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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빈은 <Daily> 카페 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그날 팔 음식 재료들을 손질하고, 가게를 열었다는 간판을 세우고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와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CD 들 중에 오늘의 날씨, 계절과 어울릴 만한 곡을 선택하고
있었다. 오늘의 날씨는 비교적 좋지 않았다. 오전에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일기 예보에 의하면
오후 늦게까지 비가 오는 곳이 많다고 했다. 그는 5월, 비가 오는 날 들으면 좋을 곡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
생각하며 이곳 저곳을 살피다가 “아, 이게 좋겠다.. 역시 비가 오는 날에는 이런 음악을 들어야지..” 라고 말하며
CD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우빈은 미소 지으며 CD 뚜껑을 열고 CD 플레이어로 걸어가 CD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첫 번 째 곡으로 <이승훈의 “비오는 거리”> 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그는 손가락으로 기타 반주에
맞추어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미소를 짓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후가 되었을 때는 정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CD 에서는 <임현정의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 이라는 곡이 흐르고 있는데 입구 문에 달린
풍경소리와 함께 비에 젖은 몸을 털며 아영이 들어왔다. 빨간 우산을 입구에 놓인 우산보관 양동이에 꽂고는
우빈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우빈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고 통통하지만 귀여운 신아영이라는
아가씨였다.
“아저씨.. 왜 그렇게 보시는 거에요?”
“응? 아니.. 오늘 오는 날이 아니잖아?”
“그랬죠.”
아영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우빈이 미소지으며 “따뜻한 걸로 줄까?” 라고 묻자, 아영은 고개를 저으며 “시원한 걸로 주세요. 얼음 동동 띄워서..” 라고 말했다.
“인마. 그러다 감기 걸려. 비도 맞은 것 같은데..”
아영은 그렇게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턱을 테이블위에 올려놓고 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조건 시원한 걸로 주세요.”
“알았다..”
우빈은 얼음을 많이 넣어 만든 아이스티를 그녀 앞에 놓아 주었다. 아영은 빨대를 빼고 벌컥벌컥 들이마시더니 단숨에 비워낸 잔을 내려놓았다.
“더 줘?”
아영이 쳐진 눈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빈이 웃으며 잔을 채워 주었다. 또 단숨에 마셔 버렸다.
“뭐 만들어 줄까? 점심 못 먹었어?”
“못 먹었어요. 너무 기운이 빠져서.. 아저씨.. 남자들은 왜 그래요?”
“뭐가?”
“그 애가 약속이 있대서 오늘 못 만났다구요.. 자기가 먼저 만나자고 해 놓고... 11시에 만나서 밥 먹고, 영화보자고 해서 아침부터 미용실에 들렀다가 가는 바람에 일찍 도착했는데...”
“그래서..?”
“못 온다고 연락이 왔잖아요. 그렇다고 벌써 도착 했는데 그냥 나오기가 그렇고.. 그래서 혼자 영화보고 오는 길이에요. 아~ 우울하고.. 답답해요..”
“혼자 영화 보는 건 괜찮았어?”
“뭐.. 생각보다 괜찮던데요? 오히려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았어요. 가끔 갈까 봐요.”
“그래.. 알았다. 기다려.. 맛있는 거 해 줄게.”
아영이 턱을 테이블 위에 고이고는 한 숨을 내쉬었다. 답답해하는 아영이 맛있게 밥을 먹고는 집으로 간다면서 나가고 난 후 저녁 6시에는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어? 둘이 어떻게 같이 와?”
여성스럽고 차분한 주은희라는 아가씨와 밝고 긍정적인 박형규가 들어왔다. 두 사람이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우리 오늘 선.. 봤어요.”
“그래?”
우빈이 웃었다.
“저도 놀랐어요. 그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요..”
“저도요.”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두 사람은 너무 놀랐다.
“어?”
“어?”
둘 다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 그 순간 어색함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친구 분은.. 괜찮으세요?”
은희가 그의 친구가 문에 부딪쳤던 부분을 떠올리며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아.. 진호요?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알려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그 친구.. 양아치는 아닙니다.”
은희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니에요?”
“네. 실력이 좋은 의사입니다.”
“형규씨도 좋은 의사선생님이시라고 들었는데요..”
“네. 같이 병원을 세워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의사로 보이진 않던데..”
“저요?”
“아니요.. 친구 분이요.”
“아.. 병원에서의 모습은 조금... 다르거든요.”
“그래요?”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저녁은 <Daily>에서 드실래요?”
“어.. 저는 좋은데..”
“그 카페 주인이 저랑 친한 형이거든요.”
“정말요? 저는 대학교 1학년부터 단골이어서 지금도 가는데..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신기.. 하네요.”
두 사람은 우연한 연결고리 덕분에 어색하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빈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두 사람을 대접했다. 지난 몇 년간 눈으로만 은희를 바라보고 있던 형규를 떠올리며 두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하며 두 사람과 인사를 했다. 하지만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아저씨..”
기운이 아영이보다 더 빠진 모습으로 임효선이라는 아가씨가 들어왔다. 키도 크고, 얼굴은 동양적으로 생겼고, 뭐든 길쭉길쭉한 아가씨였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오늘 뭐냐? 다들 바통 터치하듯이..”
“아영이랑 은희도.. 왔다 갔어요?”
“응.”
“왜요?”
“둘 중 하나는 안 좋은 소식, 나머지는 좋은 소식.. 자세한 건 두 사람에게 물어 봐.”
“네. 그래야겠네요.”
우빈은 기운없이, 생기없이 말하는 효선의 얼굴을 살폈다.
“너도.. 보아하니 저녁도 못 먹은 얼굴이다.”
“어떻게 아셨어요? 아저씨.. 귀신인가봐요..”
“기다려. 맛있는 거 해 줄게.”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 준 파스타를 한 입 먹더니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서둘러 손 등으로 닦아냈다.
“이걸로 닦아.”
우빈이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있는 자신의 손수건을 내밀자 효선이 받아 들었다.
“죄송해요.”
“뭐가? 너무 맛있어서 우는 거 아니야? 요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손님이 음식에 감동해서 우는 건 고마운 일이지..”
그의 말에 효선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다시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오늘.. 고백.. 했거든요.”
“그래?”
“괜히.. 했나 봐요. 아니.. 어쩌면 저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벌써 예전에 선배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요. 막상 선배 입에서 확실한 대답이 나오니까.. 생각보다.. 힘드네요.”
효선이 다시 눈물을 흘렸다. 우빈은 효선이 좋아하는 유자차를 그녀 앞에 내려놓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물을 그치라고 쓰다듬었는데 오히려 더 울기 시작했다.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있는 효선에게 말했다.
“늦은 시간이라 손님이 별로 없다.. 크게 울어.. 속으로 울면.. 병 된다.”
하지만 큰 소리로 울지 못하는 효선이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더니 좀 괜찮아 졌는지 음식을 천천히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고 나니.. 시원해요. 죄송해요. 아저씨 가게에서..”
“괜찮아. 조심해서 가라.”
“네. 아저씨.. 다음에 올 게요. 운거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래. 늘 비밀로 지켜줄 테니까 또 울고 싶어지면 와. 알았지?”
“고맙습니다.”
“효선아..”
“네?”
“이젠..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언제나 나는 너를 응원하고 있다는 거 잊지 말고.. 알았지?”
효선은 웃으며 가게를 나갔다. 우빈은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아~ 나는 참.. 사람이 좋은 것 같아. 오늘 하루도 보람차게 보냈구만..”
“형~ 나 밥 좀.”
문을 열고 진호가 들어왔다.
“이 시간까지 밥도 못 먹고 뭐 했냐?”
“예쁘게 생긴 여자가 나한테 데이트 신청 하길래 영화도 보고 밥도 먹으려고 했지.”
“영화 봤어?”
“응. 참! 나 또 그 아줌마 봤다? 아~! 그래서 재수가 없었나봐.”
“아줌마?”
“왜.. 지난 주에 내 머리에 혹 나게 만든 아줌마 있잖아. 왜 키 작고 데굴데굴 굴러다닐 것 같은 아줌마 말이야. 그 여자를 만난 날 13일의 금요일 저주가 나한테 걸렸는지 그 후로도 쭉 재수가 없어..”
“아.. 아영이?”
“여하튼.. 그 아줌마랑 영화관 화장실에서 부딪쳤잖아.”
진호는 우빈에게 그녀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오려고 걸음을 옮기던 진호는 화장실 입구에서 밖으로 나오는 아영과 부딪쳤다.
“어머?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으세요?”
누군가와 부딪쳤다가 상대방이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아서 아가씨의 어깨를 잡아 주고는 눈을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커졌고, 진호가 곧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잡았던 손을 놓는 바람에 아영의 등이 벽에 부딪쳤다.
“아야!”
아영은 아픈 어깨를 손으로 문지르며 인상을 쓰며 진호를 노려보았다.
“여기 저기 다니면서 사람들 다치게 하지 말고, 집에 가서 밥이나 해, 아줌마.”
