종종 이탈리아와 비슷한 나라로 제시되면서 당시 학술지나 기행문에 관심이 있던 독자들에게 다가갔다.
♦ 예술가의 눈에 비친 한국
1910년에서 1926년 사이, 기욤 아폴리네르는 다양한 정보들을 읽고 얻은 정보를 자신의 산문에 첨가시킴으로써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세계의 심포니’에 합류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여러 개의 콜라주로 구성된 그의 ‘입체주의적’ 문체 속에서 한국은 ‘음향적 요소’ 즉 노래들과 그 떨림과 리듬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편 폴 클로델은 한국 문화 특유의 요소들, 즉 풍수지리로 표현되는 지기(地氣), 그리고 이러한 오랜 전통을 담아내는 춤과 무용을 통해 한국을 그려냈다.
Ⅵ 두 개의 한국 (현대)
♦ 타국으로서의 한국
외국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눈은 한국의 ‘명칭’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것은 마치 1948년 독립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하나의 한국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의’ 한국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헌은 한반도에 있는 두 나라 가운데 한 나라만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적 표상의 문제는 정작 한국인들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에게 공식 국명의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 않으며, 한국이 둘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은 두 국가의 이름에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한국’ ‘북한’ ‘남한’ ‘대한민국’ ‘조선인민공화국’ 등의 이름은 따라서 한국의 진정한 실체와는 거리가 있는 현실을 지칭하고 있다. 이 이름들은 한반도가 지리적 차원에서 둘로 나뉘어 있다는 이미지를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 두 개의 다른 나라 : 남과 북
쟁기가 밭을 갈아엎듯 한국을 완전히 변화시킨 한국전쟁을 통해 ‘조용한 아침의 나라’ 이미지는 퇴색하고 만다. 한국의 분단은 35년간의 일제치하에서 벗어난 한국이 국가적 통일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히 염원했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프랑스 언론에 게재된 끔찍한 사진들은 새롭고도 강렬한 또 다른 이미지들을 만들어냈고, 이러한 이미지는 이후 ‘한국’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관념으로 굳어졌다.
♦ 다른 시간 속에 놓인 두 개의 한국 : 전통과 현대
지리적 시간적 차원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한국이 존재한다면, 1970년대 이후의 남한 내에도 두 개의 한국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서구 언론에서 요란하게 다루곤 했던 눈부신 산업발전을 이룬 한국이, 다른 한편에는 과거의 독특한 전통들(풍습, 관습, 예술) 등이 살아 숨쉬는 풍요로운 한국 땅이 있다. 한국의 이러한 전통들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그리고 산업화에 주력했던 군사정권하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이 글의 목적은 공시적, 통시적 차원에서 프랑스에서의 한국관련 자료들을 선별해 한국의 이미지 형성의 뿌리와 방향을 밝혀내는 것이다. 마침표를 찍어야 할 순간이 다가온 지금, 우리는 오늘날까지 프랑스에게 한국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자문해보며 끝을 맺고자 한다. 프랑스에서의 한국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먼 곳을 표상하는 대상으로서, 프랑스와 극동지역의 종교적 상업적 학문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리고 인접국가나 기타 강대국들과의 지정학적 균형관계에 따라 변화해왔다.
타인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식으로 쓰고 생각하고 꿈꾸게 하는 역할을 한다. 프랑스에서의 한국의 이미지는 프랑스로 하여금 아시아를 다시 쓰고 생각하고 꿈꾸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 한복판에 시간적 공간적 쉼표처럼 놓여 있는 한반도, 어제와 오늘 사이, 동양과 서양 사이에 놓인 한반도를 통해서.
<에필로그>
이 연구는 애초에 프랑스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한국어로 출판해 한국독자들이 이 책을 보고 외국인들이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면 했다. 나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의 담론에 담겨 있는 파행적 요소들이나 이데올로기적 이탈의 요소들을 가려낼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한국과 외국간의 밀고 당기기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평가라기보다는 재평가에 필요한 요소들을 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 세기 초에 우리 앞에 제시된 다양한 화두들, 정신의 세계화라는 이 새로운 제국주의 현상 앞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말이다.
***
문득문득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듯 했다. 뿌옇게 흐린 거울이기도 했고, 너무도 맑아 고개를 돌리고 싶은 거울이기도 했다. 결별하기 힘든 익숙한 문제들, 육화되고 체화된, 유전자에 새겨진, 알면서도 외면해 왔던 상처와 아픔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오히려 풍부하고 유연한 사고와 표현들로 보이는 대로 드러내주는 시선 앞에서 당혹스럽기도 했다.
‘텍스트가 가진 다양한 움직임을 특정 순간에 포착해 찍은 스냅 사진들’처럼 나열해 놓은, 그 속에서 불편했고 아팠고 바보처럼 미소 지었다.
올리비에 라캉은 말한다.
