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안심보다는 한숨과 걱정이 많았던, 2023년 계묘년은 저물고, 푸른 청룡띠의 해인 갑진년(甲辰年), 2024년이 눈앞에 열렸다. 그래서 올해는 지난해의 삶과 상황 가운데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들 이제 산등성에서 불어오는 새해의 맑은 바람에 실어 저 산 너머로 날려 보내고, 2024년은 갑진년 푸른 청룡띠로 안보가 튼튼하고 국민이 전쟁이나 경제불안 없이, 살기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열린 길목에서, 오늘은 차가운 영하 10도의 날씨지만 매년 이럴때는 집에서 그리 멀잖은 남한산성을 오르거나, 집부근 탄천변을 어슬렁 거닐었다.
종종 회한의 심경에 위로 받고 싶거나 가슴에 감성의 바람이 휘몰아치거나 새로운 다짐의 시간이 필요할 때는 남한산성 어수장대 부근의 큰 소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준비해간 커피를 마시며, 뿌연 서울시내와 저 멀리 인천 쪽을 내려다본다.
또한 큰 물결이 흐르는 탄천변에서 흘러가는 구름, 찬바람 부는 높은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 서산에 지는 일몰을 바라보며 가슴 아픈 회한과 무거운 상념을 내려 놓고 마음을 다져먹는다. 세월의 무게와 삶의 질곡과 상황의 변화에서 상처받은 심신을 자연세계에서 쉼과 치유를 얻는다.
한 해가 열린 길목에서, 새해 첫 시간을 맞으며 조용히 마음을 모아본다. 또 한 해가 저문다. 떠나간다. 시간은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존재할 뿐인데 또 시간이 흘러 갔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과거와 미래를 구분 짓지 않는 객관적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또 한 해가 흘러 갔다고 생각하고, 지난해와 새해라는 시간의 매듭과 마디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 지닌 존재의 자의적인 슬기다.
만일 대나무에 마디가 없다면, 약한 바람에도 쓰러지고 말 것이다. 대나무가 쓰러지지 않고 강한 바람을 견뎌내는 것은, 바로 그 마디 때문이다. 시간 안에 존재하는 인간에게 시간은 이런 대나무의 마디와 같다.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시점에 서서, 나의 인생 연륜의 나이테를 계산하여 세어보며 그 시간의 매듭과 마디가 자신을 세상풍파 속에서 어떻게 버티며 쓰러지지 않고 오늘 이 시점까지 오게 했는가 되돌아보게 한다.
법정스님은 “사람은 때때로 홀로 있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겨울 숲에 가보아라. 겨울나무들은 홀로 존재함으로써 함께 존재한다”고 성찰과 고독한 시간을 가질 것을 권고하였다. 홀로 있다는 것은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 기회가 송년과 신년을 맞는 바로 지금이다.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며 추스르며 다짐하는 시간이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나는 인생이라는 여행을 너무 멀리 떠나왔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디를 향하여 무엇을 찾아서 인생이라는 여행을 해온 것일까? 손에 거머쥘 소유를 찾아서 숨 헐떡거리며 달려왔던가? 아니면, 사람의 마음속 사랑을 찾아서 여행했던가?
지난 한해도 내 인생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새 한 마리가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날아가 앉는 그 짧은 시간, 백마 한 마리가 문틈으로 휙 지나가는 그 찰나의 시간이 인생의 시간이라는 데에 고개 숙여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일년이라는 시간의 분기점에 서서 바라보니, 인생이라는 시간은 지금이라는 시간의 연속이다 과거는 어제의 지금이고, 미래는 내일의 지금이다. 어떤 이는 과거에 매여 살고, 어떤 이는 미래를 꿈꾸며 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이 시간이 중요하다. 법정스님도 “오지 않은 미래를 오늘에 가불해 와서 걱정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인생은 목표의 달성과 완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준비하며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인생은 과정 그 자체가 완성이다. 그래야만 나의 인생의 나이테 마디는 굵고 단단하여 어떤 세파의 바람이 불어와도 쓰러지지 않고, 흔들림 없이 꿋꿋이 서 있을 것이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바라보는 기대도 그렇다. 2024년 새해도 그러한 희망의 과정이다. 그러나 희망의 시야로 앞을 바라보는데도 왠지 가슴은 답답하고 우울한 심경이 찾아옴은 무슨 연유인지 자신도 모르겠다. |