아줌마라는 소리에 아영이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감았다가 뜬 아영이 입을 많이 벌리지 않은 채로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후~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제대로 앞을 안 보고 다닌 그쪽도 잘못이 있는 것 같은데요?”
“아줌마가 너~무 작아서 안 보였지..”
“쌀을 반 톨만 쳐 드셨나 봐요. 양아치씨.”
“뭐?”
아영이 그를 노려보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그를 지나쳐 영화상영관으로 향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진호가
“하! 이건 그 날의 저주야.. 저 여자를 또 만나다니.. 재수가 없다.”
그가 몸을 돌려 화장실로 가려다가 다시 몸을 획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울리지 않는, 그렇다고 그렇게 예쁘다고 할 수도 없는 큰 원피스를 입은 그녀를 바라보며 인상을 썼다.
“도대체 저런 아줌마 치마는 시장에서 사 입었나?”
머리도 미용실에 다녀온 것 같았다.
“머리 봐라.. 누가 봐도 미용실 다녀왔다고 표시는 있는대로 다~ 내고..그리고 저 다리.. 짧아도 너~무 짧은 거지.. 쳇!”
그렇게 화장실에 들어갔다. 우빈이 진호의 설명에 웃으며 말했다.
“그랬어? 아영이가 좀.. 작긴 하지.”
“좀? 형.. 그건 좀 작은 게 아니지.. 요즘 초등학생들도 그 아줌마보다는 크다고.”
“그래도 귀엽게 생겼잖아. 눈도 예쁘고..”
“눈 낮은 거 봐.. 형이 그래서 아직도 장가를 못가는 거야.. 여하튼.. 그 아줌마를 봐서 재수가 없었나봐.”
“왜?”
“예쁘게 생겨서는 얼마나 코맹맹이 소리를 하는지...”
“데이트 하는 아가씨가 코맹맹이 소리를? 그거.. 애교가 많은 거 아니야?”
“애교? 형.. 비염이야.. 비염이라고.. 아~ 영화보고 바로 헤어졌어.”
“고질병이냐? 네가 이비인후과 의사라고 병원에 한번 오라고 하지 그랬어.”
“형.. 첫인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 그런 여자랑은 아무리 예뻐도 다시는 얽히고 싶지 않다구.. 형.. 오늘 아줌마 봐서 재수 완전 없었어. 그래서 밥도 못 먹고 헤어졌고.. 그러니까 맛있는 걸로 해줘.”
“네가 아무 여자나 만나고 마음에 안 들었던 거지.. 그게 아영이 탓이 아니잖아.”
“아.. 몰라.. 여하튼 그 아줌마를 만나면 재수 없어..”
“참, 아까 형규 왔다가 갔다.”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던 진호가 밝은 표정으로 우빈형을 바라보았다.
“참. 오늘 선 본다고 했는데.. 아가씨랑 왔어?”
“응. 아가씨랑 왔더라.”
“괜찮았나 보네.. 이~뻐?”
“그래.. 예쁘더라. 여성스럽고.. 차분하고..”
“그래? 가지 치라고 해야지..”
“응?”
“그 아가씨한테 친구 있을 거 아니야.. 소개 시켜 달라고 해야지~”
“음..”
우빈은 즐거워하고 있는 진호를 바라보며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우빈의 반응을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왜?”
“아니..”
“시답잖은 반응은 그만 두고, 빨리.. 배고파..”
“기다려 인마. 그 전에 뭐 좀 줄까?”
“시원한 거 있어?”
“그래. 아이스티 있는데?”
“아니다.. 그냥 따뜻한 걸로 줘.. 오뉴월 감기는 뭐도 안 걸린다는데.. 요즘 감기 독해서 한 번 걸리면 입원해야 하거든..”
“그래. 이거 마시며 조금만 기다려.”
“형도 조심해.."
"알았다."
우빈이 웃으며 주방으로 들어가고, 진호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더니, 귀에 들리는 <더 클래식의 “여우야”> 라는 음악을 들으며 인상을 썼다.
“형~ 도대체 언제적 노래를 듣는 거야... 최신 음악들 중에도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나는 형의 이런 노래 취향 때문에 오기 싫다구..”
“싫으면 오지 마, 임마.”
“혀엉~ 내가 차에 가서 내 CD 가져 올까?”
“됐어, 인마.. 이거나 드세요..”
진호는 한숨을 내쉬며 앞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간 아영이 효선과 은희에게 카톡을 날렸다.
아영 : 난 오늘 또 그 녀석한테 바람 맞았어. ㅠ.ㅠ 그래서 혼자 영화보고, 데일리에 가서 밥 먹고 집에 와서 지금 가만히 있는 중이야. 비까지 내리니까 더 비참.. 너희들은 제발 행복한 저녁이길..
잠시 후 효선에게 카톡이 왔다.
효선 : 아영.. 어떻게 해.. 많이 속상했지? 나도 뭐.. 못 만났어. 아저씨가 너랑 은희도 왔다가 갔다면서 좋은 소식 하나랑 안 좋은 소식 하나라고 하더니.. 아영.. 너의 소식이 안 좋은 소식이었구나.. 어떻게 해.. 다음에 만나서 얘기하면 되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말고..
아영 : 응.. 알았어.. 그런데 너도 못 만난 거야? 웬일이니.. 다들 정말.. 너무 한다. 그치?
효선 : 그렇네~
은희 : 나는 지금 막 집에 왔어. 둘은 벌서 얘기 중이었네? 헤~
아영 : 그렇다면 너는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잖아. 은희~ 좋은 사람 나왔어?
효선 : 정말.. 너무 궁금해. 어떤 사람이야?
은희 : 사실은 너희들도 아는 사람이야.
효선 : 정말?
아영 : 진짜루? 누군데?
은희 : 나중에.. 지금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아영 : 궁금해~
은희 : 정말 다음에.. 처음 봤는데, 그냥 좀 괜찮은 사람 같다.. 정도거든.
효선 : 그래 알았어. 대신 나중에 잘 되면 꼭 말해 주기야.
은희 : 응. 알았어. 그런데 나만 좋은 소식이라 어떻게 해?
아영 : 괜찮아. 너까지 안 좋은 소식이었으면 나는 정말 절망했을 거야.
효선 : 맞아. 맞아.
은희 : 너희들도 곧 좋은 일이 생기겠지. 우리 힘내자!
아영 : 응. 아.. 피곤하다. 너희들도 얼른 쉬어.
효선 : 그래. 잘 쉬렴.
은희 : 그래. 또 연락하자.
아영 : 옹~
효선 : 그래.
세 사람의 카톡이 끝나고 세 사람은 오늘도 여전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쵸! 이쵸! 이쵸!”
에어컨 때문인지 가디건을 입고 있는데도 그녀를 괴롭히는 고질병인 알레르기성 비염이 찾아왔다. 코를 훌쩍이고 있는데 옆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줌마, 감기 걸렸어?”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도서관에 자주 오는 8살 말썽꾸러기 진용이가 옆에 서서 말했다.
“아줌마라고 하지 말라니까? 누나는 아직 결혼도 안 했다고..”
“자랑이야?”
“이게 어디서 반말을 하고 있어..”
“얼른 병원에 가지? 여기저기 감기 옮기지 말고.”
“뭐?”
진용이가 동화책을 꺼내 자기가 앉던 자리로 갔다. 기막혀하는 표정으로 코를 훌쩍이며 책을 정리하는 아영에게 같이 일하는 소현이 다가왔다.
“언니, 감기 걸렸어요?”
“비염.. 알레르기성 비염 있거든. 너는 괜찮아? 에어컨 때문인 것 같아...”
“병원에 가보세요.”
“으.. 싫어. 그냥 약국에서 사 먹으면 돼. 이따 약국 들러야겠다.”
“그러다가 크게 아프게 된다니까? 병원에 가세요.”
“싫어. 뾰족한 거 잔뜩 있는 이비인후과는 치과만큼이나 가기 싫은 곳이라고..”
“하긴.. 좀 그렇긴 해요.”
“그치? 이쵸! 이쵸!”
“쿡.... 재채기 소리 한 번 독특하네요..”
아영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코를 풀고 손을 씻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코끝이 빨개져 가고 있었다.
“이~쵸!”
전화벨이 울려 화면을 보니 은희였다. 은희는 지난번에 선을 본 남자와 지금은 교제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여보세요?”
<너 알레르기성 비염 다시 시작이구나?>
“응.. 코맹맹이 소리 심해?”
<조금.. 나랑 같이 형규씨가 하는 병원에 갈래? 네가 다니는 병원은 잘 못하잖아.. 작년 가을에도 거의 두 달을 고생하지 않았어?>
“아.. 네 남자친구가 이비인후과 의사라고 했지?”
<응. 실력 좋대.>
“싫어. 뾰족한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야.. 그리고 네 남자친구한테 어떻게 코랑 입을 보여 주냐?”
<혼자 하는 거 아니고, 실력 좋은 사람이랑 같이 한 대. 그 사람이..>
“이쵸! 이쵸! 이쵸! 아... 죽겠네.. 뭐라고? 잘 못 들었어.”