‘나는 두 장의 컬러 사진에 사로잡혔다. 첫 번째 사진은 북한의 금강산 모습이다. 뾰족한 봉우리가 솟아있는 산맥, 끝없는 산마루, 눈 덮인 봉우리가 띄엄띄엄 보이고, 빛나는 얼음과 검은 바위가 아티카의 하늘같은 푸른 자줏빛 하늘에 동화같이 펼쳐져 있어서 과연 ’조용한 아침의 나라‘다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사진은 서울 도심의 건물들로 이루어진 절벽들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대한 건물들이 불규칙한 모습으로 늘어서서, 한국 국민들의 막대한 노력으로 받아들이게 된 서구 산업문명을 구현하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창경궁에서 야외촬영을 하는 우리에겐 라캉이 보았던 그 사진이 낯설지 않다. 이 책에서 나를 사로잡은 두 장의 사진은 20세기 초에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소녀의 돈치기와 연날리기였다. 하얀 치마저고리, 버선, 고무신, 헝클어진 땋은 머리로 돌치기를 하는 여섯 명의 선머슴 같은 계집아이들과 네 명의 연 날리는 아이들을 보고 ‘구름 속에서만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 표현하고 단점이라 꼬집으며 ‘재미있는 일’이라 덧붙인 그 사진. 그 사진을 보고 나는 바보처럼 눈물을 흘렸다. 내 할머니가 거기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있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아마도 그건 내 안에 존재할 할머니의 유전자가 반응한 것이었으리라. 일제 식민통치를 견뎌냈고 한국전쟁과 격변의 소용돌이를 정신없이 살다가 떠나간 할머니의 유전자가 나를 아프게 깨웠기 때문이었으리라.
그 가슴 먹먹함을 잊으려 우리 부모는 그렇게 ‘빨리빨리’ 살아왔을까?
‘차마 들여다보지 못함’은 치료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라 내 몸에 새겨진 흉터다. 내 정체성이다. 시간이 지나야 무뎌질 유전자다.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한국 우화의 특징’에 대한 설명이었다. 프랑스 우화에서의 배경이 종종 숲인데 비해 한국의 동화에서는 산이 등장한다는 부분이었는데 '뭔가를 찾아 떠난' 주인공들이 산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찾게 된다고 표현했다. 신기하게도 거기엔 ‘나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요술거울을 들여다보듯 구석구석 보고 또 봤다.
끝으로, 이 책의 곳곳에는 다양한 시선으로 담아낸 우리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 중에서 나를 미소 짓게 했던 흰 옷에 대한 글들을 전한다.
‘이곳의 옷들은 현지에서 만든 면직이나 마직으로 지었는데 모두 흰색입니다. 정말 어떻게 설명 드려야 할지……이건 직접 와서 보셔야 합니다. 한국 사람이 프랑스에 가면 그곳에서 가장 별나게 차려입은 희극배우보다 더 눈길을 끌 것입니다. 저는 적당히 기른 수염에 길고 검은 머리를 머리 위로 올려 상투를 틀었기 때문에 마치 배꼽 달린 배 같은 꼴입니다.
집 안에서는 통이 넓은 바지와 작은 상의가 전부입니다. 선교사가 외출을 할 때는 짙은 색의 길다란 겉옷을 입는데 이것은 우리의 보자기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비둘기집 지붕같이 생긴 원뿔 모양의 모자를 쓰는데 50센티미터 높이에 지름이 1미터 50센티미터는 됩니다. 이 이상한 모자의 테두리가 팔꿈치까지 내려옵니다. 이것은 한국인이 초상 때 입는 옷이라고 하는데 선교사들은 이 옷을 입기로 했습니다.’
‘멀리서 봤을 때, 촘촘히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흰 깃털의 펠리컨들이 해안가로 몰려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까이에서 보니, 이 무리는 움직이고, 소리치거나 웃거나 담배를 피운다. 온통 흰 옷을 입고, 손에 담뱃대를 들고, 검은색 모자를 쓰고, 짚신을 신고, 신기하고 새롭다는 듯이 배가 정박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이다. 배 안에서 나는 눈이 부시게 하얀 의상만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닻을 내리자 뱃사공의 냄새나고 때 묻은 누더기 옷이 보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온 국민이 입고 있는 흰옷이 연한 회색에서 흑검정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색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된다.’
‘서울 사람들은 느릿느릿 자주 쉬어가며 걷는데, 모두 상식 밖으로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 겨울철 날씨가 혹독한 이 나라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면소재의 옷을 지어 입으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바닥에 진흙 구덩이가 생겨나고, 흙으로 만든 집들의 벽까지도 내려앉는 ’쉽사리 더러워지는‘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흰색 옷을 입는다. 모든 사람이 흰색 면 옷을 입고 있다.’
눈동자 색깔만큼 다른 그들이 본 우리..물론 참 다르다..그 차이는 그래서 아름답다..아주 작은 차이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