<왜 지난번에 형규 씨 친구.. 왜 네가 머리에 혹 나게 한 사람 말이야...>
“야! 그 양아치 자식 얘기를 왜 꺼내! 나한테 아줌마라고 한 자식을.. 지난번에 영화관에서 봤는데 반말을 하더라? 재수 없어.. 진짜 또 그러면 가만 안 있을 거야. 야! 설마 같이 일한다는 의사가 그 양아치는 아니지?”
<아, 아니지~ 그 사람이 의사로 보여?>
“그렇지? 하긴 그런 사람이 의사를 한다는 걸 말이 안 되지. 양아치에 싸가지인데..”
<그래서 병원은.. 안 갈 거야?>
“이따 저녁에 약국 가면 돼.”
<그래. 알았어. 심해지면 꼭 가봐. 형규씨 병원은 어디에 있는 거냐면..>
은희의 설명을 듣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더욱 증상이 심각해졌다. 비염 때문에 재채기도 하고, 머리도 무거워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러 퇴근시간이 되었다. 나갈 준비를 하고 관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그럼.. 월요일에 뵐 게요.”
“그래요. 잘 가요. 목소리가 심한데.. 병원에 가 봐요.”
“오늘 밤에 약 먹어 보고요..”
“그래. 혹시 내일 심해지면 병원 가 봐요.”
“네.”
집으로 돌아오는데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까지 하는 것 같았다. 약국에 들러 약을 사고 집으로 와서 밥솥을 여니 밥이 없었다.
“아.. 아침에 빵 먹었지..”
냉장고를 열자 아침에 먹다 남긴 빵이 있었다. 잼을 발라 먹고, 우유를 한 잔 마시고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진호는 할머니의 호출로 아침 일찍부터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소화제를 마셨다. 그리고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안씨 아주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문이 열리자 그가 커다란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사를 하는 자리는 조용하고 엄숙했다. 그는 포크로 스테이크 고기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 그를 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고, 누나는 노려보았다.
“우리 강아지.. 많이 먹어야지. 왜 입에 안 맞아?”
“할머니~ 스테이크는 호텔가서 먹어야지. 고기가 너무 질기잖아. 이 아파.. 할머니는 괜찮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다른 걸로 해 주랴?”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집에서 스테이크를 썰었어요? 그것도 아침부터.. 차라리 갈비찜을 하던지..”
“시끄러워. 다른 반찬이랑 먹으면 되잖아.”
“다른 반찬이 없잖아.”
누나가 눈을 흘기며 한 마디만 더 하면 때릴 것 같은 표정을 짓자 그가 조용히 있으려다 할머니를 보고 물었다.
“오늘은 왜 부르신 거에요? 아침부터.”
“참한 아가씨 한 명 있는데.. 한번 안 만나볼래?”
“할머니~ 또 선보라고? 나 선 같은 거 안 본다니까? 싫어.”
“그래? 참 한데..”
“그렇게 좋으면 할머니가 데리고 살던지.”
“이 놈이! 할미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그러니까 제 연애는 관심 갖지 말아달라고요. 부탁이니까..”
“알았어. 그건 그렇고.. 이번 휴가는 언제쯤 할 거야?”
“왜요? 여행같이 가자고?”
“바닷가에 있는 리조트 좀 둘러보라고. 혹시 문제는 없는지.. 너도 가끔은 얼굴을 보여야지.”
“그거야 나 말고도 할 사람들 많잖아.”
“하라면 해. 아니면 내가 말한 아가씨 만나 보던지.”
“알았어~. 해요. 간다고..”
“7월 말이 좋겠는데?”
“알았어요.”
다들 식사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어머니가 다과를 들고 나오셨다. 그러자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장 재킷 앞을 잘 여미었다.
“그럼, 하실 말씀은 다 하신 거지? 나, 가요.”
“밥도 시원치 않게 먹었으면서. 네가 좋아하는 거라고 일부러 어멈이 사왔는데.. 들고 가지.”
“됐어~. 출근해야지. 그럼, 건강하세요. 할머니. 저, 가요. 누나, 다음에 보자.”
“그래.”
그가 현관으로 나가자 어머니가 배웅을 하시려는 모습이 보이자 그가 인상을 쓰며 문을 확 열고 밖으로 나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
밤새 코가 막혀서 잠도 제대로 못잔 아영은 눈을 힘겹게 뜨고 일어나니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가 있는 것 같이 어두웠고, 코가 더 빨개 져 있었다.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고, 화장은 기초만 하고 야구 모자를 쓰고, 입고 잔 반팔 티셔츠에 바지만 청바지로 갈아입고, 두꺼운 카디건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높은 건물 앞에 서서 이비인후과 간판이 있는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은희 남자친구가 하는 병원이라고? 잘 한다고 했으니까.. 안 아프게 잘 해주겠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병원이 있는 층에 내려 열린 자동문을 지나 접수창구에 갔다. 간호사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오셨어요?”
“네.”
“그럼, 이거 작성해 주세요.”
아영은 간호사가 건네준 메모지를 바라보며 볼펜을 들어 이름, 주민등록번호, 주소, 핸드폰 번호를 적고 자리가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그녀의 이름이 불렸다.
“신아영님~”
“네..”
“1진료실, 2진료실이 있는데.. 어디에서 받으시겠어요?”
대기실에 있는 TV같은 화면에 1진료실에는 방진호라고 써 있고, 2진료실에는 박형규라고 써 있었다.
‘은희가 형규씨라고 불렀지? 그렇다면..’
차마 친구 애인에게 코 속, 입 속까지 보이기는 좀 창피한 마음이 들었다.
“1진료실에서 볼 게요.”
“네. 알겠습니다. 이쪽에서 기다려 주세요.”
“네.”
대기 소파에 앉아 대기 명당이 뜬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리는 환자가 많은데 대부분 2진료실 대기의자에는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아이들이 있고, 1진료실에는 나이가 젊은 아가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이 환자분류 방법은..’ 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힘이 들어서 모든 생각을 지우고 머리를 뒤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신아영님.. 들어오세요.”
“네.. 안녕하세요.”
코맹맹이 소리로 인사를 하고 진료의자에 앉았다.
“네.. 신아영님..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말을 마치며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의사는 말끔한 헤어스타일에 코와 입을 마스크로 가리고 머리에는 그림에서 보는 의사들이 사용하는 동그란 거울 같은 게 달린 걸 쓰고 있었다.
“성함이.. 신.. 아영..님?”
“네.”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변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비염으로 정신이 없는 아영은 머리를 뒤에 기대었다.
“원래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데요. 어제 낮부터 심해져서 밤새 코 막히고, 콧물도 나고, 춥고, 몸이 쑤시고 그래요.”
“그.. 흠.. 그래요. 봅시다.”
그가 뾰족한 무언가를 들자 아영은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코 속에 뿌려 대더니 아프게 뭔가를 코에 깊이 넣어 빨아들이는데 마치 송곳으로 후비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참으세요. 아~ 심하시네.. 이정도면 굉장히 힘들 것 같은데.. 자.. 이번에는 아~ 해 보세요.”
그가 3번이나 코 안에 있는 걸 빼서 코가 빠지는 것 같았는데, 목을 보던 그가
“흐익! 이렇게 퉁퉁 부운 목은 처음 보네요. 편도도 붓고, 염증도 있네요.”
뭔가 쓴 약을 목에 바르자 토할 것 같았다.
“삼키세요!”
아영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며 뱉어내고 싶은 마음에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어허! 삼키시라니까요.”
아영은 눈물을 흘리며 그 쓴 걸 삼켰다.
“비염이랑 감기랑 같이 왔네요. 주사 맞고 약은 3일분 드릴 테니까 드시고 좀 나아졌다고 안 오시지 마시고, 다시 오세요.”
“주사.. 안 맞고 싶은데요..”
의사가 컴퓨터에 처방전을 치다가 아영을 바라보았다.
“어른이.. 맞으셔야죠. 그렇게 아픈데..”
“그냥.. 약만 주세요. 주사는..”
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되겠네요. 주사는 꼭! 꼭! 맞고 가세요.”
“왜요?”
“그래야 빨리 나으니까요.. 3일 후에 오세요.”
아영은 싫은데 기운도 없고, 맞기 싫지만 지금 몸이 정말 아프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주사실로 들어가 아픈 주사를 맞고 나와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어? 은희씨 친구 분.. 맞으시죠?”
“아.. 안녕하세요?”
“어쩌면 오실지도 모른다고 은희씨가 말해주셨거든요. 진료 받으신 거예요?”
“네.. 1진료실에서요.”
아직도 아픈 엉덩이를 만지고 있는 아영을 보더니 형규가 말했다.
“주사.. 맞으셨어요?”
“네. 꼭 맞아야 한다고 하시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건강해지면.. 한 번 뵈어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아영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서간호사가 형규에게 소근 거렸다.
“김간호사님 말씀에 방선생님이 조금 이상하게 진료하셨대요.”
“이상하게요?”
“네. 치료도 조금 아프게 하시고, 환자분이 주사 맞기 싫다고 하셨는데 꼭 맞아야 한다고 우기셨대요.”
“그래요..?”
형규가 진호가 있는 진료실로 들어갔다.
“야, 네가 진료 했어? 아영씨?”
의자를 빙 돌려 들어온 형규를 바라보고 있는 진호의 눈이 웃고 있었다.
“으하하하하... 그래, 내가 진료했지. 그 아줌마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지만. 내가 했지.. 얼굴 봤냐? 다크써클은 턱까지 내려와 있고, 머리도 안 감은 것 같더라. 여자인 걸 포기한 거지..”
“일부러 아프게 한 거 아니야?”
“아니야, 임마. 누구한테 맞았는지 코뼈가 왼쪽으로 휘었더라고.. 그래서 왼쪽은 원래 좁더라구. 그래서 아파했던 거지. 일부러는..”
“주사는.. 꼭 맞을 필요가 없잖아.”
“아니야. 감기랑 비염이랑 같이 왔다니까.. 맞는 게 좋아.”
“싫다는데 꼭.. 아~ 이제 알았다. 그 날에 대한 복수구나? 너 은근히 뒤끝 있다.”
“그럼, 나한테.. 할머니는 아직도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는 나한테 감히 양아치라고 말한 여자라고.. 내가 봐 줄 것 같아?”
“그런데.. 네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다고? 이상하다.. 내가 너랑 같이 일한다고 은희씨한테 말 했는데..”
“이러고 있어서 그랬나? 모르던데?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지. 엉덩이 만지며 가는 거 다 봤지.. 하하하하..”
“변태냐?”
“야!”
“내 아내가 될 사람의 친구야. 그러지 마.”
“아내? 결혼 할 거야?”
“응. 곧 상견례 하게 될 것 같아.”
“축하해.. 아~! 아니다. 그래 봐야 네 아내의 친구는 그 씩씩한 분 아니면 저 아줌마잖아.. 으아~~~ 악몽이다.. 이건 그 날의 저주야.. 저 아줌마를 만난 날의 저주라고..”
“저주 같은 소리 한다.. 여하튼 잘해. 내 와이프 될 사람의 절친이니까.”
“아.. 몰라몰라.. 난 절대로 저 아줌마와 잘 해 볼 생각 전혀 없으니까..”
형규가 고개를 저으며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질료를 받고 약을 먹어서 그런지 아영이 생각하기에 아프게 치료받기는 해도 다른 병원보다는 상태가 금방 좋아졌다.
<병원 다녀왔다면서?>
은희와 통화하면서 아영은 엄살을 떨었다.
“응. 근데 너~무 아파. 오늘 가면 안 가려고.”
<다 나을 때까지 다녀.. 그러다가 다시 도지면 어쩌려고.>
“야. 막 쑤셔 댄다니까? 빨리 좋아지기는 하는데 의사한테 진료 받을 때 얼마나 아픈데. 눈물이 다 난다
니까?”
<그래도 실력은 좋은가보다.>
“으~ 몰라. 오늘이 마지막이야. 더는.. 못하겠어.”
<그래, 진료 잘 받고.. 의사는 어떤 것 같아?>
“의사? 뭐.. 썩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실력은 괜찮은 것 같아.”
<얼굴.. 못 봤어?>
“응. 마스크 쓴 모습 밖에 못 봤어. 2 대 8 가르마를 보니 그냥 공부만 했을 것 같은 스타일 같던데.. 왜?”
< 아.. 아니야. 진료 잘 받고.. 조만간 보자. 좋은 소식이 생길 것 같아.>
“설마..”
<응. 상견례 하고 나서 연락 줄게.>
“은희야~ 축하해~ 축하해~”
아영은 조용한 도서관을 쩌렁 쩌렁 울리게 소리쳤다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조용히 말했다.
“축하해.. 정말.. 형규씨도 잘은 모르겠지만 괜찮은 사람 같던데.. 우리 중에 네가 제일 먼저 가는 구나.. 상견례 잘하고, 연락 줘. 나랑 효선이랑 엄청 많이 축하해 줄게.”
<그래. 일 끝나고 병원 갈 거야?>
“응. 그렇게 해야지. 연락 줘~”
<응.>
전화를 끊자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짓던 소현이 다가왔다.
“좋은 일 있으신가 봐요.”
“응. 친구가 결혼 한 대.”
“축하드려요. 그런데.. 언니는 언제 가세요?”
“야! 남자친구도 없는 나에게 그런 말은.. 삼가 해 줘...”
“죄송해요..”
소현이 웃으며 말했다.
“참, 나 오늘 6시에 가도 될까?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서..”
“어쩌죠? 오늘은 제가 일찍 갔으면 하는데요.. 아버지 제사여서..”
“아. 맞다. 오늘 아버지 제사였지? 그래. 내가 할게.”
“병원은요?”
“에이~ 뭐.. 늦게 까지 하면 다행이고, 아니면 다음에 가지 뭐. 걱정하지 마. 비염도 거의 다 나았어.”
“죄송해요.”
“아이고~ 아니네요. 얼른 가서 제사 잘 준비 해.”
“네.”
아영은 조용한 곳에 가서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저기.. 저 신아영인데요. 오늘 몇 시까지 진료해 주시나요? 제가 좀 늦을 것 같아서.. 네.. 1진료실은 7시요? 2진료실은. 9시까지요.. 아..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아영은 “그래, 그러면.. 못가는 거지.” 라고 말하고는 아픈 걸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책을 정리하러 갔다.
“무슨 전화?”
진호는 퇴근하려고 옷을 갈아입고는 접수창구에서 간호사들과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아.. 신아영 환자분이 전화 주셨어요. 늦으실 것 같은데 몇 시까지 진료해 주시냐구요. 그래서 1진료실은 7시까지, 2진료실은 9시까지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알겠다고 하셨어요.”
진호가 잠깐 생각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미소를 지으며 형규의 진료실로 들어갔다.
“야, 오늘은 내가 남아서 진료하고 갈게. 네가 퇴근해라.”
“정말?”
형규가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니까.. 가서 은희씨랑 데이트 해.”
“그래. 고맙다. 그런데.. 이유가 뭐야?”
“응? 이유? 없는데.. 그냥.. 내가 너무 놀고먹는 것 같아서..”
“철 드냐?”
“뭐..”
진호는 자신의 진료실로 들어와 남은 환자들의 진료를 시작하면서 김간호사에게 말했다.
“신아영씨에게 1진료실 9시까지 하니까 꼭! 오라고 하세요,”
“네?”
“전화 하시라구요.”
“아.. 네.”
다시 진료실에 들어와 이제껏 관심도 없었던 형규의 환자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다음 환자는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아~ 하세요.”
할아버지를 진찰하는 건 그에게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 마스크 위로 진호의 눈이 웃고 있었다.
한 편, 소현을 보내고 잔업을 하고 있던 아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병원.. 무슨 일로 전화 하셨어요? 네? 네.. 아까 들었어요. 하지만 2진료실은.. 네? 1진료실이 9시까지 하니까 꼭 오라고 의사선생님이 전화하라고 하셨다구요? 왜요?”
<아마도 지금 진료를 멈추시면 다시 나빠지셔서 고생하실까봐.. 그러시는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네.”
아영은 한 숨을 쉬며 그 아픈 진료를 또 받을 생각을 하며 책을 품에 안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병원에서 전화를 끊는 간호사에게 다른 간호사가 물었다.
“뭐에요? 방선생님.. 왜 저래요?”
“아마 신아영 환자분을 진료하시는 게 재미있으신 것 같아.”
“네?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계속 그렇게 아프게 진찰 하세요?”
“그렇지.. 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분명히 은근히 재미있어 하시는 것 같아. 그거 말고 이 늦은 시간까지 혼자, 자발적으로 환자를 보려고 하겠어?”
“왜 그렇게 그 환자분을 대하시는 거죠?”
“그야.. 모르지..”
간호사들은 눈을 돌려 진찰을 하고 있는 진호를 바라보았다.
가게 문을 닫으려던 은희가 앞에 서 있는 형규를 보고는 깜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왔으면 들어오지.. 여기에서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 왔어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은희가 그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요?”
“응.. 진호가 대신 한다고 해서 맡기고 왔어요.”
“웬일이죠? 일은 형규씨가 다 하는 것 같던데..”
“그것도 하기 싫어하는데 그거마저 안 하면 그 녀석 할머님이 용돈이고 뭐고 다 끊어 버리신다고 해서 억지로 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그 분이 무서우세요?”
“조금요. 진호보다는 진호누님을 더 좋아하세요. 본인 회사를 아버님 다음으로 누님에게 물려주신다고 유언장에 벌써 쓰셨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진호도 회사 경영은 별로 관심 없구요.”
“힘들지 않아요?”
형규가 고개를 저었다.
“알고 보면 괜찮은 녀석이에요. 겉으로는 뺀질 뺀질해 보이지만 속은 알차달까?”
“아영이에게 하는 거 보면 좀.. 그래요. 별로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구요. 진료도 아프게 한다고 하고..”
“그래도 진료를 계속 받으러 오시는 거 보면.. 괜찮나?”
“아프긴 한데 다른 병원 보다는 빨리 낫는 것 같대요. 오늘 마지막으로 간다고 했는데..”
“오늘?”
“네.”
“하하하...”
“왜요?”
“그래서 그렇구나..”
“네?”
“아영씨를 진료하는 것에 재미가 생긴 모양이에요. 아영씨 진찰하려고 자기가 한다고 한 것 같아요.”
“정말요? 또 아프게 하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뭐.. 그런데 왜 진호라고 말 안했어요?”
“아픈 것 보다는 빨리 나았으면 해서요. 아프게 한다는 말에 걱정되기는 했지만.. 만약 진호씨라는 걸 알면.. 난 영이 손에 죽을지도 몰라요.”
“그럼.. 내가 구해 줄게요.”
형규의 말에 은희가 미소를 지었다.
****
9시가 넘어서 간호사들도 다 보내고 혼자 앉아 있었다. 진호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 아줌마가.. 안 오면 안 온다고 전화를 해야지! 내 금쪽같은 시간을 버리게 하고 있어.”
자신의 의자에 앉아 빙글빙글 돌던 진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쯧.. 가자!”
라고 말하며 마스크를 벗고 흰 가운을 벗으려고 하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내렸다.
“어.. 아무도 안 계시나?”
그는 얼른 옷매무새를 잘 하고, 마스크를 쓰고 진료실 문을 열고 그녀에게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잖아요.”
“어머..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비염이라는 게 치료시기를 늦추면 늦출수록 안 좋다는 거 모르십니까?”
“죄송해요. 오늘 잔업이 있어서요. 다들 퇴근하셨나 봐요.”
“그럼요. 근무시간도 아닌데.. 환자분을 치료하기 위해 제가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생각해주시면 좋겠네요.”
“죄송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앉으세요.”
“네.”
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고분고분한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자신의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
“아... 아파요..”
“어려서 누구한테 맞았죠? 코 뼈가 휘었어요. 그래서 좁아서 아픈 거에요.”
“그래요? 맞은 적 없는데.. 싸움을 잘 못하거든요.”
‘거짓말 하시네~ 싸움 잘 하게 생겼는데. 아니면 싸움을 불러 일으키는 쪽인가?’
“목은 다 나으셨네요. 비염만 치료하면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쓴 약을 바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조금 살 것 같은 아영이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어? 이 아줌마가 왜 이러는 거지? 눈웃음 치고 있어..’
“간호사분들이 다 퇴근하셨으니 오늘은 주사 없습니다.”
“네.”
아영이 밝게 웃었다.
“그렇게 주사가 싫으세요?”
“네.. 뽀족한 건.. 다 싫어요.”
“2진료 보고 있는 의사랑 아는 사이시라고요?”
“네. 제 친구와 결혼 하실 분이세요.”
“그럼, 그 친구에게 받으시지 왜..”
“아.. 아무래도 친구 남편 될 분에게 너무 적나라한 모습을 보이기가 창피해서요.”
“제가 알기로는 친구 중에 좀 괜찮은 녀석이 있던데.. 아세요?”
“괜찮은 친구분이요?”
“네..”
“죄송해요. 그 분의 친구 분들을 많이 알고 있지를 않아서요. 한 명 본적이 있기는 한데요..”
“그 사람은 어떻게 보이던가요?”
“음.. 그렇게.. 좋은 분 같지는 않던데..”
“그렇습니까?”
“죄송해요. 형규씨 친구분을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나쁜 분은 아니실 것 같은데, 저랑은 좀 많이 안 맞으실 것 같더라구요.”
아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여기 처방전이요.”
진호가 조금 퉁명스럽게 내민 처방전을 두 손으로 받으며 아영이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늦은 시간까지.. 정말 감사합니다.”
“뭐.. 그래요. 3일 후에 봅시다. 그리고 또 하나. 식사는 제대로 하고 계신겁니까? 인스턴트같은 음식 말고 몸에 좋은 음식으로 잘 드셔야 더 빨리 좋아지신다는 거 잊지 마세요.”
“네.”
아영이 인사를 하고 대기실을 지나가려는데 핸드폰 벨이 울렸다. 핸드폰을 바라보던 아영이 걸음을 멈추더니 깊은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의사를 바라보고는 전화를 받았다. 그 모습을 진호는 진료실에서 바라보았다.
“얼른 나가라.. 네가 가야지.. 나도 간다..”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있던 그는 그녀의 전화통화 소리를 들었다.
“여보세요? 응.. 아니야. 언제? 5월? 아.. 괜찮아. 당연히 영화관에 안 갔지.. 네 전화 받을 때 집이었거든. 응.. 괜찮다니까.. 설마 벌써 몇 달 전 일을 아직도 생각하고 있겠어? 응.. 일이 있었다면서.. 화 안 났어.”
진호는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가 전화하는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뭐야..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무슨 일로 전화 했는데? 마지막 주 토요일? 안 되는데.. 음.. 일이 있어서. 어.. 맞아. 그 주 금요일에 휴가 받아서 여름캠프 가거든. 글쎄.. 할.. 말이 있다고? 어떻게 하지? 그 때는 어렵겠는데.. 그래. 이번 주? 이번 주는 괜찮은데.. 응.. 응.. 어디? TK호텔? 응.. 응.. 알았어. 그럼.. 6시에 보자. 그래...”
전화를 끊은 아영의 어깨가 훅 처지더니 걸음을 걷다 병원 자동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나가서 문에 머리를 부딪쳤다.
“어?”
진호는 큰 소리에 움찔했지만, 아영은 한 손을 들어 머리를 만지며 뒤를 돌아 그를 바라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벽에 기대며 한 숨을 내쉬고는 내려가 버렸다. 마스크를 벗으며 진호는
“안 아픈가..? 돌머리야? 뭐야.. 어울리지 않게..” 라고 말하며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영은 효선과 은희에게 톡을 보냈다.
아영 : 난 이번 주에 인혁 만난다.
효선 : 지난번에 못 봤다고 했지?
아영 : 응.. 이번에는 꼭 봐야 한다고 하네.. 할 말이 있다고..
효선 : 할 말? 무슨 말?
아영 : 나도 몰라.. 답답하고.. 가슴이 이상해..
효선 : 그렇겠다.
아영 : 여하튼.. 결과 보고 할게.
효선 : 그래. 너무 신경쓰느라 뜬눈으로 밤새지 말고..
아영 : 응..
집에 돌아가 씻고 나니 은희에게 톡이 들어와 있었다.
은희 : 미안해.. 지금에서야 봤어. 나는 오늘 상견례를 하고 왔어. 아마도 내년 봄에는 결혼식을 하게 될 것 같아.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 하자. 그리고 아영~ 효선이의 뜻이 내 뜻이야.. 힘 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언제든 얘기해.. 잘 만나고.. 너의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
은희의 문자를 읽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아영은 침대로 쓰러졌다.
“아~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결국 늦은 새벽까지 잠을 잘 수 없었던 아영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했다. 이비인후과는 괜찮아진 것 같아서 가지 않았다. 그리고 토요일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오후 6시에 약속이었지만 눈은 아침 6시에 떠졌다. 밥이 넘어갈 것 같지 않아서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다
“할 말이 뭐지?”
생각하다 불어 버린 시리얼을 결국 싱크대에 버리고 말았다. 오전에는 밀려 있는 빨래도 했다. 빨래는 빨래 건조대에 놓다가 동작을 멈추고는
“무슨 할말? 설마.. 사귀자고? 아씨..” 라고 말하다 빨래를 베란다 바닥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점심도 못 먹고, 미용실로 갔다.
“오랜만이네?”
“네.. 예쁘게.. 해 주세요.”
“데이트?”
“그건 아니구요. 좀.. 중요한 자리인 것 같아서요.”
“그래. 그럼, 자연스럽게 해 줄게.”
“네.”
앞에 커다란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조금은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정말.. 별것 아니면 어떻게 하지?’
“아후~”
“왜?”
“아니에요.”
미소를 지으며 미용실언니를 바라보고는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 날 누나의 호출이 있어서 누나가 있는 TK그룹 본부장실로 들어가는데 그를 알아보고 누나의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이십니다.”
“여~ 우리 비서님은 갈수록 예뻐지시는 것 같습니다.”
누나의 비서인 조수빈 비서는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중 그가 예쁘다고 생각하는 몇 안되는 여자였다. 여우같은 눈을 흘기며 뾰로통하게 입술을 매력적으로 내미는 조비서를 바라보았다.
‘저것도 계산된 행동이겠지? 예쁘기는 한데 너무 뻔히 보이는 여우타입이랄까.. 저런 타입은 피곤하지..’ 라고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요. 언제 우리 밥 한 번 먹읍시다.”
“더 이상 작업하지 마세요. 저 애인 있어요.”
“애인 생겼어요?”
“네. 오늘도 약속이 있는 걸요?”
“어떤 사람입니까? 제가 한 번 봐 드릴게요.”
문이 벌컥 열리면서 진호의 누나 방준희가 나와 진호를 노려보았다.
“조비서 애인을 네가 왜 봐? 너는 네 앞가림이나 잘 해.”
“누나는.. 같은 남자가 보면 안다니까? 여자들이 안 보이는 부분이?”
“글세.. 너나 잘 하시라구요. 안 들어와?”
“그럼, 다음에 꼭 한 번 소개시켜 주세요.”
조비서가 미소를 지으며 진호를 바라보았다. 진호는 누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너는 언제쯤 여자한테 진지해 질래?”
“난 진지한 거 싫어. 그러는 누나나 남자랑 진지해지지? 결혼이 너무 늦는 거 아니야? 그러다 홀애비랑 결혼하겠어..”
“이 자식이!”
누나가 손을 들자 진호가 두 손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형규는 상견례 했다더라. 너는 언제 여자를 데려와서 상견례 할래?”
“결혼은 늦으면 늦을수록 좋다고 하잖아. 난 지금이 좋은데?”
누나는 머리를 손으로 짚으며 한 숨을 내쉬었다.
“오늘 왜 불렀는데.. 주말에 내가 얼마나 바쁜데.”
“쓸데없이 바쁘지.. 쓸데없이..”
“잔소리 하려고 부른 거면.. 나, 가고..”
“네가 잔소리를 부르는 타입이잖아. 그래서 부른 건 아니고.. 너는 언제까지 병원 일만 할 거야? 회사야 아버지랑 내가 한다지만.. 호텔도 있고, 리조트도 있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난 회사 경영같은 거 싫어. 병원이 좋아.”
“그것도 형규가 다 한다면서.”
“누나가 결혼해서 매형이랑 하면 되겠네.”
“병원은 형규에게 넘기고, 호텔 좀 맡아주라.”
“그걸 왜 형규에게 넘겨.. 내가 얼마나 투자했는데.. 그런데.. 호텔은 왜..”
“내가 거기까지 신경을 잘 못쓴다는 걸 아는지 관리가 소홀해져서 게시판에 불평이 많아. 오랫동안 해 달라고는 안 해. 한 6개월만 해주면 안 되겠어?”
“3개월.”
“뭐?”
“그럼, 2개월.”
“이 자식이.. 그게 남 일이야? 웬 흥정이야..”
“관심 없단 말이야..”
“TK호텔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 좋겠어?‘
“우리 호텔 이름이 TK호텔이었나?”
“뭐? 아휴~ 너는.. 좀 맞어! 우리가 태공기업이니까 호텔도 TK지!”
누나가 주먹을 휘둘렀다. 진호가 손으로 막으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옛날부터 관심 없었다구.. 아버지 일 따위.”
누나의 주먹질이 멈추었다.
“그래도 우리 일이 될 테니까 너무 무관심하지 마.”
“알았어. 어떤지 오늘 한 번 가볼게.”
“그래.. 고맙다.”
“할머니한테 다음 주 주말에 리조트에 간다고 말씀 드려 줘.”
“네가 직접 해.”
“누나는 매일 보잖아. 그러니까 대신 말 해 달라고. 우리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하시지?”
“그렇게 궁금하면 한 번 오던가..”
“아버지 안 계실 때 메시지 한 번 줘. 그럼.. 나, 간다.”
진호는 나오면서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다시 바람둥이 같은 표정으로 조비서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가 차를 몰고 출발하면서 생각했다.
‘그 여자가 누굴 만난다는 장소가 우리 호텔이란 말이지..’
도착한 호텔은 입구부터 직원들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뚝뚝한 말투인 직원들이 밝게 웃으며 일하는 직원들보다 많았다. 체계적인 시스템적인 문제보다는 서비스부문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전 층을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등장한 오너의 아들이 돌아보기 시작하자 직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행동이 빨라졌다. 그는 그런 것을 알아채며 피식 웃었다. 호텔에 도착한 아영은 떨리는 마음에 화장실에 먼저 들어가서 손을 씻으며 머리와 옷을 다시 점검하고는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다. 둘러보니 아직 안 온 것 같았다. 핸드폰을 보니 아직 시간이 10분정도 남아 있어서 아영은 창가 자리로 안내받아 앉았다. 핸드폰을 들어 화장이 번지지는 않았는지 살폈다. 진호는 그런 아영의 모습을 앞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는 신문을 들고 있었다.
“저거 봐라.. 또 미용실 다녀왔구만.. 어라? 구두에 치마까지.. 뭐야.. 누굴 만나 길래 저렇게 긴장하지?”
커피숍에서 일하는 직원이 다가왔다.
“뭐 드시겠습니까?”
“커피. 여기는 원두를 어디 것 씁니까?”
“브라질산이랑 에티오피아산이 있습니다.”
“과테말라산은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어디 브라질산이랑 에티오피아산으로 맛있는 커피 한잔 만들어서 가져와 봐요.”
“네.”
직원이 불편한 표정으로 사라졌다. 분명히 자기처럼 물어오는 손님도 있을 것이다. 이곳은 그냥 일반 커피숍이 아니라 호텔커피숍이니까.. 그런데 저런 표정으로 가버리면 손님은 이미 실망한 상태에서 커피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두 테이블 정도 떨어져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정신이 없어서 마주 보고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나?’
“누나.”
아영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인혁을 바라보았다.
“어.. 인혁아.”
아영은 인혁이 자신의 맞은편에 앉자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기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뭐야.. 나이도 어린 남자 녀석한테 웬 수줍은 여자인 척?’
“미안해. 나도 일찍 나오려고 했는데.. 길이 좀 막혀서.”
“아니야. 괜찮아. 나도 방금 왔다니까..”
아영이 미소를 지으며 인혁을 바라보았다.
‘웃는 거 봐라.. 거짓말은.. 그리고 무슨 여자가 매력 없이 저렇게 좋아한다는 티를 다 내나?’
직원이 다가가 주문을 했다.
“나는 커피.. 너는 뭐 마실래?”
“저도 커피 주세요.”
‘원두가 어디 산인지는 안 물어보네? 내가 이상한 건가?’
“잘 지냈어? 여전히 그 도서관에서 일해?”
“응. 너는.. 너도 잘 지냈어?”
“그렇지 뭐.. 지난번에는 정말 미안했어.”
“괜찮다니까..”
“정말 영화관 간 거 아니지?”
“아니라니까..”
‘저 여자 분위기로 봐서는 거짓말 같은데..’
“누나는 남자친구 있어?”
진호는 조금 당황해 하는 표정을 하고 있는 아영을 바라보았다. 아영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지었다.
“그렇지 뭐.. 너는?”
인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난.. 곧 결혼하게 될 것 같아.”
‘에? 뭐야.. 결혼한다고 말하는 거야?’ 한심한 표정으로 아영을 바라보던 인혁은 아영이 더욱 당황해서 얼굴까지 붉어지며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자 인상이 써 졌다.
“저.. 정말? 야~~ 축하해. 네가 먼저 할 줄은 몰랐네? 나는 내가 먼저 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 축하해줘서 고마워.”
‘바보네.. 바보야..’
“그래.. 결혼할 아가씨는 어때? 예뻐?”
‘뻔한 대답이 나올 그런 걸 왜 물어보냐?’
“응. 예쁘지. 착하고..”
“그래? 궁금하다.”
‘뭘 궁금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그래서 말이야.. 사실은 오늘 소개시켜 주려고..”
“응? 오늘? 여기에서?”
아영은 그의 충격적인 말에 망치로 머리를 두 번을 연거푸 얻어맞는 기분이 들었지만 표정관리를 하기 위해 테이블 아래에 있는 두 주먹을 꼭 쥐어야 했다.
“응. 나랑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 비서실에서 근무하거든. 조금 이따가 온다고 했는데.. 괜찮아? 결혼할 사람은.. 누나한테 제일 먼저 소개시켜 주고 싶었어. 괜찮아?”
아영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억지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 괜찮아. 그럼~ 괜찮지. 당연히 이 누나가 봐야지.”
주문한 커피가 테이블 위에 올려 지자 아영은 고개를 숙이고 커피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굴 보겠다는 거야. 그냥 일어나서 가라고..’
“자기야~”
진호는 깜짝 놀랐다. 불과 3시간 전에 누나 사무실에서 봤던 조비서가 서 있었다. 깔끔하게 올려져 있던 머리는 풀어져 있었다. 짧은 치마는 미끈한 다리를 드러내 주었고, 인형같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친누나 같은 분이시라고.. 저는 조수빈이라고 해요.”
아영이 일어나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아영입니다. 반가워요.”
조비서가 남자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게임 끝났어. 아줌마.. 어서 일어나서 가라고..’
“양가 부모님은 찾아 뵀고, 상견례도 곧 할 것 같고, 11월에는 식을 올릴 것 같아.”
“그래?”
“청첩장은 아직 안 나왔어. 나오면 줄게. 누나 사는 집으로 보내줄까? 나주에 주소 좀 보내줘.”
“그래. 그럴게.”
‘아이고.. 아줌마야.. 아줌마야.. 그걸 왜 받아..’
“생각보다 어려보이시네요? 인혁씨한테 듣기로는 조금 어른스러우실 줄 알았는데.. 뭐야 자기야.. 예쁘시네..”
조비서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벌써 아영의 마음을 감지한 그녀는 인혁이 자신의 남자니까 주제파악 제대로 하고 그를 넘볼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래요..?”
“그런 옷은 어디에서 사세요? 편해 보이네요. 저도 하나 사고 싶은데.. 어디에서 사셨어요?”
“인터넷에서 샀어요.”
‘아줌마야.. 설마 궁금해서 물어봤겠어? 촌스럽다는 뜻이잖아.’
“우리 결혼식에 오실 거죠? 안 오시면 섭섭할 것 같아요. 꼭 오세요~”
“글쎄요.. 일이 있어서..”
“누나는.. 내 결혼식에 누나가 안 오면 누가 와? 누나가 안 오면 나도 섭섭해..”
“그래..?”
아영은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진호는 늦게 나온 자신의 커피를 바라보고, 향을 맡고, 한 모금 마셨다. 지금 기분처럼 맛도 별로였다. 그는 소리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주위의 사람들이 바라보았다. 물론 그들도 바라본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진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로 입을 헹구었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진호는 직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걸.. 지금 마시라고 갖고 온 거야.. 아니면 나보고 먹고 죽으라고 갖고 온 거야?”
“그렇게 입에 안 맞으십니까?”
진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마셔 봐. 그리고 뭐가 문제인지 적어서 본사로 팩스 보내. 확인 할 거야.. 직원.. 김상.. 호씨..”
그는 직원의 명찰을 바라보고는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아영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이 앉은 자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다 보고 있었을 걸 생각하니 얼굴로 열이 확 올라오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그가 오는 모습을 바라보지 않는 사이 그는 조비서에게 윙크를 하며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는 듯 들었다가 내렸다. 아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슬쩍 눈을 들어 보니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뭐야.. 설마 내가 불쌍해서 도와주려는 건가?’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보기 좋게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그럴 줄 알았어. 변태자식. 내가 창피를 당하는 꼴을 지켜보다 웃으며 나가는 거봐.. 어우~ 재수 없어..’
“누나.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아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들어올리려는데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깐만..”
아영은 몸을 살짝 돌리며 핸드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아직도 거기에서 뭐하는 거야? 창피하게.. 얼른 나와.>
“어쩌라고요..”
아영은 이를 악물고 조용히 말했다.
<급한 약속이 생겼다고 말하고 나와. 앞에서 차 대기해 놓고 기다릴테니까.>
그가 전화를 끊어버리자 그녀는 인내를 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누나.. 누구 전환데 그래?”
“응..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내가 급한 일이 있는 걸 깜빡했어. 뭐.. 소개도 다 받았으니까 내가 더 방해하는 것도 그렇고, 먼저 일어날게.”
“약속 있었어?”
“응. 미안..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인혁의 여자친구에게도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나..”
“다음에... 또 뵙죠.”
아영이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인혁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누구 전화인데 누나는 왜 저러는 거지?”
“모르지.. 아니면 내가 너무 예뻐서 놀랬나? 혹시 저 누나라는 사람이 자기 좋아했던 거 아니야?”
조비서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자 인혁이 당황하며 설명했다.
“아니야. 그냥 편한 누나, 동생 사인걸? 그건 그렇고, 아까 그 남자는 뭐야? 여길 자기가 전세 냈나? 예의도 없이 시끄럽게..”
“전세 낼만 한 사람이지?”
“자기.. 아는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아까 자기한테 윙크도 하는 것 같던데.. 혹시..”
“자기~ 날 그렇게 못 믿어? 우리 회사 회장님 아들이야.”
“아들도 있었어? 이사님밖에 없지 않아? 공식 행사에 항상 이사님만 계시던데?”
“회사 일에 별로 흥미 없는 거의 내놓은 아들이야.”
“그래? 혹시 자기한테 작업 걸고 그런 거야?”
“그랬었지~ 예쁜 여자만 보면 작업걸기도 하고, 워낙 괜찮으니까 여자들이 많이 따르기도 하고.. 소문도 많고.. 하지만 난 확실하게 말했어. 결혼할 사람 있다고.”
“정말?”
“물론이지. 난 자기밖에 없어.”
“하하하.. 나도.. 나도 자기밖에 없어..”
인혁은 자신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애인을 안았다. 아영은 최대한 불안해 보이지 않아 보이도록 발목에 힘을 잔뜩 주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나오자마자 아영이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잃고 벽으로 몸이 쓰러졌다. 어디에 서 있었는지 진호가 잽싸게 팔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잡아 주어 벽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았다. 아영이 입술을 깨물고는 그에게 잡힌 손목을 뺐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그냥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발뒤꿈치가 익숙하지 않은 높은 구두에 쓸려 피부가 벗겨져 쓰려왔고,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절뚝거리며 걸었다. 눈물이 고였지만 흘러내리지 않게 하려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 뒤에서 구둣발소리가 들리더니 아영의 팔을 잡고 몸을 돌렸다. 진호가 아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어울리지 않게 그렇게 높은 구두는 왜 신고 나와?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아영이 눈물이 고인 눈으로 인상을 쓰며 그를 올려다보자 눈물이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 내렸다.
“창피하지 않게.. 내가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타..”
아영이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아줌마 바보야? 왜 그런 말을 다 듣고 있어! 여자 소개시켜 준다고 하면 물이라도 확 쏟아주고 나오지. 왜 그러고 있냐고!”
아영이 이를 악물고 가방을 들고 있던 손을 꼭 쥐고 자신을 잡고 있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는 그의 어깨에 가방을 휘둘렀다.
“아! 왜 그래! 도와준 사람한테! 아파!”
“이 양아치 자식아! 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지. 쌀을 반 토막만 쳐 먹었어? 몇 살인데 계속 반말이야! 그리고 도와주긴 뭘 도와줘! 변태처럼 키득거리면서 내가 어떤 꼴을 당하는지 지켜보다 나갔잖아!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줘야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드라마 찍어? 그리고, 그 여자.. 내가 아는 여자란 말이야.”
“흥! 그럼 그렇지.. 너는 네가 아는 여자가 다른 남자랑 결혼한대도 아무렇지 않은 걸 보니,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닌 가봐? 양아치..”
“뭐? 아는 여자라고 했지? 내 여자였다고 한 적 없는데?”
“네가 그래봐야 양아치지. 별 수 있어? 남자들은 정말 너무 싫어. 싫다구..”
아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고개를 숙여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아영의 손목을 잡고 자신의 차로 데리고 갔다.
“뭐야! 야! 놔. 놓으라고. 놔, 이 양아치 자식아!”
하지만 힘이 센 그가 그녀를 조수석에 태우고 문을 세게 닫고는 자신도 운전석에 올라타 차 시동을 걸고 거칠게 차를 출발시켰다. 아영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엉엉 소리 내서 울기 시작했다. 그의 차에서 한참을 울다 진정이 되었을 때 쯤 고개를 들고 싶었지만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을 수가 없어서 한 손으로 더듬더듬 가방 안을 뒤져 화장지를 찾고 있는데
“여자가 손수건도 안 갖고 다니고.. 이거 써.”
진호가 손수건을 아영의 손에 닿도록 들고 있었다. 아영은 고개를 돌려 손을 뻗어 손수건을 받아 들고 얼른 얼굴을 닦았다. 퉁퉁 부은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내려.”
눈에 <Daily> 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못 들어가요.”
“알아. 여기는 사람들 눈에 잘 안 띄는 자리고.. 상태가 좀 진정되면 들어가자구. 아무 것도 못 먹은 얼굴이잖아..”
아영은 거울을 보고 싶었지만 그가 옆에 있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개도 못 들고 쭈뼛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진호의 손이 아영의 양 볼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아영은 깜짝 놀라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는 손에 더 힘을 주어 못 움직이게 했다.
“뭐하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 봐. 우와~ 장난 아니네.. 요즘 화장품이 얼마나 좋은데.. 미용실에서 울어도 안 번지는 마스카라 해 달라고 하지..”
“울 일이 있을 줄은.. 몰랐죠.”
“그걸 왜 몰라?”
“할.. 말이 있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남자가 할 말이 있다고 할 때 고백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 여자들의 착각이라니까? 고백하고 싶으면 그냥 해. 전화로든, 아니면 직접 찾아가서 하던지.. 그렇게 시간 약속 잡고 하지 않는다고.. 아니, 좋아하는 데, 좋아 죽겠는데 그걸 약속 잡아서 해? 그때까지 기다리다 긴장돼서 심장이 터져 죽으라고? 일단 고백을 하고나서 약속을 잡으면 모를까.. 할 말이 있다는 건.. 미안하다. 나는 여자가 생겼다.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 내 결혼식에 와 줘라.. 그런 거라고..”
“그렇네요.. 오늘 좋은 교훈 얻었네요.. 그 동안 내가.. 착각하고 있었어...”
아영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그 남자가 좋았나?”
“....”
“언제부터? 아,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
“말 해봐. 혹시 알아? 털어 놓고 나면 좀 편해질지.. 혼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정만 더 부풀려질 수밖에 없거든. 누군가 옆에서 그렇다, 아니다라고 말해주면 가벼워질 수도 있다니까.. 말 해봐.”
“확실히는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자주 어울려 다니다 보니 정이 들었는지도 모르지만, 사귄 건 고등학교 3학년 때니까.. 아마 그 때부터인 것 같은데..”
“에엑! 그럼.. 몇 년이야? 아줌마.. 몇 살이지?”
“자꾸 아줌마..”
“몇 살이냐고..”
“서른 넷...”
“서른 넷... 이면.. 헉! 15년.. 16년이네.. 뭐야.. 뭘 그렇게 오래 좋아해?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은 없어?”
“해.. 해봤지만.. 계속 비교가 되어서.. 오래 사귀지 못했어요. 우리는.. 인혁이랑 나는.. 계속 어긋났어요. 하지만.. 한번 좋아하게 된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더라구요.”
“어차피 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네..”
“뭐라구요?”
“생각해 봐. 계속 어긋났다는 건.. 마음이 맞지 않았다는 말이야. 나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 여자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면.. 헤어질때까지 기다릴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왜? 그 남자랑 헤어지고 나면 옆에서 위로해주다가 고백하면 되는 거고, 다른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면 되는 거고.. 그래서 나에게 온다면.. 그걸로 된 거지. 그 남자가 당신을 좋아하는데 당신한테 남자가 있다고 본인도 다른 여자를 만난다? 그건 이상한데? 만약 그렇다면 그 남자의 마음속에 당신 자리는.. 100퍼센트가 아니라는 뜻이야.”
아영은 뭔가로 탁! 맞은 기분이 들었다.
“반대로.. 당신은 계속 그에게 마음이 가지만 그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른 남자를 만나보지만.. 당신 마음속에는 그가 자리 잡고 있어서 잘 될 수 없었던 거지. 들어본 적 있을 거 아니야. 여자의 마음의 방은 하나고, 남자는 여러 개라고.. 완벽하게 틀린 말은 아니라구. 요즘은 뭐.. 세상이 변해서 마음의 방이 여러 개인 여자도 있고, 남자가 방이 하나인 경우도 있지만.. 당신은.. 옛날 여자네..”
“옛날 여자라고요? 내가 구식이라는 뜻이에요? 아니면 촌스럽다는 뜻이에요?”
“또 발끈 하신다.. 그게 뭐가 나빠? 구식이.. 촌스러운 게 다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호가 미소를 지으며 아영을 바라보았다.
“그만 울고, 뭐 좀 먹읍시다. 나도 배고프니까..”
“잠깐만..”
아영은 가방에서 화장품을 꺼내 덧발라보려고 했지만, 그걸로 해결은 안 될 것 같았다. 화장품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더니 문을 열려고 했다. 그가 손을 내밀어 그녀의 팔을 잡아 그녀가 못 내리도록 했다.
“뭐하는 거야? 자포자기 한 거야? 아니면 여자인 걸 포기하는 거야?”
“차라리 지우는 게 낫겠어요. 조금 이따가 들어와요. 나는 재빨리 화장실로 갈 테니까.. 거기는 내 15년 단골이에요. 눈감고도 어디가 어딘지 안다구요.”
아영이 문을 열고 카페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젠 발도 퉁퉁 부어서 구두를 거의 끌다시피 신고 절뚝거리며 달리다가 문 앞에서 철퍼덕 넘어졌다. 그녀는 얼른 치마를 제대로 내려 주위를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차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진호는 “쿡... 쿡... 쿡.. 쿠하하하하하... 저 아줌마.. 골 때리네..” 라며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어서오세요. 어.. 아영이냐?”
아저씨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네, 아저씨.” 라고 말하고는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본 아영은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아야 했다. 가방에서 나비가 달려있는 머리끈을 꺼내 머리를 돌돌 말아 정수리에 고정시키고 들어 있는 물티슈에 비누를 묻혀 얼굴을 박박 닦기 시작했다.
“형.. 나 왔어.”
“그래. 어서 와라..”
“아줌마는? 화장실로 갔어?”
“아.. 아영이..? 그래. 무슨 일 있었어?”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배고파. 우리 맛있는 것 좀 줘.”
“우리? 그래.. 알았다. 조금만 기다려.”
우빈 형이 주방으로 들어가고 화장실문이 열리고 아영이 나왔다. 진호와 한 자리 떨어진 곳에 앉았다.
“뭘 이제 와서 내외하고..”
진호가 고개를 돌려 아영을 바라보았다. 스킨, 로션 위에 겨우 비비크림만 바른 아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는 돌돌 말아 정수리에 고정시키고, 눈이 퉁퉁 부어 있고, 코끝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방금 세수한 그녀는 아직 20대로 보이는 아기 같은 얼굴이었다. 진호가 말을 하다가 말자 아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오므렸다.
“그렇게.. 이상해요?”
“뭐.. 그런대로.. 아까 보니까 심하게 넘어지던데.. 무릎은.. 괜찮나?”
“스타킹이 구멍 나서.. 버렸어요.”
“상처는? 피는.. 안 났어?”
“조금 까진거라.. 집에 가서 약 바르면 돼요.”
진호가 의자에서 내려서는 아영이 앉은 의자를 빙 돌려 자신을 보게 하고는 고개를 숙여 상처를 살펴보았다.
“파상풍주사는 언제 맞았어?”
“모르겠는데요? 어렸을 때.. 맞았을까요?”
“병원 가서 맞아. 한 번 맞으면 10년이 괜찮은데..”
“네.. 하지만 주사가 싫다구요..”
“하긴.. 그랬지?”
“네?”
“아.. 그렇게 생겼다고.. 주사, 뾰족한 거.. 싫어하게 생겼다고..”
“어떻게 알았어요? 귀신 인가봐~”
아영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상처가 꽤 깊은 것 같은데.. 기다려 봐. 형.. 소독약 같은 거 있어?”
“있을 걸? 들어와서 찾아봐.. 저기 선반 위에 있을 거야.”
“괜찮아요. 집에 가서 하면 되요.”
아영이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위에 있는 구급약상자를 꺼내 와서는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커다란 반창고를 붙여 주었다.
“참.. 작아.. 오히려 반창고가 더 커 보이네..”
“고마워요..”
“뭐.. 아까 드라마 찍듯이 데리고 나와 주지 않은 것에 대한 사죄의 마음이랄까..”
“치...”
처음으로 그녀가 진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 배고픈 영혼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와~ 고맙습니다. 맛있겠다..”
아영을 바라보며 우빈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영아.. 괜찮아?”
“네.. 그럴 것 같아요.”
아무렇지 않은 듯 웃고 있는 아영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호도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아영은 생각대로 별로 먹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조금은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해서 차에 올라타고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역시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운전을 했다.
“아, 여기에서 내려 주시면 되요.”
“집 앞까지 가지? 신발도 그렇고.. 무릎도 다쳤고.. 걷기 힘들잖아.”
“여기에서 금방이에요.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은혜는 잊지 않을 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아영이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려서는 비틀비틀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는 피식 웃었다.
“요즘도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여자도 있나? 하여간 촌스럽다니까..”
집에 들어와 샤워를 하면서 아영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아영 : 보고합니다. 보기 좋게 딱지맞고 돌아왔습니다. 여자친구가 생겼답니다.
나는.. 생각보다 괜찮고.. 괜찮아 질 예정입니다. 당분간 연락이 없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시길 은희와 효써니에게 부탁하는 바입니다.. 이상!
효선은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다 톡을 보았다.
“아.. 이런..”
“왜?”
“아니요. 아영이한테 별로 안 좋은 일이 생겨서요..”
“오라고 해. 따뜻한 밥 먹으면 괜찮아 질 거야.”
“네..”
은희는 형규와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영이 보낸 톡을 보았다.
“어머.. 어떻게 해...”
“왜요?”
“아영이가.. 안 좋은 일이.. 생겼어요.”
“그래요? 얼마나 안 좋은 일이에요?”
“많이요.. 지난.. 16년이 통째로 날아가는 일이에요.”
“그렇게 큰 일이 생겼어요? 그럼, 지금 가 봐요.”
“우리는.. 우리 모임에는 일종의 규칙이 있어요.. 지금은.. 그냥.. 두어야 해요. 먼저 전화가 올때까지..”
“하지만..”
“이럴 때는.. 시간을 혼자 보내게 해 주는 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되기도 해요. 나중에.. 많이.. 위로해 주면 돼요.”
“이런.. 마음이 아프구나..”
눈물이 고인 은희를 바라보며 형규가 안아주었다.
“참.. 세 사람은 특별한가 봐요.”
“네.. 정말.. 좋은 친구들이에요. 어떻게 해요.. 지금 울고 있을 텐데..”
은희가 형규의 품에서 울기 시작했다.
첫댓글 잼써여ㅎㅎ
재미나여
감사.. 또 감사 합니다..^^
즐감
남은 이야기들도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부족한게 많지만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